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마음과 논리학|********@불교와수학@

2017. 3. 19. 10:40일반/생물·과학과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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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마음과 논리학

-논리에 승복하는 일 민주주의 출발-
-조계종 분규는 비논리적 역사의 業-

불교 교단도 다른 일반 사회와 다름없이 인간이 만든 조직이다. 인간이 만든 조직에는 서로의 의사를 전달하는 수단으로서의 언어가 있다. 언어를 매개로 하여 정확히 의사를 전달하고 서로의 오해를 없앰으로써 조직을 원활하게 운영할 수 있으며, 그것으로써 처음 조직을 형성했을 때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한편 언어에서 한계를 인식한 불교는 언어보다는 마음을 중시하며, 그 한계를 초월할 것을 수양의 목표로 삼아 왔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세계가 바로 그것이며, 석가모니부처님과 가섭 사이의 아름다운 설화 ‘염화미소(拈華微笑)’는 이에 매우 상징적이다.

부처님이 연꽃을 따서 제자들에게 어떤 뜻을 전하려 했을 때 누구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다만 가섭만이 그 뜻을 헤아리고 미소했다는 고사이다<佛說梵天王問決疑經}>. 부처님의 여러 제자들 가운데 오직 가섭 혼자만이 그 뜻을 알아차렸다는 것은 그만큼 범인에게는 이심전심의 의사 전달이 쉬운 일이 아님을 시사하는 일이기도 하다.
희랍에서는 아예 처음부터 이성으로서의 말씀(logos,이성)을 중시했다. 그들의 전형적인 학문은 대화·토론의 방법에서 비롯되었으며, 학문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논리학’이다.

특히 유클리드기하학은 대화 도중 애매한 것이 발견되면 그 의문점을 없애기 위해서 상대를 납득시키거나 또는 내 자신이 납득하기 위해 대화의 법칙이 성립해야 한다는 자각에서 출발했으며 논증기하학은 이 방법을 체계화했다. 즉 갑이 애매한 점을 의심하는 데 대하여 의문시하는 술어의 의미를 설명하고 또한 을과의 대화가 원활히 성립할 수 있는 공통의 기반(약속)을 만들고 서로의 대화에서 야기되는 의문점을 배제시켜 가는 것이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단순한 도형의 학문이 아니며 오히려 도형을 대상을 삼는 논증의 훈련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즉 ‘정의’에 의해서 술어의 의미를 확정하고 ‘공리’로서 추론의 기초를 확립한다. 공리·술어·논리법칙이 공통의 토론 기반인 것이다. 아무리 간단한 명제일지라도 반드시 논증되어야 진리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 가령 ‘삼각형의 두 변의 합은 다른 한 변의 길이보다 길다’는 명제는 심지어 개조차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이 간단한 명제조차도 공리와 술어, 그리고 일정한 논리법칙에 따라 증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논증(논리에 의한 증명)이란 ‘정의와 공리’에서 비롯되는 논리의 전개 체계의 결과를 얻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그 논리의 결과는 공리의 한계 내에서만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일단 공리를 받아들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논리로 도출된 결과를 승복한다. 희랍 철학자들이 ‘믿어야 할 것은 오직 로고스뿐이다’, 또는 ‘법은 로고스이며, 따라서 악법도 법이기에 승복해야 한다’고 외친 것은 로고스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논리는 만인이 공평하게 공유하기에 논리에 승복하는 일은 민주주의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인간이 만든 사회, 조직에는 반드시 논쟁거리가 발생한다. 노사간의 갈등에서 종교계의 갈등까지. 논쟁이 그칠 날이 없다. 그러나 민주사회는 이러한 갈등을 논리로써 해소시킬 것을 시도해 왔다.

한편 수만 개의 작은 혈연 중심의 마을과 도시라고는 서울 하나뿐인 사회구조를 오랫동안 체험한 한국인들은 논리적 의식을 기를 시기가 없었다. 그 보다는 ‘천냥 빚도 말 한마디로 갚고’ ‘마음만 맞으면 천하도 반분’하는 정(情)의 세계를 믿어 왔다. 정은 감정이며 이성과는 반대이다.

그러한 체험들이 한국인의 조직 운영을 비이성적으로 흐르게 만든 것이며, 이번 불교계의 분규 또한 그 연장선상에 있다. 새삼 비논리적으로 살아온 역사의 업이 얼마나 무거운가를 실감하며, 원효대사가 화쟁(和諍)사상을 내세우게 된 계기 역시 당시 불교계에 많은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데 지금 조계사에는 그 손마저 없는 미망의 상태에 있는 속물들이 평소 마음의 ‘수행·수양’을 내세웠던 것과는 달리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다.

그들을 보면서 단순히 갑도 옳고 을도 옳다는 양시·양비에서 벗어나, 말씀을 초월하는 절대 경지가 있음을 알리고 특히 불자의 이상이자 목표가 바로 그 경지임을 제시한 원효의 화쟁사상을 떠올리게 된다.
                   


첫번째" 쓰기도 하고 달기도 하다. . . 두번째" 온도에 따라 맛이 다르지만


뜨거운게 가장 좋다. . . 세번째" 중독된다. . . 네번째" 커피나 사랑이나 다 끊기가 어렵다. . . 다섯번째" 철이 들어서 시작한다. . . 여섯번째" 비가오면 더 생각난다. .

. 일곱번째" 분위기에 약하다. . . 마지막으로... . . . 여덟번째" 길들여진 입맛을 바꾸기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