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 30. 19:45ㆍ사상·철학·종교(당신의 덕분입니다)/기독경 재해석
말 3 / 다석 유영모 선생 어록
[주] 나의 생각을 하느님의 성령으로 불사르는 것을 기도로 생각했다.
그때 하느님의 뜻을 얻는 것을 말씀 살음(사룀)이라고 했다.
산스크리트어 야즈나(yajna)이다.
나는 '모름지기'란 우리말을 좋아한다. '모름지기'란 반드시 또는 꼭 이란 뜻이다.
사람은 모름(하느님)을 꼭 지켜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를 모른다.
하느님 아버지를 다 알겠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아들이 아무리 위대해도 아버지와는 차원(次元)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사람이 하느님 아버지를 그리워함은 막을 길이 없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둘이면서 하나이다.
부자불이(父子不二) 이것이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는 것이다.
맨 으뜸으로 진리되시는 아버지 하느님을 그리워함은 어쩔 수 없는 인간성(人間性)이다. 그것이 사람의 참뜻(誠意)이다.
그런데 이 뜻은 꼭 이루어진다. 그것이 성의(誠意)다. 생각은 그리움에서 나온다. 그립고 그리워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1957)
'더욱'이란 더 우로 들어올린다는 뜻이다. 욱은 우로 올라간다는 것을 강조해서 'ㄱ'을 받침으로 붙였다. 그러므로 더욱은 더 우로이다.
삶은 정신적으로 더욱더욱 하느님 아버지께로 나아가야 한다. (1957)
말씀이 곧 하느님이다.
우리의 몸생명은 목숨인데 얼생명인 말숨(말씀)과 바꾸어 놓을수 있다. 공자(孔子)를 논어와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에게 생각과 말씀이 끊이지 않는 것은 누에가 실을 뽑는 것이다. 그리하여 목숨이 말숨(말씀) 속에 번데기가 되어 들어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사는 삶이다. 누에는 죽어야 고치가 된다.
죽지 않으려는 생각은 어리석은 일이다. 실을 다 뽑고는 죽어야 한다.
죽지 않으려는 미련한 생각은 버려야 한다.
생각의 실, 말씀의 실을 뽑아 생각의 집, 말씀의 집, 사상의 집을 지어야 한다. 그것은 내가 가서 있을 집을 마련하는 것이다.
내가 가서 있을 집을지어놓는 것이 이 세상에서의 삶이라 할 수 있다.
이 세상은 거저 있으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말씀의 집을 지으러 왔다. 생각하여 말씀의 실을 뽑아 누에가 고치집을 짓듯 말씀의 집을 지어야 한다.
"너희는 걱정하지 말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리고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요한 14:1~2)고 했으나 가서 지어놓는 것이 아니라 벌써 지어 놓았다. (1957)
말이 타락하면 사람의 권위는 자꾸 땅에 떨어진다. 우리가 쓰는 말 과 글이 존경을 받아야 한다.
말과 글이 쓰레기통에 떨어짐은 자기의 정신을 쓰레기통에 던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사람의 권위는 말의 권위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말 한 번 하려면 좋은 말 높은 말을 고르고 골라서 해야 한다.
옛말에 수사입기성(修辭立其誠-주역)이라 했다.
수사(修諦)란 말을 고른다는 뜻이다. 말이란 우리 정신의 양식인데 아무것이나 먹을 수 있는가?
좋은 말 좋은 글(책)을 고르고 골라서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물 한 모금 마시려고 해도 고르고 고르는데 하물며 말씀을 사르려면 얼마나 고르고 또 골라야 할지 알 수 없다.
수사를(修辭) 해야 참말을 할 수 있다. 그것이 입기성(立其誠)이다. (1957)
참말을 한 뒤에야 인격이 생기지 거짓말을 하면서 무슨 인격이겠는가?
개인도 그렇거든 나라야 말해 무엇하랴? 나라가 참말을 해야 나라가 서지 거짓말을 하는 나라가 무슨 나라인가?(1957)
말은 한 번 하면 천 리(千里)를 간다.
쏟아진 물을 다시 담을 수 없듯이 한 번 실언(失言)을 하면 회복하기 참 어렵다.
천 리를 가 버린 말을 누가 찾아올 수 있겠는가. 함부로 남의 말을 해도 안 되고 모르는 걸 말해도 안 된다.
더욱이 남의 인신(人身)에 관한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말씀을 삼가자. 말씀을 고르자. 말씀을 닦자.(1957)
우리가 정신을 닦는다는 것은 말씀을 닦는 것이다.
생각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말씀을 닦는 것이다. 몸을 닦듯이 말을 닦아야 한다.
말(言語)은 소리 없이는 할 수 없다. 소리는 숨기운이 목구멍을 통해서 나오면서 대기(大氣)를 진동시켜서 소리가 나게 된다. 대기의 이동은 바람이고 진동이 소리인 말이다.
사람들은 말을 자꾸 하고 자꾸 듣겠다고 한다.
그 까닭은 밤낮으로 말을 해야 별 것 없고 시원한 게 없는데도 말에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성현(聖賢)들은 다른 이가 아니라 소망이 담긴 진리의 말씀을 하다 간 것이다. (1957)
그리스(희랍) 말 도크사를 영광(榮光)이라고 옮겼는데 잘못 된 것 같다.
빛(光)이란 뜻은 없고 훌륭하다 뚜렷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주역(周易) 건(乾)괘에 나오는 천행건(天行健)의 건(健)은 사람 으로 일어서자는 뜻인데 사람이 턱 일어설 때 그 존재가 뚜렷한 것이다.
평안 강(康)자와 같이 써서 건강이라고 하는데 건강함이야말로 뚜렷한 것이다. 건강하지 않으면 뚜렷할 수가 없다.
풍전등화(風前燈火)는 뚜렷한 것이 아니라 위기에 놓인 것이다. 우리는 뚜렷하게 살며 뚜 렸하게 죽자는 것이다.
주역에 군자(君子)는 천행건(天行健)해야 한다는 뜻은 줄곧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뚜렷함을 가지고 살자는 것이다. 하느님께로 뚜렷이 나아가는 이라야 맘과 몸이 성하여 없다.
공자도 하느님께 가기를 뚜렷하게 하면 지성(至誠)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이와 같이 하느님 아버지와 나와의 관계를 알면 아들이 하느님 아버지를 뚜렷하게 하고, 아들은 하느님 아버지와 같이 뚜렷하게 솟아날 수 있다. 이렇게 하려고 뚜렷(健)하자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라는 것은 어찌 되었든 로케트와 같아 한 번 나오면 도로 들어갈 수 없다. 이왕 나온 바에는 자꾸 나아가게 되어 있다.
하느님 아버지가 계시는 저 위로 자꾸 올라가자는 것이다. (1957)
사람이 말씀을 믿지 않으면 마침내 손 잡고 입 맞추고 얼싸안던 것(배우자)을 마지막에 거두어 씻어 널 속에 넣어 땅 속으로 던진단 말인가.
이렇게 세운 오리목 광목에 글윌 몇 자 썼다가 불사르면 재 한 줌이 남는다.
이게 무슨 노릇이냐? 인생에서 진리의 말씀을 빼면 재 한 줌밖에 될 것이 없다.
결국 참 사는 길은 영원한 말씀뿐이다(1957)
各 우리의 몸도 하느님이 먹여 주시고 길러 주시기 때문에 있는 것뿐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이다. 어떤 작품인가 하면 하느님께서 미리 마련하신 대로 선한 삶을 살도록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작품이다.
우리도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만들어진 작품이다 우리가 밥 먹??거저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성숙하여 밥이 될 수 있도록 태초부터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하느님의 밥이 되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다.
인생뿐만 아니라 일체가 하느님에게 바쳐지기 위한 제물이다. 일체가 하느님께 바쳐질 밥이란 말이다.
특히 인생이란 밥을 통해 우주와 인생이 얻는 영양은 무엇일까?그것은 말씀이다. 인생이란 밥에는 말씀이 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성령의 말씀이 있다. 온 인류를 살리는 우주의 힘이 되는 성령의 말씀이 있다.
인생은 짐승처럼 자기의 육체를 바치는 밥이 아니다. 인생은 밥을 먹고 육체를 기르고 이 몸속에 다시 성령의 말씀이 영글어 정신적인 밥인 말씀을 내놓을 수 있는 존재다.
사람이 하느님의 제물이 되는 것은 육체적인 제물이 아니다. 영(靈)적인 제물이다.
사람이 제물이 되는 것은 말씀이지 목숨이 아니다.
말씀이 속알이요 목숨은 껍질에 지나지 밑는다. (1957)
영원한 님(하느님)을 그리는 글이 바른 글이다. 영원한 님을 그리지 않는 글은 몽땅 그른 글이다. (1957)
마음이 평안하면 바른 말을 할 수 있다. 바른 말을 할 수 없으면 마음이 평안치 않다.
몸은 곧 죽을 것같이 보여도 바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은 마음이 평안한 사람이다.
참으로 평안한 것은 자꾸 애씨 참말만 하고 싶어하고 거짓말하는 것을 모르는 그 지경에 가면 참에 들어가는 것이다. 비들어진 마음처럼 불안한 것은 없다. (1957)
다른 것은 떨쳐 버릴 마음이 있어도 숨만큼은 꼭 붙들고 가려고 한다. 숨을 못 쉰다고 하면 아주 그만두라는 것 같아서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
쉬어라 하면 숨을 쉬는 것 같아 좋고 그만 쉬어라 하면 세상을 그만두라고 하는 것 같아 싫어한다. 숨쉬는 것이 쉬운 것 같아도 이렇게 어렵다. (1957)
하느님은 고요히 사람의 귀를 여시고 마음에 인(印)치듯 교훈하신다.
마음속으로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막을 길은 없다. 잠 잘 때나꿈꿀 때나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소리를 들어라.
그것은 사람을 멸망에서 구원하여 영생을 주기 위해서다.
하느님 말씀은 공상(空想)이 아니라 구체적인 진실이다.
하늘에서 비가 와도 그릇에 따라 받는 물이 다르듯이 사람의 마음 그릇에 따라 하느님 소리를 듣는 내용이 다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주에 가득 찬 하느님 말씀은 하나이다.
하느님 말씀 에 공손히 좇아야 한다. (1957)
사람이 날마다 새롭고 새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느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하느님 말씀으로 살기 위해서는 제나(自我)가 죽어 하느 님의 얼로 눈이 뚫리고, 코가 뚫리고, 입이 뚫리고, 마음이 들리고, 알음알이(知)가 뚫려야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인 얼나가 엉큼엉큼 성큼성 큼 자라게 된다.
그리하여 나는 언제나 코에 숨이 통하고 귀에 말이 통하고 마음에 생각이 통하고 얼나에 하느님의 뜻이 통하는 삶을 생명이 라고 한다.
생명은 형이하의 생명이나, 형이상의 생명이나 통해야 살고 막히면 죽는다. (1957)
말숨(말씀)은 숨의 마지막이요 죽음 뒤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말숨 쉼은 영원한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말숨을 생각하는 것은 영원을 생각하는 것이요 말숨이 곧 하느님이기도 하다.
말숨을 쉬는 것이 하느님을 믿는 것이요 하느님으로 사는 것이다.
말숨은 우리 맘속에서 타는 참(얼)의 불이다.
맘속에서 장작처럼 쓰여지는 것이 말숨이다.
암속에 서 태워지는 장작(가스) 그것이 말숨(말씀)이다.
참(얼)이란 맘속에 쓰여지는 것이다.
중용(中庸)이란 우리 맘속에 쓰여진다는 말이다. 우리 맘속에 영원한 생명의 불꽃이 타고 있다.
하느님의 말숨(말씀)이 타고있다.
그것이 거룩한 생각이다.
사람은 하느님의 말숨이 불타는 성화로(聖火爐)이다.
이것이 현 존재이다.
하느님의 말숨을 숨쉬지 못하면 사람이라고 하기 어렵다. (1957)
말하는 것은 그림자를 부는 것 같고(言之如吹影) 생각하는 것은 먼지에다 조각하는 것과 같다.
(思之如彫塵)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하는 것은 그림자를 후후 부는 것과 같고 하느님의 모습을 그리는 것은 먼지에 무엇을 조각하는 것과 같다.
자연에서 바람이 불어 먼지가 날릴 때 우리 가 모르는 하느님께서 무엇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느낄 때가 많다.
성경에서는 바람을 하느님의 입김이라고 했다.
이 말 많은 세상의 말이라 는 것은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지나가는데 먼지를 어떻게 조금이라도 남겨 볼까 하고 부는 것인지 모르겠다. (1957)
말이 안 되는 소리를 자꾸 지껄이면 누가 말의 존귀함을 알겠는가.
말한다는 것이 기껏 남의 흥이나 보고 실없는 거짓말만 하니 이 얼마나 참담한 일인가.
요새 글자나 알고 글귀나 읽고 서책(書冊)을 쓴다는 이들의 짓이 무엇인가?
그들의 글과 말이 도리어 세상을 어지럽게 하고 젊은이들을 타락하게 만들고 국민정신을 죽이고 있지않는가?
참된 말(글)에는 깊은 뜻이 있어 사람이 나아갈 길이 훤하게 보여야 하지 않는가?
요사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성령인가 아니면 악마인가를 도무지 알 수가 없지 않은가.
사람이 살자면 맑은 샘물이 있어야 하듯이 이 세상에는 사람의 정신을 살릴 참 말이 있어야 한다. (1957)
말씀의 임자가 누구인가?
하느님의 성령이 말씀의 주인공이다.
마태오 10장 20절에는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성령이시라고 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말하는 이는 하느님이시다.
우리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말씀하신다.
하느님 의 말씀이 참 말씀이다.
"위에서 오신 분은 모든 사람 위에 계신다.
세상에서 나온 사람은 세상에 속해 일을 말하고 하늘에서 오신 분은 모든 사람 위에 계시며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요한 3:31~32) 참말을 듣 는 이가 많아야 나라가 바로 되어 흥하게 된다.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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