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의 無자 화두에 대하여

2017. 4. 22. 17:5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728x90


조주의 無자 화두에 대하여

 

혹者는 말한다.

무'자는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도구입니다.

열쇠 없다고 집에 못 들어갑니까?

창문 열고 들어가든지 대문 부수고 들어가든지 열쇠 갖고 있는

엄마 따라 들어가든지? 방법은 수만 갈래입니다.

어느 게 최 상승이냐? 이게 문제가 아닙니까? 라고 물어 온 이가 있습니다.

..........

난 이런 견해를 가진 자에게 말한다.

조주가 말하는 無는 도구가 아니어서 머리 속에 넣고 댕기는 것이 아닙니다.

무는 글에 있지 않고 그 뜻에 있습니다.

그 뜻이 곧 부처이니 부처의 법에는 두 가지 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

옛 사람들은 조주 무자를 부처에 骨수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이는 묻기를 ‘有' 와 '非有 非 無'의 차이점은?

만약에 차이가 있다면 차별 속에 있는 유무는...

유도 설명이 잘 못 되어 있는 거고, 무도 역시....

有속에 無가 있고 無속에 有가 있습니다.

유무에 차이를 두면 이미 차이를 두자마자 ...

그 것은 유도 모르고, 무도 모르는 知見에 떨어진 者입니다.

오늘은 길 가다가 하나님이란 말의 유래를. 돌아봅니다.

이世上을 하나님이 만들었다. 창조 했다. 이게 일반 사람들의 見解 이다.

그러나 그 어원을 자세히 보면. 이 하나란 말에 뜻이 있습니다.

이 하나는 눈에 뵈지 않는 것. 형상이 없는 것입니다.

.

곧, 마음입니다. 그러나 이 맘 또한 고정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정 된 것이 아니므로 변해 버립니다. 알고 보면 마음도 아닙니다.

맘이 맘 아닌 줄 알면 모든 것이 일시에 환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형상이 없습니다.

이 형상 이 없이 존재하는 것을 이름을 붙여 신 혹은 부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성인이 쓰는 언어가 나와 멀어져 본 뜻이 낯설어져 있습니다.

뜻을 알아 버리면 성인의 언어가 지금 내 눈앞에 살아나 버립니다.

사람이 부처이고 신입니다.

다만 나는 신을 가려 놓고 성인에게는 그것이 가려져 있지 않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밝고 나는 어두운 것입니다.


마음 떠난 믿음이 우상을 짓는다.

중( 僧) 보고 중노릇 하지 말고, 예수 믿는 이 보고 예수를 믿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성인의 말은 나를 보고 나온 말이다. 살아있는 사람 안에 신이 있고

부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말한다. 神은 너 안에 있다.

그리고 신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것이 아니다.

항상 나를 떠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네가 모르게 온다.

나 안에 있지만 내가 아는 것이 아니다.

나를 알게는 하지만 내가 아는 것이 아니다.

달마는 이를 '모른다'고 말한다. 선에서는 있지만 알래야 알 수가 없다고 한다.

사람이 만든 신은 거짓 신이다. 그것은 우상이다.

내가 망상 속에서 만든 신은 악령입니다. 聖 靈이 아닙니다.

부처 또한 그렇습니다.

내가 만든 부처는 상이다. 그것은 곧 멸합니다. 그러므로 존재하지 않는다.

스스로 있는 존재! 그것이 부처이고 신인 것이다.

그것을 禪에서는 부모 미 생전 혹은 천지 미 분전부터 있어 온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는 이를 유대인과의 대화 중에 이렇게 말하고 나온다.

유대인들은 예수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대는 나이도 이제 갓 30인데 어찌 그대가

유대의 시조 아브라함을 아는가" 하고  물어온다.

예수는 답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낳기 전에 있었느니라. 그러자 유대인들은 길거리에서 돌맹

이를 찾는다. 예수는 숨는다. 중생과 성인이 다른 점을 보여 줍니다.

중생은 이름이나 형상을 쫓고 성인은 이름이나 형상을 놓고 삽니다,

 

“以心傳心” 에 대하여


마음으로 마음을 전한다. 글자를 보면 이렇게 이해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쓰고 있는 이심전심은 석가여래께서 가섭에게 법을 전할 때

나온 소리로 그 근본 뜻이 사뭇 다릅니다.

사실에 있어서는 전할 마음이라곤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전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른 법이 못됩니다.

법이 법으로서 바르다면 그런 말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의 방 거사는

:있는 법도 없게 해야 하는데 하물며 어찌 없는 법을 있다고 고집해서야 되겠는가! "

하고 노래하신 적이 있습니다. 불법에서 전한다는 말은 전해야 할 것이 없는 것을

서로 인정했을 때 오는 경험을 전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조금 말이 어려워지지만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한 법이라도 있다면 그 법은 곧 사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생사를 이루는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곧 인과에 속하는 것입니다.

전하는 자도 없고 받는 자도 없을 때 법을 전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전한다는 것은 분명히 전할 것이 있고 또 받아야 할 것도 있습니다.

그런 것은 유형의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무위의 법이 아닌 것입니다.


세존은 금강경에서도 항상 이 말을 강조 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이 알아듣기로는 무엇이 꼭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곧 중생 見에 떨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알고 있는 이심전심과 불법에서 말하고 있는 이심전심은

이렇게 다릅니다.

그리고 혹자들은 큰스님 네들이 법설을 하는 곳에서

이해가 가면 고개를 끄덕입니다. 이는 자기 의식세계에서 이해되는 것이지

결코 법을 아는 게 아닙니다.

법을 아는 자는 법을 듣자마자 자기가 변해져 버리며

그 듣는 법 또한 없어져 버립니다.

그 듣는 자의 내면에서 변화가 와 고개를 끄덕이는 시간도 없을 뿐더러

오직 자기가 알고 있는 것들이 무너져 버립니다.

곧 나가 없어져버림을 경험합니다.

이때는 오직 스스로의 허물이 뵐 뿐 다른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있다고 믿었던 업식은 공하여져 버립니다.

이게 반야심경에서 말하고 있는 “무 색성 향미 촉 법"인 것입니다.

지금부터 법이 살아나게 됩니다. 보이는 것 듣는 것이 다시 들리며

옛 사람들의 언구도 다시 이해하게 됩니다.

이때 나오는 소리는 경험에서 오기 때문에 조작이 없습니다.

자기도 알고 남도 알아 경험자들끼리는 서로 속일 수가 없게 됩니다.


법은 예나 지금이나 둘이 아닙니다.

중생과 부처가 서로 뚫려있어 아는 자끼리 알고 있으니

법을 전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법이어야 사람을 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 티끌이라도 법이란 것이 있다면 법이 못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게 이심전심입니다. 세존은 한 법도 세워본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법이 있는 걸로 아는 것은 중생이기 때문입니다.

법이 있는 이유는 중생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이걸 잘못 알면 법을 지키는 법의 노예가 됩니다.

그래서 세존은 법도 버리라고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전할 것이 있다고 불교를 믿으면 크게 그르치는 줄 알아야 합니다.

말을 덧붙이면 “법이란? 있다고 믿는 법이 없어 질 때를

곧 법을 믿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 현웅스님

 

김수환 추기경님의 감동을 주는글

김수환추기경


 

 

가슴 아파하지 말고
나누며 살다 가자.

버리고 비우면
또 채워지는 것이 있으리니
나누며 살다 가자.

누구를 미워도,
누구를 원망도 하지 말자.

 



화를 내지 마시라.
화내는 사람이
언제나 손해를 본다오.

화내는 자는

자기를 죽이고
남을 죽이며
아무도 가깝게 오지 않아서
늘 외롭고 쓸쓸하다오.

기도 하시라.
기도는
녹슨 쇳덩이도 녹이며
천년 암흑 동굴의
어둠을 없애는
한줄기 빛이라오.

주먹을 불끈 쥐기 보다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자가
더 강하다오.


 
사랑하시라.
소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에는
향기가 없다오.

진정한 사랑은
이해, 관용, 포용, 동화,
부드러운 대화,
자기 낮춤이 선행 된다오.

내가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데
육십년 걸렸다오.

사랑합니다.?
그리고
존경합니다.????

 

많이 가진다고
행복한 것도
적게 가졌다고
불행한 것도
아닌 세상살이...

재물 부자이면
걱정이 한 짐이요.
마음 부자이면
행복이 한 짐인 것을~

죽을 때 가지고 가는 것은
마음 닦는 것과
복 지은 것 뿐이라오.

 

누군가를 사랑하며
살아갈 날도
많지 않은데~

누군가에게 감사하며
살아갈 날도
많지 않은데~

남은 세월이 얼마나 된다고
가슴 아파하며
살지 말자.

 

버리고 비우면
또 채워지는 것이 있으니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다 가자.

웃는 연습을 생활화 하시라.
웃음은 만병의 예방약이며 치료약.
노인을 즐겁게 하고
동자(童子)로 만든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