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혜천스님설교

2017. 10. 14. 22:0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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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울



 

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거울 5월 3주차: 불기2554년 5월 16일)   


 


아침에 일어나 보니, 벗꽃과 철쭉은 지고 붓꽃이 피어 있습니다. 붓꽃은 그 모양이 선비의 붓같기도 하고, 검객의 칼 같기도 하다고 해서 선비나 무사를 상징하는 꽃이기도 합니다. 무사가 죽어 붓꽃으로 피어났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임제선사는 다음과 같은 말도 했습니다. "路逢劍客須呈劍 不是才人莫獻詩 길에서 검객을 만나면 칼을 바쳐야 하지만, 시인이 아니면 시를 바치지 말라"


오늘 강론의 주제는 거울입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일생을 살면서 자기 얼굴을 보지 못합니다. 자기 얼굴을 볼수가 없어 좋은 물건을 하나 만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거울입니다. 사람은 거울을 통해서 자기 얼굴을 봅니다. 거울이 없다면 자기 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옛날 거울이 없던 시절에는 물에다 얼굴을 비춰 거울로 삼았습니다. 묵자는 "君子 不鏡於水  而鏡於人 물로써 거울 삼지 말고, 사람으로 거울을 삼으라"고 했습니다. 이 말로 보아도 옛날에는 물을 거울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람을 거울로 삼으라는 말의 의미는 '배운다'고 하는 뜻입니다.


노자사상에 이르기를 '상선약수(上善若水) '라고 하는데, '이 세상의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입니다. 도덕경 8장에 니오는 원문과 해석은 이렇습니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아니하고, 모두가 싫어하는 곳에 고인다.그러므로, 도(道)에 가깝다. 노자라는 책의 핵심은 물입니다. 노자는 개인의 저술이 아니라 그 당시 수 많은 좋은 말들을 하나로 모아 편집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노자는 고대 중국 정치사상의 합입니다. 노자서는 단순한 책이 아닙니다. 원래 황제만이 볼 수 있도록 한 책이었습니다. 이를테면 황제정치의 필독서인 셈입니다. 그 책 속에는 철학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이 많습니다. 그러한 것이 후일 도교나 도학에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노자서는 개인 한 사람이 서술한 책이 아닙니다. 여러가지 선현들의 말씀을 하나로 집성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보는 노자라는 책은 위진 남북조 시대 왕필이 교관한 책입니다. 왕필의 그 당시 나이가 17세입니다. 그는 그 나이에 황제와 승상을 앉혀 놓고 강의 한 것입니다. 그 시대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지혜라는 말은 대단히 추상적인 용어입니다. 예전 대념처경 강의에서도 어떤 이가 지혜가 무엇이냐고 물으셨는데, 선뜻 대답하지 않은 것은 그 뜻이 추상적이기 때문입니다. 즉 지혜는 시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고대의 지혜와 현대의 지혜가 같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2500년전의 붓다의 빤냐( Panna:지혜)와 오늘의 지혜가 같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다릅니다.



묵자의 거울얘기로 오늘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는데, 노자의 상선약수라는 말로 서두를 풀어가고 있는데, 다 그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묵자가 말한 '사람으로 거울을 삼으라'는 말은 배운다는 뜻입니다. 오늘 강론주제가 거울인데 도입부를 길게 끌고 왔습니다.


부처님이 라훌라에게 말했습니다. "라훌라야 거울은 뭐하는 데 쓰는 거지?" "비춰보는 데 씁니다, 부처님." "마찬가지로 라훌라야, 반복해서 네 자신을 비추어 돌아본 후에 행동을 해야 하고, 반복해서 네 자신을 비추어 돌아본 후에 말을 해야 하고, 반복해서 네 자신을 비추어 돌아본 후에 생각하여야 한다" 부처님이 라훌라에게 당부한 이 말은 네가 생각할 때는 마음의 거울에 비추어 생각하고, 네가 행동할 때는 마음의 거울에 비추어 행동하고, 네가 말 할 때 역시 마음의 거울에 비추어 말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일생을 살면서 절대 자기 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오직 거울을 통해서만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수없는 물건들 중에서 거울만치, 특히 여성들에게 사랑받는 물건은 없을 것입니다.


중국의 춘추 전국시대의 일입니다. 춘추(春秋)는 공자가 엮은 노(魯)나라의 역사서인 《춘추(春秋)》에서 유래되었고, 전국(戰國)은 한(漢)나라 유향(劉向)이 쓴 《전국책(戰國策)》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사마천의 <사기>를 역사서로 알고 있습니까? 그러나 사마천의 <사기>나 유향의<전국책>을 역사서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사기>의 원제는 《태사공서 太史公 書》인데, 이 책은 고대에서부터 사마천의 살았던 시기까지의 사상의 흐름을 기술한 책입니다. <전국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춘추전국시대는 주(周)나라가 서북 오랑캐 침입을 받아 수도를 동쪽 뤄양〔洛陽〕으로 천도한 BC 770년에서 진(秦)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BC221년까지를 가리킨는데, 이 시기는 한(韓)·위(魏)·조(趙)나라들이 진(晉)나라를 3분해서 독립한 BC403년을 경계로 춘추시대(春秋時代)와 전국시대(戰國時代)로 구별한다.  기원전 770년 주의 평왕이 낙양으로 천도를 합니다. 이때부터 춘추시대가 시작되고, 기원전 403년 진(晉)이 조, 위, 한으로 분열합니다. 이때부터 전국시대가 시작되어, 진(秦) 시황제가 통일하는 기원전 221년까지 이어집니다. 진(晉)나라는 도공(悼公)의 시대에 이르러  대부(大夫)들의 힘의 균형에 따라 움직이게 되었고 6경(六卿)이 결정적인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진은 6경의 가문인 범씨(范氏), 지씨(智氏), 중행씨(中行氏), 조씨(趙氏), 한씨(韓氏), 위씨(魏氏)의 당주들에 의해 좌지우지 되었는데 출공(出公)의 시대에 범씨와 중행씨의 영지를 지씨, 조씨, 한씨, 위씨가 분할하려 하자 출공이 크게 노하여 제(齊), 노(魯)와 동맹을 맺고 이들을 토벌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제로 망명하는 일이 발생합니다.(기원전 457년) 이로인해 진의 공실은 완전히 힘을 잃었고 4씨 가운데 가장 강대한 지씨의 당주 지백(智伯)은 한씨와 위씨를 거느리고 조씨를 멸하려 했습니다. 이에 조씨의 당주 조무휼(趙無恤 : 조양자趙襄子)은 한씨의 한호(韓虎 : 한강자韓康子)와 위씨의 위구(魏駒 : 위환자魏桓子)에게 말하기를 "지씨는 탐욕스러우므로 내가 망한 다음은 당신들의 차례다"라고 했습니다.결국 이들의 공격을 받은 지씨는 멸망했고 기원전 453년 진의 영토를 조(趙), 한(韓), 위(魏)의 삼자가 나누어 각각 독립을 했습니다.


전국시대(戰國時代)때 진나라 사람 예양(豫讓)은 범씨와 중행씨를 섬겼으나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순씨와 범씨가 난을 일으키고, 나머지 4씨족(조씨, 위씨, 한씨, 지씨)에게진압당하자 예양은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나 그의 물됨을 안 지백이 예양을 자신의 가신으로 삼앗는데, 지백을 섬기면서 큰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지백이 조양자의 칼에 비참하게 죽고, 자신의 주군이었던 지백의 해골이 요강으로 사용된다는 말을 들은 예양은 복수의 칼을 품고 산으로 숨어들었습니다. 신분을 감춘 예양은 죄수들 틈에 섞여 조양자의 궁궐로 들어서는 변소 벽을 칠하는 일을 하면서 조양자를 죽일 기회만 노리고 있었는데, 하루는 조양자가 변소에 들어가려다가 섬뜩한 기분이 들어 변소 벽을 칠하는 죄수들을 모두 조사해 보니, 예양이 비수를 품고 있었습니다. 측근들은 모두 예양을 죽이자고 했으나, 조양자는 이를 말렸습니다. “이미 저승 사람이 된 자기 주인을 위해 원수를 갚으려 하다니, 이 사람이야말로 충신이다. 내가 조심하면 그만이다.” 풀려난 예양은 몸에 옻칠을 하여 문둥병 환자처럼 꾸미고, 수염과 눈썹을 밀고, 얼굴에 칼자국까지 내어 변장을 하고는 거지처럼 돌아다녔는데, 아내조차도 그를 몰라볼 정도였습니다. “목소리만 빼놓고는 완전히 딴사람이 되었구려.” 예양은 목소리마저 바꾸려고 숯가루를 물에 타 마셨습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춘 예양은 조양자가 지나다니는 다리 밑에 몸을 감추고 조양자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조양자가 탄 말이 그 다리 앞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고 크게 울어대는 바람에 들통이 나고 말았다으며, 조양자의 부하들이 다리 밑을 뒤져 예양을 끌어내자, 조양자는 크게 화를 내며 예양을 꾸짖었습니다. “너는 지난날 범씨와 중행씨를 섬겼다. 그러나 그들을 죽이고 권력을 잡은 지백에게는 복수는커녕 오히려 충성을 다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지백을 죽인 나에게만은 왜 이처럼 악착같이 복수를 하려는 게냐?” 예양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범씨와 중행씨는 모신 것은 사실이나 그들은 나를 보통사람으로밖에 대접하지 않았소. 따라서 나도 보통으로 보답한 것이오. 그러나 지백은 내 가치를 인정해 주었고, 나도 나를 알아준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것뿐이오.” 조양자는 깊이 탄식했습니다. “아아, 예양이여! 그대는 그대의 주인에게 할 도리를 다했도다. 그리고 나 역시 그대를 용서할 만큼 용서했다. 이제 마음의 준비는 되었겠지?” 조양자의 부하들이 창검을 들고 예양을 에워싸자, 예양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습니다. “현명한 군주는 남의 의로운 행위를 막지 않고, 충신은 명예를 위하여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였오. 당신은 나를 한 번 용서해 주었으니, 세상사람들이 당신을 어질다고 칭송할 것이오. 이제 나도 죽음을 달게 받겠오. 다만 그전에 당신의 옷을 내게 주어서 나로 하여금을 그것을 찌를 수 있게 해 주시오. 나의 마지막 소원이오.” 그 말에 크게 감동한 조양자는 겉옷을 벗어 예양에게 던져주었고, 예양은 ‘얍!’ 소리를 지르며 뛰어올라 그 옷을 세 번 찔렀습니다. “이제 지백의 원수를 갚았노라!” 그러고는 예양은 그 칼로 자신의 가슴을 찌르고 숨졌습니다. 고대 중국의 역사서 가운데 하나인 <전국책(戰國策)>이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군주의 입장에서 예양은 쪽쪽 빨아주고 싶을 정도로 이쁜 사람입니다. 조양자는 아마 예양을 죽이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조양자는 신하들에게 충성을 하려면 그처럼 하라고 귀감으로 삼고 싶었을 것입니다.  충신은 어쩌면 그 시대에는 왕을 윽박지르는 등 역적일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 다음 시대가 오면 그는 다시 충성스런 사람이 됩니다. 조선시대 조광조의 경우도 그러합니다. 자기를 인정해준 지백의 원수를 갚기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예양의 고사가 시사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군자는 나를 알아준(認定) 사람을 위해 죽고, 여자는 나를 사랑해준 사람을 위해 화장을 고친다." 전국책에 나오는 이 긴 고사를 인용하는 이유는 거울을 말하기 위해서 입니다. 거울이 무엇입니까? 거울은 나를 비춰보는 것입니다. 즉 나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울을 단지 나의 용모만을 살펴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거울에 대한 예가 아닙니다. 거울은 나의 내면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귀감(龜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귀龜는 거북 귀, 감鑑은 거울 감 입니다. 


귀감(龜鑑)의 유래가 있습니다. 왜 거북이가 등장할까요? 거북이가 등장하는 것은 그리스식으로 말하면 '신탁'을 받기 위함입니다. 전에 대동大同이라는 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대동이란 신하, 백성, 임금의 생각이 통일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군주, 사대부, 백성의 생각이 통일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물어봐야 합니다. 그래서 1000년 이상 묵은 거북이를 잡아 숙뜸을 뜨고 불에 지지면, 거북의 등이 갈라지게 되는게, 이것을 보고 길흉을 해석합니다. 이것이 바로 점입니다. 중국의 사서 삼경중 삼경의 하나로 역경易經이 있는데, 이 역경이 바로 거북 등의 균열로 나타난 괘를 해석한 것입니다. 거북의 등에 나타나는 균열을 보고 점을 쳐서, 임금, 사대부, 백성의 생각이 일치하지 판별하는 것입니다. 신탁이 부정으로 나오면, 실제로 군주, 사대부, 백성의 생각이 통일되어 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군주, 사대부, 백성 그리고 거북의 점, 이 4가지가 일치해야 합니다. 거울을 본다는 것은 단순히 용모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라훌라에게 마음의 거울에 비추어 생각하고, 마음의 거울에 비추어 말하고, 마음의 거울에 비추어 행동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에 한번 했던 이야기입니다.


거울은 나를 비춰보는 것입니다. 불교는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는 것입니다.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는 모두 절대자인 신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불교는 반드시 나아갔다가 나에게로 돌아와야 합니다. 붓다는 나아가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는 그 지점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말씀하시길, "천리 만리 떨어져 있어도 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이 나와 함께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돌아와야 합니다. 어디로? 자기에게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 지점이 붓다를 만나는 곳입니다. 불교의 기본도 모르는 사람이 불교에 대한 책을 쓰고, 법문을 합니다. 사람이 거울이라는 묵자의 말은 사람을 통해 배운다는 것입니다. 나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을 배우는게 중요합니다. 우리는 나아가는 것만을 배우지만, 돌아오은 것을 배우지 않습니다.


어느 날 요란한 화장을 한 처자 둘이서 나를 찾아왔습니다.  왜 왔느냐고 물으니  쪽집게 도사인줄 알고  왔다고 해서 들어오라 해서 차대접을 하면서 몇 마디 얘기했습니다. 여러 말 중 그 친구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한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즉 그 친구들에게 한 말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책임지지 못할 말과 행동을 하지 말며, 책임질 말과 행동을 했으면 책임을 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화장하는 법을 좀 배우라고 했습니다. 화장은 포장입니다. 포장하는데 따라 제품이 달라집니다. 즉 포장에 따라 훌륭할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인터넷을 뒤져서라도 화장하는 법을 배우라고 권했습니다. 품위있게 화장하는 법을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여자아이에게는 화장하는 법, 그것도 품위있게 화장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화장빨이라는 말도 있듯이, 화장을 잘하면 그 사람이 돋보이지만, 잘못하면 그 사람이 천해 보입니다. 무당집이 왜 천해 보이시는지 아십니까? 깃발이 울긋불긋해서 천합니다. 고려시대 불화와 현대를 불화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현대불화는 화려하지만 천박합니다. 색감의 차이 때문입니다. 현대불화는 비유하기 좀 그렇습니다만, 그런 직업을 가진 여성들의 화장과 같습니다. 내가 그 친구들에게 "배워서라도 화장을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작은 것을 잘 배우지 못합니다. 개성의 차이라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 전 피카소의 그림이 980만불에 팔렸답니다. 그림 값이 그렇게 비싼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왜 피카소 그림은 그런 가치를 지니는데, 어떤 그림은 이발소에나 걸리는 그림이 될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똑같은 물감으로, 똑같은 그림을 그리는데, 누구 것은 980만달러이고, 누구 것은 이발소 그림인가요? 이발소 그림이란 시원찮은 그림을 나타내는 화단의 나름 전문 용어입니다. 예향이라고 일컬어지는 호남에 가면, 식당이나 이발소에 그림 한 점 안 걸린 곳이 없습니다. 화장도 그림과 같습니다. 돈을 들여서라도 화장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밑줄을 팍팍 쳐야 할 정도로 말입니다.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거울이 나를 비춘다는 것은 나를 배우는 것입니다. 나를 배우는 것이란 스스로 배우는 것입니다. 배운다는 것은 밖에서 찾을 일이 아닙니다. 스스로 배우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네 마음의 거울에 네 생각을 비춰보라는 것입니다. 자주 말해왔듯이 인간은 자기 생각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간이란 생각이라는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입니다. 생각이라는 도로는 누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드는 것입니다. 그 도로가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는지는 자기 자신만이 압니다. 왜냐? 도로건설자가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에게 묻습니다. 남에게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마음의 거울에 비춰보라는 것은 내가 배운다는 뜻입니다. 생각이라는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는 내가 행동하는 것입니다. 화장하는 것은 행동입니다.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집니다.


미안마의 한 사외도께서는 수행지도는 하는데, 인터뷰를 하지 않기로 유명합니다. 우리는 하루면 하루, 일주일이면 일주일 수행이 얼마나 진척되었는지 점검받고 싶어합니다. 그 사외도에 따르면 그 사람이 밥 먹고, 걷고, 행동하는 걸 보면, 즉 그의 움직임을 보면 다 알 수 있는데, 굳이 따로 물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굳이 수행자들로 하여금 입을 열어 말하게 하고, 수행자들에게 귀를 기울여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행동하지 않습니다. 현대 인지과학에서도 '움직이라'고 하는 마음의 지시가 없으면,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행동, 즉 움직임이란 그런 것입니다. 밥 먹고, 코 푸는 것이 몸이 움직여 일어나는 일 같지만,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생각의 변화는 빠른데 비해, 마음의 변화는 빨리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생각의 변화가 몸 세포 하나 하나에 각인되어야 몸이 움직입니다. 마음은 한 순간에 변화하지만, 몸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키워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내일이 시험인데도, 공부생각은 간절한데, 그것을 실천한는 데는 굼뜹니다. 그럴 때면 이렇게 야단치죠. " 너 공부 언제할려고 TV만 보니?" 그러면 아이가 대답하죠. "지금 공부할려고 생각하고 있단 말이야." 아이는 발딱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치 슬로우 비디오로 움직이는 듯 하지요. 그러면 부모님의 10에 1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확! TV안 끌래?" 그러나 아이가 공부하려 했다는 말은 진심입니다. 거짓이 아닙니다. 마음은 공부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몸의 변화가 늦은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그걸 알아야 합니다. 백설 공주에 보면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이쁘니?" 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거울에서, 즉 거울에 비춰진 내가 변화를 일으키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마음은 한 순간에 변화합니다. 그러나 행동은 마음의 변화가 세포에 각인되어야  변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도 30년 전 내 아이와 비슷한 어린 시절, 내 아이와 같은 대화를 나의 부모님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한테 그 일을 똑같이 반복하는 걸 보면, 30년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왜일까요? 마음의 변화만 있고, 행동의 변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은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나아가기란 쉽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로 돌아오기란 쉽지 않습니다. 왜?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태춘의 '다시 첫차를 기다리면서'라는 노래를 들으면, 그 노래 속에 행복의 거울이 뭣이겠습니까? 별거 없습니다. 막차가 떠나간 뒤에 첫차를 기다리는 것, 그것이 행복의 거울입니다. 여기에서도 '기다리는 것'입니다. 나를 비춰본다는 것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즉 마음의 변화가 일어난 뒤에 몸의 변화까지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봄이 왔다고 해서 금방 꽃 피는 것이 아닙니다. 싹도 트고 움도 트야 하는 것입니다.


맹자(孟子)는 공손추(公孫丑) 상(上)에서 호연지기(浩然之氣)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 반드시 의(義)를 쌓는 것을 일삼고 그 효과를 미리 짐작하지 말며, 혹 가득 차지 않게 될 경우에는 다만 마땅히 자기가 할 일이 있음을 잊지 말도록 할 일이지, 일을 꾸며서 그것이 자라나도록 도와서는 안 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하였습니다.  "중국 송(宋) 나라에 어리석은 농부가 있었다. 모내기를 한 이후 벼가 어느 정도 자랐는지 궁금해서 논에 가보니 다른 사람의 벼보다 덜 자란 것 같았다. 농부는 궁리 끝에 벼의 순을 잡아 빼보니 약간 더 자란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 식구들에게 하루 종일 벼의 순을 빼느라 힘이 하나도 없다고 이야기하자 식구들이 기겁하였다. 이튿날 아들이 논에 가보니 벼는 이미 하얗게 말라 죽어버린 것이다. 대교경(?)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농부가이 논에 벼를 심었는데, 벼가 잘 자리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벼를 도와준답시고, 벼의 목을 잡아 빼서 당겨 주었습니다. 벼는 말라 죽었습니다. 급한 것은 농부의 마음이지, 벼자체가 생육이 급한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급하다고 벼 목을 빼 올린 것입니다. 우리도 이처럼 벼의 목을 빼올리곤 합니다. 왜 나는 그러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할까요? 혹시 나는 공부를 못했으면서도, 내 아이가 천재이길 바라지는 않나요?


우리에겐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필요합니다. 부처님의 마음의 거울 얘기는 그래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내 아이, 내 남편을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도 잘 모르는데 어떻게 남을 잘 아는가?  궁금하기 그지없습니다. 우리들 중에 자기의 재능조차 모르고 죽는 사람이 90%난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남을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부분은 여기서 오류가 발생합니다. 즉 나 자신도 모르면서 안다고 하는 곳에서 말입니다. 우리는 진지하게 자신을 탐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대상을 탐구해야 합니다. 자신과 대상을 탐구하는 것이 거울입니다. 처음에도 말하였지만, 우리는 이 부분이 부족합니다. 나아가는 것은 잘하는데, 돌아오는 것을 잘 못한다는 것입니다. 수행은 바로 자기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신비적 체험이 아닙니다. 수행은 철저히 자기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자신의 생각과 행동과 말을 거울에 비추어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못합니다. 자신에게로 돌아오라는 것은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스스로의 변화 그리고 대상의 변화도 역시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한 순간에 생각이 변화되었다고 모든게 한 순간에 변화되는게 아닙니다. 우리는 한순간에 변화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변화란 굉장한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오직 기다릴 때만이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자리에 있다는 것은 그 자리에 한 순간에 변한 것이 아닙니다. 한 순간에 변해 그 자리에 가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부처님께서 2500년전에 수 없는 좋은 말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동안 인간세계는 과연 얼마나 변했습니까? 중요한 것은 아직도 그 분의 가르침이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아직 인간 세계는 여전히 많이 변화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나는 신심이 부족해서인지 몰라도, 붓다, 예수, 마호멧, 묵자, 공자 이런 분들의 말이 필요없는 시대가 좋은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즉 그 분들의 말이 필요없다면, 그런 말들이 필요없을 정도로 세상이 변화되어 좋은세상이 되었다는 뜻일테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나는 부처님께 늘 감사합니다. 부처님이 안계셨더라면 내가 굶어 죽었을 판이었을 겁니다. 원님 덕에 나팔 분다고 내가 그렇습니다. 나뿐만이 아니라 그런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변화라는 것이 그렇게 급격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슬로비디오가 작동하는 것처럼 천천히 이뤄집니다. 우리는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시면 어떤 말씀을 하실까에 관심을 둡니다. 그러나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말을 중요시할까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그 분의 말씀 때문이겠지요. 내가 팔아먹을 말씀이 필요한 것이지, 깊고 깊은 실천 철학이 필요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마음의 거울에 비추어보라는 부처님의 말씀이 없었다면, 지금 이 시간에 어찌 내가 이런 말로 강론을 하여 부처님을 팔아먹을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은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에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행동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사실 이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것은 자유라고 흔히 주장하지만, 내가 행동하는 것이 자유라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 자유라고 하면서, 내가 하는 일에 웬 참견이냐고는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길을 가다가 어느 집 담장 안의 사과나무 가지가 담장 밖으로 나와 길 위에 있으면, 따먹어 볼까 생각은 하지만, 실제로 따먹지는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손을 뻗어 사과를 따는 순간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한다고 바로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따라'고 지시해야 비로소 행동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생각의 거울에 비추라는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생각이라는 도로를 달리고 있습니다. 항상 자기 자신을 비춰보세요.


우리는 대상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잘 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과연 그러한가? 누구나 말 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과연 그러한가. 오늘 강론 주제가 거울입니다. 거울이란 나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처음에 말했다시피, 우리는 절대 자기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오직 거울이라는 요긴한 물건을 통해볼 수 있습니다. 어떤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80년을 산다고 할 때, 10년 정도의 세월은 거울 보는데 시간을 보낸다고 합니다. 여성들이 일생에서 거울 앞에서 보내는 시간은 더 많은 것입니다. 꽃미남이라는 말도 있듯이, 요즘은 남자들도 거울을 보게 되는데, 고무적인 현상입니다. 기왕 거울을 보는 김에 얼굴만 보지 말고, 자기 자신의 내면의 마음을 보십시요. 부처님이 내면을 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보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볼 때 진리를 볼 수 있습니다.


불교는 나아감이 아니라 돌아옴입니다. 돌아오는 그 지점에서 붓다를 만날 수 있습니다. 나에게로 돌아올 때, 그것이 마음의 거울에 나를 비춰보는 것입니다. 항상 마음의 거울을 잘 간직하십시요. 마음의 거울은 어느 누구도 대신 비춰줄 수 없습니다. 자기자신만이 비춰 줄 수 있습니다.부처님이 구원한다는 것은 내 스스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즉 불교에서는 내가 구원받을 짓을 해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구원받을 짓을 해야 부처님이 구원해 줍니다. 즉 내가 구원받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나를 구원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자신이 주인"이라고 했습니다. 네 자신이 주인이라는 말은 네자신이 주인이라는 것을 거울에 비춰보는 것입니다. 오늘 강연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6월 첫주부터는 매주 수요일 법구경 강의를 하겠습니다. 책은 법정스님이 번역한 싯구로 이루어진 <진리의 말씀, 법구경>(이레)입니다. 법정스님을 추모하는 의미도 담겨있습니다.


 

 

혜천스님 - 초기불교전공 흥천사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