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가장 위대한 자취 |
부처님 오신날은 인류 모두의 축제입니다. 부처님 오신날은 인류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날입니다. 부처님의 탄생과 성도는 인간 능력의 무한 가능성을 확인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참으로 나약한 존재였습니다. 나고 늙고 병들고 결국엔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 살아가는 과정에서 조차 행복한 삶을 보장받지 못한 채 상황이며 환경, 조건, 인연에 이끌려 잠시의 행복과 이어지는 잠시의 괴로움, 행복 불행 행복 불행... 그렇게 끊임없이 조건에 노예가 되어 살다가 죽어가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고작 추구한다는 행복조차 절대적이지 않은 잠시의 행복일 뿐 인생 전체를 행복으로 물들일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돈이며 명예, 권력, 지위, 배경, 학식, 이성, 학벌 등 살아가며 행복을 잡기 위해 이런 것들을 늘려 나가는데 혈안이 되어 있지만 그런 것들은 결코 우리에게 절대적인 행복을 가져다 주지는 못했습니다.
인간은 항상하는 것을 찾았지만 어디에도 항상하는 것은 없었으며(제행무 상) 죽지 않고 항상 고정되게 존재하는 ‘나’를 찾았지만 누구도 항상하지 못한 채 죽어가야 했고(제법무아) 끊임없이 행복하고 싶지만 괴로움(일체개고)이 우리 삶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렇게 나약한 존재들이 모여 자신보다 조금 더 나약한 존재들을 짓밟고 살아가며, 자신의 안위를 위해 자신보다 지능이 떨어지는 짐승들을 잡아먹으며 살아가 는 그야말로 본능과 이기가 난무한 인류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오신 뒤로는 이런 삶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의 탄생은 우리 인류에게 무한 가능성을 활짝 열어보여 주었습니다.
인간이 결코 나약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과,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절대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었습니다. 우리 존재 자체는 절대 무한의 생명을 부여받고 있음을 알려 준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인류에게 있어 너무나도 큰 전환이 된 것입니다.
괴로움의 삶에서 행복의 삶으로, 항상하지 않는 삶에서 항상하는 삶으로, 거짓된 어리석은 ‘나’에서 밝고 지혜로운 ‘참나’의 발견으로 인류를 안내해 준 것입니다.
그간의 인류를 거처갔던 그 어떤 위대한 인물이라도 고작 100년도 안되는 살아있는 동안의 행복을 추구해 왔습니다. 죽음에 대해서는 인간 능력 밖의 문제라 여기며 철저히 함묵하고 지내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인간의 가장 큰 괴로움을 도외시 한 채 작은 행복, 살아있는 동안의 행복만을 찾고자 아웅다웅해 왔으니 인류의 영원한 행복은 어쩌면 당연히 요원했을지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한 젊은 청년 고타마 싯다르타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내릴 수 없음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어찌 생각해 보면 인류가 가졌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 가장 기본적인 삶의 문제를 회피하고 있었음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역사 이래로 인류가 포기한 문제를 아니 도저히 문제일 수 조차 없을 인간 능력 밖의 문제, 모두가 신의 영역이라 생각했던 이 문제를 한 젊은 청년 고타마가 풀어 낸 것입니다.
그 문제를 풀고 보니 인간을 비롯한 사생육도의 모든 중생들은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그런 나약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아니 나약하지 않을 정도가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가 바로 신이며 부처이며 하늘이었습니다.
내가 곧 우주이며 하나가 곧 전체이고, 나의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무량수 무량광 한도 끝도 없는 무한생명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탄생게의 말씀을 살펴보면 그 의미가 더욱 가까워 질 것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 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하늘 위와 하늘아래 나 홀로 존귀하도다. 삼계가 모두 고통에 헤매이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 『수행본기경』상권, 「강신품」
먼저 ‘삼계개고 아당안지’를 보면 삼계의 모든 중생들이 나약하여 괴로워 함을 바로 깨달으시고는 일체 중생의 괴로움의 문제에서 풀고자 하는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또한 괴로움의 문제를 풀고자 하는 이유는 바로 일체 모든 중생들이 고통에서 헤매이기에 이 모든이를 안위케 하려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발심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인류 일체 모든 중생을 구제키 위해 당당하게 괴로움의 문제(생노병사)와 맞닥뜨려 그 문제를 풀고 나니 ‘천상천하 유아독존’임이 확연해 진 것입니다.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내가 홀로 존귀하다는 내용이지만 여기에서 ‘아(我)’는 일체의 모든 중생을 의미하며 독존(獨尊)이란 모든 존재는 존재 그 자체로서 이미 독존임을 나타내는 것 입니다.
다시말해 일체 모든 중생은 낱낱이 모두가 온전히 스스로 존귀함을 이르는 것입니다. 모두가 이 모습 그대로 독존이라는 것입니다. 물은 물대로, 자연은 자연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미물은 미물대로... 모든 존재가 그렇듯 스스로 온전히 존귀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외부에서 행복이며 자유를 구해 왔습니다. 돈이며 명예, 권력, 지위, 학식 등이 높으면 높을수록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하다고 여겨왔지만, 사실은 지금의 이 모습 그대로 우리는 누구나 독존이라는 것입니다. 결코 외부적인 여건에 따라 울고 웃는, 행복하고 괴로워하는 그런 종속적인 존재가 아닌 참으로 존귀한 삶의 주인공이라는 선언인 것입니다.
그로부터 인류는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새롭게 발견한 것입니다. 이제 인류는 하늘이며 우주나 바라문 신에 의해 지배받는 그런 종속적이고 나약한 존재가 아닌, 우리 안에 우주가 있고 세계가 있으며 진리가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 날입니다. 부처님오신날은 그런 밝은 날입니다. 이제 앞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보여주고 가신 부처님(佛)과 부처님의 가르침(法) 앞에 고개숙여 귀의하며 우리 모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청정하고 밝은 수행자(僧)가 되야 합니다. 그런 밝은 수행자가 되고자 크게 발심(發心)하는 날이 바로 오늘 부처님오신날인 것입니다.
길은 이미 밝게 열려 있습니다. 그 길이 바른 길임을 부처님께서 증명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가야할 길은 올곧게 펼쳐져 있는 길을 따라 퇴전함 없이 나아가는 일입니다. 그 길을 향해 늦추지 않고 정진 또 정진할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류가 해야 할 공통의 서원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밝은 날, 부처님 오신날 우리 생활수행자들이 나아가야 할 밝은 깨침의 길인 것입니다.
|
|
|
地藏大聖威神力 지장대성위신력
지장보살님의 위대하고 신통한 힘은
恒河沙劫說難盡 항하사겁설난진
억겁을 두고 설명해도 다하기 어렵나니
見聞瞻禮一念間 견문첨례일념간
보고 듣고 우러러 예배하는 잠깐 사이에
利益人天無量事 이익인천무량사
사람과 하늘에 이익 되는 일 헤아릴 수 없어라
살아있는 병풍 / 초의 선사 (草衣·1786~1866)
병풍은 남의 솜씨 빌어다가 그릴 필요 없어서
조화옹이 그린 그림 겹겹이 날로 쳐놓았네.
늘어선 산은 살아있는 채색 붓을 뽑아놨는가?
두 줄기 강은 부엌에 쓸 물로 길어가도 좋겠군.
밀물이 밀려오는 바다처럼 구름이 깔렸고
마르지 않고 촉촉한 길처럼 안개가 아늑하네.
사철 내내 활짝 펴서 걷어놓을 때가 없지만
화창한 봄날 차를 끓이는 화로 곁은 유독 다가오네.
奉和酉山
屛不願借人模(화병불원차인모)
千疊生陳造化圖(천첩생진조화도)
列岳疑抽生彩筆(열악의추생채필)
雙江可灌香廚(쌍강가읍관향주)
雲似海潮方進(운포사해조방진)
烟澹如塗潤未枯(연담여도윤미고)
張放四時無捲日(장방사시무권일)
春晴偏近煮茶爐(춘청편근자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