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죽음을 넘어 / 다석 유영모 어록

2017. 1. 21. 18:19사상·철학·종교(당신의 덕분입니다)/기독경 재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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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1 ㅡ 다석 유영모 선생님


내가 66년(1890~1956) 동안 사람으로서 삶에 참여하면서 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말씀(로고스, 성령)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6.25 동란(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다시 알게 된 중요한 교훈이기도 하다. (1956)


그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의 말을 알아야 한다.
반대로 그 사람의 말을 알면 그 사람을 알게 된다. 사람으로서 꼭 들어야 할 말을 들으면 죽어 도 좋다는 것이다.
(朝聞道夕死可矣-논어 공자)

말을 알자는 인생이고 말을 듣고 끝내자는 인생이다. (1956)


한사람의 총결산은 그사람이 한 말로서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날 에 너희들이 말한 말이 너희를 판단(심판)한다고 했다.
말이란 우리 입으로 늘 쓰는 여느 말이다.
그 사람이 쓰는 여느 말이 그 사람을 판단하는 데 왼통(전체)이 된다.
그 사람을 판단함에 많은 말을 가지고 우리를 판단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쓰는 한두 말이 그 사람을 판단하게 한다. (1956)


우리나라 말에 '고맙다'는 말에도 뜻이 있다. 고만하라(그만하라)는 뜻이다. 자꾸 더 받아서 될 일이 아니라 고만하라는 것이다. (1956)


하느님께 감사하는 말씀을 드리는 데 너무나 많은 말을 너무도 능청스럽게 하고들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은 참으로 감사하는 것이 못 된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지혜=사랑)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지만 할 말을 모르는 것이 사실이다. '어째서 이것을 나에게 주시나'라 고 하게 될 뿐이다. (1956)


이상한 말을 찾으려 하지 말고 가장 평범하고 보편적인 말을 찾아야 한다.
그 말 속에 참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내놓는 이 사람의 말도 어려운 말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사람의 말은 어렵다고 하는 것은 이 사람이 궤변을 늘어놓기 때문에 점점 알 수 없게 되는지 모르겠다. (1956)


하느님을 자꾸 말하면 실없는 소리가 된다.
사람의 실없는 말과 짓을 깨뜨려 주는 말씀이 있으면 그것이 참 종교가 된다. (1956)


'말미암아'라는 말은 '따라서'라는 뜻인데 본 뜻은 '그만두는 것, 그만하고 마는 것, 그만하면'이라는 뜻인 것 같다. (1956)


천 가지 만 가지의 말을 만들어 보아도 결국은 하나(절대)밖에 없다.

하나밖에 없다는 데는 아무것도 없다. 하나를 깨닫는 것이다. 깨달으면 하나이다. 하느님의 나가 '한나' '하나'이다. (1956)


부르주아들(富貴층)은 좋은 날을 즐기겠지만 우리는 비바람 부는 싫은 날, 궂은 날을 살 수밖에 없다.
비바람 부는 날 기도하기란 어렵다.
비바람 부는 날 빌고 바라기는 어렵지만 빌고 바라는 기도는 꼭 필요하다.
빌고 바라는 '비바람' , 이것이 다름 아닌 말씀이다. (1956)


이 사람은 물(水), 불(火)을 퍽 많이 생각했다. 물을 부리는 것은 불이다. 그런데 불을 다스리는 것은 물이다. 물과 불은 서로 작용한다.

사람은 물, 불 없이 살 수 없다. 예수는 하느님의 말씀을 물과 불에 비 유했다.
또 우리 마음속에 평화를 이루려면 푸른 것이 있어야 한다.

물·불(태양)로 자란 푸른 열매(벼,禾)가 입에 들어가 평화(平和)롭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물 불 풀이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1956)


큰 성령(하느님)이 계셔서 깊은 생각(지혜)을 내 마음속에 들게 해 주신다.
하느님의 말씀은 사람 보고 한다. 사람과 상관하지 않으면 말씀은 필요 없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사람 사이에서 사는 까닭에 말씀이 나오게 된다.
생각이 말씀으로 나온다. 참으로 믿으면 말씀이 나온다. 말은 하늘 마루꼭대기에 있는 말이다.

말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아서 써야 한다.
하느님과 교통이 끊어지면 생각이 결단나서 그릇된 말을 생각하게 된다.
정신세계에서 하느님과 연락이 끊어지면 이승의 짐승일 뿐이다.
몸뚱이는 짐승이라 더러운 것을 지저분하게 싸 질컥질컥 한 가운데 사는 짐승이다. (1956)


나와 네가 다른 것이 아니다. 모두 다 한 나무에 핀 꽃이다. 우리는 다만 그 사람의 긋(얼나의 나타남)을 알면 그만이다. 곧 그 사람의 인격, 그 사람의 정신,그 사람의 생각,그 사람의 말씀을 알면 그만이다.

그 말씀 속에서 또 내 얼(참나)을 내 긋(얼나)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1956)


생각을 자꾸 하는 사람은 말을 하고 싶다.
참 말씀을 알고 참 말씀을 하려는 사람은 그 가슴속에 생각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는 사람이다. (1956)



말을 모르면 사람을 알 수 없다(不知言 無以知人也-거』 요왈 편).

배운다는 것은 말을 알기 위한 것이다.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사귀어 주고 물건과 물건 사이를 밝혀 준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야 하느님을 찾아갈 수 있다. 말을 알지 못하고는 도시 사람 노릇 을 하지 못한다.
도(道)라는 것은 말의 길을 안다는 말이다. 말도 하나 밖에 없는 말인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옛 성현(聖賢)인 예수, 석가, 공자의 말씀을 더듬어 가지고 정신적으로 올라가서 하느님을 만나 보게 된다.
하느님의 말씀을 모르고는 도저히 나갈 길을 바로 찾았거나 산다고 할 수 없다. (1956)


지금 여기서 쓰고 있는 이 말이란 확실한 것이 아니다.
이 사람의 배를 흔들고 성대를 울려서 소리를 내어 말을 하면 상대방의 말을 받은 고막이 울려서 이 단계로 생각을 하게 되는 그것뿐이다.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 생각한다는 것은 소리를 낼 필요도 없고 소리를 받아서 귀로 들을 필요가 없다.
세상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으나 성현(聖賢)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귀 아닌 마음으로 듣고 있었으니 그것을 받아 적은 것이 성경이나 불경 같은 경전이 다. (1956)


'실컷 맛보라'는 말이나 '너 좋으면 좋다'는 말은 땅 위(地上)에서나 쓰는 말이다. 그따위 말은 땅에 내버리고 갈 말이다.
말 가운데 참말은 하느님의 말씀밖에 없다. 그 밖에 중언부언 할 말이 많아지면 악으로 나가게 된다.

"대접할 것이 통 이것밖에 없어서 어서 더 잡수십시오'라고 하면 손님은 "아닙니다. 많이 먹었습니다. 그만 먹겠습니다 . 잘 먹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이것이 조히(좋게) 사는 것이다. 인사로만 하지 말고
"많이 먹었어요 그만 좋습니다' 하는 이것이야말로 조히 살 수 있는 참 말이 될 것이다. 이는 '실컷'을 내버리고 사는 사람이라 '실컷'이란 못 쓸 말로 안다. 하느님으로부터 드리워진 한 얼줄을 늘 붙잡고 사는 사람은 어려운 가운데도 늘 감사하고 만족할 수 있다. (1956)


'염불보다 잿밥에 람맘이 있다'는 말이 있다.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면서도 신(神)에게 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음식에 마음이 가 있다.
사람들이 제사 음식을 만들 때 빚을 내면서 만든다.
이렇게 만든 음식을 먹는 데 마음이 가 있는 것이다. 예배를 드리는데 금?봉犬?백금, 수정으로 장식된 십자가를 들고서 하느님 생각, 예수님 생각을 한단 말인가?
도대체 무슨 생각이 날는지 모를 일이다. (1956)


실없는 말도 생각을 좇아 나오고 실없는 짓도 꾀로 만드는 것이다.

소리로 내고 손발짓을 하고 나서는 제 마음이 아니었다면 컴컴한 수작이라 남이 저를 의심 않게 하고 싶은들 되겠는가?
허물된 말이 제 몸이 아니고 허물된 짓이 참이 아니라면 소리에 틀렸고 사지(四肢)가 잘 못 든 것을 제 마땅하다면 스스로 속임이요 남으로 저를 좇게 하려 들면 남을 속이는 것이다. (장횡거의 동명(東銘)』 일부-류영모 옮김)


실없는 짓이란 꾀함 없이 하는 행동을 말하는데 꾀함이 없고 도모함이 없이 하는 일이 있겠는가?
분명히 내가 했는데도 '실없이 해보았다

거나 자기는 그러한 일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하고 보니 그렇게 되었다'라는 이러한 말은 성립이 안 된다.
실없는 짓도 자기가 꾀하여 도모한 것이 분명하다. 제가 해놓고 아니라면 말이 되는가?
사람 노릇을 하려면 제가 한 것은 분명히 제가 했다고 해야 한다. (1956)


말에는 될 말 안 될 말이 있는데 왜 그런지 딴 말보다는 될 말만 하고 싶다
이 사람은 담배도 모르고 술도 모른다. 역시 한 마디 말씀은 더 하고 싶다
사는 날까지 진리 신앙 윤리 ·도덕에 대해 더 알고 싶고 더 연구하고 싶다. 덕(德)이라는 것을 붙이고 싶다. (1956)


목사가 목회 활동을 하는데 한 교회에 오래 있지 못하고 오래 있게 하지도 않는다.
한 목사가 어느 교회에서 3, 4년 목회를 하면서 알던 이치를 다 풀어놓으면 더 말할 것이 없게 된다. 설교를 하는데 한 말을 또 하고 또 하니 듣는 사람도 듣기 싫어진다.
그래서 자리를 옮기게 된다고 한다. 다른 곳에 가서도 그냥 녹음기 노릇을 또 하게 된다.
생명있는 녹음기가 아니다. 마음속에 영원한 생명의 씨(얼)를 지닌 이는 그 씨가 자란다.
그러므로 어제의 나가 오늘의 나가 아닌데 밤낮 같은 소리만 할 까닭이 없다. (1956)


동양에서 흔히 하는 말로 '먹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런 신앙은 미신(迷信)이다.
쌀(米)로 가는(走) 글자가 미(迷)이니 쌀(밥)을 먹어야 한다는 도(道)가 미신이다.
오늘날 이 땅 위에 올바른 종교가 몇이나 되고 올바른 신도가 몇 사람이나 되는지 모르겠다. 예수는 사람이 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했는 데 모두가 밥을 먹어야 산다는 먹자판을 만들었다.
그래서 종교가 미신이 되어 아편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1956)


나는 소용(所用)이라는 말을 아주 싫어한다. 날마다 하는 일은 묻지도 않는데 다른 것을 하려면 무엇을 하려느냐고 묻는다. 그리하여 말을
해주면 뭣에 소용되느냐고 묻는다.
집안 식구들은 비교적 나를 아는 사람들인데 무엇인가 좀 다른 것을 하면 뭣에 소용되느냐 왜 그것을 하느냐고 핀잔을 듣게 된다.
말을 하고 싶지 않는데 비평이 나오니까 말이 하고 싶어진다. 무엇에 쓰느냐고 그 소용(所用)을 따지는 말을 내가 아주 싫어한다.
사람이 무슨 소용이 있어서 사는 것이 아니다. 무슨소용에 닿지 않는 것이 여간 많지 않다.
오히려 그러한 것이 의미가 있다. 무엇에 쓰는지 모를 것을 실상 알아보아야 한다.

하늘은 무엇에 쓰는 것인가?
우리 인간은 무엇에 쓰자는 것인가?
저 억만 별들은 무엇에 쓰자는 것인가?
구만 리 넓은 땅은 무엇에 쓰자는 것인가?

사람은 이용(利用)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이용이니 소용이니 하는 생각 없이 사는 것이 참으로 사는 것이다. 그냥 보아서는 아무 의미 없는 것 그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아무것에도 쓸데없는 것이 참으로 쓸데있는 것이다. (1956)

공자(孔子)님이 살아서 말씀할 그때에 사람들이 공자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을 알고 따랐는가 하면 그렇지 못했다.

참으로 공자의 신앙 사상을 그대로 지니고 이어 내려 왔다면 세상의 나라 다스리는 일은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송(宋)나라 때 와서 유교의 사상 체계를 고쳐 세웠는데 이것이 그대로 이어 내려 왔다면 동양의 역사가 지금보다는 좀 달라졌을 것이다.
문제의 손바닥 하나 들여다 볼 줄 모르고 지내온 것이 오늘의 유교를 만들어 버렀다. (1956)


물에 용이 뛰듯이 참말 속에는 참뜻이 튀어 오른다.
영원히 사는 것은 참(하느님)뜻뿐이다. 하느님의 뜻은 시작도 마침도 없이 영원하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인 참뜻만은 지니고 가야 한다. 하느님의 뜻인 참뜻이 나의 본체인 참나(얼나)이다.

영원히 죽지 않는 하느님의 뜻이 담긴참말이 곧 영원한 생명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과 내 뜻이 하나가 되어 영원한 참뜻을 이루어 간다.
뜻이 참이요 참이 뜻이다. 하느님의 뜻이 내 참뜻이다. 하느님의 뜻이 참된 것처럼 내 뜻도 참되게 해야 한다. 하느님 뜻의 영원을 믿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믿는 사람에게는 바쁜 것이 없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영원한 생명으로 사는 사람은 언제나 유유하다. 그래서 생각도 유유하고 노래도 유유하다. (1957)


말씀 살음(사룀)이 영생이다. 육체가 숨이 막히면 죽듯이 정신은 말이 막히면 죽는다. 말대답을 못하면 정신은 죽는다.
하느님의 말씀 살음 이것이 영생이다.
마치 비가 와서 샘이 솟듯이 말씀 살음이 영원한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1959)



죽음을 넘어

 

●나는 모름지기 이 세상을 떠나도 좋다고 생각한다. 나는 일흔(70)살

에 가깝다. 일흔이라는 말뜻은 인생을 잊는(忘)다는 뜻이라고 본다. 그

래서 내게는 이 세상에 좀 더 살았으면 하는 생각은 없다. 있다가는 어

떻게 될지 모르겠으나 더 살고 싶다고 소리소리 지르지는 않을 것이다.

말을 하고 말을 알려고 하고 말이 심판을 한다는 사실을 믿고 있는 나

로서는 결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 (1956)

 

●이 세상에서 바로 살 줄 알고 말씀을 아는 사람은 사는 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그리고 기쁜 것인지 슬픈 것인지 잘 모르고 산다.

죽는 것이야말로 축하할 일인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산다. 이렇게 사

는 것을 부지지생(不知之生)이라고 한다. 살려준다고 해서 좋아할 것

도 없고 죽이겠다고 해서 흔들릴 것도 없다. (1956)

 

●참혹한 이야기인지 모르나 사람이란 세상에서 최후의 불행이라 할

수 있는 홀아비가 되어 보아야 신앙을 알기 시작한다. 연애하고 결혼하

고 자식 낳고 할 때는 바로 알기 어렵다. 홀아비가 된 뒤에 하느님을

믿으라는 말은 못할 말이지만 어떤 사람은 장가를 갔다가 아내가 죽자

아내에게 따라갈 수 없으니 신부(神父)가 되었다. (1956)

 

 

●죽음이란 줄 것을 다 주고 꼭 마감을 하고 끝내는 것이다. 줄 것을

다 주고 위로 올라가는 것이 죽음이다. 돈이 있는 사람은 모은 돈을 주

고, 아는 것이 있는 사람은 아는 지식을 주고 그래서 줄 것을 다 주면

끝을 꼭 맺는다. 사람이 이 세상에 나온 것은 모을 것을 모으고 알 것

을 알아서 이웃에 주고 가려고 나왔다. (1956)

 

●해안선(海岸線)을 떠난다는 육리(陸離)라는 말은 영광이 찬란하다

는 말이다. 인생의 종말은 찬란한 육리가 되어야 한다. 난삽(難澁)한

인생의 마지막이 육리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몸나에서 얼나

로 솟나야 한다. (1956)

 

●차마 말 못할 사랑으로 천지가 창조되었고(忍信仁三二)

   그 가운데 벌려진 삼라만상은 참으로 좋아라(參差由來是)

   그래 속에서 작은 아들인 내가 영원을 그리며 헤매는데(小子慕彷徨)

   근본을 찾고 영원을 좇는 날개의 힘은 너무도 미약해(報本追遠微)

   생각하고 추리하여 영원에 바로 들어가는 길은(推抽到直入)

   자기의 속알을 깨쳐 제 뿌리로 들어가는 길뿐이라(自本自根己)

   모르면서 아는 체함은 어리석고 고집일 뿐(不知知痴固)

   아무것도 모르는 자기임을 깨달아 신비의 아버지 만나리(知不知神秘)

 

   집을 떠나 걸어오다가 이런 생각을 얻었다. 이런 생각은 나도 모르게

나온 것이기 때문에 즉흥적이란 말을 쓸 수밖에 길이 없다. 여기다가

뭐라고 제목을 붙여야 할지는 나중에 생각해 보아야 겠다. 사는 것은

언제나 이제에서 사는 것이고, 생각은 언제나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에

날아가기 마련이다. 생각이 나면 기쁨이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나

는 이 생각에 도취하여 오는 시간을 잊었다. 이런 삶이 기쁨의 삶이

다. (1956)

 

[주]구기동 집에서 금요강좌 장소인 YMCA까지 걸어오면서 지은 한시임.

 

●이 세상에 나오는 것은 좋다고 하는데 이 세상을 그만두고 가는 것

은 싫다고 한다. 나온 것은 좋다(吉)고 하고 돌아가는 것은 나쁘다(幽)

고 한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마칠 것을 마치고 돌아가자는(知終

終之) 것이 대학(大學)의 정신이다. 길흉래귀(吉幽來歸)는 지나는 길

에 하는 말이다. 그대로 받아도 나쁜 것은 아니다. 지종(知終)이면 종

지(終之)할 것을 알아서 오고 가는(來는 生 歸는 死) 것이 문제 될

것 없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배웅받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형

사가 데리러 오면 싫어한다. 가는 것은 마찬가지이지 둘이 다른 것 아

니다. 흉(幽)하다 길(吉)하다지만 지종종지(知終終之)하면 그런 것 없

다. 신(神·伸)과 귀(鬼·歸)는 같다. (1956)

 

●인생살이에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것이 확실한 것인지 우리는 모

르고 있다. 죽는다고 하는 이것 또한 무엇?适?우리는 모른다. 몸이 죽

는다고 해서 얼까지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뛰어

나와 우리가 살고 있는데 이게 참 사는 게 아니다. 또 여기를 떠나서

몸이 죽는 것도 참나(얼나)가 죽는 게 아니다. 몸나에서 얼나로 갈아타

는 것이다. 이 사람이 60년 전에 어머니의 배를 차고 나와서 지금 지

구라는 어머니(地母) 뱃속에 있다. 머지 않아 이 배를 버리고 다른 배

를 타게 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1956)

 

●우리는 날 때부터 사형선고를 받고 있다. 형무소에서 죄수를 사형시

키는데 사형수가 눈치채지 못하게 끌고 가서 마루청이 떨어지면 목이

졸려서 죽는다. 우리도 그와 같이 마루청이 떨어지지만 않았지 언제 마

루청이 떨어질지 모르는 그러한 형편에 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잊으면

슬데없는 잡념에 잡히고 욕망에 시달리고 교만에 빠진다. (1956)

 

●자살(自殺)을 죄라고 한다. 그것은 너의 생명은 하느님의 것이라 내

 맘대로 처리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나는 생명을 비워버리는

 것을 시인한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한다. 나는 그것을 좇아야 한다

고 믿는다. 나도 죽인다는 것은 퍽도 안 되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일본 사람들은 자살을 아주 손쉽게 하는 것을 자랑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꼭 자살을 해야 할 경우 그러한 자리에서 못나게 죽음을 피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죽는다는 것이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을 때

는 죽어야 한다. 이렇게 죽어야 다음 대(代)가 좀 살아가게 된다. 얼굴

은 주그러지고 나이는 일흔이 넘게 늙어서 나는 병 하나 없다고 자랑

을 한다. 그건 거짓말이다. 여든 아흔이 넘어서 건강이 있다고 할 것인

가? 늙는 것이 병인 것이다. 죽을 때 죽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

다. 이래야 사람이 가치가 있게 보이지 않겠는가?

   일제(日帝)시대 종교탄압의 하나인 신사참배사건으로 감옥에 갔다온

이들이 당시에는 죽기로 저항한 것으로 듣고 있다. 자기가 자기를 결정

지을 수 있는 문제이다. 내가 자꾸 나아가는 것이라 죽어서 나아진다면

몸나의 자살은 하지 않을지언정 정신의 자살은 얼마든지 해도 좋을 것

이라 생각한다. 나아가는 것이라면 정신의 자살을 하는 그 지경이 복음

도 알고 은혜도 부딫쳐 보는 것이 된다. 내가 나를 죽이고 내가 나를

낳아 가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 내가 걸어오면서 생각해본 것이

다. (1956)

 

●외국 사람의 얘기를 들은 것인데 어느 일본 사람이 배를 타고 바다

를 항해하다가 파선(破船)하여 배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을 때 그 배의

선장이 죽기 바로 직전까지 배의 상황을 기록해 놓고 죽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사람이 두려운 존재가 된다. 그렇게 죽는 그 사람이야말로

죽음을 아는 사람이다. 소위 이것을 순직했다고 한다. 자기 직분에 순

사(殉死)하는 이것은 그대로가 종교가 될 줄 안다.

   하느님을 한 번 부르지 못하고 예배 한 번 올리지 않았어도 이 사람

은 무엇(진리)인가 찾고 들어갈 때에 (진리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나도 이러한 죽음을 택했으면 좋겠다. 삶의 길

을 걸어가다가 하느님께서 삶을 그만두라고 하면 이럴 수 있겠는가라

며 왜? 소리가 나오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돌아갈 곳은 하느님 아버

지이다. (1956)

 

●일본의 다꾸보꾸(琢木)라는 시인은 27살에 이 세상을 그만 둔 사람

이다. 우리나라의 김소월과 비슷한 데가 있다. 그 사람의 시를 보면 높

은 곳에서 스키를 타고 활주하다가 잘못하여 떨어져 죽게 된다. 그 떨

어지는 동안이 한참 되는데 그 죽음 직전 동안의 생각을 그리고 있다.

곧장 떨어지면 금방 죽는 것 같아 아이고 죽나보다 하지만 높은 곳에

서 한참 동안 떨어지면 죽는다는 생각만을 하게 되지 않는다. 1분 동

안 떨어진다면 꽤 생각을 할 수 있다. 다꾸보꾸는 죽기 전 1분 동안의

그 생각을 그리다가 끝낸 사람인지 모르겠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자마자 시간이라는 폭포에서 떨어지고 있다.

사람의 삶이란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잠시도 머무를 수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떨어지면서도 어디 한번 잘 살아 보았으면 좋

겠다는 말을 한다. 좀 잘 살았다고 하면 '그때는 참 좋았어' '제법 살

맛이 있었지'라며 두고두고 얘기를 한다. 이런 사람은 죽는 것이 무엇

인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1邦6)

 

●운동선수??경기장에 나서면서 '나는 자신 있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여기에는 조건이 따른다. 하느님께서 운동하는 그 시간동안 건

강을 허락한다면 그런 자신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밖의 사

물(訃物)에 대해서는 자기 밖의 소관이라 자유로 할 수 없다는 말이

다. 아무리 천하를 주무른다는 영웅일지라도 밖의 것에 대해서는 불가

항력이라 자기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다. 따라서 거기서는 책임이 없

다. 책임이 없고 보면 권리도 없다. 결국 하느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아

무것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장자(莊子)는 외물불가필(外物不可必)이라

고 했다. 밖의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없고 나의 의지만이 자유라고 한

것이다.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자유는 기껏해야 좁디좁은 의지의 자유뿐

이다.

   이 땅 위에서는 하는 사업이나, 나라나, 세계나 다 제맘대로 할 수

없다. 모두가 외물(外物)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물에 끌려다닐 것

없고 외물에 종노릇 할 것 없다. "이따위 내 몸을 자른다해도 겁낼 것

없다. 내 얼이 나를 영생케 한다. " 이쯤가야 한다는 것이 예수의 가르

침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돈이나 권력만 있으면 다 할 수 있는 줄로 안

다. 그러나 그것들은 다 외물이다. (1957)

 

●이 '나'란 이 우주의 끄트머리인 한 긋(點)이다. 이 긋이 진실 무한

의 적광체(寂光體)인 하느님 아버지를 찾아가는 길이 종시(終始)이다.

제나(自我)의 삶을 마치고 얼나(靈我)의 삶을 시작하는 종시(終始)이

다. (1957)

 

●우리가 사람 노릇 하는 데 정신차려야 할 것은 오늘 할 일은 오늘

해야 한다는 점이다. 한 번 정한 일은 꼭 해야 한다. 일과(課)자는 말

씀의 열매란 뜻이다. 그러니 말씀을 열매 맺게 하려고 애를 씨서 마침

내 이루게 하는 것이 지성(至誠)의 길이다. 이 사람이 오늘까지 24055

일을 사는데 그동안 날마다 그날의 일과를 다 했으면 성인(聖人)이 되

었을지 모른다. 그간 일과를 게을리해서 이 모양이 되었다.

   이왕 사람으로 나와서 사는 것이니 제일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렇다고 대통령이니 국회의원이 되라는 것은 아니다. 이발사와 운전기

사가 되더라도 제일가는 이발사와 운전기사가 되라는 뜻이다. 이처럼

 제일 간다는 말이 절세(絶世)이다. 그래서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

 인을 절세미인이라고 하거나 절색(絶色)이라고 한다.

    절제(絶世)라는 말은 세상과 인연을 끊는다는 뜻이다. 세상에서 제

 일이라는 것은 세상과 인연을 끊고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일인지도 모

 르겠다. 우리는 형이상(形而上) 형이하(形而下)를 생각하면서 절세(絶

 世)라는 숙명을 지키고 있다. 이 숙명(宿命)이 어째서 시작되였는지

 모른다.

    인생은 무상(無常)하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이것을 알면

  대장부처럼 지내갈 수 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우리가 밤낮

  없이 가는 것을 알면 우리는 저녁에 잠자리에 들어가듯이 한 번 픽 웃

  고 죽는 길에 들어 설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대장부다. 숙(夙)자는 손

  에 어떤 일감을 붙잡고 있는 꼴이다. 이 글자에는 일찍 일감을 붙잡으

  면 종일토록 건건하게 붙잡고 나간다는 뜻이 들어 있다. 이처럼 살고

  간 이가 공자요, 석가요, 예수이지 대장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인생을 따지면 유교, 불교, 예수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

  다. 오직 사람의 정신을 하나(하느님)로 고등(鼓動)시키는 것뿐이

  다. (1957)

 

●하느님 나라에는 죽음은 없다. 하느님께서 무시무종(無始無終)인데

죽음이 있을 리가 없다. 하느님이 안고 계시는 상대적 존재들이 변화할

뿐이다. 그런데 그 변화를 보고 죽음이 있는 줄 알고 무서워한다. 죽음

을 무서워하는 육체적 생각을 내던져야 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죽음

의 종이 되지 말아야 한다. 죽음이 무서워 몸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이를 놓아 주려 하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다. (히브리서 2:15) 왜 밥을

못 잊을까? 죽을까봐 그런 것이다. (19i7)

 

[주] "한평생 죽음의 공포에 싸여 살던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2:15)

 

●죽지 않겠다고 야단쳐도 안 되고 죽으면 끝이라고 해도 안 된다. 몸

이 죽는 것을 확실히 인정하고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

이 신앙이다. 몸은 죽어도 얼이 하느님께로 간다고 믿는 것이다. 얼은

하느님의 생명인 것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이다. 자기를 죽이지 못

하고 남을 죽이려는 놈들이 제사장이라니 기가 막힌다. 그런 놈들은 하

느님을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팔아먹는

악독한 놈들이다. 세상은 이런 놈들 때문에 더 못된 세상이 된다. (1957)

 

●종교의 핵심은 죽음이다. 죽는 연습이 철학이요 죽음을 이기자는 것

이 종교이다. 죽는 연습은 영원한 생명을 기르기 위해서다. 단식(斷食)

하고 단색(斷色)하는 것이 죽는 연습이다. 우리가 몸으로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요 죽는 것이 죽는 것이 아니다. 산다는 것은 육체를 먹

고 정신이 사는 것이다. 단식하는 것은 내 몸을 내가 먹는 것이다. 단

식에는 금식(禁食)과 일식(一食)이 있다. 유대 사람들은 금식을 하고

인도사람들은 일식을 했다. 모두 죽는 연습이다. 몸으로 죽는 연습이

얼로 부활하는 연습이다.(1957)

 

●우주가 폭발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또 지구가 흩어지면 어떻게 될

것인가? 3차 대전으로 수소폭탄이 떨어져 터지면 어떻게 되나?새삼스

럽게 우리는 놀랄 필요가 없다. 우주 만물이 반딧불이라 즉조(卽照)하

여 죽으니 무슨 걱정이 우리에게 있겠는가? 모두 나중에는 없어지고

마는 것들인데 걱정할 게 없다. (1957)

 

●하나(一)는 참이요 절대다. 그러나 이 하나는 눈으로 안 보인다. 분

명히 있다면서 없다는 것이 오유(烏有)라고 한다. 오유는 돌아간다는

뜻이 된다. 우리 인생도 무엇인가?지금 살았거니 하지만 결국 오유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있다고 하지만 우리는 오유로 돌아

간다. 그래서 우리는 돌아가는 것을 놀랄 필요가 없다. 아주 돌아가기

를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왜 대기하느냐 하면 오유로 가는 길이 하나

(절대)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전체)로 가는 것이니까 대기

하고 있어야 한다. (1957)

 

●우리는 두려움 없이 살아야 한다. 공자(孔子)도 지·인·용(智仁勇)

이면 무서운 것이 없다고 했다. 마하트마 간디의 진리파지(眞理把持)

에도 무서워하지 않는 정신이 들어 있다. 예수의 가르침에도 두려워 말

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인 우리가 무엇이 두렵겠는가? 몸나가 있

어서 걱정인데 몸나로 죽고 얼나로 솟난 하느님 아들이 무엇 때문에

두려운가? 시편에는 '나를 무서워하지 않는 이는 나의 아들이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두려움 없이 살아야 한다. (1957)

 

●죽음을 넘어서 울리는 소리 그것이 복음(福音)이다. 연못 속에 뛰어

드는 개구리의 생명은 무상(無常)한 것 같지만 적막을 깨뜨리는 그 물

소리는 한없이 심오하다. 사람의 죽음도 개구리가 연못 속에 뛰어드는

것이나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얼의 심연(深淵)에 뛰어드

는 얼 소리는 한없는 묘미가 있을 것이다. 이것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

는 복음인 것이다. (1957)

 

●있다는 것도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없다는 것도 참으로 없는 것

이 아니다. 생사(生死)에 빠진 미혹과 환상에서 있느니 없느니 야단이

다. 유무(有無)를 참으로 아는 사람은 없다. 다만 우리 몸의 감각이 있

다 없다고 하는 것뿐이다. 있다 없다고 느끼는 것은 마음인데 이 마음

이 영원한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마음은 생사(生死)의 제한을 받

는다. (1957)

 

●생명인(生命印)이라는 도장을 새겨 가지고 왔다. 크기는 옛날 엽전

만하고 모양도 둥글고 속은 네모난 구멍이 뚫린 것이 옛날 엽전과 마

찬가지다. 가운데는 입구(口)로 만들어졌다. 세로로는 무상생(無常生)

가로로는 비상명(非常命)이다. 그 옆에 새긴 글자는 생필무상(生必無

常) 명시비상(命是非常)이다. 인생은 무상하다. 백 년을 살아 보았댔

자 인생이 무상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느끼는 바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인생은 무상을 벗어나서 무상하지 않는 세계에 머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바람이다. 이런 바람 때문에 사람은 생각하고

연구하고 창조하고 신앙한다.

   인생이 무상하다는 것인데 그래서 생각하고 연구한 결과가 무엇인

가? 그것은 인생이 무상한데 천명(天命)은 비상(非常)하다는 것이다

천명(天命)은 무상한 인생을 무상하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무

상한 인생이지만 이 무상한 인생에서 비상한 명령을 내려 주신다. 그것

은 평상시에 명령이 아니라 비상시에 명령이기 때문에 그것은 거역할

수 없는 절대명령이다. 내가 온 것은 이 명령을 실천하러 온 것이다.

   인생은 아이로 끝나면 요절이지만 늙어서 마치면 장수

이다. 무상생은 요절이란 말이요, 비상생이란 장수란 말이다. 사람은

요절할 때 허무하고 장수할 때 자족(自足)한다. 인생이 무상하다는 것

은 미숙(未熟)한 탓이요, 인생이 자족하다는 것은 성숙한 탓이다. 인생

문제는 성숙해질 때 해결된다. 성숙이란 내가 아니면서 내가 될 때 이

루어진다. 이는 제나(自我)에서 얼나(靈我)로 중생 부활하는 것이

다. (1957)

 

●사람은 일생 동안 9억 번을 숨쉰다. 숨을 들이쉬는 것이 사는 것이

요 숨을 내쉬는 것이 죽는 것이다. 그러니 한 번 들이마시고 한 번 내

쉬는 것이 한 번 낫다가 한 번 죽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다. 결국 9억

번을 숨쉰다 해도 들이쉬었다 내쉬는 것이지 그 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한 번 숨쉬는 데 생(生)의 덧없음과 명(命)의 보통 아님을 볼 수 있다.

숨을 한 번 들이쉬고 한 번 내쉬는 것이 곧 생명의 내용이다. (1957)

 

●나는 넝쿨장미꽃이 담장에 달라붙은 것은 보기가 싫다. 꽃은 고운데

질 줄을 몰라 탈이다. 꽃이 지면 열매가 맺히는 것이 좋다. 꽃 지고 열

매 맺고 마치어 가을을 이룬다. 사람은 가끔 이번만 살려 달라고 기도

를 한다. 씨가 들지 않아서 열매를 맺지 못해서 그렇다. 빈 쪽정이가

된 것이다. 쪽정이가 가지에 3년이란 말이 있다. 가지에 붙어만 있으면

무얼 하나 모양만 사납다. 나는 이번만 살려달라는 쪽정이 인생들의 남

은 여생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마치 전과자들처럼 용서해주면 또 죄를

범하는 것과 같다. (1957)

 

●사람은 생사(生死)를 벗어나야 한다. 몸과 맘을 벗어나야 한다. 그

렇지 못하면 빛나고 힘있게 살 수가 없다. 사람은 즘더 빛나고 힘있게

살아야 한다. 하느님은 우리 마음속에 영원한 생명을 깊이 감추어 두었

다. 이 영생의 씨앗(얼나)을 잘 길러서 제나(自我)를 초월해야 한

다. (1957)

 

●마지막을 거룩하게 끝내라. 끝이 힘을 준다. 끝이 힘을 준다는 말은

결단하는 데서 힘이 생긴다는 것이다. 끝이란 끊어 버리는 것이다. 몸

과 맘의 제나(自我)는 거짓나라고 부정하는 것이다. 끊어 버리는 데서

얼맘의 정신이 자란다. 전광석화(電光石ㅘ火)처럼 생명의 찰나 끝에 얼

생명의 꽃이 핀다. 마지막 숨 끝 그것이 꽃이다. 그래서 유종지미(有終

之美)라 한다. 마지막을 아름답게 꽃처럼 그것이 끝꽃이다. 그러기 위

해서는 마지막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순간 순간이 곧 끝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끝이요 꽃이다.

   현재는 끝·꽃이다. 하느님은 알파와 오메가이며 처음과 끝이다. 현

재의 현(現)은 꽃처럼 피어나는 것이요, 현재의 재(在)는 하느님의 끝

이다. 인생의 끝은 죽음인데 죽음이 곧 끝이요, 꽃이다. 예수가 숨진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은 꽃구경을 하는 것이다. 죽음이야말로 엄숙하

고 거룩한 것이다. 꽃다운 피, 꽃피를 흘리는 젊은이의 죽음은 더욱 숭

고한 꽃을 피우고 있다. (1957)

 

●생각이란 꽃피(花血 花開)요, 죽는 연습이다. 날마다의 생각을 아

름답고 거룩하게 해야 한다. 죽음의 연습이라는 것은 오늘 하루하루를

착실하고 아름답게 생각의 꽃을 피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내 삶의

순간 순간을 또박또박 아름답게 가면 마지막 끝도 아름답게 갈 것이라

고 생각한다. (1957)

 

●죽음이란 어린이가 만삭이 되어 어머니 배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지구는 어머니 배나 마찬가지다. 어린이가 뱃속에서 열 달 동안 있듯이

사람이 백 년 동안 지구에 있다가 때가 되면 지구를 박차고 나가는 것

이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죽으면 우리는 다시 신정(新正)을 맞아 하느

님께 감사해야 한다. 이 땅에 사는 동안은 어머니 뱃속에서 영원한 생

명인 하느님의 아들(얼나)이 충실하게 무럭무럭 자라 열 달이 차면 만

삭공(滿朔空)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 아들이 자라기 위해서는 식 색

(食色)을 절제하면서 하느님께 기도드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 입은 묵

혀 두고 맘을 비워 둔다. (1957)

 

●생사(生死)의 제나(自我)는 멸망의 물질이라 더럽다. 제나(自我)는

깨·끝(覺終)이 해야 영원한 생명인 얼나에 이른다. 제나의 삶은 꿈이

라 깨야 하고 제나의 삶은 거짓이라 깨트려 끝내야 한다. 더러운 것을

깨끝이 하면 본래의 청정(淸淨)한 생명이 드러난다. 그것이 영원한 생

명인 얼나(靈我)이다. 얼나는 하느님의 생명이라 개체인 너와 나가 없

다. 얼나는 영원한 생명이라 늘 현재만 있을 뿐이다. (1957)

 

●후손 끊어지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진리가 끊어지는 것을 걱정해야

한다. 짐승은 종족을 잇는 것이 삶의 목적이지만 사람은 진리를 잇는

것이 삶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예수와 석가는 자식을 기르려 하지 않고

제자들만을 길렀다. 진리를 이어 주는 것은 자식이 아니라 제자인 것이

다. 그러므로 진리를 이어 나가려고 해야지 후손 끊어지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실제로 후손이 끊어진 사람은 극히 적다. 그러나 정신이

끊어진 사람은 아주 많다.

   단군 할아버지의 정신을 잇댈 사람은 삼국시대에도 별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단군 할아버지의 정신이 끊

어지는 것을 걱정한 사람이 있었는가? 이 사회는 참으로 철학을 좀 해

야 겠다. 생각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1957)

 

●반드시 화장(火葬)을 지내야 한다. 몸이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

는 데는, 그리고 없는 데서 생겨나서 없어지는 데는 다 마찬가지다. 몸

의 근본은 땅의 흙이고 얼의 근본은 하느님의 얼이다. 얼은 하느님께로

돌아가고 몸은 흙으로 빨리 돌아갈 수 있도록 재로 만들어 버리면 그

만인 것이다. 무슨 삶의 흔적을 남기려고 할 것 없다. 영원한 것은 진

리의 생명인 얼나뿐이다. 인도사람들은 이미 3천 년 전에 화장(火葬)

을지냈다고 힌다. 그들은 전 인류의 선배이다. 불교에서는 여자들까지

머리를 깎는데 이것 또한 인류의 선배다. 선각지인(先覺知人) 들이

다. (1957)

 

●예수는 영원히 사는 것은 얼이니 몸은 쓸데없다(요한 6:63)고 했다.

몸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려보내면 된다. 그런데 주검의 처리에 너

무나 마음을 쓴다.

   제가 묻힌 무덤을 천만 년 보존하면서 후손들에게 제사나 받아먹겠

다는 쭈그러진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는 사람 노릇

하기 틀린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인에게 볼 만한 것

이라며 보여 주는 것으로는 옛 왕조들이 남긴 왕릉이 많다. 이것은 참

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옛 임금은 태(胎)를 묻고서도 태 묻은 데를 잊지 않고서 아무개

태가 묻힌 곳이라 했다. 이 백성이 살림에 여유가 있으면 다 이 짓을

하고 싶어 할 것이다. 이것은 올바른 생각이 아니다. 이 몸은 외물(外

物)인데 어찌하여 외물에 집착을 하는지 모르겠다. 흙에서 된 몸에 정

신이 있어 사람이다가 그 정신이 나가면 흙인데 그 흙이 오래 가기를

왜 구하는가?그렇게 미련이 많으면 내 속에서 나간 똥을 어떻게 버리

고 돌아서겠는가? 보존하려고 해야 할 게 아닌가? 참나(얼나)로부터

떨어져나가는 것은 다 외물(訃物)인데 무엇 때문에 참나 아닌 주검을

묻은 무덤을 숭상한단 말인가?

   무덤을 명당 자리에 쓰면 부자가 되고 고관이 난다고 하는데 이는

수주대토(守株待兎)의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는다. 이 나라 백성들이

거의가 이러한 생각에 빠져 있다. 이런 생각으로 어떻게 새 시대에 적

응할지 모르겠다. (1957)

 

[주]수주대토(守株待兎) . 농부가 밭에 일하러 가니 토끼가 도망을 치다가

    나무 그루턱에 머리를 부딪쳐 죽어 버렀다. 그 농부는 또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며 일을 하지 않고 그 나무 그루턱에 토끼가

    부딪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고사성어

 

●죽인다 하면 살고자 하고 살리고자 하면 빨리 죽었으면 한다. 이것

이 혹(惑)이 아니고 무엇인가? 사는 게 좋고, 죽는 게 나쁘다는 것은

혹(惑)해서 그런 것이다. 죽음이란 좋고 언짢고가 없다. 그런데 모두가

이 시험에서 헤어날 줄 모르고 있다. 사는 게 좋고 죽음에 대해서는 생

각지 않겠다는 것은 두 번 혹하는 것이다. 거기에 지레 죽으려고 하는

것은 어림없는 혹이다. (1957)

 

●한 10년 더 살았다고 늙은이 행세를 하고 오래 산 것을 자랑하는데

얼마 더 산 것이 오래 산 것일까?어림없는 생각이다. 뜰(죽을)때 뜸을

(죽음을) 얻어야 한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 죽을 준비가 있어야

한다. 남들은 떠날 준비를 다하여 곧 잘 떠나는데 자기 혼자만 남아서

무엇을 자랑한단 말인가? 늙은이 주책만 남는다. (1957)

 

●사람이 나이 먹으면 늙어 가고 늙어지면 어떻게 되는가? 살았으되

 죽은 것과 다름이 없게 된다. 다 늙은 몸은 해골만 남아 살았으나마나

 한 지경에 이른다. 그런데 나는 이러한 공상(空想)을 한 적이 있다. 사

 람은 누구나 없던 몸이 생겨나서 차차 자라나서 30살쯤 되면 다 자란

 다. 그러나 정신만은 더 크게 자란다. 벼가 다 자란 뒤에는 벼이삭이

 영글어 가는 것과 같다. 그 뒤로는 몸은 차차 쇠잔해지다가 해골만 남

 게 된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해골이 넘어지면 자녀들이 사람 죽었다고

야단한다. 나로서 공상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30살까지 몸이 다 자란

뒤에는 반대로 이제는 차차 작아져서 다시 어린이가 되었다가 마침내

꺼져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이란 이렇게 다시 없어지게 되

는구나 하고 의심하지도 않고 깜짝 놀라지도 않게 된다. 인간의 세상도

지금 보다는 훨씬 간단해질 것이라고 생각된다. 늙으면 속은 이미 다

죽었는데 거죽만이 버젓이 남아 있어서 말썽이다. (1957)

 

●지구의 종말에는 모든 것을 불사른다고 한다. 대동(大同)으로 함께

당하는 것이니까 좀 덜할지 몰라도 어떻든 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게

걱정이 되어서 하느님을 찾는 게 아니다. 내 형제는 한 10여 명 있었

는데 둘 남고 다 죽었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없어졌는지 모르

지만 그들이 복된지 지금 살아 있는 이 내가 복된지 누가 알겠는

가?(1960)

 

●이 지구 위의 문명이라는 잔치에 다녀가는 것은 너와 나 다름없이

미련을 갖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 지저분한 몸살이를 자꾸 더 살

자고 애쓰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자연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을 잊지 않고 있으면 죽을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그저 사는 게 좋

다고 죽는 게 싫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여기는 잠깐 잔치에 참

여할 곳이지 오래 살 데가 아니다. 우리가 본래 여기서 산 것도 아니요

또 늘 여기서 살 것도 아니다. 형이상학의 종교란 이 세상을 초월하자

는 것이다. 이 세상 잔치만 바라보고 있을 수 없으니 이를 우리의 생각

만으로라도 즘 초월해 보자는 것이다. 예수는 이 세상을 내 나라가 아

니라고 했다. (1960)

 

●이 세상에는 그렇게 시원한 곳도 따뜻한 곳도 없다. 그러니 시원한

곳도 따뜻한 곳도 너무 찾지 말자. 세상은 본래 갇혀 있는 것인데 어디

서 시원함을 찾겠는가. 정말 시원하려면 이 몸뚱이를 벗어 버릴 때이

다. (1960)

 

●이 몸뚱이는 더러운 것이라 이 몸뚱이에서 나오는 것은 더러운 것뿐

이다. 그 다음에 더러운 것은 우리들의 집안이다. 자연은 더럽지 않는

데 집은 더럽다. 아무리 화려하게 꾸며 놓는다 해도 자연에 비기면 더

럽다. 그러므로 깨끗해지려면 몸뚱이를 버려야 하고 집을 버려야 한다.

정말 집은 인생의 처음과 마지막에 필요하다. 똥싸고 오줌싸고 할 때에

집이 필요하다. 지저분한 것을 치우기 위해 집이 필요한 것이다. 집이

아니면 지저분한 것을 치울 수가 없다.

   사는 것은 나가는 것이지 어디 틀어박히자는 게 아니다. 거주(居住)

를 삶으로 알아서는 못쓴다. 이 더럽고 괴로운 것에서 벗어나자는 사나

이는 집 속에는 없다. 어떻게 하면 이 더러움을 떠나 거룩한 데로 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다. 더러운 것을 떠나고 괴로움을 벗

어나자는 운동이 종교다. 몸을 극복하고 집을 탈출하여 얼나로 솟나자

는 것이 신앙이다. (1960)

 

●피와 살로 이뤄진 우리의 몸이란 짐승이다. 사람이 몸을 쓰고 있는

한은 별 수 없이 이런 것이다. 그러므로 주검의 관뚜껑을 덮고 나서야

그 사람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기운이 풀어질 때는 종교의 진리에 열

중하던 사람도 그만 혹하기 쉽다. 그런데 입은 살아서 여전히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다. (1960)

 

●무덤에 혼자 묻혀 절을 받으려고 하는 게 늙은이들의 심리인데 이건

젊은 사람들보다 늦은이가 더 철이 없다. 40억(2002년 현재 60억) 인

류가 한군데 묻히면 친목도 되고 좋을 것이다. 이집트에서 미라가 돼서

무슨 일이 있었관데 또 무슨 일을 봤다고 그렇게 무덤에 마음을 쓰는

가?(1960)

 

●이 세상엔 죽기 위해 나온 건데 그걸 뻔히 알면서 죽긴 왜 죽어 하

고는 잡아떼지만 그게 말이 되는가?(1960)

 

●밖의 것은 내 맘대로 못하고 속의 마음을 내 맘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 스토익 정신이다. 자유가 있어야지 자유가 없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이 스토익 정신이다. 자유는 우리의 의지에 있다. 내 몸은 죽여도 내

뜻은 못 빼앗는다 하여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지경에 가야 한다. 예

수와 석가는 우리에게 죽음의 종이 되지 말자는 것이다. 죽음을 무서워

하지 않는 것이 성경 불경의 뜻이지 다른 게 없다. (1960)

 

●내가 22살 때 20살의 동생이 죽었다. 그때부터 나는 이 세상에서는

완성된 게 없다고 생각했다. 일 하나를 완성했다는 것은 일감을 하나

더 만들었단 말이다. (1960)

 

●비롯을 따지니 어쩔 수 없이 마침에 돌아간다. 아담으로부터 죽고

살고 죽고 살고 하면서 이어 왔다. 죽으니 낳고 낳았으니 죽는다. 나

안 죽겠다는 그런 소갈머리가 어디 있는가?(1960)

 

●죽음에 다다라서는 인생이란 싱겁고 우습다고 한다. 구약성경 전

서에는 인생의 일이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 하여 "헛되고 헛되다.세상

만사 헛되다"(전도서 1:2)고 했다. 전도서에는 헛되고 우습다는 말의

연속이다. 중국의 소설 『서상기(西廳記)』의 서문인 통곡고인(痛哭

古人)편을 여러 번 읽었다. 그건 전도서와 같다. 착실하다는 사람도,전

도서를 안 읽은 사람도 죽음에 다다라서는 다 전도서가 되고 만다.우

습도록 헛되면 웃고 그만두어도 될 터인데 죽지 않겠다고 바득바득 악

을 쓴다. 약을 사 오너라 입원을 시키라는 등 집안 식구들을 괴롭힌다.

나기 전부터 있는 하느님의 말씀은 그러지 말라는 것이다. 이 사람

말은 고요히 죽는데 소용이 되면 소용된다. 죽음이 없었다면 종교 신앙

도 없다. 이 사람 말은 이 세상 나오기 전 나온 후 죽은 뒤에까지 관계

있는 말이다. (1960)

 

●참 시(詩)라면 사세(辭世)의 시(詩)일 것이다. 정말 참(진리)은 죽

음 때문에 있다. 정말 값있는 노래·말씀·사상은 사람이 왜 나서 죽어

야 하는 가를 생각하는 데서 나온다. 일본의 가인(歌人) 파초가 임종

에 다다랐을 떼 사람들이 말하기를 "사세(辭世)를 하나 짓고 가시오"

라고 하자 '내가 이 세상에서 처음 부른 노래부터 지금까지 부른 노래

가 모두 사세(辭世)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1960)

 

[주] 사세(辭世) 이 세상을 하직함.(죽음)

 

●나는 죽음 맛을 즘 보고 싶다. 그런데 그 죽음 맛을 보기 싫다는 게

뭔가? 이 몸은 내던지고 얼은 들려야 한다. 땅에서 온 몸은 죽어 땅에

떨어지고 우에서 온 얼은 들리어 하느님께로 올리운다. 그러나 여기

있는 동안에는 땅의 일도 충실히 해야 한다. 나는 이 다음에 대학생이

될 테니 유치원 일은 할 필요가 없다고 해서는 안 된다. (1960)

 

●이 세상에 나와서 오래 묵지 않겠다고 하느님 아버지께 장담을 하고

나왔는지 모른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도리어 이상하게 생각

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좀 해야지, 이런 생각도 안 해 보고 갑자기

죽게 되면 사람들은 어쩔 줄을 몰라 한다. (1960)

 

●죽음을 생각하여 언제 떠나도 미련이 없도록 준비와 각오를 하면

더 생각을 깊이 하게 된다. 몸이 아프면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아픔이

없으면 죽음 생각을 안 하게 된다. 사람의 몸은 아끼고 아끼다가 흙이

된다. (1960)

 

●우리가 태어났다는 것은 큰 일이다. 우리의 삶이란 사형수의 집행유

예 기간이다. 사형수가 향락을 하다니 요절복통할 일이다. 이 생명은

종당 죽음이 결정되어진 사형수들이며 이 죄수들이 못나가게 얽혀 매

어놓는 곳이 가정이요 국가다. 처옥자쇄(妻獄子鎖)란 말이 있다.

(溫)이란 죄수(囚)에게 쟁반(血)에 음식을 담아서 주는 것이 따뜻하단

말이다. 곧 이 세상은 우리 모두가 다 사형수의 처지로서 서로서로 위

로해 주는 것이 따뜻한 일이다. 부귀공명이란 이 병든 세상의 한 증세

다. 사형수의 몸으로 서로 잘났다고 다투다니 요놈의 사람이란 도깨비

같은 존재인지 모르겠다. (1960)

 

●불경이니 성경이니 하는 것은 제나(自我)의 마음을 죽이는 거다.몸

은 살아 있어도 맘은 죽은 거다. 제나(自我)가 한 번 죽어야 마음이

빈다. 한 번 죽은 마음이 빈탕(太空)의 마음이다. 빈 마음에 하느님 나

라, 니르바나님 나라를 그득 채우면 더 부족이 없다. (1960)

 

●우리가 왜 죽을 것을 겁내는가?우리가 빚이 있기 때문이다. 빚이

죄이다. 빚을 다 갚아 버리고 원대한 하나에 참례하면 군색할 것 하나

도 없다. 원대한 하나(하느님, 전체)에 합쳐져야지 못 합쳐지니까 문제

가 생긴다. 원대한 하나(전체)에 합쳐지는 것이 우리가 온전하게 되는

거다.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1960)

 

●병이든 곳을 꿰매어 삶을 연장하려는 것은 찢어진 옷을 꿰매어

계속해서 입자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밥 먹고 똥 누고 하는 이 일

얼마나 더 해보자고 애쓰는 것은 참 우스운 일이다. (1960)

 

●이 모가지 하나는 전체 생명과 관계가 있다. 우리도 한 목(한몫)단

단히 해야 한다. 4·19에 목숨 바친 그 사람들은 정말 한 목 잘 본거

다. 그 목이 여러 목이 아니라 한 목이다. 그 목이 예수·석가 간디

목이나 같은 목이다. 독재를 씻어 버리자는 목이었다. 고금을 막론하고

톡특히 한 목 한 사람은 죄다 목이 잘렸다. (1960)

 

●깨어서 저쪽으로 갈 수 있는데 이쪽으로 넘어와서 오늘 깬 것이다.

이 할딱할딱 숨쉬는 게 분각령(分覺嶺)으로 깸과 죽음을 가르는 마루

다. 분수령은 이리 넘어오면 압록·두만강이고 저리 넘어가면 송화강

이다. 이렇게 할딱할딱 하다가 딱 그치면 저쪽으로 넘어가 버린다.이

쪽으로 넘어오니까 이렇게 모였다. 우리에게는 숨이 분각령이다. (1960)

●제 맘속에 나라는 생각이 아직 남았다면 불안을 못 면한다. 속이 없

을 만큼 작아야 한다. 제나(自我)가 없어져야 한다. 참나(眞我)란 속의

속이다. 속의 속이 참나인 것 같다. 속의 속은 중(中)인데 중(中)이 참

나다. 참나가 어디에 있는가. 내 속의 속에 있는 것 같다. 제나가 죽은

이는 하느님께서 살리거나 죽이거나 아버지 맘대로 하십시오라고 하는

이게 아들의 마음이다. (1961)

 

출처:다석 류영모 어록 ㅡ박영호 엮음 두레

추억이 흐르는 즐거운 가요산책 43곡/골라 찝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