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4. 9. 17:53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처음의 마음이 곧 선의 마음, 마음 만나야 선은 시작돼
기획-간화선의 이해(26)
서울육조사 현웅스님
마음을 가지고서도 만나지 못하고 있다
하려고 하는 것이 되려 공부 길을 막는다
어떤 일이든 믿음에서 마음이 쉬어진다
마음을 모르고 시작하는 선은 어렵기만하다
생각을 믿는 것과 마음을 믿는 것은 다르다.
대개 사람들은 생각을 마음으로 잘 못 알고 믿는다.
그리고 그 생각으로 마음을 끌고 다니려고 한다. 마음의 혼란은 여기에서 온다.
불교 반야심경에서 말하고 있는 전도 몽상이 그런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마음을 알고 믿으면 생각은 저절로 사라지고 없어져 버린다.
마음에는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생각 대신에 지혜가 와 있다.
이 지혜는 생각이 마음 아닌 줄 알게 한다. 마음에 생각이 놔져 있다.
어리석음 성낸 마음 탐하는 마음들이 헛것인 줄 안다.
역시 이런 것들도 놔져 있기 때문이다.
무심(無心) 이다. 빈 마음이다.
빈 하늘에 구름이 떠도는 것을 보듯이 헛것을 본다.
생각을 하되 집착 없이 하는 생각이 지혜이다.
이것을 생각에 물들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심경에 불구 부정이 그것이다.
이 마음은 형상이 없다. 형상이 없으므로 잡을 수도 없고 또한 얻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마음을 알면 저절로 붙들고 있는 것을 놓는다.
生도 놓고 死도 놓는다.
이 놓는 것은 아는 것으론 놔지지 않는다. 깨달아야 놔진다.
아는 것은 식의 작용으로 그 뿌리가 비어져 있다.
그러나 아는 것도 빈 마음에서 써지면 이 또한 지혜가 된다.
다만 먼저 오고 나중 오는 것만 다르다.
그래서 우린 먼저 마음을 바로 알아야 한다.
석가는 이 마음의 성질을 금강경에 곳곳마다 말해 놓고 있다.
불교는 알아 들어가는 종교가 아니다. 믿어 들어가야 한다.
믿음이 없이 아는 것은 지혜가 없다.
아는 것과 지혜가 구별이 안 되면 불교는 기복에 묻히든지
어려운 철학으로만 남아 사람의 삶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마음은 내 속에 묻혀 있지만 내가 모를 뿐 항상 나안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나의 믿음에 따라 가깝고 멀다.
믿음의 방향을 바로 잡아 주는 것이 스승이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공부인 에게 '승사 선우를 여 부모 하라' 고 한다.
내 마음에 스승을 두면 헛생각이 줄어들고 잘못된 것이 돌아보아져
허물을 고친다. 나 안에 있는 불에 가까워져 간다.
불설이 밝아져 그 분의 말이 지금 내 앞에 계신 것처럼 안다.
불은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불이기 때문이다.
이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는 마음이다. 석가도 있고 나도 있고 남도 있고
예수도 있고 공자에게도 있는 마음이다.
나와 남이 뚫어져 있다. 성인과 중생이 뚫어져 있다.
이 하나가 너와 사이에 뚫어져 있다.
이 마음을 까달으면 부처요
곧 하나로 뚫어져 있는 것을 알면 그것이 하나님이다.
다만 그것에 공경하는 마음을 나타낸 “님” 자를 붙여
부처님! 하나님! 이름을 달리하고 나온다.
이 마음을 등진 사람은 하는 일마다 시끄럽다.
종교도 시끄러운 종교가 되고 성인을 멀리한 종교가 된다.
마음이 시끄러우면 학문도 시끄럽고 사업도 시끄럽다.
사람 속에 하나로 뚫어져 있는 마음을 등지고 있으면
무엇이든지 그렇다.
사실 이 부처마음은 어느 누구와도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떠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도 그 시원은 이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의 뜻을 사람이 여러 갈래갈래 만들어 찢어 놨다.
사람이 쓰는 언어에 따라 성인의 말이 다르게 나타날 뿐이다.
성인의 마음은 그렇게 복잡할 것이 없다.
사람이 스스로 성인의 마음을 가려 내가 짓는 마음으로 살아가니 복잡하다.
부부사이에도 서로 가깝고 먼 것은 마음이 만든다.
마음이 열리면 서로 가까워진다. 나라와 나라 사이도 그렇다.
마음이 가는 곳에 몸도 간다. 물질도 가고 사람의 정도 가고 온다.
모든 친소는 이 마음에서 일어난다.
가린 것이 없으면 부처마음이 드러난다. 사람의 마음이 부처마음이다.
다만 나는 그것을 가리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그들의 이름이나 형상에 붙들릴 때
내 안에 있는 성인의 마음을 등진다.
부처가 나를 등진 것이 아니라 내가 부처를 등지고 있다.
망상 속에 내가 있다. 부처는 망상이 없는 사람이다.
헛생각이 없다. 모든 중생 속에 뚫어져 있다.
우리는 이 마음을 놔두고 떠돌아다니는 마음을 붙들고 근심 걱정을 한다.
내가 어둡고 밝지 못한 것은 이런데서 온 것들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내가 이런 곳에 있는 우리를 본 것이다.
그는 우리 속에 부처를 본 것이다. 그의 마음에 연민이 이~ 인다.
자비가 이~ 인다. 그리고 입을 열기 시작한다.
그것이 그가 남긴 경전이다.
석가의 눈에는 마치 우리가 가시로 뒤덮인 밤송이가 익어지면
벌어지는 것을 본 것 과 같이 우리를 본다.
밤이 익어지면 가시를 놔두고 속 알밤만 드러난다.
가시가 벌어지면 가시 속 알밤만 드러낸다.
가시는 밤을 들러 싸고 있을 뿐 밤의 본 모습이 아니다.
밤이 익어져지면 가시는 저절로 알밤을 놔둔다.
헛된 마음이 사라진 것이다.
불교에 무상이라는 말은 이 뜻을 품고 있는 말이다.
변하고 있는 것을 놔두면 부처가 드러난다.
그러나 우리는 애지중지 가시를 붙들고 있다.
나를 쑤시고 남을 쑤신다. 삶이 전쟁이다.
알면 놓는다. 지혜는 스스로 놔둘 줄 안다.
그것이 우리들의 성품이고 알밤이다.
깨침이 없이는 부처 말을 배울 수가 없다.
사람들은 부처의 경전을 읽고 부처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부처는 기억하고 싶어도 기억 할 수가 없는 것이
부처의 성질이다. 그러므로 기억 속에서는 부처를 배울 수가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부처는 내가 섞어져 있다.
중생 견해 속에서 본 부처는 참 부처가 못 된다.
중생의 견해가 부처를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생이 만든 부처는 그 폭이 좁고 너그럽지 못하다.
자비와 지혜의 폭이 좁고 밝지 못한 것은 부처가 아니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부처를 놔 버려야한다.
기억 된 부처는 부처가 아니기 때문이다.
놔져 있는 곳에는 알고 모르는 것이 없다.
스스로 있는 성품 자성만 있다.
이 자성은 온 종일 나와 함께 하며 찰나를 떠나지 않고 존재한다.
앉고 서고 보고 듣고 밥을 먹고 옷을 입고
남과 말하고 있는 곳에도 있다.
말 하는 곳에 있으면서 말에 머물지 않고 옷 입는 곳에 있으면서
옷 입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어떤 것을 해도 그 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있다.
이것을 만나면 부처의 말이 저절로 나 안에서 살아나고
나의 삶이 밝아져 나온다.
이제 나는 부처를 알고 부처 말을 배울 수가 있다.
석가는 사람 속에 있는 부처를 본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석가가 본 부처를 스스로 가려 놓고 있는 줄 모르고 살고 있다.
부처는 내가 모르고 있을 때도 나안에 있고 다른 사람 안에도 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귀한 존재입니다.
이것을 알면 나도 편안하고 너도 편안합니다.
왜 두리번거리는가?
선원에는 불교를 많이 알고 있는 분들도 찾아온다.
물론 ‘마음이 부처다!’ 라는 말도 알고 온다.
저는 그 분들에게 묻습니다. ‘어떤 마음이 부처입니까?’ 라고.
어리둥절하고 머뭇거린다. 저는 다시 ‘두리번거리고 있는
그 마음이 부처를 떠나 있지 않다고 라고 말해 준다.
밖으로 찾는 부처는 없는 이ㅇ다.
부처는 내가 숨 쉬고 있는 곳을 떠나지 않고 있다.
결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부처는 생각을 일으켜
사량(思量)으로 그린 망한 부처다. 망상 부처다.
왜 자신이 부처인 것을 믿지 못하는가?’ 라고 다시 물어 본다.
말이 없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알고 있는 것이 불교를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생각으로 부처를 그리는 것은
망상으로 아무짝에도 못 쓰는 부처이다.
우린 지금 살아 있는 나에게 관심을 두어야한다.
앉고 서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듣기 좋은 말에 기쁘고
듣기 싫은 말에는 찡그릴 줄 아는 곳에 관심을 두어야한다.
그런 곳에 내 마음이 있고 부처가 있다.
이 마음을 놔두고 찾는 부처는 다 헛된 부처다.
마음은 가지고 댕기는 것이 아니다.
그냥 나 있는 곳에서 헛생각을 놔둘 때 가까이 있다.
부처는 몸이 움직이는 곳에 있으면서 그 몸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몸에 붙들리면 부처가 있는 마음은 숨어버리고
그리고 마음에 붙들리면 망상이 되어 나온다.
그래서 몸이 아니고 마음도 아니다. 라는 화두 공부를 하는 것이다.
화두 공부하는 이에게는 어떤 마음이든지 좋습니다,
망상이든지 성내는 마음이든지, 공부가 잘 안 될 때의 마음이든
상관없다.
그렇게 하고 있는 그 마음은 살아있는 삶의 표현이라고 봐야한다.
죽은 이에겐 그런 마음도 없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그런 마음도 귀하고 중요하다.
그 마음도 부처를 떠나지 않고 있다.
그런 마음이 부처와 같이 있는 줄 아는 이는
이제 그것 때문에 더 이상 그에게는 장애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그 마음이 부처와 따로 있다고 봅니다.
그것이 망상이다. 특별한 마음을 만들어 부처를 찾는다.
마음 밖에는 부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언어에 붙들려 있는 사람은 마음을 믿지 않는다.
말에 휘둘러 사느라 바쁘다.
그런 이에게는 부처가 옛 사람이야기가 되고 만다.
우리는 부처가 일상을 떠나지 않고 있는 줄 알아야한다.
부처를 배우는 사람은 먼저 어려운 말을 내려놓고
우선 이것부터 믿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나에게 관심이 두어야한다.
살아있는 생명은 귀하고 중요하다.
임제 스님도 '사람 떠나 부처가 있다고 믿으면
사마 外道에 떨어진 사람이다' 라고 한 적이 있다.
생명이 있는 곳에 부처가 숨 쉬고 있는 것이다.
다른 부처를 만들지 말아야한다.
내가 믿고 관심을 두면 살아있는 부처는 나와 가깝다.
바른 믿음은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禪 공부에 장애가 된 것들
사람들은 禪을 하려고 할 때 생각 속에서 선을
마음으로 그려놓고 하려고 한다.
공부가 처음 시작이 안 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꿈속에서 하고 있는 짓이다.
마음에서 시작되지 않는 공부는 엉터리다.
마땅히 생각이 일어나기 전 마음으로 돌아가
생각이 그치어져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생각이 일어나기 전 상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생각이 그치고 나면 곧 마음을 만난다.
경험이 가져다 준 마음입니다.
알지만 마음의 눈이 가 있을 뿐 요란한 것이 없다.
저절로 생각이 멈추어져 있다.
지혜의 눈만 떠 있다. 禪은 시작 된다.
만약에 선을 하는 사람의 마음에 어떤 좋은 마음이나
나쁜 마음이 마음 주변에서 서성거리면 그런 마음이
부처와 같이 있다고 알지 못하면 禪은 시작부터 어렵다.
불가능 할 수도 있다. 그런 선은 하려고 하는 것이 더 혼란만 준다.
그런 사람은 선을 못합니다.
내 마음을 떠난 불설(佛說)이나 조사어록을 들고서
그대로 하려고 하는 것도 큰 망상인 줄을 알아야 한다.
내 마음을 놔두고는 조사나 부처는 없다.
그러므로 생각이 일어난 뒤에 것들은 일체가 다 망상인 것이다.
이런 것들이 망상인 줄만 알아도 마음이 편안해져 공부가 쉽다.
지금 우리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음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하려고만 한다. 되러 그 하려는 것이 공부 길을 막아 버린다.
선은 어렵다. 그래서 먼저 믿어지는 스승을 찾는 것이다.
사람은 어떤 일이든지 믿음 속에 있을 때 조급하게 하려는
마음이 줄어든다. 마음이 쉬어진다.
망상 속에서 禪은 꿈속의 일!
마음을 모르고 시작하는 선은 어렵기만하다.
마침내 선은 나와는 먼 것처럼 되어 버린다.
그런 이에게는 일상의 삶도 풀리지 않고
하는 일마다 어려움에 처합니다.
하려고 하는 마음이 망상인 줄 알아야한다.
내가 지금 이런 짓을 하고 있구나! 하고 알 때 마음이 그친다.
헛생각들이 놔진다. 한 생각이 풀리면 다른 것들도 술술 풀린다.
일체 삶이 홀가분해져 얼굴도 평온해진다.
이렇게 선은 생활 속에 나를 밝게 해주는 공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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