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리쉬와의 문답

2017. 1. 21. 18:2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꿈과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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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리쉬와의 문답

침묵의 큰 스승, 마하리쉬의 가르침을

데이비드 갓맨이 편집한 이 책의 제목은 '있는 그대로'입니다.


스리 라마마 마하리쉬(Sri Ramana Maharishi)


'스리'는 존경하는 사람의 이름 앞에 붙이는 존칭어이며,

'라마나'는 벵카타라만의 축약어로 '아트만에 머무는 자'라는 의미

'마하리쉬'는 산스크리트어로 '위대한 성취자'라는 뜻입니다.

허리에 두르는 천조각과 물주전자, 나무지팡이 하나가 가진 소유물의 전부였던 그에게

깨달음이란 어떤 것을 대상적으로 알거나 성취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있는 그대로'의 진아가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나'를 신체나 감관 또는 마음작용과 동일화하는 그릇된 생각을 멈추는 방법으로

라마나 마하리쉬는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묻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직접적인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먼저 책 앞부분에 있는 추천의 말 중 일부입니다.


흔히 그의 방법은 '자아탐구'라고 불렀으며,

이 자아탐구는 라마나 마하리쉬의 실천철학의 핵심을 이루는 독특한 방법이다


나는 누구인가?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이 몸은 내가 아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은 내가 아니다.

말하고, 움직이고, 붙잡고, 배설하고, 생식하는 다섯 가지 행동기관은 내가 아니다.

호흠 등의 다섯 가지 생기(prana)는 내가 아니다.

생각하는 마음도 내가 아니다.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무의식도 내가 아니다.

이 모든 것이 내가 아니라면, 나는 누구인가?

이 모든 것을 '내가 아니다'라고 부정하는 행위자,

그를 지켜보는 목격자만이 남는다.

그것이 바로 나다.

이제 본문 중 일부분을 옮겨 보겠습니다.


-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또 어떻게 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어떻게 키워 나가야 합니까?

그대가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그대의 다른 이름이다.

그대 자신이 깨달음이므로 그것을 얻거나 키워 나갈 필요가 없다.

그대는 단지 참자아가 아닌 것들을 그대라고 생각하는 오해만 버리면 된다.

그러면 순수한 깨달음만이 남으며, 그것이 바로 그대의 참자아이다.

 

- 제가 각성된 상태라면,

어째서 저는 지금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원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가 현재 알고 있는 것은 에고에서 비롯된 것이고,

따라서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상대적인 앎은 주체와 대상이 있게 마련이지만,

참자아의 각성 상태는 절대적이며, 어떠한 대상도 있을 수 없다.


기억 또한 상대적이다.

기억하는 주체가 있고, 기억되는 대상이 있다.

그러나 주체와 대상의 이원성이 사라진다면, 누가 누구를 기억한단 말인가?


참자아는 영원히 현존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참자아를 깨닫도록 도와달라고 하는데,

자기 자신을 아는 데에 무슨 도움이 필요한가?

그들은 참자아가 무언가 새로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참자아는 영원히 같은 상태로 현존하고 있다.

사람들은 무언가 번쩍이는 섬광 같은 것을 보고 싶어한다.

하지만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참자아는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니다.

그것은 그저 그것일 뿐이다.

인간의 언어로는 규정될 수 없는 무엇이다.


그래도 굳이 정의하자면,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that I am)"라고 말하는 정도가 최선일 것이다.

....참자아는 유일한 존재이지만, 실재와 비실재의 분별을 넘어서 있다.

참자아는 앎이지만, 앎과 무지의 분별을 넘어서 있다.

어떻게 그것을 정의할 수 있겠는가?

참자아는 그저 현존하고 있을 뿐이다.


- 그런 상태를 어떻게 해야 직접 체험할 수 있을까요?


참자아에 대한 앎을 말하려면, 두 개의 자아가 있어야 한다.

알아차리는 자아와 알려지는 대상이 되는 또 다른 자아가 있어야 한다.

거기에다가 그것을 알아가는 과정도 있어야 한다.

우리가 깨달음이라고 부른 상태는 있는 그대로의 자기로서 존재하는 상태이지,

무엇인가를 알거나 무엇이 되려는 상태가 아니다.


깨달았다고 해도 깨달은 그 존재는 항상 존재해 왔고 존재하고 있다.

그 상태가 어떻다고 묘사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존재할 뿐이다,


차선책이긴 하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이런저런 말로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있으리라,

깨달음을 얻는다고들 이야기하지만,

이미 실재하는 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단 말인가?


- 선생님께서는, 참자아는 침묵이라고 말씀하시곤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참자아 안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생각해야 할 거리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극치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생각 자체가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자아의 아름다움 속에서 말은 길을 잃어버린다.

그에게는 오직 침묵만이 존재한다.

궁극의 그런 상태에서는 그 상태 그대로 존재하는 것 외에는 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


- 무엇이 침묵입니까?

 

언어와 생각을 초월한 상태가 침묵이다.

현자들은 말한다.

'나'라는 생각(에고)이 털끝만큼도 일어나지 않고

참자아만이 오롯이 현존하는 상태를 침묵이라고.

이러한 침묵 상태의 주인공이 신이며 영혼이다.

참자아는 아득한 태고 적부터 존재해 온 침묵이다.

침묵만이 진실하고 완전한 앎이며,

그 밖에는 모두 보잘것 없고 하찮은 앎에 불과하다.

주체와 대상이 분리된 상태에서

삼라만상의 수많은 모습들을 분별하는 것은 참다운 앎이 아니다.

삼라만상은 앎 자체인 참자아의 표면에 나타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 어떻게 해야 습을 버리고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까?

 

자유는 우리의 본성이다.

우리가 곧 자유이다.

우리가 자유를 갈망한다는 사실 자체가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움이 우리의 진정한 본성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우리는 단지 구속되어 있다는 착각을 버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자유에 대한 생각이나 자유롭고자 하는 갈망이 사라지고, 자유로움 자체가 된다.

그러나 스스로 구속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자유롭게 되기를 갈망하는 동안에는 구속되어 있는 것이다.


- 마음과 참자아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아무런 차이도 없다.

마음이 내면으로 향하면 참자아이고,

외부로 향하면 에고와 현상계가 된다.


똑같은 옷감이라도 여러 가지 다른 이름의 옷으로 불리게 된다.

똑같은 금으로 만들어진 장신구들이라도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하지만 이름만 다를 뿐 모든 옷의 본질은 옷감이며,

모든 장신구도 다같이 금으로 되어 있다.

실재는 오직 하나일 분이며, 이름과 모습이 다를 뿐이다.


마음이라는 것이 참자아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이라는 독립된 실체는 없다.

참자아는 마음이 없어도 존재하지만,

마음은 참자아가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