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空)의 모양을 설명할 때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다'라고 하여 '절대 청정'의 개념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일체 모든 존재의 본성, 인간의 본성은 더럽거나 깨끗하다는 분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해 우리의 본성, '참나 주인공'은 절대 청정성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청정'이라는 것은 더러움의 반대 개념으로서 청정이 아니라, 어느 것에도 비견될 수 없는 절대적인 청정성을 말합니다. 우리들이 흔히 깨끗하다, 더럽다고 하는 것은 상대적인 분별심일 뿐 입니 다.
우리는 어렵고 힘든 일을 할 때에는 작업복 을 입으며, 의례 옷이 더럽혀질 것을 알고 있기에 어느 정도 더러워지더라도 더럽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맞선을 보려고 티 하나 없이 깨끗한 양복을 입고 나갔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때에는 사뭇 상황이 달라지게 됩니다. 작은 잡티가 있어도 신경이 쓰이고, 더욱 더럽게 느껴지게 됩니다.
있는 그대로 본다면, 작업복을 입고 일을 할 때 훨씬 더 더러운 데도 양복을 입을 때 더욱 신경쓰이고 작은 더러움에도 당황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더럽다거나 깨끗하다는 것도 상황 따라, 인연 따라 더하고 덜한 마음의 분별이 있는 것이지, 본래 더럽고 깨끗한 고정됨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대상은 가만히 늘 그 자리에서 고요하지만 우리의 마음이 깨끗하다는 혹은 더럽다는 상을 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분별심일 뿐입니다.
일년에 한 두 번 정도 고등학생 불자들을 데 리고 수련대회를 다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에게 있어, 수련대회의 재미는 발우 공양에 있습니다. 사뭇 낯선 광경에 당황하는 이들이 꽤나 많습니다. 수련대회를 끝내며 설문조사를 하면, 가장 하기 싫은 것에 발우 공양이 들어있는 것을 보고 의아한 마음에, 학생들에게 왜 싫은가를 물어 보았습니다.
한마디로 '더럽다'는 것입니다. 음식 찌꺼기를, 김치를 휘휘 둘러 숭늉으로 씻고는, 다시 마시는 것에 대해 더럽다고 하는 상을 짓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몸 안으로 들어가면 다 똑같은 음식일 뿐입니다. 그러나, 밥상을 차려 놓고 밥을 먹고 나서 김치를 먹고, 그리고 숭늉을 마시면 깨끗하고, 이것을 발우에 놓고 함께 먹으면 더럽다는 것입니다.
다만, 시간적으로 선후가 정해지면 깨끗하 고, 함께 먹으면 더럽다는 것이라면, 이것은 우리의 분별심이지, 실제로 더럽고 깨끗함이 있는 것은 아닙니 다. 학생들 중에도 물론 발우 공양에 대해 부담이 없는 이도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몇 번씩 해 본 이들입니다. 이 학생들은 몇 번 직접 해보았고, 실제로 더럽다는 마음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불구부정의 도리를 알기에 맘 편히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을 바꾸면 더러운 것도 이렇듯 깨끗해지 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무언가를 판단할 때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는 상대적인 분별심이 있기에, 더럽고 깨끗하다는 분별도 있는 것입니다. 더럽다고 했을 때 그것은 상대적으로 다른 것에 비해서 더러운 것이고, 깨끗한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나아가, 이러한 더럽고 깨끗한 가치의 분별 은 좀 더 넓게 확대하여 해석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불구부정이란 공성의 이해는, 어떤 사물에만 깨끗하고 더러운 것이 있다고 분별하는 것을 없애려는 사상이 아니라, 사람의 인품이라든가, 인종, 학력, 재산, 명예 등에 있어서도 불구부정임을 올바로 깨달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대할 때 순수하게 다가서기 보다는, 온갖 편견의 색안경을 쓰고 다가서게 마련입니다. 인간의 가치를 출신 성분이나, 사회적 신분, 재산의 유무, 학력의 고저 등에 의해 판단하고 있는 현실 말입니다.
그러나, 본래 태어나면서부터 못나고 잘난 것이 어디 있을 수 있으며, 청정하고 더러운 사람이 어떻게 나뉘어 질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공의 바탕, 연기법의 바탕에서는 스스로 존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본래 더럽다거나 청정한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이 사상이야말로 영원하고 절대적인 인간 청정성의 회복이며, 인간 무죄의 엄숙한 선언인 것입니다.
존재의 본성, 인간의 본성, '참나'는 더러워질래야 더러워질 수 없는 절대 청정한 것입니다. 다만 현실에서 행위를 어떻게 하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인연가합(因緣加合)으로 잠시동안 귀천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 또한 우리들이 신기루와 같고 환영과 같 은 인연가합의 존재에 집착하여 고정짓고 모양을 짓기 때문에 생겨나는 어리석은 분별심의 결과인 것입니다.
구정, 생멸, 장단, 미추, 고저, 증감, 선 악... 이 모든 양 극단의 관념이란 잠시 인연따라 생겨난 가합상에 불과합니다. 꿈과 같아, 제각각 무아(無我)이며 무상(無常)한 속에 우리들이 생명을 불어넣고 모양을 지어 분별심을 일으키고 고정화 시키게 되니 그때부터 극단에서부터 오는 괴로움이 시작되는 것입니 다.
모든 양 극단의 분별을 놓아버리게 되면 그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맑고 고요한 정견(正見)의 시야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본래 맑고 청정하여 어디에도 걸림이 없고 집착이 없는 절대 청정 부처님의 맑은땅, 정토가 내 앞에 열리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숫타니파타에서 다름과 같이 설하고 계십니다.
출생에 의해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 고, 출생에 의해 바라문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 행위에 의해서 천한 사람이 되고 바라문도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