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 대표적 선승 봉암사 적명 스님

2017. 5. 13. 22:1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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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 대표적 선승 봉암사 적명 스님


“불법대로만 살자”며
성철·청담 스님 등 결사한 지 70돌

그 절, 조실 자리도 존칭도 거부
그냥 선승을 일컫는 ‘수좌’로

왜 대중들을 멀리하느냐는 우문에
“법력 없는 게 문제지 어디 있든…”

깨달았는지 어떻게 아느냐는 질문엔
“확인할 길도, 의미도 없다”면서도

“지혜는 행동으로 표현되고
인품도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

돈오돈수-돈오점수 깨달음 논쟁
‘은사’뻘인 성철 스님과 대비

“막 금광에서 캐낸 금도 금이지만
단련하고 또 단련해서 순금 되는 것”


적명스님2-.jpg

희양산 봉암사는 경북 문경 가은읍 원북리 깊고 깊은 산골에 있다.
신라시대부터 수행처가 되지 않았으면 양산박 같은 도적의 소굴이 되었을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만큼 기가 세다는 곳이다.
해방 뒤 1947년 성철, 청담, 자운, 월산, 혜암, 성수, 법전 스님 등이 ‘불법대로만 살자’는
수행정진의 맹약 모임체인 ‘결사’를 한 곳이다.
조계종이 선을 종지로 삼도록 한 핵심 사찰인 셈이다. 따라서 봉암사는 조계종 유일한
종립특별수도원으로 지정돼 연중 산문을 폐쇄하고 1백여명의 선승들이 참선하며,
‘부처님 오신날’ 하루만 일반인들에게 개방된다.  올해는 ‘결사 70돌’이다.

 봉암사처럼 선승들이 모인 선방을 이끄는 정신적 스승을 ‘조실’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봉암사엔 조실이 없다. ‘도’란 종정이니 방장이니 조실이니 하는 그런 허명에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인가.
9년 전 봉암사 선승들이 적명 스님을 조실로 모셨지만, ‘나는 그럴 위치에 있지 않다’며
자리도 존칭도 거부했다. 그래서 그는 사실상 조실 구실을 하고 있지만,
그냥 선승을 일컫는 ‘수좌’로 불린다.

 그 ‘수좌’ 적명스님(78)을 만났다. 적명 스님은 세속적 명리를 거부한채 평생 토굴과
암자에서 수행정진해온 한국불교의 대표적 선승 중 한명으로 꼽힌다.
적명 스님이 일간지 인터뷰에 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적명스님3-.jpg

 “법문하는 중 그리 많은데 나까지…”
 적명 스님에게 먼저 ‘왜 조실에도 안 오르고, 대중들을 멀리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밖에 나가지 않는 것이지 여기서도 법문을 안 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대중 포교하고 법문하는 중이 그리 많은데 나까지 나설 게 있느냐”고 답했다.
그러면서 “요즘은 (컴퓨터와 모바일로) 천리만리 밖에서도 다 들을 수 있으니,
나가고 나가지 않는 게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법력이 없어 문제지 법력만 있으면 어디 가 있든 무슨 대수겠느냐는 것이다.

 그가 ‘말과 행’을 언급했으니,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물었다.
‘말로는 스승으로부터 견성(깨달음)을 인가받았다고도 하는 이들도 집착과 욕심에서
자유롭지 않고 행동으로 본을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무엇을 보고 깨달았는지 여부를 알 수가 있겠는가’라는 것이었다.
그는 “알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본인도 입증이 어려운데, 타인이 어떻게
겉모습을 보고 알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럼에도 답답할 세인들에 대한 방편법문을 잊지 않았다.
 “지견이나 지혜는 행동으로 표현되기 마련이다. 인품도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적명스님4-.jpg

 그러나 그는 “진정한 깨달음을 성취했는지, 거기에 몇 밀리가 부족한지는 확인할 길도 없고,
의미도 없다”고 말했다. 그런 ‘깨달음 논쟁’을 고타마 붓다가 ‘쓸데없는 논쟁’으로 치부한
희론쯤으로 내친 것이다.
이 점에서 ‘돈오돈수(한번 깨달으면 더 이상 닦을 필요가 없음)-돈오점수(깨달은 후에 더
닦아가야 함)’라는 깨달음(돈-점) 논쟁으로 일세를 풍미한 성철 스님과 그는 대비된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선가에서 ‘은사’뻘인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가 유일한 길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성철 스님도 돈오점수를 부인한 건 아니다. 보조 스님도 돈오돈수도 인정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드문 경우로 상근기만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는 불경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화엄경>에 나오는 ‘십신, 십주, 십행, 십회양, 십지,
등각, 묘각 등’의 단계를 가리키며,
 “막 금광에서 캐낸 금도 금인 것은 맞지만, 이를 단련하고 또 단련해서 순금이 되는 것”
이라고 설명했다. 불교적으로 보면 금을 캐는 것(깨달음)보다 제련하는 데 더 많은
수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선승들-.jpg » 동안거를 마친 봉암사의 선승들.

 화두 수행이 최선의 길’ 소신
 그는 오래전 토굴에 머물 때 프랑스 비구니가 와서 ‘그렇게 수행만 하는 것은 인생 허비 아니냐’
고 물었을 때 한 “왜 길고 큰 살림을 금생(이번 생)의 살림으로만 한정하느냐”고 답했다며
내용을 들려주었다.
 “성불해서 중생을 도울 지혜만 갖출 수 있게 된다면 천생 만생을 들이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다.
그때도 애타게 기다리는 고해 중생들이 있을 것이다. 남을 진정으로 도울 수 있는 힘을 갖출
수 있다면 무엇이 아깝겠느냐.”
 그는 산중에만 은거하면서도 세계적인 명상지도자인 아잔 브람이 봉암사에 와 청한 대담에
응할 만큼 ‘열린 선승’이다. 그런데도 ‘간화(화두)선’ 수행이 최선의 길이라는 소신이 확고하다.
이는 자신의 수행 체험에서 기인한다.
 제주 출신인 그는 20살에 ‘천진도인’으로 알려진 우화 스님에게 전남 나주 다보사로 출가했다.
그는 20대 초반 한 수행승의 지도로 ‘관세음보살’을 염불하며 관(觀)하는 수행을 했다.
훗날 대승경전인 <능엄경>에서 ‘수행 과정에 나타나는 마장들’이 당시 관수행 때의 체험과
너무나 유사해 놀랐다고 한다.
그는 “관수행을 통해 천상 천하 극락 지옥을 모두 생시보다 더 생생하게 보고, 굉장한 희열감에
사로잡힌 체험의 자부심 때문에 범어사 동산 스님이나 통도사 경봉 스님 등 선지식들이
‘그런 수행은 돌아가는 길이니, 화두선을 해야 한다’고 해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25살 때 토굴에서 정진할 당시 다 낡은 <법화경>과 보조국사의 <절요>가 손에 들어왔다.
 “몇 권은 사라지고 조각조각 남은 <법화경>을 눈물 흘리며 감동으로 읽었다.
<절요>는 앞뒤 몇 장도 떨어져 나갔는데 모두 한자인데 토도 안 달리고 띄어쓰기도 안 돼 있었다.
고등학교 때 일주일에 한 시간씩 배운 한문 실력으로 옥편을 찾아가며 3번을 읽었더니,
어느 정도 뜻이 들어왔다. 그 마지막에 ‘수행을 하려면 모름지기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는
글을 보고, ‘무(無)자’ 화두를 들기 시작했다.”

적명스님과 조현-.jpg » 적명스님과 조현기자.

 “100년 뒤 그리워할 대통령 뽑아야”
 그는 “이미 깨달음의 길에 들어섰다면, 물속에 떨어진 돌과 같이 끊임없이 한곳을 향해
갈 것이기 때문에, 깨달음에 목맬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선승들에게 ‘봉암사에 3년만 살면 이마에 수좌라는 도장을 찍어주마’라고 말하곤 했다.
10분, 20분이라도 화두 일념이 순일해지는 체험을 하게 되면, 그 뒤부터는 어느 곳을 가고
무슨 일을 하더라도 결코 향상하는 일로매진에서 벗어나지 않게 할 수 있다는 표현이다.
 그는 “수행의 궁극은 일체 중생과 털끝만큼의 차이도 없이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내 욕망이 줄면 타인과 만생명과도 하나가 되어 행복해진다”며
 “그런데 내 자식 가족에겐 그러면서 문 밖만 나가면 왜 그렇지 못하냐”고 물었다.
 그는 “바깥세상을 차단한 채 수행에만 집중하는 것이 중생의 고통에 무관심하라는 게
아니다”고 밝혔다.
 “깨달은 이는 세상을 영화처럼 여기기에 자유롭지만, 중생의 고통에도 그래선 안된다.
가령 타인이 악몽 속에서 강도를 만나 칼에 찔리고 죽어가며 고통에 신음할 때
‘저건 현실이 아니다’고 내버려둬야하느냐. 빨리 깨워서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지않겠는가.
 부처님도 중생의 고통은 환(헛것)일뿐이라고 하지않고 평생 구제하며 살지않았느냐”
 그는 현재 국정농단 사태와 관련해 “중생이 무지한 것은 탐욕이 행복의 길이라고 믿는 것”
이라며 “행복이란 욕심을 줄여 남을 돕고 배려하고 존중할 때 스며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선에 대해 “눈앞에것만 집착하면 잘 볼 수 없으므로 10년뒤 100년뒤를 생각하며
그때 그리워할만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아야 한다”고 말했다.

봉암사1-.jpg » 희양산 아래 봉암사 전경.
 
 보기 따라 바위산-흙산, 그래도 희양산
 그의 방을 나서니 희양산이 우뚝하다. 장날 괴산 사람들과 가은 사람들이 희양산의
생김새를 놓고 바위산이니 흙산이니 하고 다툰다는 그 산이다.
희양산은 가은에서 보면 바위산이지만 괴산에서 보면 영락없는 흙산이다.
관점도 시비도 여럿이지만 근본은 하나다.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때 7세기 지증 대사가 창건했다.
봉암산문을 나서니 적명 스님이 들려준 지증 대사의 선어가 귓전을 울린다.
 산문을 나서지 않던 지증 대사는 왕이 수차례나 청하자 도성에 갔으나 하룻밤만을 머물고
돌아와버렸다. 그 밤 도성의 호수에 비친 달을 보며 대사는 단 한마디만으로 이심전심의
 무차별 경계를 내보였다.
 “시즉시 여무언(是卽是 餘無言: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문경/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