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智慧)와 지식(知識)이 다른 점/현웅스님

2016. 11. 27. 17:4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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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智慧)와 지식(知識)이 다른 점 
                                      기획-간화선에 대한 이해(20)


육조사 현웅스님- 琢 磨 마당

 

1, 사람 性品은 거울과 같아 !


중도는 사람 속에 있으면서 눈에는 안 뵌다.  안 보이니  잡을 수가 없다.

가끔 禪宗에서 이것을 할이나 방으로 보이고는 사라진 것들이 그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만든 경지라는  말엔 중도가 없다. 

화두 ‘이 뭣 고 ? 를  공부하는 이들에게서도 같은 실수를 범한다.


‘이 뭣 고 ? 를 하면 ‘이 뭣 고’를 지어서 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설명은 말로 되지만 사실인 “이 무엇 고”는  그 사람 마음에 이미 있는 마음이다. 

알고 모르는 성질이 아닌데서 온  것이 이뭣고의 성질이다. 


구하는 생각이나 아는 마음이 다 그쳐져 있다. 이것을 알래야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짓는 “이 무엇 고“ 는 망상으로 된 화두이다. 살아 있는 활구! 이 뭐고 가 못 된다.

이 뭣 고는 생명 속에 살고 있으면서 이름을 남기지 않는 言語이다  

말을 놔두고 뜻을 취하는 자는 이를 얻고 말을  취하는 것은 그림자를 붙드는 사람이다. 

 

중에 든 마음은 언어나 형상으로 보이고는 그것에 머물지 않는다.

내게 있지만 볼 수가 없고 잡을 수가 없다.  그래서 이 뭐고? 것이다.

世尊은 곳곳마다 중을 이것으로 보여 주지만 그곳에 서있지 않는다. 

금강경은 이 중을 보여주는 경전이다.


성철스님이 쓴 백일법문은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읽고 이해한 뒤 ‘불교란 이런 것이다’

라며 불교를 알고 지키고 있는 病을 준다.사람에게 있는 性品을  소홀히 한다.

아는 것이  믿는 데 장애를 하고 경험이 오는 인연을 멀리한다.

 

중도를 아는 이는 치우친 것에 마음이 없다.그래서 중을 만나는 사람은  붙들고 있는

것을 절로 놓는다. 다툼은 절로 그치고  슬기로운 눈을 갖는다. 

 

사실 부처는 되는 게 아니다. 원래 있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머리로 아는 사람은 중도를 짓고 부처도 쉽게 짓는다. 조작이다.

선에서 말하는 의리선이 그것이다. 본성에 없는 그림으로 그린 禪이다.


성철스님은 “ 천제 굴 “ 이란 말에서 그의 애쓰는 모습이 잘 드러난다.

그의 그치고 싶은 마음을 천제 굴로 보여준 것이다. 자신의 장애 된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면에서 스님은 현명하신 분이다.

 

어느 시대든지 그 시대가 주는 역사와 환경을 알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더 탄탄하게 할 수 있다.  성철스님이 활동하기 전에는 근대 불교를 이끄신 분들은

만공스님, 전강스님이나 경봉스님, 효 봉 스님 같은 분들을 들 수 있다.

이 분들은 텔레비전이 나오기 전에 法의 눈을 들고 나오신 분들이다.


이 분들의 명성은 밝음으로 알려진 것보다, 사람들이 쉴 수 있는 德망을 품고 있는

것으로 이름을 남기고 가신 분들이다. 반면에 성철스님이나 탄 허 스님 같은 분들은

워낙 박식해서 철徹 즉, 밝음으로 세상에 알려져 많은 지식을 남기고 가신 분들이다.


그들의 밝음이 세상 속으로 나온다. 예나 지금이나 밝은 사람들은 옳고 그름을 많이

남기고 간다. 그 한 부분에 이 분들도 속한다. 그러나 이런 분들은 성현이 아는 것과는

보이지 않는 차이가 있다. 많이 알기는 하지만 성현처럼 밝음을 놓아두는 일을 못한다.

 

老子는 말한다. 聖賢은 밝되 밝음을 따라가지 않는다. 라고.

성철스님은 밝음이 있는 사람이다. 다만 많이 알기는 하지만 밝은 식을 못 놔버린 사람이다. 

 ‘무 수상 행 식 無受想行識’에서 말하는 ‘식’의 뿌리가 비워져 있는 것을 경험한 사람은

아는 것을 그의 안에 두고 있지를 않는다. 


마치 거울은 사물을 비추어 주지만 그 비추어진 물건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럼으로 아는 것으로 인한 시끄러움이 없다. 왜냐하면 거울 같은 우리 성품은

아는 것을 찰나에도 붙들고 있는 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울은 비추어 지는 성질일 뿐! 짐으로 남아있는 것이 없다. 그걸 비어 있다고 한다.

 

불교를 알지만 무엇인가 혼란 하고 내 마음이 편안치 않는 것이

이런 것들이 뒤 바뀐 데서 온다. 心經에 보이는 전도 몽상이 그것이다.

텔레비전이 등장하면서 성철스님이 대중들에게 알려진다.

성철스님의 명성이나 그를 다룬 수많은 책이 발간된다.

 

성철스님의 道는 知識에 가깝다 할수 있다

지식으로 덮으면 내면의 맑음이 어두워진다

사람을 쫓으면 實像이 아닌 허상을 쫗는 것

맹목적 믿음은 내 안의 부처 智慧를 가린다

 

마치 한국 불교는 거의 ‘성철의 바다’가 되어 버린다. 이와 같은 시대의 흐름은

옛 스승들의 지혜가 한 사람의 명성에 묻혀 대중을 헛된 그림자에 머물게 한다.

우리는 명성을 쫓는 눈을 그치고 옛 것을 다시 보는 눈이 살아나야 지금 것을 바로

볼 수 있다.  그래야 성철의 좋은 점도 바로 살릴 수 있다.


 이걸 모르면 만대 만인이 의지해야 할 불법의 생명이 쇠락해 진다.

마치 유행처럼 떠돌고 있는 fast food을 먹는 것처럼  정신문화도 어두워진다.

이런 시대에  노자의 말은 나에게 貴하다. 

 

다시 老子가 남긴 말이다. ‘밝지만 빛이 없다’   는 그의 말은

道의 성질을 산뜻하게 보여준다. 

이를 보면 성철의 도는 지식으로 가까이 하는 것이  잘 드러난다.
아는 것이 밝은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이 잘 드러난다. 

불교를 아는 것으로 덮어 놓은 것은 내 안에 밝음을 어둡게 한다. 

마땅히 멈추고 그쳐야한다. 불교는 사람을 쫓으면  상을 쫓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맹목적인 믿음은  어리석음을 낳고 나 안에 있는 부처의 지혜를 가린다.

 

2, 滿空회상에서 젊은 성철

 

우리들이 어른 아래에서 공부하고 지내듯 성철 스님 또한 그가 젊었을 때 

그도 윗사람들 아래서 지낸다.
성철 스님이 30 갓 넘었을 즈음  해인사에는 만공스님께서 조실로 계실 때의 일이다.  

퇴설당에 계시는  조실인  만공은  눈에 자주 뛰게 산보를 할 때면 성철 스님만 데리고

도량을 거닐며 도란도란 이야기 했다고 한다.


그걸 본 부산 범어사 암자 대성 菴에 계셨던 만성 비구니 스님이 하는 말이 있다.

“왜 큰 스님께서는 성철 수좌만 데리고 도란도란 이야기 하는지 모르겠다”고

못마땅해 했다고 한다.
그러자 만공스님은 이 놈은 앞으로 입 팔아먹을 놈이니  입단속 하느라 그런다”고 말했다.

이 이야기는 필자가 60년 말 동안거를 마치고 범어사 암좌  대성 암을 방문할 때

만성스님이 전해 준 말이다.
이런 저런 일을 보면 성철 스님은 도덕경을 주석한 젊은 왕필처럼 타고 난 매우해박한

사람이다. 만공은 성철의 총명 변재를 알고는 있었지만  입단속은 못하고 간 셈이다.  

그의 손에 든 무기가 내려 놔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의 총명함은 출가 전에도 보인다.

그는 젊은 나이로 몸이 시들시들 아파 경남 산청 대원사에 들어가 처사로 있었다고 한다.

그 때에 조주 무無자를 참구하다가 한 바퀴 돌아가 식이 열렸다고 그의 행적은 말하고 있다.


스님이 되기 전에 이미 무無자 공부로 밝은 禪理가 나온 것이다. 그 후에 선원을 다니며

열심히 공부한다. 어른 없이 혼자 하는 공부에 식이 먼저 밝아진 것이다.


식이 먼저 밝아지니 왕필이 노자를 알듯 모두 알아 버린다.

알아 버리니 그것을 다시 버리는 것은 그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후에 스님이 되어 어록이나 경전을 많이 접하고 그 식이 더 넓어져 나오지만

그 밝아진 식이 더  중도를 보는 그의 눈에 티가 되어 나온다. 그는 불교의 언어는 잘 쓴다.

그러나 밝음을 놓아버리는 데는 벗어나있지 못한다. 

그런 밝은 것은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는 궁극의 道는 아닌 것이다.


성철스님이 한 수행자로써 모범을 훌륭하게 보이시고 많은 어록 해설서를 내 놨지만

스님이  보이고 져 하는 중도는  그림자 중도론 이다.  그냥 말이다.

그런 중도를 도의 기준으로 두고 불교를 가까이 하는 것은 후학들에게 다시 미혹만 더 붙인다.

 

3. 道에서 온 지혜는 시끄러움이 없다.

 

어떤 禪 학자는 성철의  박식한 불교가  근세에 가짜 도인만 양성해 놓고 갔다고

두덜대는 이도 있다. 특히나 초심자에게는 마음은 무엇이고, 또 아는 것이 무엇인가를

구별하는데 혼란을 주어 공부에 큰 장애로 남겨 둘 수 있다.

이렇게 그의  밝음을 그치지 못하는 데서오는 시끄러움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는 돈오돈수를 설명하면서 팔백 년 전의 보조스님을 비판을 내 놓은 것도 그중의 하나이다.

이 또한 보조스님을 그의 밝은 식이 가린데서 온  싸우는 이론이다. 이러한 돈점 론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논쟁 속에서 후학들은 다시 보조의 근본 뜻을 멀리 하게한다.


예와 지금에 혼란을 갖게 한다. 마침내는 불법에 없는 편을 가르고 만다.

보조는 조계 육조의 돈점을 간화 결의론에 선명하게 잘 드러내고 있다. 

뒷사람들이  비판할 일이 못된다.  그러나 성철은 보조의 비문에 있는 작은  글자

몇 줄을 보고 비판을 못 쉰다.  이런 한 사람의 비판이 후학의 눈을 어지럽히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 눈이 뜨지 못하면 비판은 비판을 물고 이어진다.

좋게 보면 탁마이지만 본질에서 오는 법의 성질을 드러내지 못한 비판은 시비이다.

성철의 말은 어록에서 온 것인지 그 자신의 말인지가 분간하기가 어렵다. 

그만큼 어록은 藥도 되고 病도 된다.


어록을 섭렵하지 않는 분은  성철의 말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그의  눈은 어느 곳에서도 홀로 보인 것이 확실하지 않다.

성철스님은 보조스님을 비판하기 위해  가져온 논리가 곳곳에 그 무리함을 보인다.

그의 말을 육성 그대로 옮기면 “보조가 상 무주 토굴에서 눈이 쬐끔 열렸는 갑드먼!”
                             <듣는 것을 그대로 옮긴 그의 말이다>


그러나 너무 박식하기 때문에 그를 반박 할 사람도 없을 뿐더러 알고도 그냥 놔두는

이들도 많다. 성철스님 역시 후학들에게 그의 견해가 바른 가에 대한 비판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를 통해 시비를 그치고 내가 먼저 돈오를 경험 하고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성품에서 나오는 말은 듣는 자에게 옳고 그름의 비판함을 그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중생심을 걷어 내고 자성의 혜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느 한사람에만 향하는 견해를 그치고 자기 마음을 만나는 일을 먼저 하면

옳고 그름은 그냥 쉬어진다. 공부 인이 눈에서 익힌 불교를 놓아버릴 수 있다면,

옛 사람들의 법을 보는 데 의심이 없을 것이다.


후학은 이런 눈을 회복하고 어록에 있는 옛 뜻을 다시 만나야한다.

그러면 옛 사람들의 말이 말마다 새롭다. 가물가물한 믿음이 살아난다. 

불교를 더 폭넓게 살려 낼 수 있다. 우리는 사람마다 갖추어져 있는 자성을 못 믿는 것이

탈이면 탈이다. 아는 것이 없어서 불교가 살아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이 공부는  옳든 그르든 아는 것이 눈을 가리고 있으면 아무 이익이 없다. 

마음을 떠난 불교는 되러 사람을 시끄럽게 하고 어둡게 만든다.

식에 갇혀 사람을 구속하는 하는 종교가 되고 만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로써 묶임을 풀어주는 종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