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난 어떤 사람인가 하고 말입니다.
공부를 잘 하는 사 람, 못 하는 사람, 운동을 잘 하는 사 람, 못 하는 사람, 커피를 좋아하는 사 람, 좋아하지 않는 사람, 혹은 커피 없인 못 사는 사람, 능력 있는 사람, 없 는 사람... 우린 누구나 자기 스스로에 대한 무수한 고정관념화 된 가치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렇게 스스로 자신 에 대한 울타리를 쳐 놓고는 그 안에서만 빙빙 맴돌며 그 밖의 세상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난 원래’ 어떠 어떠한 사람이다. ‘난 원래’ 어떠 어떠한 것을 좋아한다, 혹은 싫어한다. ‘난 원래’ 어떠 어떠한 것은 못한다, 잘한다. ‘난 원래’ 어떤 것에 소질이 있다, 없다. 가만히 스스로를 대 입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내가 어떤 사 람이었는가 말입니다. ‘난 원래 ~다’ 고 하는 것의 종류가 많은 사람일수록 스스로에 대한 고집 이 크며, 스스로의 능력을 한 정짓고 사는 사람입니다.
본래 우리가 가지 고 있는 ‘참나’ ‘주인공’의 무한능력을, 법계(法界)의 무량 광 무량수 한량없는 가능성을 그대로 가져다 쓰 지 못하고 외면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 ‘원래 어떤’ 것 이 있단 말입니까. ‘원래’라는 것은 이 우주법계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나 내 스스로 ‘원래’를 만들어 두고 고집할 때 ‘원래’의 힘은 커 져만 가고 실체화 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자신의 업력 에 의해 그러한 특정 업력 을 가지고 태어났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업력이라는 것이 다 무엇입니까? 제 스스로 몸으로 입으로 뜻으로 지은 행위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굳어진 업력 이 있다면 그 놈을 바꾸어 가 는 것이 수행자의 도리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날적부 터 운동에 소질이 없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자라나면서 한두번 운동을 해 보지만 영 운동에는 소질 이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고 나면 그 사 람은 ‘난 원래 운동을 못해’ ‘난 원래 운동신경이 부족해’ 하고 단정짓게 됩니 다. 그러고 나면 앞으로 는 운동은 전혀 시도조차 하지 못하게 되고 맙니다. 그러다보면 자꾸만 업식이 그쪽으로 굳어져 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운동 잘 하 는 사람은 자꾸 운동을 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운동선 수도 되고 그러는 것이겠지요.
못 하는 사람은 계 속 못하고, 잘 하는 사람은 계속 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원래’ 어 떠 어떠한 것들을 스스로 고집하며 살다보니 이 세상에 이렇게 천차만별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 되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 근본을 돌이켜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소질이 있고 없었 던 그 이전의 자리로 말입니다. 그 자리에서 본다 면 소질이란 단어조차 필요없게 됩니다. 그저 개발한다면 잘 할 수도 있고, 잠재운다면 못 할 수 있는 그런 모든 방면으 로 뻗칠 수 있는 잠재능력만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운동에 소 질 없다는 한생각 고집스런 마음을 놓아버리고, 지금 잘 못하는 이 유는 다만 노력을 안 했기 때문임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그때부터는 소질 없 음을 바꿀 수 있게 됩니다. 가령 어렸을 때 많 은 사람 앞에서 발표를 할 때, 잘못하여 낭패를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까지 대중 앞에서 발표하는 것에 대한 고집스런 두려움에 시달리게 될지 모릅니다. 실제로 수련회를 진 행하다보면 법등별로 토의를 하 고 발표하기 싫어하는 이에게 일부러 발표를 시키기도 합니다. 또한 청취하는 모 든 이에게는 발표하는 모든 이에게 잘 했고 못 했다는 분별을 떠나 동일한 열렬한 환호를 요구합니다. 설령 발표를 잘 못 하였더라도 기립박수를 받게 되며 마음나누기에서는 작은 부분이라도 잘 된 부분을 동료들에게 칭찬받게 됩니다. 특히나 고등학생 등 청소년 수련의 경우 학교를 다니며 발표 를 해 본 적도 없고, 발표를 잘 못하는 이들에게 이 프로그램은 너무 나도 큰 변화를 가져오기 충분합니다.
‘난 원래 발표는 못해’ 하는 한생각을 놓아버릴 수 있도록 이끌어 주면 난 못한다는 고집들 이 자연스레 녹아내려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학교에서 보 면 발표는 늘상 하는 사람만 하지 않던가요. 하지 않는 이는 아 무리 궁금한 것이 있어도 결코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디 발표 하는 사람, 하지 않는 사람이 본래부터 정해져 있던가요? ‘원래 발표는 못한 다’는 한생각만 놓으면 그저 필요에 의해 당연스레 발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렇듯 무슨 일에서 든 ‘원래’ 하는 고집 을 가지고 있다면 수행자라 할 수 없습니다. 수행자는 모름지기 ‘원래’ 라는 말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수행자는 자 신에 대해 ‘난 안되’ 하는 말을 경계할 노릇입니다. ‘난 원래 어때’ 하고 고정지으니 안되는 것이 있고, 못하는 것이 있고, 못 먹는 것이 있고 여기 걸리고 저기 걸리고 이래서 괴롭고 저래 서 괴로운 것입니다. 고집이 없어 그 무엇이든 받아들 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작은 것부터 찾아내 고 한번 바꾸어 보는 연습을 해 봅시다. 우리 일상에서 일어 나는 사소하고 작은 것들에서도 그런 점들은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나의 일상을 돌아보 면 굳어져 버린 습관들 이 있게 마련입니다. 우선은 그것들부터 바꾸어 보고 변화시켜 보는 것입니다. 변화시키는 것이 목 적이라서가 아니라 한번 바꾸어 볼 수 도 있음을, 지금까지 해 왔던 것이 전부가 아님을 그동안의 굳어진 부 분들을 한번씩 녹여보는데 그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 언젠가 놓아 야 할 때가 오더라도 쉽게 놓을 수 있을 마음공부를 연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김치 없 인 라면을 못 먹는다거나, 핸드폰이 없으면 왠 지 불안하다거나, 하루라도 인터넷 접 속을 못하면 못 참겠다던가, 아침에 일어나면 보 든 안 보든 우선 TV부터 켜고 봐야한다거나 하는 등의 작고 사 소한 일상의 습관들을 먼저 놓아보는 것입니다. 김치 없이 라면도 먹어보고, 까짓 수행자가 그 깟 김치에 걸려서 되겠어요! 핸드폰도 한 몇일 끊어보기도 하고, 핸드폰 없을 때의 불편함과 이윽고 느껴지는 자유로움도 느껴보시고, 인터넷 메일 검색 도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는 마음을 가져보고, TV도 한 몇일 동안 켜지 않고 조용한 가운데 살아보고 그렇게 작은 것부 터 놓아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나아가 ‘난 원래 7시간은 자야 몸이 개운해’ ‘난 원래 노래를 들어도 클레식은 싫어해’ ‘난 원래 밤에 공 부가 더 잘 돼’ ‘난 원래 소고기 는 못 먹어’ ‘난 원래 사람 많 은 곳에서는 말을 잘 못해’ 하는 것들에 이르기 까지 ‘원래 ~한’ 것들을 한번씩 놓고 살아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끊어야 한다 는 것이 아니라 한번쯤 놓고 살아 볼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고집부리 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고집을 부릴 때는 부리고,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더라도 그 고집을 놓아버려 야 할 때 툭툭 털어버릴 수 있게 집착을 여의는 방법 을 터득해 보라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이 할 수 있으면 나도 할 수 있는 것이 법계의 이치입니다. 여느 사람처럼 나 도 이 고집 놓고 살아볼수 있는 노릇입니다. 다른 사람은 되는 데 나는 안 된다는 말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하는 데 나는 못 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한 사람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우리 또한 할 수 있 어야 본래자리에서 모두 가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우린 무한능 력의 소유자입니다. 참으로 수행자는 ‘안 되는 것’ ‘못 하는 것’ ‘원래 어떠어떠한 것’이 없어야 하는 법입니 다. ‘나는 원래 ~하 다’ 그 틀을 깨 보시기 바랍니다. 그 놈을 깨는 순간 이 진정한 출가(出家)입니다. 그 놈을 놓아버리 는 순간 순간이 부처마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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