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0. 15. 17:57ㆍ사상·철학·종교(당신의 덕분입니다)/기독경 재해석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기를 청하자
제자들이 그들을 나무랐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화를 내시며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거기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어린이들을 안으시고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마가복음, 10:13~16]
아무리 감정이 메마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천진하게 웃는 어린아이를 보면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자기만의 고민, 힘겨운 상황 속에 빠져있는 사람일지라도 청명한 방울소리 같은
어린아이의 웃음소리를 들으면 그 순간만큼은 잠시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말 그대로 어린아이들은 천사와 같습니다. 그들은 천국을 살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린아이들이 가진 무엇이 그렇게 만드는
것일까요?
(잠시 묵상)
어쩌면 어린아이들은 어른들이 갖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을, 천국을 살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어른들도 어린 시절 분명히 누리고 살았던 그것을 어느 사이엔가 잃어버렸습니다.
아니, 잊어버렸습니다. 있는 그대로 하늘이 부여한 우리 본래의 성품, 본래의 면목을
우리는 망각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잠시
묵상)
어린아이의 눈망울을 가만히 들여다 본 적이 있습니까?
어린아이의 눈동자 속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까?
인형 같은 까만 눈동자 속에 ‘나’가 들어 있던가요?
‘나’라는 생각, ‘내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차 자리 잡고 있던가요?
오히려 그런 것들의 부재, 생각의 흔적 없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생명력만이 가득하지 않던가요?
기회가 되면 어린아이의 눈망울을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그리고 그 눈망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도 되돌려
살펴보십시오.
우리는 모두 한때 천국을 살았습니다.
거기에서 왔기 때문에 당연히 그곳에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작을 알 수 없는 어느 시점에 ‘나’가 등장했습니다.
원래 없었던 생각이란 기능이 육체적 성장과 더불어 생겨났습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천국에서, 낙원에서 추방되어 상대적 대립과 분별로 가득 찬
이 ‘세계’ 속에 떨어졌습니다. 천국은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요?
(잠시 묵상)
예수는 말합니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거기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어린아이의 순진한 마음, 순수한 마음이 바로
하나님 나라, 천국, 낙원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래 성품, 본래 면목입니다. 우리의 참된 정체성, 참나입니다.
아무 내용이 없는 의식, 텅 비었지만 가득 차 있는 생명의 힘, 영원한 현재,
바로 지금 여기, 순수한 존재 자체가 바로
그것입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그것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다만 잃어버렸다고 착각했을 뿐입니다. 다만 까맣게 잊어버렸을
뿐입니다.
그대가 아는 모든 것은 ‘나’와 ‘내 것’,
‘세계’입니다.
아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천국은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나’ 바깥에 있는 무엇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본래 성품, 본래 면목, 참나입니다.
우리는 천국 바깥에 있지 않습니다.
생각이 스스로 멈추는 순간, 생각이 저절로 쉬어지는 순간, 본래 있던 이것,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의 진실이 드러납니다. 계시처럼 한 순간 천국을 보게 됩니다.
언제나 바로 지금 여기 있었습니다. 늘 변함없이 이렇게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 자기 안에서, 자기를 잃고, 자기를 찾고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 있으면서 다른 곳을 꿈꾸며 살았습니다.
이 순간에 있으면서 다른 때를 갈망하며 살았습니다. 꿈을 꾸었을
뿐입니다.
(잠시 묵상)
진실로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마음, 순수한 마음 가운데는 ‘순진’과 ‘순수’ 같은
티끌마저 없습니다. 어른의 눈에는 마치 무지(無知)처럼 비춰지지만
결코 무지한 것이 아닙니다. 앎의 내용은 없지만 앎마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에 대한 앎이 아니라 앎 그 자체일 뿐입니다.
이 앎을 다시 알 자가 따로 없습니다. 그러므로 둘이 아니고, 하나 또한 아닙니다.
어쩔 수 없어 절대자, 하나님이라 말하지만 그 역시 상대적인 분별의 소산일 뿐입니다.
결코 생각을 통해 확인되고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마지막 의문이 사라지는 순간 확인과 증명의 필요성 또한 사라질
뿐입니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는 없는
법입니다.
(침묵)
- 몽지 심성일님(몽지와릴라 밴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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