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⑵⑨불교에서의 삶과 죽음의 초월|******@불교의생명관@

2017. 8. 27. 10:08일반/생물·과학과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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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佛敎에서의 삶과 죽음의 超越

佛敎와 自然科學 / 朴淳達·吳亨根·曺勇吉·金成九 共著 集文堂 1992. 8. 30

삶과 죽음을 생리적이고 물리적인 탄생과 소멸로 해석하는 상징적인 입장은 또한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보통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인간의 실제적인 느낌이기 때문이다.
실제적인 느낌을 부정할 수 없다.
긍정 부정은 상대적인 논리의 세계이고, 실제적인 느낌은 주체적인 감정의 세계이기 때문에 논리의 세계를 감정의 세계로 옮겨서 처리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
사람과 죽음의 물리적인 파악을 부정할 수 없다.
기쁨과 슬픔이란 감정의 세계가 그것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부처님도 또한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건 고사하고 유명한 붓다의 사문출유(四門出遊)의 동기는 생. 노. 병. 사였다고 한다.
붓다에게 출가의 결심을 재촉한 현상은 늙어 가는 사람, 병든 사람, 죽어 가는 사람의 영상이었던 것이다.
생. 노. 병. 사라는 물리적인 현상은 29세의 다감한 붓다의 감정을 자극했다.
그러나 붓다는 감정적인 자극에 의해서 생. 노. 병. 사를 초월한 영혼의 존재를 믿었을까?
또는 그는 과연 영혼의 실재성을 입증하려고 했을까? 그렇지 않다.
부처님이 찾았던 것은 생. 노. 병. 사가 없는 세계였다.
앞서 말한 자연종교, 철학, 과학적 심령학은 생. 노. 병. 사가 존재하는 세계를 전제로 하는 것이라면, 부처의 입장은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였다.
세 입장에 대해서 부처님의 입장을 제4의 입장이라 할 수도 있다.
부처님에게 문제였던 것은 사후의 존재가 아니고 그 차원이 급전되어 있는, 즉 삶에도 괴롭지 않고 죽음에도 괴롭지 않은 생명에 대한 추구였다.
즉 삶과 죽음을 초월해서 사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문제였다.
이것이 업과 윤회(생사)를 초월한 경지라고 했다.
이것이 번뇌를 불어 끄다라는 원어(nir-va)를 갖는 열반(涅槃, nirvana)이다.
이 궁극적인 경계를 표현하는 방법은 각 학파 각 종파에 따라 서로 다르다.
열반, 생사 즉 열반(生死卽涅槃), 불생불멸(不生不滅), 감로(甘露, 不滅), 공(空)등으로 술어화된 내적 경지다. 여기에는 이미 영혼의 존재는 부정되어 있다.
예를 들면 수 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이집트의 영혼(바비)의 신앙도 아니다.
이 신앙에 의하면, '바비'의 생각대로 신이 되기도 하고, 황금의 매(매)가 되기도 하고, 또한 아름다운 수련이 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불교의 업론에는 이와 같은 기이하고 아름다운 신화도 없다.
업(生死)의 세계를 초월한 것이 열반이라면, 처음부터 업의 세계는 없는 편이 좋지 않은가 하고 지식인은 생각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던 지식인도 고대에 있었다.
그 결과 소신(燒身)자살을 했다. 마음의 불안, 즉 번뇌를 '불어 끄다'라는 열반의 진의를, 육신을 불어 끈다고 오해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회신멸지(灰身滅智)라고 한다. 현대의 지식인이 물리적인 삶과 죽음으로 파악되고 있다면, 이와 같이 고대인의 어리석음을 행하는 결과가 된다.
이와 같이 궁극적인 경지는 오관의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에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현대의 지식인이 오관을 초월한 텔레파시현상에 흥미를 보이고 있지 않은가?
어느 시대에나 인류에게는 오관을 초월한 차원에 대한 유혹이 숨어 있는 것이다.
불교는 이 유혹을 긍정도 하지 않았다면, 부정도 하지 않았다.
붓다는 "어떻게 생존하는가"를 물었던 것이다.
붓다는 소신자살도 하지 않았고 또한 동굴로 달아날 이유도 없었다.
오히려 불교의 절규는 유아독존(唯我獨尊)이다.
그것은 살아 있는 확신의 상징이 아니고 무엇인가?
불교가 말하는 궁극적인 경계(生死卽涅槃, 대승불교적인 표현)는 업윤회의 세계를 제거한 것이 아니며, 그것을 초월하기 위하여 초월되는 것으로 제창된 것이다.
초월하기 위하여는 초월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초월되는 것이 없을 때, 초월하는 것도 없다.
이것은 대승불교에서 전개한 논리이나 그 시원은 원시 불교에 있다.
즉 앞에서도 인용했던 것인데, "생사윤회를 끊어서 이제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테라가타)."라는 심적인 경계를 논리적으로 전개한 해명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의 지식인은 의심할지도 모른다.
즉 그와 같이 생사를 초월한 심경은 오관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제로(零)과 같다고 한다.
이렇게 말하는 지식인은 마치 수학으로 말하면, 정수만을 수로 생각하고 그 기본으로 되어 있는 영은 수가 아니라고 하는 지식인일 것이다.
업윤회의 세계에 대한 불교적인 분석은 그것을 초월하는 것을 목표로 하므로 비평하고 정립해 놓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소인이다.
업윤회의 세계가 인도의 자연종교적인 이해인 삼세관에 의해서 설명되든지, 또는 철학적으로 범아일여(梵我一如)로 생각되든지, 또는 윤리적인 윤회의 해석의 소재로 되든지 그것은 불교 본래의 입장으로 말하면 어느 것이라도 좋다.
불교로서 본질적인 것은 업윤회의 세계가 초월된 소재로서 그곳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 없이는 초월도 없다는 것은 앞서 얘기한 것과 상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