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2. 17. 16:31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사랑
혜천(嵇瀳)스님의 일요강론-(12월 2주차: 불기2553년 12월 12일)
부석사(浮石寺): 자인당 (慈忍堂 扁額)
선방의 용도로 사용된 건물이였으나, 부석사의 동쪽으로 약 1.5km 떨어진 폐사지에서 옮겨 온 석불을 이곳에 이안하고 당호를 '자인당'으로 고쳤다. 이는 곧 부처님을 자인(慈忍) 대사라 하는 데서 따온 것이다. 출처: http://www.koreatemple.net/
이번 주 강론 주제는 사랑입니다.
그러면 왜 자비라는 말이 있는데 사랑이라고 주제를 정했느냐는 의문이 들 것입니다. 불교에서 흔히 쓰는 慈悲라는 말은 두 가지 단어의 복합어입니다. 자비란 산스크리트어 원어로 메타 까루나( maitrī-karunā ), 慈와 悲의 복합어인 것입니다. 자란 사랑으로 번역되고, 비는 연민과 동정으로 번역됩니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말과 자비라는 말은 엄밀히 보면 다릅니다. 불교의 핵심사상으로 자비사상을 말하고, 불교의 가르침으로 자비의 가르침을 말하지만, 사실 부처님 당시에는 자비라는 말이 없었습니다.
불교도의 수행에 있어서의 핵심 덕목으로 흔히 사무량심(四無量心이 얘기되고 있습니다. 그 4가지는 자(慈)·비(悲)·희(喜)·사(捨) 입니다. 慈는 사랑, 悲는 연민, 동정, 喜는 기뻐하는 마음, 舍는 치우치지 않는 마음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는 상대에게 기쁨을 주는 것, 비는 상대에게 슬픔을 없애주는 것, 희는 상대에게 무한한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것, 사는 그 기쁨을 치우치지 않게 하는 것, 즉 친소관계에 따라 달리하지 않는 것 등을 말합니다.
내가 지난 주 부석사 법회에서 인상 깊은 것이 많았습니다. 상전벽해라는 말이 있듯이 내가 예전에 보았던 부석사하고는 참으로 많이 달라졌습니다. 비포장길이 포장되고, 없던 주차장도 생기고, 새로운 건물들이 지어졌습니다. 그게 더 좋아졌다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많은 생각을 하게했습니다. 그 중에서 내가 눈여겨 본 것은 조사당 옆 신라시대 석불 세 개를 모신 자인당, 그 중에서도 자인당(慈忍堂) 편액입니다. 내가 원래 글씨와 그림에 관심이 많습니다. 절의 편액들은 사찰의 얼굴이어서 보통 당대 명필들의 글씨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절 흥천사 대웅전 편액도 글씨도 맘에 안 들어 내린 적도 있지만 허전해서 다시 붙였습니다. 미륵이라고 불리는 마이트레야의 의미가 사랑과 평화입니다. 그래서 慈라는 글은 주로 미륵보살을 모신 곳에 붙이는 이름입니다. 자인당을 보면서 사랑과 인내를 그저 매일 외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불교에서도 '사랑'이라는 용어는 많이 씁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의미를 잘 들여다 보면, 긍정의 의미와 부정의 의미가 섞여 있습니다. 사랑의 긍정적 의미는 慈로 자애 말한 대로 원어는 메타(metta)이며, 부정적 의미는 감각적 욕망인 카마(kama), 집착적 탐욕인 라가(raga), 사랑을 갈구하는 탄하(tanha)입니다. 그런데 번역의 한계, 언어의 한계라는 것이 이렇습니다. 우리말에는 사랑이 모두 하나의 의미로 번역됩니다. 서양의 문화와 철학에서도 사랑은 에로스, 아가페 등으로 다양한데, 우리만 사랑이 하나의 의미만 가지게 되어, 이걸 번역해 놓고 나면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사실 그것은 사랑이라는 원어에 대한 이해 부족입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잘 할 수 있은 것이 무엇입니까? 또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서투른 것은 또 무엇입니까? 이 모두의 답은 사랑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물드는 것입니다. 좁히고 또 좁혀 아주 좁혀서 말하면 물론 동양의 경우지만 동양고전 철학에서는 음과 양 둘만이 존재합니다. 해는 양이고 달은 음입니다. 닭은 양이고, 돼지는 음입니다.그래서 닭고기를 차게해 먹는다고, 돼지고기는 끓여서또는 구워 먹는다고 해서 그 성질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지금도 한의원에 가면, 병을 진단하고 약을 처방하는데 음양을 따집니다. 조선시대 이제마의 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의 분류에 따라 병을 보고 약을 처방합니다. 뿐만 아니라 음양이론에 따르면 모든 사물이 음양으로 나뉩니다. 쌀은 양이고, 보리쌀은 음, 팥은 양이고, 콩은 음입니다. 더 좁히면 인간도 음양인 여과 남으로 나뉩니다. 그리고 대중가요의 90%가 이런 남녀의 사랑 얘기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사랑이란 내가 상대에게 물들어 주는 것입니다. 즉 내가 붓이 되는 것이 아니라 화선지가 되고 캔버스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물들여 주려하지 않고 물들이려고 합니다. 우리의 결혼식 문화를 보십시다. 서로 상대에게 휘어 잡히지 않고 주도권을 잡으려면 결혼초기에 기를 잘 들여야 한다고 충고합니다. 이게 뭡니까?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시길 사람이 가장 고치기 어려운 것이 습(習)이라고 했습니다. 습은 문화적 관습이기도 하지만, 한 집안의 관습, 내 개인의 습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습이라는 것이 어느 날 갑자기 바뀌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조선시대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그 당시 인재 등용제도인 과거에 급제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역사상 최고령의 나이로 과거 장원급제한 사람이 82세, 요즘의 82세라는 나이는 노인 축에도 끼기 힘들지만, 그 당시 이 나이는 무덤 속에서나 있어야 할 나이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임금께서는 경이로운 일이라 하여 종2품의 벼슬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최연소 장원급제 기록 보유자는 존선 후기 이건창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나이가 15세로, 요즘 나이로 말하면 중학교 2~3학년에 해당 되겠지요. 그러니 그가 장원급제하여 고을 원님으로 부임하였는데, 그 곳 아전들이 어린 원님의 말을 고분고분 들을 리 없지 않겠지요. 그래서 원님이 명하기를 모두 돌갓을 쓰라고 명하였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무거운 돌갓을 쓰고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빳빳이 들 수 없을 테니까요. 또 이런 명령을 내리기도 했답니다. 밭에가서 수숫단을 부러뜨리지 말고 소매에 넣어오라고 지시했는데, 당연히 수수대를 어찌 소매에 넣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 어린 원님이 하는 말, "1년 밖에 자리지 않는 수숫대도 소매에 넣지 못하거늘, 어찌 15년이나 자란 나를 너희 소매에 넣으려 하느냐?" 습이란 이처럼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불교적 의미에서 물드는 것,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물들어 주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정태춘 박은옥의 데뷔30주년 기념 콘서트가 있었다고 합니다. 가까이서 했다면 가 보고 싶을 정도로 내가 좋아하는 가수들입니다. 박은옥은 목소리가 청아해서, 정태춘은 생각 있는 가수여서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 콘서트에서 정태춘씨가 미리 준비해 온 편지를 박은옥에게 읽어주자 그녀가 눈물을 훔치며 무대 밖으로 뛰쳐나갔더랍니다. 그 편지의 내용인즉 이렇습니다. "내가 언제나 당신 앞에 있어서 미안 합니다. 오늘 이 콘서트는 그야말로 당신을 위해 마련했는데, 내 생각과는 다르게 또 내가 당신 앞에 있습니다. 그것이 내가 오늘도 너무 미안한 이유입니다" 그 날 콘서트 제목도 자기 이름이 부인 앞에 써 있는데 대한 얘기였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나를 내세우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란 나를 내세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나를 내세우려하고, 내 세웁니다. 심지어 부부간에도, 부모와 자식 간에도 내가 항상 앞서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수 정태춘의 이런 고백이 낯설게 들리는지도 모릅니다.
慈忍堂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내가 상대에게 물들려면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인내란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상대가 어떤 그림을 그릴지 모르지만 기다려 주는 것, 이것이 인내입니다. 조선시대 화가 연담 김명국은 요즘으로 말하면 미술평론가라 할 만한 숙종 때 남태응에 의해 신품(神品)이라고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남태응은 요즘으로 말하면 미술평론가쯤 되겠군요. 이 모든 것이 남태응의 문집<청죽화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김명국이 통신사를 따라 일본으로 가게 되자, 일본 귀족들이 그림 한점을 얻으려 서로 그려달라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 중 어느 귀족은 다실(茶室)을 짓고, 그 벽에 그림을 그려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김명국의 그림은 술에 취한 상태에서그린 것이 압권이었던 모양입니다. 술에 취하지 않은 그림은 생동감이 없고, 과하게 취한 그림은 난삽했습니다. 그러나 적당히 취한다는 것은 김명국 자신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기대에 잔뜩 부푼 이 귀족은 금가루로 그림을 그려줄 것을 부탁하고 술을 대접했습니다. 그런데 술을 마신 김명국이 금가루를 입에 물고 벽에 확 내 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순간 이 귀족은 손이 칼집에 갈 정도로 화가 났습니다. 조선시대에서 금분은 얼마나 귀한지 임금에게 진상되는 그림에나 사용할 정도였으니, 그 금분을 붓에 찍어 정성들여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입에 머금고 확 뿜어버렸으니 오죽이나 화가 났겠습니까? 그런데 에고편이 끝나고 본편이 시작되었습니다. 김명국은 입에 품었던 금분을 뿜고나서 붓질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 뿜은 금분의 흔적은 사라지고 기막힌 그림이 완성되었습니다. 그 후 그 귀족은 그 그림을 보호하기 위해 그림 위에 기름종이를 덮고 보관할 정도였습니다. 그 후 이 귀족은 그 그림의 인기가 높아지자 심지어 그림의 관람에 돈을 받아, 본전을 뽑고도 남았다고 합니다. 오늘날의 미술전시관인 셈이지요. 상대가 어떤 그림을 그릴지는 기다려봐야 압니다.
어떤 사소한 일로 부부싸움을 하던 부부가 이혼하기로 결정하고 법원에 갔습니다. 보통 부부싸움이라는 것이 사소한 일로 일어납니다. 붓을 누가 잡느냐의 문제이니까요. 그리고 드디어 법원의 결정으로 이혼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법원 밖을 나서는데, 마침 그 앞에 카페가 하나 있어, 전남편이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이제 헤어져 남남이 되었으니 차나 한잔 하고 헤어지지자고 말입니다. 여기서 호칭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젠 남편과 아내는 그야말로 서로 아무 상관없는 전남편, 전아내입니다. 그런데 카페에 앉아봤자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노고지리라는 가수의 <찾잔>이라는 노래 아십니까? 그저 그 노래에 나오는 가사처럼, 찾잔만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지요. 그런데 이 때 기막힌 일이 벌어집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일에는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그 카페서 최진희의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무슨 노래인지 아십니까? (나를 비롯한 몇 대중이 그녀의 대표곡 '사랑의 미로'라고 작은 소리로 답했다.)하아! 참으로 답답하십니다. 이렇게 눈치가 없으셔야 어디? 그 노래는 <우린 너무 쉽게 헤어졌어요>입니다. 이점전심으로 눈물을 흘린 이 부부는 아직까지 무탈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노래에도 감동없이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대의 옷자락에 매달려/눈물을 흘려야 했나요/길목을 가로막고 가지말라고/애원해야 했나요/떠나가버린 그대 때문에/내 모습이 야위어가요/아무에게도 말을 못하고/남모르게 가슴 아파요/우린 너무 쉽게 헤어졌어요/우린 너무 쉽게 헤어졌어요/한번쯤 다시 만나 생각해봐요/너무 쉽게 헤어졌어요 (간주) 떠나가버린 그대 때문에/내 모습이 야위어가요/아무에게도 말을 못하고/남모르게 가슴 아파요/우린 너무 쉽게 헤어졌어요/우린 너무 쉽게 헤어졌어요/한번쯤 다시 만나 생각해봐요//너무 쉽게 헤어졌어요/한번쯤 다시 만나 생각해봐요/너무 쉽게 헤어졌어요(스님께서 노래를 직접 불러보이시진 않으셨지만 제가 그냥 가사를 올립니다)
물들이고, 물드는 것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사랑은 인내를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인내없는 사랑은 카마, 탄하이지 메타일 수 없습니다. 앞서 말한 남태은의 미술평론집에 윤두서의 얘기도 나옵니다만,공재 윤두서처럼 머리카락 마져도 한올 한올 섬세하게 그리는 사람입니다. 연담 김명국처럼 일필휘지 붓으로 쓸어내려 그림을 완성하는 사람과는 스타일이 다르지요. 그가 그린 심득경의 초상화는 보물이며, 자기 자신을 그린 초상화, 그 목없는 그림, 그건 국보입니다. 그가 즐겨 그린 그림이 말 그림인데, 그는 말을 그리기 위해 마굿간에 상주할 정도였다고 전해집니다. 그 결과 그의 말 그림은 움직임이 느껴집니다. 말이 움직일 때 앞발과 뒷발의 움직임에 대한 묘사가 사실과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윤두서와 김명국은 그림 그리는 것이 다릅니다. 나와 살고 있는 사람이 윤두서 같은 사람인데, 김명국처럼 그림을 완성하길 기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상대가 연담 김명국이라면 그가 술에 취해 그림을 그릴 때까지 기다려줘야 하고, 공재 윤두서라면 말을 관찰하고 그림을 그릴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줘야 합니다. 그래서 공재 윤두서는 위의 남태응의 <청죽화사>에서 묘품(妙品)으로 평가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다른 이들에 대해 같은 격(格)에 놓습니다. 그리고 붓을 탓합니다. 추사 김정희는 중국 고급지나 붓이 아니면 글씨나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의 전래 한지가 책을 만드는 데는 좋지만, 먹이나 물감을 잘 빨아들이지 못해 자신이 의도한 그림과 글씨가 잘 안나오는 것이 그 이유랍니다. 일본산 그림종이도 질이 좋기로는 유명한데, 우리가 흔히 쓰는 화선지라는 말은 일본산 종이를 뜻하고 것이고, 중국산 종이는 화전지라고 합니다. 또한 김정희는 붓도 서수필(鼠鬚筆)을 애용했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도 포구 뱃전의 쥐들에게서 만든 서수필이 아주 유명합니다. 그건 그 곳의 쥐가 사람이 드나들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 수염이 빳빳하고 탄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내가 물드는 것입니다. 내가 좋은 화선지가 되어야지 붓을 탓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속담에 국수 못하는 자가 안반 나무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연주자가 피아노를 탓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피아노는 좋은 음을 얻기 위해 조율하면 되고, 조율하는 것은 피아노가 아닌 연주자의 몫입니다. 조율을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자인당의 편액처럼 사랑은 인내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피아노를 탓하고 피아노를 팔아치우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노래에도 감동받지 못하는데, 앞에서 본 이혼부부처럼 노래를 듣고 다시금 자신들을 반추하고, 인내하지 못했음을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랑이란 항상 물들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물들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중국의 조주스님은 나이 80에도 7살 난 아이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면 배워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명나라 말 사상가 탁오 이지가 동심설을 주장한 것도 이런 맥락일 것입니다. 즉 동심의 회복이 도(道)를 얻는 것인데, 아이에 물드는 것이 아이에 대한 사랑인 것입니다. 높은 곳에서 쏟아지는 폭포 때문에 물드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높은 하늘의 푸르럼에 물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푸르럼에 물들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인내가 필요하겠습니다. 푸르럼, 아이들이 마음이 이렇습니다. 사랑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사랑이란 말을 구분하지 않고 너무 쉽게 씁니다. 즉 긍정적 사랑과 부정적 사랑을 구분하지 않고 씁니다. 불교적 의미의 사랑은 좋은 것에 서로 물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책임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향불 옆에 있으면 향에 물들고, 생선 옆에 있으면 비린내에 물듭니다. 좋은 것에 물들여지게 하기 위해서는 책임이 필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인내, 즉 기다려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다리지 못합니다. 그저 빨리 성과를 내고 싶어 하죠. 신문 기사를 봐도"경춘고속도로 1년 앞당겨 완공" 과 같은 머릿 기사를 자랑스러워 합니다. 그런데 테이프 커팅 후에도 끊임없이 공사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상관없습니다. 4대강, 세종시와 같은 사물은 잘못되면 고칠 수가 있지만, 우리의 삶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과거는 지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혹시 <너는 내 운명>이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아주 명화인데? 거기에 전도연의 대사 중 이런게 있습니다. "과거는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 없다" 사랑에는 인내, 즉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기다림이란 서두르지 않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맡겨 주는 것입니다. 그림으로 말한다면 그림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후에 신품이니 묘품이니 논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불교에서 사랑은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무량심 첫 번째가 사랑인 慈입니다. 사무량심이 무엇입니까? 수행자기 이것 없이는 도를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 즉 자심(慈心)은 물들어 주는 것입니다. 완성될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항상 내 마음 속에 사랑이 넘쳐흐르도록 해야 합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이 그런 것입니다. 사랑이 도이며, 사랑이 있어야 깨달음에 갈 수 있습니다.
혜천스님 - 초기불교전공 흥천사주지
원불사한국불교개혁源佛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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