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열매가 익으면 반드시 재난 당한다

2017. 11. 12. 18:4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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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열매가 익으면 반드시 재난 당한다 / 묘허스님
(단양 방곡사 회주)
우리가 불교를 믿고 법문을 듣고 수행을 하면서도 내가 무엇 때문에 혹은 무엇을 위해서, 또 무엇을 깨치기 위해서 불교를 믿는가를 잘 모르고 공부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가 불교의 진리를 깊이 알고 들어가보면 우리의 본래 모습 즉 ‘자성’인 참나가 불생불멸(不生不滅)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죽지도 않고, 오지 않았기 때문에 가지도 않고, 더한것도 없기 때문에 덜한것도 없고, 본래 더러운 것도 없기 때문에 깨끗한 것도 없는 것이 우리의 본래 모습이요,
자성(自性)이요, 참나입니다. 
바로 이 참나를 발견하는 것이 불교공부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참나는 불생불멸하다고 했는데 어떻게 우리 눈앞에서 
나고 죽고 오고감이 이루어 질 수 있을까요? 
우리 중생 스스로가 참나를 망각하고 오직 부모에게 받은 

이 육체에만 집착해 일생동안 이 육체의 앞잡이 노릇과 종노릇하면서

이 놈만 행복하게 해주려고 업(業)만 짓고 사는 것이 중생입니다.

그러다보니 우리 몸뚱아리의 안락만을 위해 육도를 전전하면서 윤회전생하는것, 이것이 우리네 중생들의 삶입니다.


그러면 생사의 근본 , 윤회의 원인은 무엇인가? 바로 업이지요. 이 업이 태어나고 죽음의 근본이 되고 윤회전생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업이라는 말을 일상생활에서 굉장히 많이 사용하고 있어요. 그러면 그 업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살면서 일이 뜻대로 잘 안 풀릴 때 뭐라 그럽니까. 전생에 업이 얼마나 많은지, 업장이 얼마나 두터운지, 아이구 이래도 업이 다 소멸되지 않았는지 이런식으로 업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너 대체 업이 뭔데?”하고 물어보면 분명하고 똑떨어지게 대답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어째서 그러냐 하면 이 업이라는 말의 어원이 본래 우리말이 아닙니다. 업은 산스크리트어로 ‘카르마’인데 이것이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중국땅으로 불교가 전해지면서 한문으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바로 업(業)자를 사용하게 됐어요. 업을 가장 알기쉽게 얘기하면 무엇이냐, 우리가 하고 있는 일, 내가 하는 행위,

그 자체가 업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상대방이 하는 일을 물을 때 뭐라고 합니까. “네 직업이 무엇이냐?” 그러지요

이것도 결국은 현재 하는 일 즉 업을 묻는 것입니다. 내 직업은 상업이다, 농업이다, 공무원이다 그럽니다.

이것도 일종의 업이지요. 그러나 그 이전에 했던 일거수일투족 행위 자체도 업 아닌 것이 없지요. 업은 크게 ‘사업(思業)’과 ‘사기업(思己業)’으로 나눕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다른 종교와 달리 선악시비를 누가 만들어 설정해 놓은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럼 누가 만들어 놓은 것도 아닌데 우리 목전에 선악과 시비가 왜 나타나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선악의 원인은 우리가 일으키는 한 생각에 있습니다.

한 생각 일어나는 마음, 이것이 선악의 원인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선과 악으로 갈라질까요. 악한 마음이 일어나는 순간이 바로 죄가 되는 순간이요, 그다음에 착한 생각, 어진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이

바로 복이 되는 순간입니다. 아예 이 생각 자체를 끊어 버리면 죄도 없고 복도 없어요. 여기서 일어난 생각, 좋고 나쁜 생각 등

그 생각 자체를 ‘사업(思業)’ 이라고 합니다. 이 사업은 꺼 버리면 업이 되질 않는데,

이것을 마음속으로 결정지어 버리면 ‘작위업(作爲業)’ 즉 ‘사업’ 이라고 합니다.

또 결정지어진 생각을 우리 몸뚱이가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행위업(行爲業)’ 즉 ‘사기업’이라고 하지요. 그것을 통칭해 우리가 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약해 말하면 이 사바세계에서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다 업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일생동안 우리가 지은 업은 끝이 없습니다.

그 셀 수 없는 업을 또 나누어 보면 선업과 악업, 무기업 등 세 가지로 다시 나눌 수 있습니다. 자신과 상대가 함께 도움이 되고 득이 되는 행위가 선업이고, 자신과 상대에게 피해를 미치는 것이 악업이며, 자신과 남에게 해도 득도 모두 안되는 것이 바로 무기업입니다. 무기업은 힘이 없는 업, 무기력한 업을 말합니다. 왜 나같이 힘없는 늙은이를 무기력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이해하면 쉬워요. 이런 업들을 우리는 몇가지 신체기관으로 짓게 됩니다. 신구의(身口意) 즉 몸과 입과 뜻을 의미하는데,

이것을 바로 신구의 3업이라고 합니다. 첫째, 몸으로는 살(殺), 도(盜), 음(淫)을 행하게 돼 있습니다. 바로 몸으로는 세가지 업을 짓게 돼 있지요.

둘째, 입으로는 네가지 업을 짓는데 망어, 기어, 양설, 악구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뜻으로는 탐, 진, 치 세가지 업을 짓지요. 신구의 기관을 통해 나쁜 행위를 저지르면

악업이 되고 참으면 선업이 되지요. 업에는 또 나와 남이 함께 어떤 행위에 대해 책임져야 하는

‘공업(共業)’ 이 있고, 그 과보를 혼자 돌려 받는 ‘불공업(不共業)’이 있습니다. 이와같이 업의 종류는 다양하고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구의 3업을 통해서 한번 짓고 저질러 놓은

업은 백겁 천겁 만겁이 지나가더라도 없어지지 않고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자기 스스로가 다 돌려받게 됩니다.

그런데 돌려받을 때에는 또 어떻게 받느냐 하면 선업은 선보(善報), 좋은 일을 하면 좋은 결과를 불러 올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생겨요. 내가 좋은 일을 해놨는데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악업은 악보(惡報)라 했지요. 나쁜일을 지어 놓았으면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힘과 능력은 있지만 좋은 결과를 가져 올 수는 없지요. 이렇게 이야기 하면 이렇게 질문하시는 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내가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해만 끼치고 덕만 보려는 못된 사람인데 지금은 굉장히 부자인 반면, 어떤 사람은 자신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에게 제것을 나눠줄 만큼 착한 사람인데 가난하게 삽니다.

이것은 어떤 이유 때문이지요? 스님이 설명하시는 인과법대로라면 맞지 않는 것 아닙니까”라고 말입니다.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그런 사람들을

우리 주위에서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 질문에 저는 <법구경>의 구절로 답을 하지요. ‘악의 열매가 맺기 전에는 악한 자도 때론 복을 만난다. 그러나 악의 열매가 익었을 때 악한 자는 반드시 재난을 당한다. 선의 열매가 맺히기 전에는 선한 이도 이따끔 화를 만난다. 그러나 선의 열매가 익었을 때 선한 사람은 복을 받는다’고 말입니다. 악한 자가 지금 잘사는 것은, 잠시동안이나마 그 사람의 지난 업의 과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 선업을 짓지 않는다면 업의 열매가 익었을 때 그 사람의 복덕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지요. 반대로 선한 자가 현재 못사는 것도 지난 업의 결과 입니다. 하지만 좋은 업을 짓다보면 언젠가는 좋은 결과가 분명히 옵니다. 업에 대한 과보를 받는 것도 세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순현보(順現報)라는 것이 있습니다.

현재의 업을 현생에서 그대로 받는 것입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교도소 입니다. 교도소 담장안에 수인의 몸이 돼서 징역을 살고 있는 죄수들, 전생에 진게 아니고 바로 금생에 지은 업 때문에 과보를 받는 것 아닙니까? 나쁜 생각을 생각에서 꺼트렸으면 괜찮은데 그만 그것을 행동으로 옮겼기 때문에 과보를 받는 것이지요. 둘째, 금생에 지어서 내생에 돌려 받는 업이 있어요. 이것을 순생보(順生報), 순차보(順次報)라고 합니다. 셋째, 금생에 지은 업이 업에 밀려가지고 내생에도 그 결과 과보가 도래되지 아니하고 저 후생까지 뻗쳐 나가는 업이 있어요. 그것을 순후보(順後報)라고 합니다. 언젠가는 바로 그 과보를 돌려받는데, 금생에는 어질고 착하고 선한데도 불구하고 뭔가 마음대로 잘 안 풀려나가는 사람은 지금 짓고 있는 업이 아직 설익은 업이라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농사를 지어놨어도 맛이 있거나 없거나

먼저 지어놓은 곡식 먼저 먹어야지, 미리 지어놓은 곡식 맛없다고 아직 익지도 않은 설은 것을 먹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이치와 같습니다. 다시말해 지금 짓고 있는 업은 아직 익지 않은 설은 업이지만 전생에 지어놓은 업덕으로,

지금은 비록 악한자라도 잘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 선업을 짓지 않는다면 이 업은 생유와 본유, 그리고 사유와 중유에서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자궁에 자리잡고 있을때인 입태, 세상에 나오기전까지 뱃 속에 있는 동안의 처태, 태어남의 출태,

이 세가지를 한마디로 생유라고 하고, 태어나서 일생을 사는 동안을 본유라고 합니다.

한 평생 살다가 죽으면 사유라고 하는데, 이는 다시 태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입니다. 그런데 죽어서 다시 이생으로 돌아올 때 까지를 중유라고 하지요. 따라서 우리는 생유에서 본유로, 사유에서 중유를 통해

다시 사유를 거쳐 생유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생에서 사로 가면 돌아가신 것이지만, 사에서 다시 생으로 오니 돌아오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렇게 윤회와 업연의 원리를 정확히 알면 금생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답이 정확히 나오지요. 불자여러분들, 조금 힘들더라도, 때론 달콤한 유혹이 들더라도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순간 선업을 쌓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내생생히 평안하고 더 달콤합니다. 정리=김주일 기자·사진=박재완 기자 묘허 스님은 1943년생. 1957년 상주 남장사에서 한산당 화엄 선사를 은사로 득도했다. 1963년 불교전문강원 대교과를 졸업했다.

1965년 월하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한 이후, 성암강백 화상 밑에서 대교이력 및 <전등록>을 이수하고

이후 제방에서 정진하였다. 특히 통도사 보광선원 수선안거이래 11하안거를 성만했다. 1975년 은해사 말사 법주사 주지를 거쳐,

1979년 신탄진 신흥사 주지를 역임했다. 현재 대전 신흥사 김해 원명사 단양 방곡사 회주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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