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함께하는 사람|…… 혜천스님설교

2017. 10. 22. 21:5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728x90

 


나와 함께하는 사람

 

 

혜천(嵇瀳)스님의 일요강론


 

(1월 2주차: 불기2554년 1월 10일)

 

'설국(ゆきぐに)'의 작가이자 그 소설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가 묘사한 바대로 눈같은 눈이 내렸다. 마치 아껴 두었던 눈이 내린듯 하다. 설국의 첫문장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처럼.

 

오늘 강론 주제는 "나와 함께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나는 부처님이다. 그래서 결국 달리 표현하면 "부처님과 함께하는 사람"이 오늘 주제이다.

 

불교를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두 가지 측면에서 알아봐야 한다. 그 동안 끊임없이 관점에 대해서 얘기해왔다. 그 두 가지는 해석과 실천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내가 어떻게 해석할까?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해석하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영어에서도 독해가 중요하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관점에서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오직 내 눈, 나의 안목으로 해석해야 한다. 과거 누가 어떻게 해석했는가는 다 지우고 쓸어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불교 이해는 원효가, 의상이, 보조가, 서산이 각각 어떻게 봤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들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지 부처님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의 관점에 다가가려면 과거의 관점을 버려야 한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 실록을 편찬한 후에 세초(洗草: 조선시대에 역대 왕의 실록(實錄)을 편찬한 다음 그 초고(草稿)를 없애는 일)라는 절차가 있다. 이것은 실록에 싣기 위해 수집한 그 동안의 자료를 씻어 없애는 것이다. 그것처럼 우리는 과거의 누구의 관점에서 본 본것을 세초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내가 부처님의 관점에 다가갈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눈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볼 수 없다. 즉 누군가 걸쳐준 것으로 보게 된다. 걸쳐준대로 보게되는 것을 과감하게 벗어버리지 못하면 감동이 없다. 누군가가 걸쳐준대로 보는 것을 과감하게 벗어나야 비로소 부처님의 가르침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오직 나의 눈, 즉 심안이라는 입각점에서 보는 것이다. 그래야만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것이다'라는 것이 다가올 수 있다. 우리는 그 동안 누군가의 권위에 굴복해 감히 스스로의 눈으로 보려 하지 않고,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우리는 아직도 천년 전의 원효의 해설서로 불교를 공부한다. 불교도 역사의 산물이다. 그런데 오늘날 그의 해설서로 공부한다는 것은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역사의식이 없는 것이다. 1000년 전의 원효의 해석은 그 시대 그렇게 해석하는 또는 그렇게 해석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해석은 언제나 시대를 반영한 것이다. 그런데 1000년 후인 오늘날 그 해석을 앵무새처럼 흉내낸다면, 어떤 새로운 것이 태동할 수 없다. 시대의식을 가지고 봐야 한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가르침을 따라 실천할 때 내가 세상에 살아있는 것과 같다"고 했다.    

 

우리는 불교를 보면서 역사적 관점을 도외시한다. 그래서 뭔지 모르고 배운다. 내가 예전에 아비달마구사론이라는 것을 배운적이 있다. 아주 어렵고 복잡한 책이다. 그야말로 머리에 쥐가 난다. 이것은 설일체유부, 즉 부파불교의 한 갈래의 소전이다. 그러니 이것은 다른 부파와 다른 인도 사상을 비판하면서 설일체유부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규명한 책이다.  나는 그 당시 인도 사상이나 다른 부파 불교의 주장을 몰랐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었다. 딱 하나 배운 것이 있다면 잘난 것은 '나'라는 것이다. 오직 자파의 주장만 정당하고, 그 외의 것은 모두 비판하고 있으니 그렇게 받아들일 법도 했다. 나는 그 당시 일방적인 것을 배우고 들었다. 그저 70년대 시골 노인들의 논쟁과 같았다. 그들 논쟁이 한 방에 정리되는 것이 있었다. " 이 영감 무식하기는. 좀 배워라. 내 얘긴 오늘 KBS에 나온 것이란 말이야"

 

가장 중요한 것은 관점이다.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역사 시간에 조선왕조에 대해 개혁적 성리학자들이 부패한 고려를 무너뜨리고 성리학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개창한 것으로 배워왔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조선의 개창정신은 그저 명나라를 따른데 불과하다. 1363년 중국에서는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황제에 등극함으로써 명왕조가 성립한다. 조선은 1393년에 세워진다. 명나라는 근본법전인 대명률에도 적시되어 있다시피 성리학, 그 중에서도 주자의 성리학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즉 성리학적 관점이되 주자의 관점인 것이다. 그래서 명나라의 과거 시험답안 또한 주자의 관점으로 해석한 것을 써야 했다. 즉 자기 눈으로, 자기의 안목으로 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종실, 즉 황제 주원장의 친척인 명나라 선비가 이런 성리학적 견해에 반발했다. 그 결과는 그저 죽지 않을 만큼 매를 맞는 것이었다. 그가 친척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 결과는 죽음이다. 그 시대 조선 반도의 사람들은 중국이 기준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소위 지식인, 특히 기독교인들에게 모든 것이 미국이 기준인 것과 같다. 추사 김정희도 스승 옹방강을 만나고 나서 자신이 조선에 태어난 것을 시를 지어 한탄했다고 한다. 그를 비난 할 수는 없다. 그 당시에는 중국이 조선의 모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국이 한국의 전부이듯, 사람은 한국 사람이되 의식은 미국인인 것과 같다.

 

왜 그러할까? 스스로의 눈이 없으면 소용없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눈이 없으면, 평생 남의 노예로 산다. 그리고 그 노예 노릇을 하면서도 자신이 노예로 사는 것조차 모른다. 노예노릇을 하는 줄 알면, 노예로 살수 없다. 얼마 전에 볼리비아 백인 농장주가 원주민에게 30~40년 동안 노예 같은 삶을 살게 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기사가 있었다. 원주민 출신인 대통령이 그것이  불법이라고 말한 다음에야, 그제야 그 노예 같은 삶이 불법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우리가 과거의 권위와 관습에 답습하는 것은 볼리비아 원주민의 노예 같은 삶과 같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메시지는 오직 자신의 눈으로 보라는 것이다. 내 관점이 옳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원효도는 보조의 눈으로 보지 말고, 오직 내 눈으로 보라는 것이다. 그것이 불교이자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다. 행동하지 않는 것은 차라리 모른 것만도 못하다. 알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것은 권위에 굴복하기 때문이다.

 

조선 숙종 때 하곡 정제두((霞谷 鄭齊斗)는주자학을 거부하고, 자신이 양명학자임을 공개저그로 천명하였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한 이유는 그 자신이 병들어 기왕 죽게 되었으니, 병석에서 자신이 주자학설을 버린 걸 선비의 양심에 따라 양심 고백한 것이었다. 그는 당시에 주자학의 권위주의적 학풍에 대하여 학문적 진실성에서 비판하면서 "오늘날에 주자학의 학문을 말하는 자는 주자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곧 주자를 핑계 대는 것이요 주자를 핑계되는 데에서 나아가 곧 주자를 억지로 끌어다 붙여서 그 뜻을 성취시키며 주자를 끼고 위업을 지어서 사사로운 계책을 이루려는 것이다." 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운이 없어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죽지 않고 살아난 것이었다. 그래서 엄청난 핍박을 받게 되었다. 그의 스승 남계 박세채가 정제두의 학식을 아까워해 편지를 보내 양명학을 버릴 것을 강권하기도 했다. "그대가 주자학을 버려야 한다. 그래야 산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걸 잃게 될 것이다." 박세채는 (왕양명학변)을 지어 양명학을 비판하여 그가 양명학을 버리도록 종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제두는 "왕씨의 학설에 애착을 가지는 것이 남보다 특이한 것을 구하려는 사사로운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면 끊어버리기도 어려운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학문하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성인의 뜻을 찾아서 실지로 얻음이 있고자 할 뿐입니다." 라고 하여 결연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는 끝까지 그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의 사상은 후에 조선이 멸망한 후 독립운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는데, 위당 정인보가 그의 손자이기도 하다. 행동하지 않는 것은 차라리 모르는 것보다 못하다. 몰라서 행동하지 못하는 것과 알면서 행동하지 않는 것은 다르다.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표현도 있지만, 나는 사회적 지위가 높다거나, 돈이 많다거나,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집에 사는 사람들이 부럽지 않다. 오히려 멸시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거나 학식이 높은 사람, 심지어 대통령조차도 부럽지 않다. 자기 양심을 지키면서,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이 부럽다. 그리고 내 자신이 작아진다. 스스로의 일에 당당하게 가는 사람 앞에 제 자신이 작아진다. 하곡 정제두가 죽임을 당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명문가인데다가, 윤증 같은 이의 보호 덕택이었다. 행동하는 사람에게는 그를 해치려는 삶도 있고, 그를 보호하려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행동하지 않는가? 그것은 두려움 때문이다. 즉 내가 가진 것을 모두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내가 춘천에 살기로 결정했을 때, 거기에 살려면 손가락을 잘 꼽을 수 있어야 한다면서, 손가락을 꼽을 줄 아느냐 묻고, 할 줄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는 걸 걱정한 도 있었다.

 

오늘은 '나와 함께하는 사람'이라는 주제의 강론을 하면서 모두 발언이 좀 길어졌다. 길어진 이유는 철저히 자기 눈으로 보고 실천해야 한다는 걸 말하기 위해서이다. 5부 니까야를 모두 암송해봤자 소용없다. 오직 나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부처님의 가르침이 살아 숨 쉰다. 나의 눈으로 보고, 행동에 옮긴다면, 부처님 말씀대로 부처님이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부처님이 어떤 비구에게 한 말이다. "어떤 비구가 내 가사자락을 붙들고 내 그림자를 밟고 다닌다 하더라도, 그가 욕망, 화, 그릇된 소견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나와 멀리 떨어져 있는 자이며, 나 또한 그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그는 진리를 보지 못하는 자이다. 진리를 보지 못하는 자는 나를 보지 못한다. 어떤 비구가 천 리 밖에 있다 할지라도, 그에게 욕망이 없고, 격정도 화도 없고, 그릇된 소견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는 내 곁에 있는 것과 같다. 그리고 나 또한 그의 곁에 있는 것과 같다. 그는 진리의 마음이 견고해서 진리를 보는 이다. 진리를 보는 이가 곧 나를 보는 이다." 한편 바카리 비구에게도 "나를 보는 자 진리를 보고, 진리를 보는 자 나를 보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진리는 못 보는 자는 무엇 때문에 그러한가? 그것은 1)염오심(染汚心)2) 분노심(忿怒心) 3)사심(邪心)때문이다. 이것은 나 관점이다. 염오심은 마음에 더러움이 물들어 있는 것, 분노심은 화를 내는 것, 사심은 삿된 마음, 간사한 마음이다. 마음이 더러움에 물들어 있다는 염오심은 부파불교에서 객진번뇌客塵煩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객진번뇌란 바깥에서 오는 번뇌로, 번뇌가 바깥에서 물드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눈이나 귀를 통해, 환경이나 관습에 의해 물드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에 의하면 염오심은 물이 끓는 것 또는 흙탕물과 같다고 했다. 물로 거울을 삼는다는 말이 있다. 지금은 거울이 흔하지만, 아주 오랜 옛날에는 귀한 신분만이 거울을 지닐 수 있었다. 그러니 그렇지 못한 대다수는 맑은 물에 비춰 자신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물이 끓거나 흙탕물이 되면, 얼굴을 비춰 볼 수 없다. 염오심이란 끊임없이 바깥에서 쇄도해 오는 것이다.

 

프로이드에 의하면,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끊임없이 법칙과 규칙을 배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배운 것이 복종하는 것이다. 엄마에게, 가족에게, 이웃에게, 국가권력에 복종하는 법을 배운다. 권위에 복종하지 않게 되면,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저 엄마나 선생님의 매타작이다. 사회에선 쇠 팔찌를 달고 한 10년씩 썩고 반성하기도 하는데, 이런 곳에서 나오면 완전히 개조되어 꼬리를 흔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염오심의 반대말은 청정심(淸淨心)이다. 청정심이란 물들지 않은 마음이다. 즉 원래의 인간 마음이다. 천연지성인 진심(眞心)과 청정심은 같다. 천연지성이란 본래 내가 가지고 있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규칙과 법칙의 지배가 없다. 배고프면 우는 아이의 마음과 같다.

 

부처님은 마치 "바깥에 물드는 것이 마치 안개 속에서 물드는 것과 같다"고 했다. 높은 곳에 살아보면 수시로 걸리는 것이 안개이다. 그래서 그 곳에서 안개가 끼어 있을 때 무엇을 하면 옷이 젖게 되는데, 짜보면 물이 나올 정도이다. 나보고 뻥이 세다 할지 모르지만, 이건 0.1%로도 안 보탠 것이다. 몇 시간만 일하면 안개에 젖어 물이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그러하다. 그렇다면 태어나서 어떤 환경 속에 물들면 어떻게 될까? TV에서 몽고고원의 망아지를 붙잡아 길들이는 할머니를 방영한 적이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마치 일급 조련사처럼 망아지 중 가장 잘 뛰는 놈에게 올가미를 씌워 붙잡는다.  그러면 말이 미친 듯 날뛴다. 이 때  그 힘에 대항해 무조건 당겨버리면 망아지가 죽는다. 그래서 적당히 밀고 당기기를 반복한다. 결국 어느 순간이 되면 말이 지치게 된다. 중국 역사상 가장 힘 좋은 장수 항우의 최후도 차륜전(車輪戰 :한 사람을 상대로 여러 사람이 차례대로 싸우는 것을 말한다. 상대방의 실력이 매우 막강하여 일 대 일로는 상대할 수 없는 경우에 쓰는 전법으로서 상대에게 쉴 틈을 주지 않으므로 비록 많은 희생이 따른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필승을 하게 되는 약간은 치사한 전법이다.)에 걸려 끝내 자살하고 만다. 말이 먼저 지쳐 쓰러지고 말에서 떨어진 항우를 차마 유방의 군사들조차 죽이지 못하지만, 항우만큼은 아니더라도 힘센 장수와 연달아 싸우면서 지치게 되는데, 결국 지치서 자살하게 되는 것이다. 앞의 예처럼 지친 망아지는 이제 끄는 대로 끌려온다. 그리고 고삐가 매어진다. 그렇게 되면 망아지에게는 자유는 박탈되고, 복종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염오심이다. 안개처럼 남의 노예이면서도 노예인줄 모르는 것과 같다. 처렴상정(處染常淨: 연꽃은 더러운 물에도 물들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 더러움이라는 것도 적당해야지 심한 오염에는 연꽃 자체가 살수 없다. 염오심이란 것이 그렇다. 적당하면 그저 그런 줄 알고 세상을 사는 것이다. 적당한 비유는 아니지만,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만 봐도 절을 한다는 속담이 있다. 알아서 긴다는 것 아닌가! 그래서 부처님은 청정심을 회복하라고 하라고 한다. 객진, 즉 안개에 물들지 않는 본래의 마음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염오심 때문에 법을 못 본다. 그래서 청정심으로 법을 보는 것이다.

 

둘째로 분노심을 버려야 한다.  분노심은 욕구불만에서 비롯된다. 마치 가스가 차서 불을 당겨주길 기다리는 것과 같다. 그러면 욕구불만은 왜 생기는 것인가? 내 청정신이 억압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아주 순치되면 괜찮은데 적당히 순치되어서 그런 것이다. 분노심은 자기 자신의 욕구불만인데, 지혜로운 사람은 스스로에게 돌이켜 해소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남 탓을 하게 된다. 그런 경우 불행의 이유가 모두 남 탓이다. 상대인 남을 잘못 만나 불행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 여자, 그 남자를 만난 것이 상대방의 탓인가? 내가 그러해서(잘나거나 못나거나 해서)역시 그 여자, 그 남자를 만난 것이다. 요즘 유행어로 루저가 마누라 탓을 한다. 잘난 사람은 남 탓 안한다. 분노심은 남을 탓하는 것이다. 그러면 왜 남을 탓할까? 그것은 자기의 무능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전쟁이나 파괴 속에서도 능력있는 사람은 기회로 삼는다. 의사는 사람이 아파야 돈을 벌고, 장의사는 사람이 죽어야 장사가 잘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평정심(平靜心)을 유지하라고 하는 것이다. 분노심은 평정심의 반대말이다. 흔들리지 않는 나무, 여여부동(如如不動)이 모두 이를 표현한 것이다. 숫타니바타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라,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사자,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연꽃"이 그것이다. 떡고물이 묻는 것은 떡을 만져서 묻는 것이 아니다. 떡고물을 묻히고 싶어서 성형이라도 해서 우리 손에 털을 만들기 때문에 떡고물이 손에 묻는 것이다. 꿀벌의 발에 미세한 털이 있어서, 꽃에만 앉아도 꽃가루가 묻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나는 꽃 위에서도 꽃가루가 묻지 않는다. 내가 마음이 있기 때문에 분노심이 일어난다. 평정심을 유지하려면 남의 탓을 하지 않으면 된다. 적어도 그렇게 하면 평정심을 유지는 할 수 있다. 마누라 탓을 하면 안 된다. 분노심은 남을 탓하는 것이다. 남을 탓하지 말라. '누구 때문에'는 없다. 오직 '나 때문'이다.

 

성철스님이 해인사에 있을 때, 하루 4시간 이상을 자면서 어떻게 수행자라 할 수 있느냐고 일갈한 적이 있다. 세 시간을 자면 서울대 합격도 보장한다는 말도 했다. 물론 이는 승가대 학생을 대상으로 한 말이다. 또 실제 3시간만 잔다고 서울대에 갈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노력해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일 것이다. 이 정도 노력을 해야 남을 탓해도 탓할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평정심을 유지하라.

 

세 번째 사심(邪心)이다. 여기서는 邪는 '삿되다'의 한문표기이다. 표의 문자인 한문은 글자마다 뜻이 있어 매력적이다. 여기서 사심이란 삿된 마음, 즉 간사한 마음이다. 간사함이란 무엇인가? 간사함은 남에게 엄격하고 자신에게 관대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간사한 마음이 있어 남에게 엄격하고 자신에게 관대하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바람 또는 스캔들(학식 있는 사람들은 불륜이라고 한다)이 그런 예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말을 뒤집고, 스스로에게 거짓마를 하는 것에 관대하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고 이유를 대는 것이다. 내가 예전에 차 있을 때 남들이 불법주차를 하면 화가 났다. 그러나 내가 할 때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 남들이 불법주차를 하면 돈이 아까워 그런 것이지만, 내가 하는 것은 바쁜 볼 일이라며 피치 못할 사정이라는 이유를 댄다. 나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왜? 나는 1년이 지나도 하늘을 안쳐다 보니까.

 

유대인들에게 질문했다. 홀로코스트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인 무엇인가? 그 대답 중 1위가 유태인 출신의 감독이 만든 영화 '쉰틀러 리스트'의 가스실이었다. 우리는 특정 이미지에 각인되어 그것이 형성된다. 그러나 그들은 홀로코스트를 강조하면서, 똑같은 일을 팔레스타인에게 현재 행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에 둘러싸여 있는 거대한 원형감옥이자, 집단 수용소이다. 이스라엘에 의해 포위된 장벽인 팔레스타인에 대해 그거 심심하면 여우 사냥하듯 그들을 죽인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터하고 있는 땅이 고래로부터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이미 2000년 전 모세가 남의 땅을 빼앗아 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던가! 얼마 전 우리의 외규장각도서를 돌려달라는데 대해, 프랑스 정부의 법원이 국가 소유이므로 반환불가라는 판결을 내렸다. 훔치면 장물도 내 것이라는 논리이다. 유태인은 장물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중동에 감옥을 세우고 팔레스타인들을 여우 사냥하듯이 하면서, 즉 홀로코스트와 같은 짓을 지금 스스로 행하면서 피해자라고 예전의 일에 대해서만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실은 그들이 가해자이다. 예전과 달라졌다면, 그것은 힘이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이다. 간사한 마음이란 이런 것이다. 어제는 정당하였던 것이 오늘은 비난 받는 것이 사심이다. 부처님은 그래서 정심(正心)을 말한다. 사심은 교활한 것으로, 견강부회, 아전인수이며, 정심은 단순한 것이다. 설사 내가 한 것이라도 내가 잘못했으면 인정하는 것이 정심이다. 정심은 내 행동과 언행을 정당화시키지 않는 것이다.

 

부처님은 나와 함께하는 자는 진리를 볼 것이라고 말했다. 청정심, 평정심, 정심이 있으면 진리를 보게 된다.  가사자락을 붙들고 내 그림자를 밟고 다닌다 하더라도, 청정심, 평정심, 정심이 없으면 진리를 보지 못하고,  청정심, 평정심, 정심이 있으면,  천 리 밖에 있다 할지라도 진리를 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 나와 함께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누군가에 의해 덧씌워진 안경으로 모든 걸 보아왔다. 법을 보는 자가 나를 본다는 것은 자기 눈으로 보라는 것이다. 불상 앞에서 매일 3000배를 하고, 심지어 소지공양을 해도 소용없다. 어떤 스님은 소지공양을 자랑스레 말하는데 이건 사실 율장에도 엄격히 금지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불자 여러분들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순간, 여러분이 부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혜천스님 - 초기불교전공 흥천사주지 



    • 라이브 카페 포크음악 모음 71곡 01.김철민 ㅡ 목마를 타고간 사랑 02.윤태규 ㅡ 기다리겠소 03.김철민 ㅡ 인연 04.김재성 ㅡ 천상재회 05.김재성 ㅡ 가을사랑 06.김철민 ㅡ 사진 한 장 07.김철민 ㅡ 이렇게 당신 생각에 08.김철민 ㅡ 불꺼진 창 09.김철민 ㅡ 무지불 각성 10.서상우 ㅡ 계련 11.백미현 ㅡ 부르지마 12.김재성 ㅡ 젊은 여인들 13.김재성 ㅡ 괜찮아요 14.김재성 ㅡ 라일락이 질 때 15.김재성 ㅡ 가을사랑 16.김재성 ㅡ 벙어리 바이올린 17.김재성 ㅡ 나무와 새 18.김재성 ㅡ 러브 19.김재성 ㅡ 낯설은 아쉬움 20.김재성 ㅡ 나는 당신께 사랑을 원하지 않았어요 21.김재성 ㅡ 민들레 홀씨 되어 22.김재성 ㅡ 문 밖에 있는 그대 23.김철민 ㅡ 그곳에[고향] 24.김철민 ㅡ 클래멘타인 25.김재성 ㅡ 내일은 해가 뜬다 26.모모 ㅡ 너무 아픈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27.우대하 ㅡ 쓸쓸한 연가 28.김재성 ㅡ 골목길 29.김철민 ㅡ This Little Bird 30.김재성 ㅡ 푸른초원 저 위로 31.김재성 ㅡ 고독 32.김철민 ㅡ 서울야곡 33.김철민 ㅡ 아이야 34.윤태규 ㅡ 비와 외로움 35.김재성 ㅡ 야화[통기타] 36.김재성 ㅡ 숨어 우는 바람소리 37.김재성 ㅡ 사랑하는 그대에게 38.김재성 ㅡ 빗속을 둘이서 39.김재성 ㅡ 등불 40.김재성 ㅡ 당신 따라 갈 것을 41.김재성 ㅡ 눈 먼 사랑 42.김희진 ㅡ 그때 그사람 43.백미현 ㅡ 빗속의 여인 44.윤태규 ㅡ 마이웨이 45.김철민 ㅡ 라발승의 새벽 노래 46.바다새 ㅡ 바다새 47.윤태규 ㅡ 영상 48.클래식 ㅡ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49.이진석 ㅡ 카사비앙카 50.김철민 ㅡ For The Good Times 51.이진석 ㅡ 내일로 가는 마차 52.백미현 ㅡ 바람아 멈추어 다오 53.윤태규&추가열 ㅡ 야화 54.윤태규 ㅡ 쥬리아 55.문형석 ㅡ 너무 아픈 사랑은사랑이 아니었음을 56.김철민 ㅡ 슬픈 사랑의 멜로디 57.바다새 ㅡ 사랑의 잎새 58.바다새 ㅡ 잃어 가는 느낌들 59.윤태규[라이브] ㅡ Let It Be 60.이진석 ㅡ 비와 외로움[통기타] 61.풍경여행 ㅡ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62.울타리 ㅡ 천상재회 63.캐슬 ㅡ 야화 64.윤태규&추가열 ㅡ 소녀와 가로등 65.바다새 ㅡ 이어둠 이슬픔 66.최진연 ㅡ 너무 아픈 사랑은사랑이 아니었음을 67.찬진 ㅡ 하얀나비 68.백미현 ㅡ 하늘만 보면 69.너에게 난 나에게 넌ㅡ 70.박강수 ㅡ 살다 보면 71.이정선 ㅡ 뭉게구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