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無爲) 무위의 행, 함이 없이 하는 행, 머무는 바 없는 행, 집착 없는 행을 일러 무위의 행이라 한다.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 얼마나 무위로써 할 수 있는가 얼마나 무위로써 행해 왔는가 하는 점이 바로 수행자의 행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본보기다.
그러나 무위로써 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보통 사람들은 무위라고 하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인 줄로 알고, 제법무아요, 오온개공이라고 하니까 아무것도 없으니 허무주의가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위의 행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하되 함이 없이 하라는 의미다.
행을 하되 그 행에 대한 그 어떤 집착도 없어야 한다는 말이며, 행을 하고 나서 했다는 상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고, 그 어떤 흔적이나 그림자를 남기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이 그리 쉬운 문제는 아니다. 우리 삶에서 가장 무위에 가까운 행이 어떤 것인가 가장 수행자다운 사람이 행할 수 있는 행이 어떤 것인가 바로 그것을 살펴보는 작업은 현실 생활의 방편에 있어 매우 의미있는 작업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생각하기에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의 자리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몫을 행하는 일, 그래서 온전히 '자기답게' 사는 일이야말로 일상 생활 속에서의 무위를 올곧게 실천해 내는 일이 아닐까 싶다.
가장 나다운 일이야말로 가장 진리다운 일이요, 무위의 행에 가깝지 않을까.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삶의 목적이 있고 몫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리고 그 목적은 제각기 다를 수 밖에 없다. 다르기 때문에 모두들 생김새도 다르고, 능력도, 특기도, 재능도, 좋아하는 분야도 다 다른 것 아닌가.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다르게 생겼고 저마다의 능력 재능 특기 취미가 다른 것은 저마다의 몫이, 저마다의 인생의 목적이 다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세상에 자기 자신과 똑같은 이는 오직 자기 자신 하나 뿐이다.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나와 같은 이는 찾을 수 없다. 그것은 곧 이 세상에서 '나만이' 할 수 있는 나의 길, 나의 몫, 내 인생의 목적이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자신의 길을 걷는 것이야말로 나로써 피어나는 진리를 꽃피워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진리에 이르는 방편은 팔만사천가지가 있다고 했는데, 팔만사천이라는 것은 상징일 뿐이고, 모든 존재의 숫자만큼 무한히 많은 방편의 길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깨달음도 모두 똑같은 길로만 다다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재각기 자기 자신의 삶이 있고 진리가 있으므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길도 존재의 숫자만큼 많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그 어떤 것도 고정짓지 않지 않는가. 그 어떤 수행법도 절대시하는 일이 없다. 그 어떤 진리도 절대시하여 이것만이 절대불변의 것이란 고집이 없다. 그 어떤 것에도, 그 어떤 방편에도 활짝 열려 있다.
이처럼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무이한 진리의 표현이다. 진리가 '나'로써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로써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불교에서는 두두물물이 산하대지가 그대로 법신이요, 일체 모든 존재가 그대로 부처라고 하지 않았는가. '나'로써 드러난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우린 이미 부처요 법신이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부처님처럼 살기를 바란다거나 어떤 높은 수행력을 가진 스님처럼 살기를 바라는 분이 아니라, 바로 법계에서 보내 준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현실에서 고스란히 꽃피워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분이시다.
부처님의 유일한 바램은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써 독자적이고 창의적으로 살아감으로써 진리를 자기 자신의 방식으로 꽃피워내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지금의 나 자신이 바로 부처님의 법신이라는 점. 다른 모습이 아닌 바로 '지금 이 모습 그대로의 나'야말로 가장 온전한 부처님의 모습이라는 점을 말이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를 너무 얕잡아 보고 있다. '어찌 내가 부처란 말인가' '어떻게 내가 완전한 존재란 말인가' '나는 어리석고 무지한 중생일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그렇게 생각하는 견해가 굳어질수록 우리는 점점 더 어리석은 중생이 되어갈 수 밖에 없다. 내 스스로 어리석고 나약한 중생이라고 믿는다면 우주법계는 그러한 내 생각에 힘을 실어 줄 것이지만, 내 스스로 완전한 깨달음을 구족한 부처라고 믿는다면 우주법계에서는 그러한 밝고 원만한 믿음에 힘을 실어 줄 것이다.
과연 어떤 존재로 남을 것인가. 자기 자신이야말로 가장 온전한 진리의 모습임을 기억하라.
사람들은 저마다 즐거워하는 일이 다르다. 삶의 주 관심사가 모두 다 제각각이다. 저마다 '자기다운' 어떤 일에 끌린다. 그리고 그 일을 할 때 가장 행복감을 느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자기다운' 일이야말로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 나온 진리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자기답게 자기다운 일'을 행하는 것이야말로 진리를 내 방식대로 꽃피워낼 수 있는 방법이다.
남들이 모두 저 길을 간다고 너도 나도 그 길을 따라 갈 필요는 없다. 저 길이 돈도 벌기 쉽고, 쉽게 살 수 있는 방법이라고 모든 사람들이 다 그 길을 갈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대사회의 큰 폐단은 모든 사람을 획일화시키면서 똑같은 길을 걷도록 강요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돈 버는 길, 유명세를 타는 일, 그런 외길을 모두에게 강요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길을 가고자 한다면 모두가 똑같은 길을 가야만 한다. 모두가 똑같이 시험에, 대학에, 취직에 목숨을 걸어야 하고, 모두가 똑같은 과목을 공부하고 똑같이 영어에 목숨을 걸어야 하고, 똑같이 대기업이며 공무원, 고시 준비를 향해 내달려야 한다.
자기 자신다운 독창성과 창의성은 지금의 세상에서는 별로 필요치 않다. 사회에서 정해 놓은 '성공의 길'을 얼마만큼 잘 규격에 맞춰 따라갈 수 있는가 하는 점이 요즘 사회에서 성공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어 버렸다.
자기답게 사는 것은 사회에서 소외될 뿐이다. 저마다 세상에 나올 때부터 이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나 자신의 길을 부여받고 왔으며, 나 자신의 삶을 나답게 살아 나갈 수 있도록 주어졌건만 정작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나다운 삶은 오히려 소외와 왕따와 실패를 가져올 뿐이다.
그러나 진리의 길을 걷고자 하는가. 진리의 길은 이 세상과 거꾸로 가는 길이다. 세상에서는 욕심과 집착과 이기와 소유를 키우라고 하지만 진리에서는 그 모든 것을 비우라고 말한다.
거꾸로 가는 길, 세상에서 만들어 놓은 대로 획일적인 길을 걷는 길이 아닌 나답게 나 자신의 길을 걷는 길, 그것이야말로 가장 진리다운 발걸음이다.
나다운 일이란 어떤 일인가. 내가 그 일을 했을 때 가장 행복한 일이다. 가장 끌리는 일이기도 하고, 가장 내 능력을 잘 드러낼 수 있는 길이기도 하며,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길, 바로 그 길이다.
모든 사람에게 '나다운 일'은 다를 수 밖에 없다. 어떤 사람은 집 짓는 일에 마음이 끌리고, 또 어떤 사람은 연구하는 일에 마음이 끌리며, 또 어떤 사람은 음악을 작곡하는 일에, 그림을 그리는 일, 사진을 찍는 일, 글을 쓰는 일, 농사를 짓는 일, 나무를 조각하는 일 등 저마다 자신이 '그 일을 하면 행복한' 일이 있게 마련이다.
그것은 일종의 상징이며 신호이기도 하다. 내 안의 진리에서 보내는 신호. 물론 그것을 아직 발견하지 못한 사람도 있겠지만 분명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면 저마다의 '자기다운 일'을 발견해 낼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은 내 밖의 것들에만 관심을 가지며, 항상 생각하고 계획하고 분별하며 욕심내는 등 끊임없이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다. 그 때문에 '자기다운 일'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기다운 일'을 발견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나로써 피어나는 진리의 일'을 발견하는 일인데, 그것은 바로 '마음을 비우고 집중하며 비추는' 명상과 수행을 통해 조금 더 빨리 알게 될 수 있다.
'자기다운 일'을 행하고 있을 때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다. 가장 자신 있는 일이며, 그 일을 했을 때 가장 즐겁고 유쾌한 일이고,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일이기 때문에 그 일을 할 때는 힘들어도 힘든 줄 모른다.
밤 새 일을 하더라도 시간 가는 줄 모를 수도 있다. 그것은 누가 억지로 시키지 않더라도 자기 스스로 즐거워서 하는 일이다. 그 일을 할 때 가장 깊은 집중을 이루어 낼 수 있다. 그런 일에서는 쉽게 '일 삼매'에 들곤 한다.
그런 일 삼매에 들었을 때, '자기다운 일'을 하고 있을 때, 그 때 그 어떤 괴로움도 없고, 지루함도 없으며,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어떤 인위적인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그런 '내가 나 자신이 되는 일'을 할 때는 억지스런 노력과 애씀도 없고 자연스럽고 깊은 삼매 속에서 일을 행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바로 무위다.
무위의 행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내가 나 자신답게 내 일'을 하는 것, 그것은 나에게 오히려 휴식을 가져다 준다.
억지로 하기 싫은 일을 할때 우리 마음은 억눌리고 괴로우며 에너지는 고갈되고 만다. 그러나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자기다운 일'을 할 때, 그 때는 오히려 일을 하면 할수록 내 안의 에너지는 생기롭게 피어나고 충전이 되곤 한다.
그것이 바로 무위로써 하는 행의 모습이다. 그것이 바로 행하되 행함이 없는 행이 되는 것이다.
'자기다운 일'에 집중해 있을 때는 '자기'를 잃는다. '나'라는 모든 상에서 벗어난 채 오직 깊은 집중 상태에 있다. 바로 그런 상태야말로 내가 나답게 깨어있을 수 있는 일 삼매의 순간이며, 내가 나로써 피어나는 진리를 마음껏 드러내는 순간이다.
그 때 내 안에 진리가 깃든다. 내 삶의 목적을 온전히 달성해 내는 순간이 된다. 또한 '내가 나다운 일'을 행할 때 이 우주 법계는 그 일을 위해 최선의 힘으로 도움을 준다. 그것이 바로 '진리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듯 진리의 일은 저마다 '자기 자신의 일'을 온전히 행할 때 이루어진다.
그래서 '자기답게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것이 곧 수행의 길이요, 자기를 깨닫는 길이며, 이 우주 법계에 큰 도움을 주는 길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억지로 떠맡은 일을 하지 말고 '나다운 일'을 하라.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려면 지금까지 내가 하던 것을 그만둬야 할 지 모르고, 그랬을 때 월급도 지위도 다 포기해야 할 지 모른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돈 벌어야 하니까, 생계를 유지해야 하니까, 살아가야 하니까 억지로 행하고 있는 일이라면 그 일을 하면서도 생기가 없고 행복이 없고 무언가 나를 성장시키는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없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내 안에서 정말 하고 싶은 일, '나다움을 드러낼 수 있는 일'을 행하려고 마음을 먹고 시작한다면 그것은 곧 우주 법계의 힘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하고 망설이며, '아무래도 내게는 어려운 일이야' 하고 의심한다면 그러한 의심스런 내 나약한 믿음만큼만 우주 법계는 도와줄 것이지만, '분명 할 수 있다'는 온전한 믿음을 가진다면 그 완전한 믿음만큼 우주 법계는 도움을 줄 것이다.
우주 법계는 우리의 마음에 따라 에너지를 이동시킬 뿐이다. '자기다운 일'의 위대함을 굳게 믿고 행하는 이에게는 그 믿는 만큼 법계의 에너지를 가져다 주지만, 믿지 못하고 의심하며 작은 정신을 소유한 자에게는 딱 그만큼만 법계의 힘을 보내줄 뿐이다.
그래서 그릇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그릇이 크다면 우주 법계에서 내리는 한없는 법의 비를 무한히 담을 수 있지만, 그릇이 작다면 법의 비가 아무리 많이 온들 그 크기만큼만 담고 나머지는 흘러내릴 뿐인 것이다.
나 또한 글을 쓰다보면 때때로 느끼게 되는 것이 있다. '언제까지 어떤 주제의 글을 어디로 제출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으면, 그것도 잘 써 줘야한다는 당부가 심할 때면, 그것은 '글 쓰는 일'이 되고 만다.
그렇게 '글 쓰는 일'을 하다보면 자꾸만 인위적인 노력이 개입되는 것을 느낀다. 쓰다가 자꾸만 지우게 되고, 언뜻 생각이 나지도 않으며, 글 쓰는 일이 그렇게 부담스럽고 힘겨운 일이 된다.
그러나 어느 날 숲 길을 걷다가, 혹은 새벽 별을 보다가, 그도 아니면 어떤 상황이나 경계를 만나 문득 깨달아지는 어떤 것이 있을 때 자연스럽게 글을 쓰게 되면 아무리 긴 글이라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글을 쓰게 되기도 한다.
그렇듯 어떤 영감이 번뜩하여 저절로 글이 써질 때 그 때는 아무 노력도 들이지 않고 아무런 애씀도 없이 글이 쓰여진다.
그랬을 때가 참된 무위의 글쓰기가 아닐까. 예전 같으면 매일 한 편씩 글을 써야지 하고 정해 놓으니 글쓰기가 어떤 '글 쓰는 일'이 되었지만 이제는 그런 억지스런 글쓰기를 하지 않는다.
저절로 쓰여질 때 그 때 글쓰기에 내 몸을 맡긴다. 그러면 인연따라 내가 사라진 채 법계에 도움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법계에서 필요한 글을 쓰게되는 것을 느낀다.
그 때 나는 없다. 내가 글을 쓴다는 생각이 없다. 나는 단지 중간자 역할을 할 뿐이다. 법계가 필요한 일을 나라는 몸뚱이를 빌어 법계에서 행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나 없는 나'로써, 무위의 나로써, '가장 나다운 나'의 모습이 아닐까. 글을 쓸 때 나는 가장 나다운 것을 느낀다. 나답다는 것은 다시말하면 내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나를 잊고 글쓰기 그 자체에 몰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듯 내가 나다운 것을 할 때 나는 행복하고 편하다. 아니 행복하고 편하다는 그 생각도 없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중을 하고 한다. 그 때 그 어떤 노력도 필요치 않다.
그렇듯 나다울 때는 모든 것이 저절로,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나는 다만 그 흐름에 들어 몸을 맡기면 그만이다.
이처럼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 자기 자신다운 어떤 모습이 있다. 그것이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온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자신이 살아가야 할 삶의 몫이요 삶의 목적이다.
과연 나는 자기다운 일을 하고 있는가. 그 일을 할 때 나는 평화로운가. 나를 잊는가.
행여 억지로 그 일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 일을 어쩔 수 없이 행하면서 마음 속으로는 다른 어떤 일을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다른 것을 꿈꾸지만 내가 과연 그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포기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바로 지금이 저질러야 할 때다. 생각만으로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저질르고 행동하는 것 만이 나를 나답게 해 주며 이 우주 법계에서 응답을 해 준다.
자기 자신이야말로 바로 완전한 부처라는 것을 믿는다면, 내가 가장 나다운 것을 행할 때 우주 법계는 완전한 도움을 준다는 것을 믿는다면, 바로 지금 '나다운 일'을 저질러 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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