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7. 8. 20:00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
모든 사람이 부자를 꿈꾼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부자가 되는 길에 완전히 목숨을 걸었지 싶다. 그러다보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직 그 목적이요 결과인 경제적 부유함만을 쫓아 쉴 새 없이 뛰고 또 뛰고 있다. 그 부자를 향한 질주는 좀처럼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 속도감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렇게 달리고 있다 보니 많은 사람들에게 이제는 그렇게 달리는 것이 더 편안하다. 뛰고 또 뛰어야 안심이 되고, 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다른 사람들에게 뒤쳐질 것이고, 나는 곧 이 세상에서 낙오자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런 불안감과 위기감 속에 되지 못한 부자를 마음속에 품으며 불행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부유함, 그 하나를 쟁취해 내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잃고 있는가.
수많은 구도자들은 현대인들에게 수없이 말해왔다. 욕망을 버리라. 소유를 버리라. 부유함을 버리고 가난을 택하라. 물론 그럼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을 죄의식에 얽매이게 했다. 그러나 그것은 현대인들이 너무 부유함, 소유, 욕망에만 얽매이기 때문에 균형을 맞춰주기 위해 다른 한 쪽을 강조한 것이다. 바로 그 점을 우리는 잘 살필 수 있어야 한다.
현대인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부자 되는 길에 나는 전적으로 반대하고 싶지는 않다. 또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부를 향한 속도전이 좀처럼 멈출 것 같지도 않다. 그러니 그것을 반대함으로써 모든 사람을 죄의식에 휩싸이게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부유함을 버리고 가난해 지라는 말이 아니다. 너도 나도 직장을 버리고, 가진 재산을 다 버리고 시골로 들어가라는 말은 아니다. 부자가 되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 물론 청빈하게 살고 싶다면 그것도 좋다. 다만 부자로 살든 가난하게 살든 중요한 것은 그 어느 한 쪽의 극단에 치우치지 않음으로써, 집착하지 않고 그 길을 걸음으로써 참으로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스승들이 부를 쫓지 말라고 한 이유는 현대인들이 너무 부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 우리는, 지금 이 사회는 부에 너무 광적으로 집착하고 있다. 그러나 부유함에 악착같이 집착해야지만 돈을 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부자가 되어야지만 잘 사는 길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부자가 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잘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물론 잘 사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또 사람에 따라 잘 사는 방법이 다를 수도 있고, 종교에 따라, 가치관에 따라 나름대로의 잘 사는 방법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현대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획일화되어 가고 있다. 학교 공부도 똑같은 과목에 똑같은 것을 공부해야 하고, 똑같이 일류대학 가는 것이 목적이 되고, 사회에서도 똑같이 대기업 취직이나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것이 목적이다. 그런데 그 최종의 목적지에 무엇이 있는가. 바로 부(富)가 있다. 부자가 되기 위해 공부도 하고 취직도 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사람들은 부가 목적이 아니라 행복이 목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조금만 눈여겨 이 세상의 흐름을 돌이켜보면 금방 자신도 깜짝 놀라고 말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행복하기 위해 돈을 벌었지만 이제는 가치가 전도되어 모든 것이 돈을 벌기 위한 것으로 귀결되고 있는 듯 하다.
가족이 행복하게 잘 살기 위해 돈을 벌지만 무슨 투자니 재테크니 복권 등으로 대박이 나는 순간 돈에 눈이 멀어 이혼을 하거나, 심지어 가족끼리 서로를 살해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는 세상이라니 이 얼마나 가치가 전도된 일인가. 가치가 뒤바뀌면 안 된다. 온전하고 지혜로운 삶의 원칙에 마음의 중심을 세울 수 있어야 한다. 오직 돈을 위한 돈, 부자를 위한 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부자가 모두의 꿈이겠지만 부자 그 자체가 목적이기 위한 꿈이 아니지 않은가. 부자가 됨으로써 좀 더 행복하게 잘 살고자 함이 본질이지 않은가. 그렇기에 부자가 되는 것을 막고자 함이 아니라 부자가 되고자 했던 삶의 본질, 근본이 무엇이었는가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잘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잘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자로 살되 지혜로운 삶의 원칙을 놓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앞서 말했듯이 먼저 집착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돈을 벌되 그 돈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다면 부유함 속에 정말 잘 사는 길이 있는 것이다. 부에 집착하지 않으면, 더 벌더라도 혹 더 못 벌더라도 괜찮고, 사업이 좀 실패를 해도 성공을 해도 괜찮으며, 현재 있는 재산을 자유로이 불우한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더라도 괴롭지 않다. 집착이 없는 지혜로운 부자에게 있어 돈이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전적으로 나를 나일 수 있게 해 주는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이다. 있으면 있는 대로 나눌 수 있고 사회를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으니 좋고, 없으면 없는 대로 절약하며 만족하고 살면 되니 그것도 좋은 것이다. 그런 정말 잘 사는 부자에게 재산은 그리 큰 의미가 아니다. 돈 보다는 삶 그 자체가 중요하며 존재 그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소유가 많은 부자가 되기 보다는 만족이 많은 부자가 되라. 더 많이 소유하기 보다는 더 많이 존재하며, 더 빨리 달리기 보다는 더 많이 멈추라. 참된 행복이란, 정말 잘 사는 길이란 소유가 많은 것이 아니라 만족이 많은 것이며, 채움이 많기 보다는 비움과 나눔이 많은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광적으로 달려 온 부를 향한 속도를 늦춰야 한다. 잠시 멈춰 설 수 있어야 한다. 멈춰 서야 비로소 보지 못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얼마 전 직장을 중간에 그만 두게 된 한 가족이 있었는데 다들 퇴직을 걱정하는데 오히려 그 가족은 더 큰 것을 얻었다고 했다. 아내는 내 남편이 이런 사람이었는지 처음 알았다고 고백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났더니 아이들과 놀아주고 학교생활도 묻고 아내에게 사소한 관심을 보이더라는 것이다. 또 남편은 가족의 따뜻함과 사랑스러움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했다. 처음으로 가족이 여행도 떠나고 등산도 다닌다고 좋아했다. 그동안은 오직 직장과 일 밖에 모르던 사람이 이제 비로소 작지만 정말 중요한 것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런 깨달음을 위해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지금 이 자리에서 한생각 돌이킴으로 인해 작지만 소박한 행복에 눈 뜰 수 있다.
이렇듯 부자를 향한 우리의 질주를 멈출 때 비로소 나 자신의 본연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 곁의 가족들에게도, 이웃들에게도 눈을 돌릴 수 있게 되고, 좀 더 가난한 이들을 향한 자비의 마음도 꽃처럼 피어난다. 그 뿐 아니라 대자연의 고요함과 경이로움 그리고 지혜에 눈 뜨게 되며, 내면의 깊은 존재 본연의 세계에도 눈을 돌리게 된다.
단순히 돈 많은 부자가 되지는 말라. 마음이 부유한 참된 부자가 되라. 참으로 잘 사는 부자가 되라. 못 사는 부자가 되지는 말라. 지금 이 세상에는 못사는 부자가 얼마나 많은가. 돈이 많지만 마음이 가난한 부자, 베풂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부자, 아직도 벌어야 할 것이 너무 많은 부족한 부자, 마음을 비우지 못한 부자, 가족의 행복을 부유함 아래에 두는 부자, 꽁꽁 묶어두고 내보내지 못하는 부자, 있다고 펑펑 써대는 부자, 마음에 여유와 평화가 없는 부자, 기도와 명상과 고요한 사색이 없는 부자, 대자연의 경이로움에 눈뜨지 못한 부자, 그런 부자가 되지는 말라.
돈은 없어도 마음이 풍요로운 부자, 이웃과 나눌 줄 아는 부자, 아끼고 절약할 줄 아는 부자, 마음에 평온과 여유가 있는 부자, 마음을 비우고 때때로 마음을 닦아가는 부자, 부유함이 언젠가는 떠나갈 것을 아는 부자, 돈과 재물에 집착하지 않는 부자, 기도와 명상으로 깨어있는 부자, 오직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부자, 그런 부자가 되라.
[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 서문
바람이 좋다. 햇살이 따스하다. 아래지방에 한 며칠 다녀왔더니 절 풍경이 완전히 바뀌어 있다. 불과 며칠 만에 뒷산 앙상하던 가지가 일제히 연초록의 잎을 틔우고, 절 앞마당에 매화며 벚꽃, 개나리, 진달래, 앵두꽃도 한창이다. 요즘 같은 때는 하루가 다르게 숲 색이 바뀌다 보니 내 눈도 내 마음도 더없이 설레고 생기롭다. 숲의 생명들을 스치운 맑은 바람이 진한 숲향을 품고 내게 봄소식을 전해줄 때 내 마음에도 투명한 꽃이 피어오를 것만 같다.
아침 산책길에 난 잠시 숲 속 마음이 가 닿는 곳에서 잠시 눈을 감고 서 있곤 한다. 가만히 눈을 감고 서서 귀와 코와 몸의 감촉을 활짝 열어놓고 숲이 보내는 신선한 소식을 듣고 온몸의 감각을 느낀다. 그렇게 한동안 감각을 예민하게 일깨웠다가 눈을 뜨면, ‘아, 좋다!’ 하는 소리가 저절로 꽃망울 터지듯 입가에서 흘러나온다.
참 행복하다. 참 평화롭다. 때때로 바쁘고 정신없는 일들이 있더라도 잠시 숲을 찾거나, 잠시 앉아 호흡을 바라보면 이내 마음은 평온을 되찾는다. 언젠가부터 이런 행복한 세상에 깊이 깊이 감사하는 습관 같은 것이 생겼다. 삶이란 얼마나 풍요로운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누구에게나 삶은 풍요롭다. 이 세상은 늘 경이에 넘치는 곳이며 모든 생명은 한없는 축복 속에 살고 있다. 마음에 스스로 붙잡고 있는 것을 잠시 놓아두고 세상을 향해, 자연을 향해 감각을 열어 놓는다면 누구나 이러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아니 누구에게나 행복은 존재의 가장 기본적인 삶의 방식이다. 우린 누구나 행복하게 잘 살기 위해 태어났다. 이 우주의 원만한 풍요를 누리며 살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 어느 누구도 괴롭힘을 당하면서, 가난에 얽매이면서, 불행하고 억척스런 삶을 살도록 태어나지는 않았다.
이 우주 법계는 언제나 모든 존재에게 온전한 사랑과 자비를 선사해 주고 있다. 다만 그 선물을 받고 받지 못하고, 또 느끼고 느끼지 못하고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애초부터 불행을 선물 받은 사람은 없다. 심지어 태어날 때부터 괴로운 삶을 부여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영겁에 걸친 생의 조화와 균형에 있어서 더 행복한 삶을 위해 내 스스로 선택한 것이고, 우주에서는 그 선택을 존중해 준 것일 뿐이다. 그것 또한 보다 더 넓은 관점에서 본다면 행복이요 평화로운 삶의 방식의 일부다.
그렇기에 우리가 할 일이란 우주에서 선사해 준 풍요를 마음껏 누리고 사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행복하게 참으로 잘 사는 길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스스로 그 풍요의 길을 걷어차고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누구나 풍요로웠지만 그것보다 더 큰 풍요를 원하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나 다 구족되어 있는 행복을 버리고 다른 사람보다 더 큰 행복을 바라기 시작했다. 나와 너라는 차별이 없는 평등의 세상에서 상대보다 더 윗자리를 차지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본연의 행복은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는 현대인들 대부분이 그런 삶을 쫓고 있다. 남들보다 더 부자가 되길 꿈꾸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길 꿈꾸며, 더 많이 벌어 더 많이 먹고 쓰는 쪽을 선택했다. 그러다보니 너도나도 소유를 늘리는 것만이, 부자가 되는 것만이 유일한 행복일 것이라 생각한다. 이미 본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원만구족한 행복은 이제 더 이상 행복이 아니다. 그것은 부족이고 결핍이다. 그것으로는 모자라다. 더 많아져야 한다. 이런 생각들이 현대인 모두에게 보편적인 삶의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면서 자연과도 멀어지고, 사람과도 멀어지고, 행복과도 멀어지고, 풍요와도 평화와도 고요와도 멀어지게 되었다. 모든 것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행복이란 말이 낯설다. 풍요라는 말보다는 부자라는 말이 더 가슴을 뛰게 한다. 아무리 벌어도, 아무리 축적해도 여전히 만족할 수 없다. 여전히 가난하고 부족하다. 그런 인류의 착각이 이 세상을 한없이 부족한 곳으로 만들어 놓았고, 한없이 풍요롭던 이 땅을 결핍과 굶주림과 전쟁과 기아로 얼룩지게 만들어 놓았다. 그러면서 땅도 죽어가고, 숲도 죽어가고, 생명도, 사람도, 정신도 죽어가고 있다. 사람의 마음이 이젠 본연의 평화, 풍요, 행복과는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버렸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의 욕망과 집착과 이기,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이 우주는 여전히 우리를 한없는 사랑으로 자비로 품고 있다. 진리의 세계에서는 단 한 순간도 우주의 풍요를 빼앗은 적이 없다. 인간이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파괴시켜 놓은 이 지구별은 그러나 여전히 풍요와 평화로 가득하다. 지구가 죽어가고 있고, 환경이 파괴되며, 인간성이 상실되고, 전쟁과 기아와 죽음과 빈익빈 부익부와 차별로 지옥처럼 변하고 있다는 것은 사람들의 어리석은 생각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에게 지구는 그런 곳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생각 돌이켜 ‘있는 그대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지혜를 가지게 되면 그 순간 본래의 평화로운 별 지구가 천상의 뜰처럼 다가올 수 있다.
문제는 가난이 아니다. 문제는 세상에 있지 않다. 지구가 문제인 것도 아니고, 경제가 문제인 것도 아니며, 나라가 문제인 것도 아니다. 문제는 내 스스로 그 문제를 만들어 냈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스스로 만들어 낸 수많은 문제들을 다시 거두어들이기만 하면, 아니 더 쉬운 말로 그냥 놓아버리기만 하면 모든 것은 제자리를 찾는다. 이 지구와 우주의 본연의 풍요와 고요가 당장에 눈앞에 현전한다. 깨달음도 그렇지 않은가. 중생이 어리석음을 없애고 없는 깨달음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은 이미 깨달아 있기 때문에 본래 부처였음을 다만 바로 보면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의 문제며, 괴로움도 그것을 없애고 새롭게 행복과 부를 만들어 낼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원만하게 있던 풍요를 되찾으면 되는 것이다.
애써서 돈을 벌어서 될 문제가 아니다. 부자가 되고, 명예와 권력을 찾고, 소유와 욕망을 충족시켜서 될 문제가 아니다. 왜 너도나도 부자되는 좁은 길을 싸워가며 먼저 도달해야만 하는가. 다만 지금 이 자리에서 온전한 행복과 평화를 누리면 된다. 부자가 될 것이 아니라 풍요를 누리기만 하면 된다. 물론 이렇게 말해도 ‘도대체 어떻게 누리라는 것인가’ 하고 물을 것이다.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의문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부자가 되기보다는 풍요롭게 잘 사는 방법을 선택한 사람들, 더 많이 소유하기 보다는 더 많이 삶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행복과 평화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들, 스님들처럼 다 버리고 출가할 수는 없지만 버리지 않고도 현실 속에서 구도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 몸과 마음의 건강과 조화를 찾는 사람들,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공존과 교감을 꿈꾸는 사람들, 이 세상의 모든 종교와 나라와 인종간 계층간의 갈등을 치유하고 활짝 열린 정신으로 우뚝 서길 소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이 작은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마음모아 발원해 본다.
창 밖으로 온갖 꽃과 여린 잎들이 노을빛에 반짝이며 하늘거린다. 이제 노을을 보러 갈 시간이다. 아침 떠오르는 햇살과 저녁 지는 노을을 매일같이 마주하는 산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이 책이 자연을 닮은 사람과의 향기로운 만남에 작은 역할을 해 줄 수 있길.
이 책이 나오기까지 관심과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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