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2. 31. 19:20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元曉의 一心哲學
1.원효의 신행체계
불교는 석가모니부처님의 지혜를 믿고 발심發心하여 깨달음을 성취하고, 그 지혜를 실천하는 종교입 니다. 이것이 깨달음의 종교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불교에 입문한 자는 누구든지 우선 깨달음의 관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깨달음을 얻는 길에 자각自覺과 신앙信仰이라는 두 문이 있습니다.
자각은 자신의 불성佛性에 대한 인식으로 스스로 닦아 연기緣起의 세계관을 통찰하여 정각正覺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자신이 고뇌하는 범부로서의 유한성을 자각하고 자비광명에 의지하여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닦음과 자비광명에 의지함, 두 경우 모두 부처님의 지혜에 대한 진실한 신심信心을 바탕으로 행하는 것이며, 인생의 근원적이고 전체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불교의 수행문은 그 방법론이 다양하고 서로 자파의 수행법이 제일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자신의 근기를 어떻게 헤아리고 어느 문을 선택해야 옳은 것인지 참으로 난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라의 원효도 대소승경전이 함께 유입되고 유학파에 의해 새로운 이론이 도입되던 시기에 이런 점을 매우 유의깊게 생각하였습니다.
원효는 34세 무렵에 마음법을 깨닫고 38~45세 사이에 요석공주와 인연이 되어 설총薛聰을 낳았습니다. 그 후 외부의 비난을 감내하며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자칭하고 오로지 저술과 불교 대중화에 전념하였습니다. 아마 이 시기에 불법의 큰 뜻과 신행체계를 화고히 세운 것으로 봅니다.
원효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불교의 큰 뜻이 상홍불도 하화중생上弘佛道(혹은 上求菩提)下化衆生에 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문제는 추상적으로 말하지 말고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방법론을 제시하여 신행체계를 뚜렸이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원효는 모든 수행문이 상홍불도 하화중생을 구현할 수 있는 통일적인 신행체계를 확립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깨달음과 더불어 <대승기신론>을 중심으로 수많은 경론을 열람하고 부처님의 일대교설에 대하여 불교는 부처님의 지혜를 믿는 종교이며, 그 믿음의 궁극은 “일체경계는 일심인 지혜”라 하였습니다. [일심은 믿음의 대상인 동시에 마침내 성취해야 할 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승의 유일한 법으로써 일심을 세우고 일심이문一心二門 삼대(體相用)의 신행체계를 정립하였습니다. 또한 자신이 정립한 신행체계에 의하여 스스로 닦아 나아가거나, 자비광명에 의지하거나, 모든 수행문과 불법에 귀의한 일체중생이 다함께 보리심의 원願을 품고 일심의 광대한 바다로 향하도록 화쟁和諍과 회통會通의 논리를 전개하였습니다. 일심의 근원에 돌아가면 자연히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체 중생이 부처요 한 생명임을 깨달아 보살의 광대한 원행을 구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행의 완성인 일심광명一心光明입니다.
일심이문삼대一心二門三大에서
일심(중생심)이란 믿음의 대상이자 성취해야 할 법입니다.
이문에서 진여문(體大)은 불생불멸의 심체이며, 생멸문의 相은 여래장성공덕상(相大)과 진여의 염상染相 입니다. 생멸문의 用은 여래의 불가사의한 업용業用(用大)과 진여의 정용淨用입니다
삼대는 앞의 체대體大.상대相大.용대用大입니다.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고자 들어가는 수행문은 모두 여기에 포함됩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면 깨달음을 얻기 어렵습니다. 일심이문삼대의 뜻을 이해하여 어떻게 들어가고 무었을 닦는가? 이것이 불교의 신행체계입니다. 엽불念佛도 여기에 속하지만 방법이 독특합니다. 신행체계를 세워야 한다는 원효의 독백을 오늘날 한국 불교계는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2.일심이란 무었인가?
가르침의 큰 뜻을 서술하겠다, 저 중생심의 본성(衆生心之爲心地)은 모양도 없고 성품도 없으니, 바다와 같고 허공과 같다. 허공과 같기 때문에 모양이라 하여도 통하지 않는 데가 없으니 어찌 동쪽이다 서쪽이다 할 곳이 있겠는가! 바다와 같기 때문에 성품이라 하여도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없으니 어찌 움직이고 고요할 때가 없겠는가! 이와 같으니 어떤 사람은 오염된 행위로 인하여 오탁을 따라 오랫동안 흐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청정한 연에 힘입어서 사류를 끊고 영원히 고요해지기도 한다. 이러한 움직임과 고요함도 모두 커다란 꿈속의 일과 같아서, 꿈에서 깨어나 바라보면 흐름도 없고 고요함도 없을 것이다. 예토와 정토는 본래 일심이요,생사와 열반도 궁극에는 두 경계가 없다.((第一述大意者 夫衆生心之爲心地~穢土淨國本來一心 生死涅槃終無二際)) <아미타경소>
<정목해설>
괴뇌하는 중생의 마음, 그 근본바탕은 본래 허공처럼 크고 바다와 같이 깊고도 맑다. 허공과 같아서 일정한 모양과 크기가 없으니 시방으로 끝없는 곳에서 어찌 가리킬 방향이 있겠는가? 바다와 같이 평등하게 맑아서 특정한 성질이 없는데 어찌 더럽다 깨끗하다 할 곳이 있겠는가? 그러나 바다와 같이 본성이 평등하여 일정한 성품이 없지만 맑고 부드럽기 때문에 인연을 따라 더럽혀지기도 하고 깨끗해지기도 하며 번뇌의 업풍에 의하여 움직이기도 한다. 이러한 때문에 겁탁.견탁.번뇌탁.중생탁.명탁 다섯의 혼탁한 물결을 따라 오랫동안 흐르며 고통을 받기도 한다. 때로는 청정한 수행문을 만나 욕계에서 다섯 가지 감각기관으로 받아드리는 오경에 대한 번뇌(욕루), 색계와 무색계에서 일어나는 존재의 유무에 대한 번뇌(유루), 삼계에서 공통으로 일어나는 무명번뇌(무명루), 삼계에서 공통으로 일어나는 삿된 견해와 미혹(견루)인 사류四流의 번뇌를 끊고 영원히 고요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깨닫고 나면 업풍으로 인한 요동과 번뇌를 끊은 고요함도 모두 꿈처럼 실체가 없음을 알 것이다. 우리는 본래 나가 없는줄 모르는 까닭에 생사를 두려워하고 영원한 생명을 구한다. 결국 좋아하고 싫어하는 분별심으로 인하여 예토와 정토가 벌어진 것이니 만약 깨달음을 성취하면 온갖 상대적 개념들이 한 순간에 무너져버리고 일체경계가 일심인 세계가 눈 앞에 전개될 것이다.
원효는 <기신론소>에서 성취해야 할 법이 왜 一心인가를 이렇게 밝혔다. “일심법을 세운 것은 법을 의심하는 것을 제거하는 것입니다(법을 의심한다고 말한 것은 말하자면 이러한 의혹을 짓는 것입니다. 대승의 法體는 하나인가?, 여럿인가? 만일 하나라면 곧 다른 법이 없을 것이며, 다른 법이 없으므로 모든 중생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살은 누구를 위하여 큰 서원을 일으키겠는가? 만일 법이 여럿이라면 곧 일체가 아니며, 一體가 아니므로 대상세계와 내가 각기 다를 것인데, 어떻게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의혹 때문에 능히 발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승의 법에는 오직 一心만 있으니, 일심밖에 다른 다시 다른 법이 없음을 밝힌 것입니다. 다만 無明이 자신의 일심을 미혹하여 모든 물결을 일으키고 六道에 유전流轉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육도의 물결을 일으키지만 일심의 바다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진실로 일심이 움직여 육도를 짓기 때문에 널리 제도 하려는 원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육도가 일심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동체대비심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의심을 제거해야 큰 마음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일심이라고 이름한 이유에 대해서는 “더러움과 깨끗함의 모든 법은 그 성품이 둘이 없고, 진심과 망심의 두 문이 다를 수 없기 때문에‘일一’이라 이름한다. 이 둘이 없는 자리가 모든 법 중에 가득하나 허공과 같지 않아서 성품 자체가 신령하게 알기 때문에 ‘심心’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일체경계가 자신의 마음과 다를 바 없는 일심을 깨달아야 주객이 한 몸인줄 알고 자비의 마음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일심을 대승의 유일한 법으로 세웠다. 일심이라고 이름한 뜻은 진여가 일체법의 본질이지만 분별심이 없고 신령한 작용을 일으키는 마음을 중심으로 말하가 때문에 일심이라고 이름지어 부르는 것이다. <무량수경종요>에서는 일심은 번뇌에 물든 중생심이 아니라 중생심의 본체임을 이해하도록 중생심의 본성(衆生心性)이라고 하였다. <아미타경소>에서는 이를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하여 “중생심의 바탕됨(衆生心之爲心地)은 ?助永?없고 성품도 없어서 바다와 같고 허공과 같다.”라고 하였다. 일심은 연기의 세계관을 신해信解하여 “연기즉공緣起卽空”을 통찰함으로써 일체경계는 일심임을 주체적으로 증득한 지혜이다. 일심은 대승의 유일한 법이며, 여래의 마음이고, 중생심의 본성이다. 일심은 무아의 생명이며, 나의 생명이고, 우주적 생명이다. 일심은 자신에게 있으면서 일체의 경계를 포함한다. 자신의 마음은 보는 마음이고, 일체경계는 보이는 마음이다. 곧 일체경계는 자신의 마음이 나타낸 모습이다. 일심의 경지에서는 색色과 심心이 둘이 아니고, 예토와 정토, 생사와 열반이라는 상대적 개념도 사라져 버린다.
원효는 ‘일체경계는 일심’이라는 부처님의 지혜를 우러러 믿어야 한다(仰信)고 하였다. 우러러 믿어야한다는 것은 종교적 신념이다. 원효에게는 깨달음 혹은 열반이라 하여도 그것은 일심의 다른 이름이며, 정토역시 종교적 신념으로 염원해야 할 세계인 동시에 스스로 깨달아 일심의 바다에 나아가는 한 문門이었다. 이치가 이러한 때문에 허망한 번뇌를 여의고 꿈에서 깨어나 마음의 근원에 돌아가면 예토와 정토, 생사와 열반 등 일체의 상대적 경계는 일심이었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일심의 근원에 있는 사람이 불보佛寶이다. 일심으로 인도하는 가르침이 법보法寶이다. 일심으로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이 승보僧寶이다. 일심은 곧 삼보三寶이다.
어떤 경전, 어떤 수행문도 궁극에는 일심의 바다에 나아가 뭇 생명을 이익되게 하도록 인도하는 가르침이라고 믿으면 틀림없다. 이제 모든 경전을 공부하면서 귀일심원 요익중생歸一心原饒益衆生을 염두에 두고 믿음과 이해를 깊이 하여야한다. 그리하여 다 함께 일심의 바다에 나아가 부처님의 자비광명과 일체 인연의 은혜에 감사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3.일심.이문.삼대 (一心.二門.三大)
불교는 마음의 과학이라고 부를 만큼 우리들 마음을 중심으로 자연과 생명의 역사를 밝히는 종교이다. 불교의 역사는 마음의 본성과작용을 합리적으로 규명하고 그 행위가 자신의 삶과 타인 및 세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탐구하여 규명하고 발전시킨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초기불교는 일체유부一切有部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이 논리에 대한 모순을 지적하고 마음의 청정성을 강조한 중관中觀 사상이 발전하였다. 그러나 중관사상의 일체개공一切皆空으로써는 수행의 당위성을 잃을 수 있다는 염려 때문에 현실적으로 작용하는 마음의 염오성을 중심으로 다룬 유식唯識사상이 부각되었다. 그 후 중관과 유식의 두 대립을 지양하고 종합하여 마음의 청정성淸淨性과 염오성染汚性은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서로 여읠 수 없는 진망眞妄이 화합된 것이라는 여래장如來藏 사상이 대두되었다. 마침내 一心의 법을 세우고 이 모든 사상이 일심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대립을 화해하고 융합하여 통하게 한 사상이 <기신론>에서 밝힌 일심.이문.삼대의 논리이다.
원효는 <대승기신론소>에서 대승의 유일한 법으로써 일심법一心法을 세우고 일심이문 삼대의 사상을 높이 세웠다. 일심에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 체상용體相用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같은 신행체계에 의하여 스스로 닦아 나아가거나 자비광명에 의지하거나 모든 수행문과 불법에 귀의한 일체중생이 다 함께 보리심의 원願을 품고 일심의 광대한 바다로 향하도록 화쟁和諍과 회통會通의 논리를 전개하였다.
일심은 여래의 마음인 동시에 중생심의 근원이다. 일심은 일체법을 포섭하기 때문에 일체법의 본 바탕이다. 일심을 체득하면 법신法身이요, 일체경계는 일심임을 미혹한 그 마음을 무명無明이라고 부른다. 일심은 본래 적정한 본성인 진여眞如와 만법으로 생겨난 현상계인 생멸生滅의 두 측면이 있다. 진여는 무생무멸無生無滅이며, 본래 적정한 마음의 근원이며, 만물의 본성이다. 생멸이란 생주이멸生住異滅하는 일체 현상계 및 마음의 작용이다. 생멸은 진망眞妄이 화합된 여래장如來藏이며 염정染淨을 포함한 일체 현상의 제법이다. 생멸하는 가운데서도 진여로부터 솟아난 지혜로써 무량한 공덕功德을 쌓고 업용業用을 일으킨다. 이것은 일체경계가 일심임을 증득한 지혜로 쌓은 여래장성공덕상如來藏性功德相이며 여래의 대자비심이다. 일심을 미혹하면 망심으로 죄업을 짓고 육도에 유전하며 고통을 받는다. 이것이 범부의 생멸현상인 염상染相이다.
생멸문에서 무량한 공덕과 부사의한 업용을 일으킨다는 것은 도道란 본래 적정한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체경계가 일심임을 깨달아 생사의 바다에서 드러내는 구제의 작용이며 대자비의 활동임을 말하는 것이다. 여래장 활동으로 공덕상과 업용을 드러내는 이것이 진정한 도道이다
진여만 말하면 본체이므로 체대體大라 한다. 진심眞心을 일으켜 중생에게 이익되도록 무량한 공덕상功德相을 보이면 이를 상대相大라 한다. 무량한 공덕상을 드러내 보신불報身佛로써 출현한다. 중생을 위해 부사의한 업용을 보이는 것을 용대用大라 한다. 용대는 응화신應化身으로 출현한다. 이것이 일심의 삼대三大이다.
생멸하는 현상계는 진여(體大)를 바탕으로 일어나지만 진여는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생멸문에는 상대와 용대만 작용한다. 이것은 여래의 본성이 숨어있기 때문인데 이러한 이치를 여래장如來藏이라 한다. 중생은 여래의 지혜안에 있고(所藏), 중생심 가운데 여래가 있다(能攝). 비록 일심을 미혹하여 드러내지 못하고 있으나 언젠가는 부사의한 작용을 드러낸다(隱覆). 무량한 공덕과 부사의한 업용은 모두 일심의 지혜로써 드러나는 작용이다.
일심은 지관止觀으로써 증득한다. 진여문에 의지하여 지止를 닦는다. 지止란 경계상境界相을 그치게 하는 것이며 경계상을 그치면 분별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생멸문에 의지하여 관觀을 닦는다. 관觀이란 인연생멸상因緣生滅相을 분별하는 것이다. 생멸문에 의지하여 법상法相을 관찰하기 때문에 분별한다고 말한다. 연기의 이치를 관찰하여 지혜를 얻는다. 지와 관을 쌍으로 닦아 일심의 바다에 들어가고 일심의 지혜로써 생멸상을 관하여 중생을 제도한다.
일심(중생심) 진여문...體大.....불생불멸
생멸문...相大.....여래장성공덕상(불공여래장,능섭여래장) / 진여의 염상(相)
...用大....여래의 불가사의한 업용 / 진여의 정용淨用(用)
4.화쟁和諍과 회통會通
불교의 가르침은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때부터 다양한 방법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그것은 근기가 다른 일체 중생을 다 함께 깨달음으로 인도하기 위한 부처님의 대자비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열반하신 뒤에는 교법을 해석하는 관점에 따라 대립과 다툼이 번번히 일어났습니다. 오늘날에도 지속되는 그러한 다툼이 당파의 욕망을 위한 것이 아니라 희망의 역사를 선도하기 위한 건전한 논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모든 이의 바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원효도 지속되는 다툼에 대하여 괴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원효는 부처님과 보살의 말씀이 어긋날리 없으며 어떠한 경우에도 부처님의 지혜와 근본 뜻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다툼을 화해하는 기본 정신이었습니다. <경>과 <논>에서 설한 것은 근기따라 베풀어진 것들이므로 서로 어긋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근본 뜻은 하나로 통한다는 것입니다. 그어므로 말만을 따르게 되면 한 쪽에 집착하여 근본을 잃는 오류를 범하게 되므로 뜻을 얻고 이해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진실한 믿음으로 발심하여 믿음과 이해(信解)를 깊이 하면 다툼은 해소되고 깨우쳐 통하게 될 것이라고 역설 하였으니 이것이 원효가 일심으로 근본을 전개한 화쟁과 회통의 논리입니다.
원효는 불보살의 지혜 경계요, 자신의 깨달음인 일심一心을 대승의 유일한 法으로 세우고 수행의 목표와 방법을 일심이문一心二門으로 정립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심의 근원에 돌아가는 문을 지행止行과 관행觀行으로 설정하여 다양한 수행문이 마침내 일심의 바다로 향하는 법을 보였습니다. 또한 불법대해佛法大海를 향하는 모든 지류支流를 “귀일심원 요익중생歸一心源饒益衆生”이라는 대명제를 안고 흐르게 함으로써 대승불교의 두 축인 지혜와 자비의 뜻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신앙의 가르침을 펴 보이신 정토문도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에 부흥하던 초기부터 해석하는 관점에 따라 이견과 대립이 ?羚?왔습니다. 그것은 불교가 진리에 대한 자각自覺과 자비광명에 의지하는 신앙 信仰이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원효는 일심사상을 바탕으로 본체와 현상, 자력과 타력, 정토의 위치, 왕생인의 분별, 경과 논의 차이점 등 대립하고 의혹하는 양상들을 총망라하여 예를 들어 해석함으로써 다툼을 화해하고 통하게 하여 모두가 일심의 근원으로 향하도록 인도하였습니다.
원효는 정토의 과덕果德에 대해서 청정하고 청정하지 않는 문(淨/不淨門), 색이 있고 색이 없는 문(有色/無色門), 법락을 함께하고 함께하지 않는 문(共/不共門), 번뇌가 있고 번뇌가 없는 문(有漏/無漏門)을 분별하여 각기 다른 주장과 다툼을 화해하였습니다. 또한 불법에는 자력과 타력, 지혜의 성취와 자비광명에 의지함 등 갖가지 수행방편이 있어서 시작과 방법이 다르지만 다함께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도록 인도하는 방편이며 그 궁극은 자신과 남을 이익되게 하는 보살도의 실천을 가르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예리한 근기에게는 지혜의 성취를, 우둔한 범부에게는 자비광명에 의지하도록 함으로써 일체 중생에게 안심과 희망의 길을 열어 보인것입니다.
원효의 사상은 정토문에서 지향하는 정토왕생 역시 일심의 근원에 돌아가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불교의 근본된 가르침이라는 것은 두 말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성사聖師의 일심정토一心淨土 사상은 자력과 타력, 서방정토西方淨土와 유심정토唯心淨土를 각기 주장하는 무리들을 모두 포용하여 다툼을 화해하고 다 함께 일심의 바다로 통하게 하였습니다. 원효의 일심정토 사상은 실로 대승불교를 장엄하는 가장 아름다운 꽃이요 순수한 한국불교를 탄생시킨 위대한 업적이었습니다.
5.대승大乘의 요체要諦
원효는 불교에 입문한 자는 부처님의 지혜를 우러러 믿어야 하며 그 믿음의 궁극은 일체경계는 일심인 지혜라 하였습니다. 부처님의 지혜를 모두 들어 이해하자면 삼 아승지겁이 걸려야 믿음을 성취할 수 있을 정도로 깊고 넓습니다. 그래서 먼저 그 지혜의 궁극인 일체경계는 일심인 지혜를 믿고 출발하여 점점 믿음과 이해가 깊어지면 불법의 큰 바다에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자는 이와같은 종교적 신념으로 대승적 삶을 위해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하는데 이것이 곧 대승의 요체(大乘要諦)입니다. 자신의 깨달음에 그치지 않고 모두가 이익되는 길을 보인 것입니다. 성사의 설說을 따라 대승의 요체를 밝힘니다.
첫째,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발보리심發菩提心 혹은 발심發心이라고 말합니다. 발심은 부처님의 지혜에 대한 믿음을 성취한 후에 그 지혜를 성취하고자 일으키는 마음입니다. 발심에는 수사발심(隨事發心:해야 할 일을따라 발심)과 순리발심(順理發心:연기의 이치에 순응하여 발심)이 있습니다. 원효성사께서는 “수사발심은 번뇌가 무수하지만 모두 끊기를 원한다. 선법이 무량하지만 모두 닦기를 원한다. 중생이 무변하지만 모두 제도하기를 원한다. 이 세가지 일을 결정하여 기약하고 원하는 것입니다. 순리발심은 일체의 법이 모두 환幻과 같고 꿈과 같아서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므로 말을 떠나고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경계임을 믿고 알아(信解) 이 신해에 의지하여 광대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저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발심과 필경은 둘이 차별이 없으나 이와같은 두 마음 가운데 앞의 마음이 더 어렵다. 스스로는 제도하지 못했지만 먼저 남을 제도하니, 이러한 때문에 나는 초발심에 경례하노라’ 라고 하였으니” 발심의 긴요함을 밝힌 것입니다.
둘째,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성사는 깨달음이란 물러섬이 없는 정정正定의 지위(正定聚)에 오르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바른 믿음을 결정하여 발심하고 악도에 물러서지 않는 지위에서 보살도를 실천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수행문을 선택하든지 반드시 깨달음을 성취해야 생사로부터 해탈하고 남을 이익되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이 모든 종교가운데 불교만의 특색입니다. 이 깨달음을 성취하고자 하는 수행문은 지관止觀에 의지하여야 합니다. 진여문에 의지하여 지행을 닦고, 생멸문에 의지하여 관행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지止란 모든 경계상을 그치게 하는 것이니 사마타의 뜻을 수순하기 때문이요, 관觀이란 인연생멸상을 분별하는 것이니 비파사나의 뜻을 수순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수순하는가? 이 두가지 뜻으로 점점 닦아 익혀 서로 여의지 아니하면 쌍으로 눈앞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통찰하는 것이 곧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을 성취하는 데는 근기에 따라 십해초발심주十解初發心住에 오르거나 단박에 초지보살初地菩薩의 지위에 오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자각自覺 즉, 스스로 닦음의 경우입니다.
셋째, 자비광명慈悲光明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불교에 입문한 자가 얻는 이익은 자각의 종교라는 입장에서 말하면 두말 할 것없이 스스로 닦아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곧장 이 문에 들어가기 어려운 근기를 위해 정토문을 열어 진실한 믿음으로 자비광명에 의지하는 길을 보였습니다. 관상염불觀相念佛과 침명염불稱名念佛의 염불법을 행하여 아미타불 본원력에 힘입어 쉽게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정토문에서도 발보리심을 정토왕생의 정인正因으로 삼았으니 마침내 자타가 이익되는 근본을 삼도록 한 것입니다. 만약 보리심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면 본원력에 대한 진실한 믿음속에 보리심이 포함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보리심을 감당할 수 없는 죄악이 심중한 범부일지라도 부처님의 본원력本願力에 힘입어 정토에 왕생함으로써 깨달음을 성취하는 길을 보인 것입니다.
넷째, 참회懺悔로써 자유를 얻는 거입니다.
참회는 이미 지은 죄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고(懺), 깊이 뉘우치는(悔) 것입니다. 죄업의 공성空性을 믿고 이해하여 그 실상을 사유하여 육정(六情:안이비설신의)의 방일을 참회함으로써 업식業識을 소멸합니다. 대승법大乘法에 의거한 참회법을 열어 보임으로써 죄악이 무거운 범부에게까지 안심과 희망을 부여한 것입니다.이것은 일체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신 부처님의 큰뜻을 실현하기 위해 보이신 대자비 방편입니다. 이것이 원효성사가 일심법一心法에 의거하여 보인 대승의 요체(大乘要諦)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실천철학實踐哲學이며, 그의 삶이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신행활동을 통해 그 이익으로써 복福과 지혜智慧가 증장되기를 바랍니다. 복혜증장福慧增長은 범부의 바램과 종교의 구원성救援性을 생각하면 현실적으로 감응感應이 따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불법의 가르침에는 깨달음으로 향하는 길에서만이 지혜와 복덕이 증장합니다.
정토문에 있어서 복혜증장은 진실한 믿음으로 안심을 얻고, 정토왕생을 원하는 염불행 念佛行과 공덕행 功德行의 과보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물론 현세에 깨달음을 성취하면 더 큰 이익을 얻습니다. 이러한 실천의 밖에서 복과 지혜를 구하는 것은 외도행이거나 사견에 빠진 행위에 불과한 것입니다. 원효성사는 이렇게 대승의 요체를 설할 뿐만 아니라 안심법과 복혜증장, 깨달음에 대하여 의혹하는 범부를 위해 구체적으로 낱낱이 해설하였으니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경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6.일심은 실천철학
원효가 평생동안 사상을 전개하고 집약한 핵심은 일심一心이었습니다.
일심은 종교적 신념으로 실천하여 스스로 깨달아 증득한 내용이며,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을 드러내 보이고자 한 실천철학이었습니다. 성사의 정신을 계승하여 빛내고자한 후학들은 마침내 그 덕과 삶을 찬탄하여 성사(聖師:성스러운 스승)라고 받들어 칭송하고 사모하고 그리워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사가 한평생 불교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실천한 요체는 “바로 이것이었구나!” 하고 감탄하며 부른 노래가 있습니다. ‘귀일심원 요익중생歸一心源 饒益衆生!’(일심의 근원에 돌아가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 이 일구는 “불교는 무었인가?” 라는 물음에 대하여 그 어떤 표현보다 분명하고 구체적인 대답이므로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성사는 일찍이 분황사에서 <화엄경소>를 저술하다가 제4 십회향품十廻向品에 이르러 마침내 붓을 꺽었다고 전하니 “일심一心은 적정寂靜이 아니라 실천철학實踐哲學”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일심의 근원(眞如門)으로부터 얻은 지혜를 일으켜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生滅門)는 것입니다.
일심은 연기즉공緣起卽空을 통찰하되 공空에 무물러 있지 않고 일체의 경계는 한 마음임을 주체적으로 증득한 지혜입니다. 그리고 일심의 근원에 돌아가면 동체대비심이 자연히 일어나기 때문에 함이 없이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수행修行이란 어떤 문을 막론하고 그 궁극의 목표는 마음의 근원에 돌아가는 것이며 그것은 오직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실천철학입니다.
우리는 불교의 수행과 그 목표를 말할 때 대개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위로 구하는 보리란 무었이며 아래로 교화란 무었인가? 라고 다시 물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물음에 대하여 구체적이고 지혜로운 대답이 곧 “귀일심원 요익중생歸一心源 饒益衆生”입니다. 원효는 이 명제에 그치지 않고 몸소 실천하였으니 과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계승한 보살의 삶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효가 말하는 일심은 모든 수행문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범부가 염원하는 종교적 세계인 정토淨土마져도 성사에게 있어서는 일심의 세계였습니다. 일심은 연기의 세계관을 통찰하는 깨달음으로 일체경계는 일심임을 주체적으로 증득한 지혜입니다. 깨달음이란 일체는 인연생기因緣生起하는 법法이므로 연기즉공 緣起卽空임을 육근六根으로 감득感得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적정寂靜이 아니라 실천철학實踐哲學입니다. 그러므로 세계와 생명의 실상을 공성空性으로 관觀하는데 그치지 않고 연기의 세계관을 구현함을써 일심의 바다에 나아가야 합니다. 자연과 일체 생명이 우주적 한 생명임을 증득한다는 것입니다. 이 문은 먼저 연기즉공을 깨달아 연기의 세계관을 구현함으로써 일심을 증득하는 선오후수문先悟後修門입니다. 일심의 지혜를 증득하면 동체대비심이 자연히 일어납니다. 다함께 믿음을 견고히 하여 일심의 실천철학을 높이 세우고 발심하여 정진하면 개인과 사회는 희망의 세계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심의 깨달음, 일심가족, 일심사회, 일심국가, 일심세계를 목표로 대립과 갈등을 화해하고 다함께 일심의 바다로 나아가도록 인내로써 화쟁和諍과 회통會通의 논리를 전개해야 합니다. 일심의 바다에 나아가서 연기의 세계관을 실천하는 것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환경 등 모든 분야에 적용되는 위대한 성자聖者의 가르침입니다.
일심을 곧장 증득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일심의 바다로 나아가는 실천과정에서 이미 무량한 공덕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실의 삶을 외면하고 깨달음에만 집착한다면 올바른 신행생활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양한 근기를 막론하고 다함께 일상생활 가운데서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으로 삶을 윤택하게 하는 가르침이 정토문淨土門이요 염불수행念佛修行입니다. 그 가운데 일심의 실천철학을 바탕으로 보인 원효의 정토사상은 종교를 통하여 종교를 초월하는 위대한 사상입니다.
정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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