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는 가까이 하면 없어진다 /현웅스님

2017. 2. 18. 20:3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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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는 가까이하면 되러 없어진다.

이 뭣고?’는 내게 이미 있는 것!


이 뭣고?’ 화두는 가지고 댕기는 게 아니고 내게 있는 것을 내 쪽에서 걸려들어져서

오는 의심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조작 의심입니다.

대개 참선한다고들 하지만, 관법을 하고 있으며 혹은 그려서 짐작하거나 조작으로

하고 있으며 어떤 큰 스님의 가르친 법문을 듣고 가르친 대로 기억해서, 가르침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바른 의심을 일으키는 것을 못하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어떤 것으로든지 성품을 가려버리는 것은 바른 공부가 아닙니다.

대승을 공부한다고 하지만, 자기를 가려놓고 하기 때문에 대승법이 소승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바른 화두의심은 생각 하나하나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 의심은 흩어짐이 없는 의심이어서 삶 자체가 하나의 의심으로 이어질 뿐입니다.

 

조주 무()자 화두도 이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가야 옛 부처의 가르침과 조사의 글이 둘이 아닌 대로

이어져서 공부길에 대해서 별다른 의심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이가 묻는다. “번뇌 망상이 일어나는 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버릴려고 해도 버려지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저는 대답 합니다.

 

"번뇌 망상은 버려야 할 대상이 아니고, 있는 번뇌를 더 가까이 해 보십시오.

그 번뇌를 생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마음으로 받아들여 같이 살겠다고 보듬으면

번뇌는 어디로 가버리고 그 번뇌가 있었던 자리에는 안온하고,뿌듯한 편안함이 와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경험을 하게 되면 번뇌의 성질을 알게 되기 때문에 번뇌와 싸워야 할

일이 없어질 것입니다. 번뇌와 싸워서 이긴 사람이 이 세상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번뇌 그것을 알고 보면 우리가 살아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삶의 표현인 것입니다.

번뇌가 있으므로 우리가 공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번뇌와 같이 살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대의 삶을 크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공부의 기초가 바로 잡히는 것입니다.” 라고.

 

기억할 수 있는 것은 법이 아니다.

 

법을 아무 장애 없이 쓰는 사람이 있고

법 속에서 법을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을 믿어서 지키고 가지고 댕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법으로부터 자유스러운 사람이고

두 번째 사람은 법으로부터 구속을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자기 상상에서 아직 못 나오고,

법을 그려서 법으로 부터 밀려 댕김을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또 다른 한 사람은 법을 많이 알고만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아만을 일으키며 법상으로 인해 어리석음만 키워 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알기는 많이 알되 되는 일이 없으며 조작과 부자유스러움 속에서

법으로 인한 번뇌를 붙들고 삽니다.현실에서 공부 타령을 하면서 꿈속에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상과 현실을 오고 가면서 가장 낮은 법의 그림자에 끄달려

살고 있는 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정(市井)에 불교를 보는 눈 !


낱낱이 살아있는 부처님!

을지로와 청계천 거리를 걸어 다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생업을 가지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호박죽과 팥죽을 끓여 놓고 장바닥에 앉아 죽을 팔고 있는 여인네에게서 부처를 봅니다.

상가에서는 손님을 기다리다 지쳐 홀로 졸고 있는 부처님도 있습니다.

 

그 많은 사람 사람들의 안에는 부처가 있습니다.

 

시장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주인님의 손에는 부처가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물건을 사러 온 사람에게 물건을 주고 돈을 받습니다.

이 주고 받는 손의 작용 속에 부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얼마라고 값을 말 합니다. 이 말 속에도 부처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의 묘한 작용!

 

묘를 보이는 모습은 낱낱이 부처의 얼굴입니다.

시장 바닥 곳곳에서 사람들이 다 부처의 작용을 보이고 있습니다.

부처를 경전이나 특별한 스승에게서 찾지 않습니다.

 

장바닥 사람들 속에서 봅니다.

낱낱이 부처가 살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제가 본 불교는 이러했습니다.

 

話頭? 부처가 살고 있는 곳에서 나온 말이다


화두를 알기 전에 사람이 사람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마음이 있는 곳에 부처가 있기 때문입니다.

 

화두는 곧 부처 있는 곳을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음을 모르고 헛 군데서 깨달음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 마음은 항상 지금 내가 살아있는 곳에 있는 것입니다.

다시 이 중생심이 있는 곳에 있습니다. 중생심이 어디 멀리 있겠는가?

중생심을 알면, 알자마자 공부는 시작됩니다.

부처마음은 중생을 떠나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되면 궁구는 그냥 됩니다.

이때는 스스로 압니다. 화두를 설명하려고 하나 그건 중생심으로 화두의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화두는 어떤 식으로든지 그릴 수가 없습니다.

부처와 조사도 못 그립니다. 그래서 비상(非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중생심을 아는 곳에 화두가 있습니다. 아는 것은 중생으로 아는 게 아닙니다.

자각상태로 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각자 살아있는 사람 눈앞에 석가도 모르는 것이 역력합니다.

행여나 알려고 하는 마음이 일면 그게 곧 중생심이란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완전을 구하면 길이 막힌다.

 

삶에 있어 무엇인가를 나눌 수 있는 벗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퍽이나

다행한 일입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서로 나누며 스스로를 이해하고 용서해가며

성장합니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들은 너무 완전하려는 데서 문제를 만납니다.

삶 자체가 불완전한 것인데 어찌 완전을 바라겠습니까.

우리는 살아가는데 서툴러서 노력해가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완전을 바라는 것은 어리석음 입니다. 일종의 망상(妄想)입니다.

세상은 그 근본 틀이 항상 변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완전이라고는 자리할 곳이 없습니다.

완전을 바라지 않는 것 자체가 불교 공부의 시작입니다.

 

일반 小乘명상법과 수행이 다른 점

 

명상은 마음을 고요히 해서 안정을 얻으려는 노력을 하지만

은 마음을 시끄럽게 하는 헛된 상념들을 깨달아 놓아 버립니다.

그리하면 본래 있는 우리들의 마음은 저절로 다툼이 사라져 고요해집니다.

명상은 기술이나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지만

은 어떤 노력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은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이 마음 아닌 것을 자각하면

평정심이 곧 찾아듭니다. 따로 고요를 찾을 것이 없는 수행법입니다.

왜냐하면 본시 우리들의 마음은 부처이며,

이 부처 마음은 우리가 살고 있는 평상심 속에 항상 있어 왔기 때문입니다.

 

명상은 마음을 아는 것은 뒤로하고 어려운 고행을 거쳐

마음 변두리를 터치합니다. 기술을 배워 개인적인 체험으로 들어갑니다.

변화무쌍한 수행의 경계가 끝이 없습니다.

좋은 경계에 대한 집착을 떨쳐 버리기가 어렵습니다.

믿음으로 된 것이 아니고 노력으로 된 것이어서

쉽사리 에고가 떨어져 나가지 않습니다. 유위법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석가세존은 이런 폐단을 지적하여 무위법인 을 가르쳐 보여 주었습니다.

은 처음부터 경계를 세워두지 않는 공부이므로 부처가 경험한 것을

누구나 직접 경험해 가는 길입니다.

 

은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믿음이 없이는 사람이 자성불이란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곧 어려움에 떨어집니다.

을 바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스승을 요합니다.

그 믿음 아래서 자기의 상념들이 내려 놓아져 공부 경험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공부 경험이 부처가 깨닫고 난 후 말씀해 놓은 경전과 맞아 떨어지면

그때는 바른 믿음이 자리 잡는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 단점은 혼자 하다가 자기 상념에 묻히면 일반 명상보다도 못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믿어지는 스승을 찾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깊어지면 깨달음을 향하는 소견이 바르게 됩니다.

그리하면 깨달음이 오는 날은 멀지 않게 됩니다.

이때는 부처를 둘로 보지 않고 바로 알아 날마다 성숙됩니다.

하는 바 없이 공부가 되는 때입니다.

 

성격을 바꾸고자 하는 이들에게

 

사람의 마음은 믿을 것이 못 되고, 성격도 믿을 것이 못됩니다.

오직 깨닫는 법을 믿어야 합니다. 법은 마음도 아니고 성격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 성격이 좋지 않다고 오래된 성격을 바꾸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오래된 습이 쉬이 바뀌어 지지 않습니다.

법을 믿으면 그러한 마음과 성격에 대하여 저절로 관심을 두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나쁜 성격은 저절로 나와 상관없게 되어 어디로 가버립니다.

그것을 모르고 바꾸려고만 하면 어렵고 바뀌어 지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삶속에는 이런 것들이 우리를 어렵게 합니다.

하는 일들이 잘 풀리지 않는 것들도 알고 보면 이런 작은 것에서 옵니다.

그래서 불법 공부는 이 삶속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공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知識智慧와 따로 놀면

 

지혜를 가진 자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그 지식은 모든 이에게 도움을 주는 데

쓰입니다.그러나 지식은 있되 지혜가 없다면 그 지식은 방향 없이 쓰여 질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지식은 자기가 자기를 속이기에 알맞은 꾀가 될 수 있고,

남을 속이는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는 것에 속는다면 사람 마음에 아만이 자리 잡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어리석음을 제일 먼저 알아 자기를 세워두는 짓을 하지 않습니다.

남과 다투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식은 더 많이 알아야 하고, 남을 이겨야하기 때문에

다툼을 그치지 않습니다. 자기를 비울 수 있는 밝음이 없습니다.

이렇게 제한성을 벗어 날 수가 없는 것이 지식의 한계성입니다.

 

불교적으로 보면 탐진치를 구별하는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는 탐진치를 끊는 힘이 있습니다.

모든 문제는 아는 것과 지혜의 뒤바뀜에서 옵니다. 이것을 반야심경에서는

전도몽상이라고 합니다. 지식의 단점을 보완하는 데는 믿음이 근본이 됩니다.

그래서 믿음은 모든 공덕의 뿌리라고 합니다. 이 공덕이 있는 곳에서 사람이

사람을 얻습니다. 그리고 사람 속에 있는 지혜를 얻어 뜻을 이루고 일이 성취됩니다.

 

그러나 지식은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믿음이 없으면 남의 의심을 받을 수 있고

그 뜻을 이루는데도 신뢰를 얻어 내야하는 결점이 항상 따라 다닙니다.

이런 것들이 조화를 잃으면 이기심이 생기고 다툼이 옵니다.

그래서 사람의 그릇이 크고 작음은 여기에서 결정됩니다.

지식이 적어도 지혜가 있고 덕이 있는 자에게는 지식을 가진 이들이 뒤를 따릅니다.

그러나 지식이 많은 이는 홀로 가둠을 못 벗어나 이상 세계를 추구하든지 자아도취에

빠지게 됩니다.

지식은 주인 없는 망아지처럼 종횡무진 아상을 지어, 나와 남을 해치는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지식은 지혜가 뒷받침 되어 있어야 믿을 수 있는 것이 됩니다.


- 현웅스님

잔잔하고 가슴 적시는 노래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