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철학에서는 종적으로 갖가지 발전단계의 형태가 있고, 또한 횡적으로도 여러 학파의 대립이 있으나, 그 많은 흐름에서 가장 공통적인 경향은 현세에 대한 강렬한 관심이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업론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업론은 두 가지 의미에서 중요하다. 첫째는, 불교 이전의 인도 고대사상이 자연에 대한 관심이 강한 나머지 자연은 신이라고 불려지는 초자연적인 원리에 의해서 생명이 주어지고 활동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초자연적인 비법에 의해서 신들에게 접근하고 그 힘을 이용하려고 했다. 불교 이전의 점성술, 연금술, 비약(秘藥)등과 결부된 제 신앙이 그것이다. 둘째는, 신들에 대한 관심이 인간존재로 향해지고, 살아있는 인간 속에서 심경개오(心境開悟)의 상황을 체험하고자 하는 신앙이었다. 새로운 인간상의 발견이라고도 해도 좋다. 이것이 불교였던 것이다. 먼저, 첫째의 자연종교적인 신앙부터 다시 상세하게 서술해 본다면, 서구에서는 종교와 철학은 분명히 구별되어 있는 것 같다. 전자는 신과의 관계이고, 후자는 진리와의 관계이다. 원래 구별해야할 것은 아니었으나, 자연과학의 발달과 함께 종교와 철학도 또한 자연히 그 분담 영역을 구별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이 구별이 없다. 소위 철학도 종교도 그 시원에서는 해탈(Vimoksa)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고, 사유도 신앙도 혼연일체로 통일되어 있다. 이것이 그대로 현대의 인도 철학 종교라고 하는 형태로 전승되어 있다. 구태여 이 체계를 표현하는 원어를 찾는다면 다르샤나((darsana)일 것이다. 산스크리트어의 다르샤나는 '보다(drs)라는 어근에서 나왔으나, 단순한 철학적인 사상은 아니고, 그 사상의 체험 또는 실감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이러한 다르샤나의 성격 때문에 인도사상은 어떤 때는 매우 합리적이고 정밀한 기계적인 구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되기도 하고, 또 심리적인 느낌의 분위기를 갖고 있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또 신비적인 체험의 서술인가 하면 합리적인 분석의 지식이 아니고서는 접근할 수 없는 이중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자연신앙이라고 할지라도 애니미즘과 같은 토속신앙만은 아니다. 철학적인 원리에 근거를 둔 신앙이기도 하다. 인도사상에 나타나 있는 신들(브라흐마, 시바, 비쉬누 등)의 신앙이 그것이다. 이 신들은 인격신이 아니고, 여러 원리의 상징이라고 하는 철학을 갖고 있다. 예컨대 브라흐마는 창조, 시바는 파괴, 비쉬누는 유지 원리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우주가 질서를 갖게 하는 하나의 힘(sakti)이 신들의 형태를 취하고, 혹은 자연의 형태를 갖고서 현세에 내려와 있다는 권화사상(權化思想)이다. 권화의 원어는 avatara이며 이것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왔다(ava-tar)는 의미다. 하나인 우주의 근원력(sakti)은 여기에 접함으로써 그 힘을 이용할 수 있다고 믿었다. 여기에서 점성술, 연금술, 생천(生川)사상 등이 발달해 왔던 것이다. 다른 방면으로는 동일한 우주의 근원력과 합일하고자 하는 정신의 비약으로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체험이 설해져 왔다. 다르샤나라고 말해지는 철학적인 종교의 개념에는 상술한 바와 같이 두 개의 요소가 얽혀있다. 둘째는, 인간의 내부인 영혼의 발달(깨달음)에 집중한 철학적인 종교로서의 불교이다. 부처님은 처음부터 점성술, 주술 등을 배척한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또 부처님은 영혼의 사후 존재도 부정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과연 점성술 혹은 생천사상 등 당시의 여러 자연신앙을 이용하지 않았을까? 여기에 그것을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될 자료가 있다. 즉 부처님은 생존시에 중생에 대하여 설하는 대상으로서 두 종류를 갖고 있다. 불제자(比丘)와 같은 출가자와, 전통적인 인도사상 내지 자연신앙을 믿고 있는 재가자이다. 부처님의 설법도 이 양자를 염두에 두고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현대의 카운슬링의 시초라고 생각되나, 불교에서는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고 한다. 한 예로서 생천(生川)사상을 파악해 봐도 알 수 있다. 그것은 육방예경(六方禮敬)에 있으며, 거기에는 천도(天道, saggassa magga)로서 육법수행(六法修行)의 결과로 현세에서는 명성(名聲), 내세에서는 하늘에 태어난다고 말한다. 원시경전에는 이런 종류의 생천사상이 대단히 많이 나온다. 그것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신적인 영역으로 수렴된 불교임에도 불구하고 , 자연신앙에서 사용되고 있던 하늘에서 태어난다는 것이 설해지고 있다. 즉 현세에 초선(初禪)을 얻은 사람은 목숨이 다해서 범신천(梵身川), 제 2선을 얻은 사람은 광음천(光音川), 제 3선을 얻은 사람은 변정천(遍淨川), 제 4선을 얻은 사람은 광과천(廣果川)에 태어난다고 설해진다. 이것은 고대 인도의 전통적인 자연신앙에서 자라온 재가 청중에 대한 설법이었다. 한편 부처님 직제자인 전문불자에게는 불교 본래의 철학을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자연신앙을 부정하는 정신으로 일관하고 있다. "사람의 오랏줄을 끊고, 하늘의 오랏줄을 넘고, 일체의 오랏줄에 얽히지 않는 자를 나는 바라문이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신성시된 신의 존재의 속박을 벗어나는 것이 설해진다. 신적인 것의 부정은 동시에 피안(彼岸)이나 차안(此岸)의 부정이기도 하다. "피안도 차안도 피안비차안도 없고, 괴로운 것도 없고, 속박되는 것도 없는 사람을 나는 바라문이라고 부른다 담마빠다[法句經]보다 얼마간 시대는 뒤지나 테라가타[長老偈]로 오면, 명료하게 신적존재의 부정과 불교의 원리적인 본래의 입장이 기록되어 있다. "이젠 다시 태어나지 않고, 천신(天身, deva-kaya)에서의 제망(諸網, jalini)이 없다. 생윤회(生輪廻, jati-samsara)는 끊어지며, 이미 다시 태어나는 것(punabhava)이 없다. '제망'이란 주석(바라마타 티파니)에 의하면 모든 천신이고, 천신은 천으로서의 취체(聚體, devasamuha)이다. 이와 같이 신적인 존재 및 신화적인 세계의 부정이야말로 불교의 본질이나 그것은 출가자에 대해서만 설해진 본질론이었다, 이것에 의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고대 인도의 자연신앙을 수용해서 나타난 불교에는 고대 인도적인 노선과 불교의 본질적인 노선이라는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것은 고대 인도사상에 대립해서 생긴 불교도 또한 인도의 다르샤나(darsana)의 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불교에도 철학적인 원리가 있는 것과 동시에 구체적인 실증성도 구비해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불교에서의 업 사상도 또한 이상과 같은 다르샤나(철학적 종교)의 전통 위에 나타나 있다. 불교의 업은 인간의 생사의 세계를 가르쳐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다르샤나의 구조가 그랬던 것처럼, 업의 세계도 또한 이중으로 되었다고 설해진다. 업의 세계는 불교 본래의 철학적인 원리로서는 무명에서 시작된 생사의 세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신화적이고 종교적인 요소를 갖고 있는 것으로도 설명되어 있다. 업의 세계를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는 방법이 그것이다. 무명과 행(行)은 과거이고, 식(識)에서 유(有)에 이르는 기간은 현재이며, 생과 노사를 사후의 미래로 적용하는 해석이 생겼다. 이런 삼세이중의 인과에 의한 업의 세계의 해석은, 불교적으로 말한다면 아비달마 불교라고 붓다 사후의 불제자들은 말한다. 당시의 자연신앙 혹은 소박한 신화적인 피안신앙(彼岸信仰)과의 결합이었다. 불교는 다른 종교처럼 단순한 신앙만으로 전개된 것은 아니고, 오관으로 호소하는 실증성과 결부돼서 전개하고 있다는 것에 주의하여야 한다. 철학적 사고와 실증이 결부되어 있는 불교의 내면세계가 바로 인간 자신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