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1. 5. 16:27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다르마를 보라
혜천(嵇瀳)스님의 일요강론 (1월 3주차: 불기2554년 1월 17일)
오늘 강론 주제는 '다르마를 보라'입니다.
이번 주 금요일부터 다음 주 금요일까지(1월15일부터 1월25일까지), 즉 음력 12월 초하루부터 초파일까지의 기간을 불교에서는 성도재일 기간이라 하여, 특별히 선원에서는 1주일간의 용맹정진 합니다. 용맹정진의 의미와 유래는 부처님이 12월 8일 반월에 성도를 이루었기에,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1일부터 8일까지 잠을 자지 않고 정진하는 수련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번 주 주제를 다르마를 보라로 정했습니다.
통상적으로 쓰는 법이나 진리라는 말을 쓰지 않고, 원어 다르마Dharma를 그대로 쓰는 이유는 다르마라는 원어가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법은 진리라는 단 하나의 의미를 지니지만, 다르마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다르마는 크게 네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즉 1)진리의 입법, 2) 우주 만물의 법칙, 3)인간 개개인의 일상에서 부딪치고 경험되어 지는 것, 동시에 4)사회적인 질서(=규칙과 법칙), 즉 만유의 존재법칙을 뜻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선거를 치른 것, 세금 내는 것도 모두 다르마입니다. 오늘 강론에서 다르마라는 원어를 그대로 쓰는 이유는 이런 포괄적인 의미 때문입니다.
다르마의 포괄적 의미를 중국의 한자나 우리말로는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인도에서는 다르마로 통용되는 의미가 50여가지나 된다고 합니다. 인도에서는 다르마를 단순하게 보지 않는데, 그래도 인도 사람들은 그 의미를 알아듣습니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호남 사람들이 '거시기'라는 표현과 비슷합니다. 거시기에는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들은 그 속의 특정한 의미를 알아듣습니다. 다르마도 마찬가지 입니다.
여러 불자들께서는 보통 불교의 종교적 성격이 무어냐고 물으면 무어라 답하십니까? 아마 대개의 경우는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 답할 것입니다. 즉 깨달음을 얘기합니다. 또 그렇게 배워오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 동안은 은근슬쩍 에둘러 말해왔지만, 오늘은 그대로 제 진 심을 말하겠습니다.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 정의하는 것은 부처가 살아 있던 때가 아니라 후대의 얘기입니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기술되어 잇는 아함경을 보면, 불교의 근본은 다르마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나 이슬람교가 신의 종교라면 불교는 다르마의 종교입니다. 불교에서 내세우는 것이 다르마입니다. 불교에서 믿고 있는 것은 다르마를 믿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수행한다는 것은 다르마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르시길, '법을 보는 자 나를 본다'라고 하였습니다. 아함경에서 부처님이 바카리비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바카리야 누웠거라. 장차 썩을 몸(육신)을 보아 예배해서 무엇하리. 진리를 보는 자가 나를 볼 것이요. 나를 보는 자가 진리를 볼 것이다. 누웠거라" 또한 여시어경(如是語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원문에는 비구로 되어있음) 내 가사자락을 붙들고 내 발자취를 그림자처럼 따른다 할지라도 만약 그가 욕망을 품고, 남을 시기하고, 미워하며, 그릇된 소견에 빠져있다면 그는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고 나 또한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거나 다름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법을 보지 못하고 법을 보지 못한 자는 나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붓다는 진리의 뜻입니다. 붓다는 다르마를 보는 자가 나를 본다고 말합니다. 즉 다르마가 붓다인 것입니다.
강론주제를 '다르마를 보라'로 정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음력 12월 8일 부처님이 새벽 샛별이 빛나는 것을 보고, 다르마를 알았다고 합니다. 부처님은 다르마를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르마는 내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다르마를 아는 것은 "버려진 고성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깊은 밀림에 고대 도시가 있고, 어떤 사람이 그 고대도시의 고성을 발견하는 것이 다르마를 아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자신이 다르마라고 한 적도 없고, 다르마를 만들었다고는 더 더욱 말한 적이 없습니다. 부처님을 표현하는 말 가운데, 길을 나신 분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것은 선도하는 분, 만드신 분이라는 뜻으로, 여기서 길은 다르마의 길입니다. 불교는 다르마의 종교입니다. 내가 귀의한다는 것은 다르마에 귀의한 것이며, 내가 믿는다는 것은 다르마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붓다는 붓다를 인격의 붓다로 보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있습니다. 오직 다르마로서의 붓다를 보라는 것입니다.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 하는 것은 엄격하게 말하면, 불교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를 적어도 곡해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다르마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직지인심 견성성불 (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 성품을 보고 부처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마음을 보라는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를 비롯해 동남아의 불교들은 마음을 보는 것이 깨달음이고, 이것이 곧 부처의 가르침이라고 왜곡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보는 것은 다르마를 보기 위함입니다. 마음을 보는 것이 궁극의 진리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국 불교에 중국선종의 전통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스님들의 말이 대게 이 중국 선사들의 말입니다. 이 전통에 따라 오직 마음을 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깨달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악한 견해입니다. 부처님은 다르마를 보라고 했지, 마음을 보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동남아 수행의 기본서인 대념처경에서는 수행을 네 단계로 나눕니다. 첫째, 몸(루빠)를 보고, 둘째, 몸을 본 다음 느낌(외다나)을 보고, 셋째, 몸을 본 다음 마음(짓다)를 보고, 넷째, 마음을 본 다음 다르마를 보는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몸, 느낌, 마음을 보는 것은 결국 다르마를 보기 위한 것입니다. 몸을 보아야 느낌을 볼 수 있고, 몸을 보아야 크다 또는 작다는 느낌을 보는 것입니다. 그 느낌을 보고 나서 마음을 보는데, 마음은 더 미세합니다. 마음을 본다는 것은 진심을 본다는 것입니다. 진심에 돌아가 진심에 처할 때 '다르마'를 보게 됩니다.
고타마 싯타르타가 보리수 아래 앉았을 때, 고행과 수행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보리수 나무 아래 깨달음을 이룬 후 네란자라 강에 목욕 후 수타자의 우유 공양을 받았다는 얘기와 더불어 성도 후 1주일 앉았다는 기록은 있지만, 우유죽을 먹고 며칠 동안 그 곳에 머물렀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나무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이 나무는 비팔라 나무 입니다. 지금의 보리수라 불리는 원래의 나무는 죽고, 원래 나무의 가지로 자란 스리랑카의 나뭇가지를 다시 옮겨와 심어 지금 그 자리에 있으니 부처시대 보리수의 손자 나무인 셈입니다.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는 말이 있지만, 이걸 보면 나무 팔자도 그렇습니다. 이처럼 부처님이 성도한 그 위의 나무는 보리수라 해서 성수(聖樹)로 대접받습니다. 그러나 어떤 나무는 살고, 어떤 나무는 죽습니다.
일본의 도오겐(道元)선사는 카마쿠라 막부의 쇼군의 초청을 받았는데, 그가 땅을 주려 하자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제자가 그 땅을 받아 가지고 돌아옵니다. 그리고는 불같이 화를 내면서 땅문서와 함께 스님을 버립니다. 그도 모자라 스님이 앉았던 자리를 3M나 파 버렸다고 합니다. 부처가 앉았던 곳의 나무는 성수로 대접받지만, 그 스님이 앉았던 자리의 땅은 파내어집니다. 불교는 해석입니다. 어디서 무엇을 이끌어 오느냐는 내 눈에 달려 있습니다. 저는 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저는 부처님의 얘기를 전하는 전교사(傳敎師)일 뿐입니다. 그래서 근거를 가지고 말합니다. 목동이 풀을 끊어 깔고 앉으면, 그저 풀이지만 붓다가 깔고 앉았기 때문에 길상초(吉祥草)가 되었습니다.
"내가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일어나지 않겠다"는 붓다의 마음이 금강심입니다. 금강신이 곧 보살심입니다. 성도를 이루기 전날의 부처는 보살(원어 보티 사트바)이니 보살심이며, 그 이후 붓다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보살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보살이 아닙니다. 오늘은 진심을 말하려 합니다. 위나라에서는 보살이 그저 절에 흔한 낙엽 같습니다. 절에 다니는 여성 불자를 보살이라 불러서는 안 됩니다. 과공(過恭)은 비례(非禮)라고 했습니다. 보살리라는 이름을 붙이려면 금강심이 있어야 합니다. 고타마 싯타르타가 보리수 아래에 앉은 그 마음이 금강심입니다. 한국불교는 시장터로 전락했습니다. 그래서 보살리라는 말도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보살이라는 이 중요한 용어가 그저 시장바닥의 떨이처럼 팔려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악한 일이 있을 수 있나?
부처님이 피팔라(Pippala) 나무 아래에서 샛별에 눈이 맞는 순간 얻었다는 깨달음은 진리의 체험입니다. 남방 불교의 위빠사나 수행처럼 콧구멍으로 숨을 센다고 또는 우리 불교처럼 화두를 붙잡고 간화선의 수행을 한다고 진리를 체험할 수 있을까? 화두의 대표적인 것으로 주주 삼전어라는 것이 있습니다. 200여 년 전 조주스님이 대중의 심기를 일전하기 위해 말씀하시길 "흙으로 빚은 부처는 물을 건너지 못하고, 금으로 만든 부처는 용광로를 지나지 못하며, 나무로 만든 부처는 불구덩이를 지나지 못한다.[擧. 趙州示衆三轉語. 泥佛不渡水 金佛不渡爐 木佛不渡火.]고 했습니다. 이 무슨 회괴한 사악한 견해란 말씀입니까? 동해 바다에 던져 버려야 할 생각들입니다. 주자의 대학 장구에 나오는 표현처럼 '혹세무민'하는 자들은 쓸어 담아 동해에 던져버려야 합니다. 어제 내가 도자기 전시회에 갔을 때 조주 삼전어라는 말이 생각 났습니다.
그렇다면 다타마 싯타르타는 도대체 그 나무 아래에서 무엇을 하였던 것일까? 저는 사람이 그다지 모자라서 그런지 나사가 빠져 있어서인지 불교를 접하고 나서 이와 같은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정말로 그러한가? 생각이란 자동차가 달리는 길과 같습니다. 우리는 생각의 도로를 자동차를 몰고 달립니다. 인간은 자기 생각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나는 객관적인 것을 주장하고 합리적인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경멸합니다. 인간은 철저히 주관적인 것입니다. 즉 인간의 자신의 눈높이에서 보고, 자신의 눈높이에서 듣고, 자신의 눈높이에서 알게 됩니다. 대승경전인 법화경에 보면, 사실 여부를 떠나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했을 때 소승은 눈먼 소경, 귀머거리였다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은 눈높이가 맞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눈높이 이상 볼 수 없습니다. 인간은 객관적이 않다. 인간은 합리적이지 않다. 오직 주관적이다. 우리가 주관적이기 때문에 합리적, 객관적이라는 말과 주장이 나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피팔라 나무 아래서 사색한 것은? 그는 무엇을 사색했을까? 인간이 버리기 어려운 것이 습(習)이라 했습니다. 습의 조자철학을 보면, 날개 또는 깃우(羽)+흰백(白)으로 솜털이 희고 뽀송한 새의 새끼를 말합니다. 그래서 習은 어미의 날개 짓을 배운다는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습學習에도 '익힌다는 의미의 이 글자를 씁니다. 습은 내가 밟아온 길입니다. 우리는 내가 밟아 온 길을 쓸어버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관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붓다가 진리를 체현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체현했을까? 들숨과 날숨을 관찰함으로써? 화두를 참구함으로써?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건 허무맹랑한 소리입니다. 위빠사나는 부처님의 수행 방식을 하나로 정리한 것에 불과합니다. 부처님이 처음부터 12연기를 말한 것일까? 이것은 후대에 정리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는가? 진심으로 돌아가 진심에 처했습니다. 과거의 습을 씻어버렸습니다. 과거에 내가 배우고 경험한 모든 것을 깨끗이 씻어버렸습니다. 그렇게 하고나면, 고타마 싯타르타의 진심이 드러나게 되고, 진심이 드러남으로써 비로소 담마의 길을 걷게 되고, 그렇게 되니까 담마(다르마)을 알게 된 것입니다. 다르마를 안다는 것은 다르마를 체현했다는 것입니다.
인도의 신화에 창조주주인 브라만 신이 있습니다. 신화에 따르면 창조주인 이 신은 원래 다르마의 원리를 신격화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브라만은 인간의 길흉화복과 우주 질서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길흉화복에 개입하는 신은 인격신입니다. 인도의 시바, 기독교의 야훼가 그렇습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인격신의 인간 살해에 비하면 연쇄살인범 온보현은 선한 양입니다. 미국에 카트리나 허리케인이 불어 닥쳐 수많은 인명과 재산의 피해가 일었을 때, 미국의 한 목사는 그 원인을 동성 연애하는 흑인이라고 했습니다. 왜 죄 없는 인간을 죽이는가? 인간에게 죄가 있다면 인간이 대가를 치러야지, 노아의 홍수처럼 왜 수 많은 동물들이 죽어야 하는가. 인격신은 개개의 인간보다 더 저열하고 흉악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죽이고도 아무렇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노아라는 사람은 왜 살려두는 것인가? 그도 죽이고 다시금 제대로 만들면 되었을 것을. 기독교가 선해지려면 구약을 버려야 합니다. 현대사회에서 기독교는 선한 척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인격신이 가진 한계때문입니다.
브라만은 자연신이라서 길흉화복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다르마의 원리를 얘기하기 위해 부처님이 12월 8일 다르마를 깨달았다는 데서부터 얘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다르마와 붓다는 분리할 수 없습니다. '다르마를 보는 자가 나를 본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불교는 인간 붓다 고타마 싯타르타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붓다 자신도 인간인 붓다를 경배하라 말한 적이 없습니다. 붓다는 오직 다르마를 보라고 말하였습니다. 불교는 다르마를 보는 것이며, 그래서 불교는 다르마의 종교입니다.
즉심시불(卽心是佛). 마음이 곧 부처, 마음 속 부처는 사악한 견해입니다. 마음이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불교는 마음을 실체가 있는 것으로 말하고, 그 마음이 윤회한다고 말합니다. 한 마디로 깨 풀 뜯어먹는 소립니다. 동네의 개가 왜 짖어댑니까? 그래도 맨 처음 짖는 개는 뭘 보아서 그렇다지만, 동네 개들은 이유 없이 그저 따라 짖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꼴입니다, 즉 짖는 개에 따라 짖는 개꼴인 것입니다. 앞서 말했지만 저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나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짖을 뿐입니다. 난 본 것이 없습니다. 그저 따라 짖을 뿐입니다. 부처는 마음을 보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다르마를 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불교의 붓다 말씀은 다르마를 인도하는 것이며, 다르마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최초의 제자가 된 콘단냐(Kondanna:倧蓮如, 교진여)에게 콘단냐가 도반을 얻었으며, 콘단냐가 다르마의 눈을 얻었다고 했지 마음을 보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은 45년간 설법했습니다. 예수님은 3년간 말했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말한 것을 일요일 마다 말하고 있는 저도 딱합니다. 중국의 선사는 수승해서인지, 누가 물으면 덕산은 통이 커서 몽둥이질로, 임제는 할, 즉 소리를 질렀다지만, 내가 그랬다간 뼈도 못 추릴 것입니다. 혹은 혼천가는 구 도로 고갯길 병원에서 평생 나오지도 못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저 시지부리 짖는 것일지도 또는 시대를 잘못 만난 불행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직 다르마를 보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다르마를 본 것은 과거의 습을 쓸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습을 버리지 못합니다. 끌어안고 버리지 못합니다.
도자기 전시회에서 바우 최창석께서 말하기를 깨어 버렸어야 할 초기의 작품이 그 당시 그저 줘버려 지인들에게 집에 있는 걸 보고나서 얼굴이 화끈거려 없앨 요량으로 되돌려 달랬더니, 심지어 바꿔 준대도 돌려받지 못했다는 말을 했는데, 성인의 말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은 절대 자기에게 들어온 것은 내어 놓지 않습니다. 비록 그것이 청산가리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습, 즉 내가 밟아 온 길을 버리지 못합니다. 부처님께서 수자타에게 우유죽을 공양 받고 피팔라 나무 아래에서 무엇을 했을까? 나는 당신이 밟아 온 길을 되밟아 갔을 것으로 봅니다.
'보면 사라진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 잇는 것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마음 속에 가라앉아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예를 들면 장마가 져 물이 불면서 소양강물은 흙탕물이 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면 가라앉겠지요. 그러나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면 강물 속 흙탕물이 일어나게 됩니다. 남방불교에서는 마음을 보라고 합니다. 그것을 보면 상처받은 것이 드러나고,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순간 그것은 사라지고 다시 떠오르지 않게 됩니다. 부처님은 자신이 밟아 온 길을 되짚어 갔을 것입니다. 가면서 그 자취를 없앴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제 표현입니다. 되짚어간 사람은 없애야 할 자취가 없습니다. 되짚어간 사람은 본래의 진심으로 돌아가 진심에 처하게 됩니다. 그 천연 지성의 바탕으로 다르마를 본 것입니다. 그래서 붓다가 다르마가 된 것입니다.
그 분이 인간으로 온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 붓다일 필요는 없습니다. 거기에 합리적일 필요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그림을 그리고 10억의 가격을 매깁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던 내 그림은 10억의 명화입니다. 오늘 무식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를 하겠습니다. 고호나 고갱의 그림이 수백억의 가치를 지닌다고들 합니다. 제가 TV를 안봅니다만, 요즘 <아마존의 눈물>인가를 한다지요. 고호그림을 그들 부족에게 가져가면 아마 달 한리도 바꿀 수도 없을지도 모릅니다. 수백억을 주고 그 그림을 사는 사람, 닭 한 마리도 바꾸지 않는 밀림의 부족 중 누가 미친 것입니까? 중국의 왕희지는 서성이라 불렸습니다. 그것도 따지고 보면, 황제인 당태종 이세민이 그의 글씨를 좋아하고 수집했기 때문입니다. 황제의 사랑을 받는 여자가 최고로 이쁜 여자입니다. 최고 권력자가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왕희지의 명성 또한 적어도 300년 동안은 권력자 당태종 덕분이었습니다. 당태종의 아들이 고종, 그 아들이 현종인데, 아버지의 평가를 아들이 뒤엎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약 뒤집는다면 불효자가 될 것이고, 불효자는 죽여도 할 말이 없는 것이 그 시대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왕희지의 글씨는 위작과 가짜도 많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예전에 화가 천경자의 가짜 그림 파동이 있었습니다. 천경자는 그 위작에 대해 자신이 그리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졌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가 그리고도 그 사실을 잊어버렸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이 일로 한국을 떠났습니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할까요? 한 번 정해지면 그것에 따를 뿐, 설이 한 번 만들어지면 뒤집기 어렵습니다. 부처님 말씀도 이와 같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의 존재는 증명할 수 없는데, 그래서 신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다르마를 보라고 강연하는 것은 불교가 다르마를 보는 것이라고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마음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보는 것은 달을 보라는데, 손가락을 보고 있는 꼴입니다. 불교의 잘못이 여기에 있습니다. 다르마를 보려하지 않는 것, 다르마를 보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마음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실체가 아닙니다. 일심(一心), 마음을 보다 라는 말을 모두 잘못되었습니다. 다만 마음은 흐를 뿐입니다.
우리가 인격의 붓다를 경배해서는 안 됩니다. 인격신을 말한 것은 이해에 도움을 드리기 위해 인용한 것입니다. 인격의 붓다가 아닌 오직 다르마의 붓다를 보십시요. "다르마를 보기 때문에 나를 본다"는 구절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지난 주 강론에서 여시어경<如是語經)>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어떤 사람이(원문에는 비구로 되어있음) 내 가사자락을 붙들고 내 발자취를 그림자처럼 따른다 할지라도 만약 그가 욕망을 품고, 남을 시기하고, 미워하며, 그릇된 소견에 빠져있다면 그는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고 나 또한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거나 다름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법을 보지 못하고 법을 보지 못한 자는 나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2550 여 년 전 12월 8일 반월에 새벽의 샛별을 보고 붓다는 진리를 체현하셨습니다. 그것은 붓다가 스스로 걸어온 길을 밟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고의 전환이 온 것이며, 생각이 바뀐 것입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생각이란 자동차가 달려온 길입니다. 생각이 바꾸지 않는 한 콧구멍에 산소 줄을 꽂고 들숨 날숨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 산 속에서 조주 삼전어를 타파하는 것 모두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느니 차라리 술 마시고 삼바 춤을 추는게 낫습니다. 다르마를 보려면, 내 머리를 씻어 세척해야 합니다. 즉 과거의 습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다르마의 길을 걷게 되고, 알게 되고, 체현할 수 있게 됩니다.
다르마는 앞서 정의한대로 일상이자 우주만물의 법칙입니다. 우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느끼지도 알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붓다의 말을 따라 할 뿐, 그의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저 동네 개처럼 그의 말을 짖을 뿐입니다. 이는 절대로 겸사의 말이 아닙니다. 잇는 그대로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다르마를 보라. 그래야 붓다를 본다. 다르마를 보지 못하면 붓다를 보지 못한다. 그러면서 어떻게 붓다를 만나고,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수행자가 붓다의 소문을 듣고 붓다를 만나보기를 작정하고 길을 떠납니다. 그러나 그는 정작 어느 날 붓다와 한 지붕 아래 잠들고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길을 떠납니다. 제가 스스로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붓다가 속이고 감추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붓다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혜천스님 - 초기불교전공 흥천사주지
커피 한잔과 혼자 듣는 클래식 12곡 모음
01.파가니니 / 바이올린과 기타를 위한 소나타 작품2 1번 04:27 02.파가니니 / 바이올린과 기타를 위한 소나타 작품2 4번 02:39 03.파가니니 / 바이올린과 기타를 위한 소나타 작품2 6번 05:10 04.베토벤 / 바이올린 소나타 5번 '봄' 2악장 06:24 05.비발디 / 바이올린협주곡 '라 스트라바간차' Op.4 No.10 1악장 03:06 06.쇼팽 / 야상곡(Noctum in E Flat. Op.9 No.2) 05:20 07.차이코프스키 / 야상곡 Op.19 No.4 01:17 08.모차르트 / 피아노협주곡 제21번 2악장, 안단테 06:43
10.하이든/교향곡 제6번 D장조 H 1 No.6 '아침'(Le Matin) 3악장(Menuetto & Trio) 04:32 11.토셀리 / 세레나데<바이올린> 연주 03:40 12.멘델스존 / '노래의 날개위에'(Auf Fluegeln des Gesanges,Op.34-2) 관현악연주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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