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하라|…… 혜천스님설교

2017. 12. 25. 13:5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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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하라

 

 

오늘 설문의 주제는 정진, 노력하라 입니다.

 

정진은 쉬임없이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강릉의 소금강에 가서 비룡폭포를 보고 놀랬습니다. 그 놀랜 이유가 폭포를 처음 봐서도 아니고, 그 풍부한 수량이나, 절경의 경치 탓도 아니었습니다. 그 밑의 단단한 화강암이 낙숫물에 부드럽고 깊게 패인 것을 보고 놀랬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몇천만년의 세월이 지났던 걸까요. 그렇게 오랜 세월을 거쳐 반복하는 것, 그것이 노력인 것입니다.

 

붇다가 사라나무 아래서 운명의 때가 가까웠을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여, 때아닌 때 사라나무의 꽃이 피고, 하늘에서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더라도 이는 나를 위한 진정한 공덕이 아니다. 나의 가르침대로 정진하고 노력하고 행동하는 것이 나에 대한 참다운 공덕이다." 붇다가 열반에 드실때 실제로 사라나무들이 일제히 꽃을 피우고, 그 꽃들이 점점이 떨어져 붇다의 시신을 덮고, 하늘에서는 아름다운 음악이 들렸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적도 붇다의 말씀대로 정진하고 노력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진 말씀이 "모든 존재하는 것은 무상하다. 게으름피우지 말고 정진하라 (위리야 - 빨리語, 노력하라)"는 말씀을 남기신 것입니다. 이것이 붇다의 마지만 말씀입니다. 붇다가 비구들에게 정진을 강조한 것도, 붇다가 후계자을 정하지 않은 것도 모두 정진하는 자, 그가 내 진정한 후계자이다라는 뜻을 확고히 하신 것입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철학의 명제는 '삶은 무엇인가?'이었고, 신학의 명제는 '나는 누구인가?'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노력한다는 것은 나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멈추어있지 않고 앞으로 나가니 고정돼 있지 않고, 막혀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고정돼 있고, 멈춰 있고, 막혀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똑같은 것으로 고민하고, 마음 상해하고, 또 기뻐합니다. 매일 매일 해와 달을 갖고 놀다보면, 어느새 해와 달은 서산에 걸려있고, 머리에 서리가 하얗게 피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 고정돼 있고, 막혀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간다는 것은 흐른다는 것입니다. 흔히 하는 말로 흐르는 물은 이끼가 끼지 않듯이 고여있는 물은 썩고, 흐르는 물은 썩지 않습니다. 흐른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정진한다는 것은 막힌 것을 뚫고, 고정된 것을 부수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진입니다.

 

일본 조동종의 창시자인 도겐 스님도 '판도(辦道 - 힘쓸 판, 길도)'라 하여 정진의 중요성을 늘 얘기 하였습니다. 오직 노력할 뿐, 오직 정진할 뿐.., 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붇다도 "단지 노력할 뿐"이라는 언급을 자주 하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뜻을 너무 높은데에 두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상은 현실과 분리되어서 현실에서는 아무 생명력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상은 반드시 현실에 두발들 딛고 있는 순간에만 의미가 있습니다. 이상은 오직 대지에 발을 딛고 있을 때만 호흡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붇다는 "생사는 어디에 있나"하고 물었습니다. 거기에 대하여 일주일 후, 사흘 후..., 이런식으로 대답을 하는데 어느 한 보살이 '생과 사는 들숨과 날숨 사이에 있다'고 대답합니다. 이렇게 생사는 들숨과 날숨 사이에 현실적으로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아주 막연하게 생각합니다. 이 모두가 우리의 생각이 막혀있고, 멈춰있고, 고정돼 있기 때문입니다. 고정은 오직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의 틀을 깨는 것이 정진입니다.

 

전래동화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옛날에 장안의 부잣집이자 명망가가 있었는데, 이집은 자기집의 흥망성쇠는 남의 집 식구가 잘 들어오느냐의 여부로 좌우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남의집 식구란 며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세력도 좋고, 가문도 훌륭한지라 이 집과 사돈을 맺고자 하는 집은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좋은 며느리를 얻는가 고민하던 끝에, 쌀 4되, 잡곡 1되, 간장 한종지, 신김치 3포기로 집밖을 나가지 않고, 종인 할머니와 한달을 버티는 자와 혼인을 하겠다는 공표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 며느리 후보들이 도전을 하였는데, 몇 일간 위의 것을 먹고 버티다 배가 고파 다 도망가고, 또 어떤 지혜로운 여자는 미리 30등분을 하여 하루씩 먹다가 영양실조로 도망가고 하여 집 식구들조차 '아들을 생총각을 만드는구나'하는 원망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입성은 깨끗했지만, 낡은 옷을 입고 온 처녀가 할멈에게, 그동안 고생이 많으셨다. 나는 하도 가난하게 살아서 배고픈 것을 싫어하니, 밥을 아주 많이 해 먹자'고 하여 사흘만에 그 곡식을 다 먹었습니다. 처녀는 그 사흘동안 방 안팍을 광나게 청소하였습니다.

 

곡식이 떨어졌음을 알리는 할머니에게 이 처녀는 '내가 밖으로 나가서는 아니되니, 가서 바느질 감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가 밖에나가 유삼(선비가 입는 도포로 중국 옷이 조선화 된 것으로 바느질하기가 까다로움)을 가져다 주자 아주 솜씨좋게 바느질을 해 냈습니다. 이런 야문 일솜씨가 퍼지자 주문이 밀려들고, 바느질 삯으로 곡식을 사서 배불리 먹고도 먹을 것이 뒤란에 가득하였습니다. 이렇게 한달을 지낸 처녀는 한달이 지나도 아무런 기별이 없자, 자신의 집이 너무 빈한하여 무시한다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가자 집에 이미 사주단자가 와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묵수(墨守)라 하여 직역하면 먹을 지킨다라는 뜻으로 글자를 곧이 곧대로 읽는 사람을 의미하는데 이는 벽창호라는 뜻과 같습니다. 북한의 벽성과 창성이라는 지방의 소가 어찌나 미련하고 고집이 센지 그후로 지금까지 이렇게 미련하고 고집 센 사람을 벽창호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담판아(擔版兒)는 등판에 판자를 들러 붙인 놈이라고 하는데 이 역시 융통성없이 꽉막힌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는 경주마에게 앞만 보고 달릴 수 있게 시선 고정용 안경을 끼우는 이치와 같습니다.

 

다른 처녀들은 모두 곧이 곧대로 있는 재료로 한달을 버티려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명망가에서는 며느리감이 얼마나 지혜로운 현실대응능력을 갖추고 있는가를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자고로 남자는 언제나 여자에 비해서 띨띨해서 이를 부인이 잘 길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일례로 호남제일 명가라 할 수 있는 녹우당은 고산 윤선도의 고택인데 아직도 전답을 60만평 정도 갖고 있는 갑부중의 갑부입니다. 이러한 재산을 근 400여년간 지켜오고 있는데 6.25나 일제 수탈 등 어려운때일 수록 이 집을 지켜낸 것이 종부, 맏며느리들이었습니다. 6.25때는 땅 깊숙히 항아리를 묻고 돈이며 책이며 그림, 글씨 등을 숨겨 지금에 이르도록 했던 것입니다. 물론 남자들은 강제 징병도 있고 하니 일찌감치 내뺀 상황이었습니다. 아마 남자는 여자의 몸에서 나온 존재이므로 이렇게 돌봐주는 것이 어쩌면 당연 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명문가를 만드는 것은 대개 여자가 만들은 것입니다. 주어진 것을 곧이 곧대로 하는 것이야 누군들 하지 못하겠습니까. 주어진 재료를 30등분하는 것 정도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같은 현실에서 따로이 읽어내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고의 틀이 막혀 있어서는 이러한 창조성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익히 다 알고 있는 3년고개의 고사도 마찬가지입니다. 3년 밖에 못산다고 난리를 칠때, 다시 한번 구르고, 자꾸 구르라고 한 소년의 역발상은 사태를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전환시키는 것입니다. 붇다도 "비판하라"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들이 내 가르침을 그대로 믿고 따르지 말고, 나의 말이 옳고 그른지 너희들이 비판해라" 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현대 철학의 출발은 이성(理性)입니다.순수이성비판 등  데까르트나 칸트의 등장으로 신학의 시대가 가고 철학의 시대가 도래합니다. 이성은 합리적인 비판을 요구합니다. 엊그제 대념처경을 강론하면서 불교의 주요 구성은 체험, 이성, 이론이라고 얘기 했습니다. 체험은 경험주의이고 이성은 비판, 이론은 집을 짓는 설계도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붇다도 "나를 비판하라, 나의 눈으로 보지말고 너의 눈으로 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비판입니다. '붇다의 눈으로 나를 보고, 나의 눈으로 붇다를 보는 것이 불교'입니다.

 

요사이 법정과 김길태로 범벅이 되던 언론이 또 다시 불가의 얘기로 소란을 피고 있습니다. 법정을 강원도의 오두막으로 쫏았던 사람들이 아직도 건재하고, 나는 다만 법정이 간지 얼마 안됐지만 벌써 법정이 그립습니다. 휘엉청 달이 밝은 어느날 밤, 붇다는 포살을 엽니다. "비구들이여 내가 하는 말과 행동에 허물이 있다면 날를 비판하라" 그러자 사리불 존자가 "붇다시여, 우리는 붇다의 말과 행동에서 어떠한 허물도 발견한 사실이 없습니다" 이어서 사리불 존자는 이어갑니다 "상가들이여, 제가 하는 말과 행동에서 허물을 본 사람이 있다면 나를 비판해라..." 이것이 포살인데 이것을 왜 안하는가. 이것을 하면 귀찮기 때문입니다. 이성적인 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체험과 함께 이성을 얘기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비판은 나의 눈으로 사태를 읽는 눈을 배양하는 것입니다. 3년 고개를 다들 부정적으로 읽고 있을때 소년은 다른 식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 처녀도 그 명망가의 의도를 다른 식으로 이해 한 것입니다. 그 할머니 종이 주인집에 가서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 하고 바느질 감을 부탁했을때 주인집은 무릎을 쳤던 것입니다. '이제사 무언가를 아는 처녀가 왔구나'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현실이나 사태를 읽어내는 능력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정진'하면 너무 막연하게 생각합니다. 무조건 노력한다고 다 되는가? 노력을 어떻게 지혜롭게 하는 가가 관건이 되는 것입니다. 맨 땅에 헤딩하는 노력은 마이 아파, 제 머리가 많이 아플 뿐입니다. 그런데 맨땅에 헤딩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 보고 사람들은 왜 저사람은 머리에 꽃을 꽂았지? 묻습니다. 요사이 머리에 꽃꽂은 사람 많습니다. 노력은 지혜롭게 그 문화를 읽어내는 사람입니다. 장작을 패는 일도 이와 같습니다. 장작을 잘 패는 사람은 힘이 센 사람이 아니라 나뭇결을 잘 보는 사람입니다. 결을 보고 도끼를 내어주면 저절로 쪼개집니다. 억지로 힘으로 찢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자기만 힘들게 할 뿐입니다. 나무의 결을 보고 한 곳으로 미친듯이 힘을 집중하는 것이 노력입니다. 현실을 읽어내며 집중하는 것, 이것이 정진입니다. 읽어내는 능력이 선행돼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자동적으로 멈추게 됩니다. (전자오락 디거게임?) 높이 올라갈수록 사고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경춘도로에 차를 올려놓으면 누군들 서울을 가지 못하겠습니까. 지금도 군 작전사의 여전한 의문으로 남아 있는데, 6.25전쟁 때 왜 북한군은 3일간 서울에 머물며 시간을 보냈는가. 그 3일간 내리 공격했으면 낙동강 방어진을 쌓을 여력도 없고, 미군의 개입도 없이 끝날뻔 했는데 왜 북한군은 3일간 시간을 허송했는가? 최근 대외비에서 풀린 러시아 군의 비밀문서를 보면, 북한 탱크부대가 서울의 도로를 숙지 하지 못해서 미로를 헤매다가 전선을 재정비하는 데 소요됐다고 하는 문건이 발표됐습니다. 북한의 촌놈들이 서울의 번화함에 적응하지 못한 것입니다. 저 자신 열네살 때, 형님의 손에 이끌려 와본 동대문 버스 정류소에서 서울을 보고 하늘이 노래지는 것을 느꼈던 것입니다.

 

사람이 어느 단계에 이른면 그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남들이 그려놓은 지도를 보고 왔다면, 어느 단계부터는 자신이 길을 만들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스스로의 사고의 틀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책 '술 취한 코끼리'에도 벽돌 두장에 관련한 예화가 나옵니다. 건축기술자에게 맡길 돈이 없어 자신이 벽돌로 집을 짓는데 나중에 보니 벽돌 두장이 삐뚜르게 놓였더란 겁니다. 이를 보고 부수고 다시 져야 하나 고민을 하던 차에 어떤 건축가가 와서 이것을 건축가에게 맡겼더라면 두배의 돈이 들었을 것이다. 저 벽돌 두장을 저렇게 비뚤게 만들게 하기 위한 댓가로 두배의 건축비를 요구했을 것이라는 얘기를 합니다. 이는 창의는 결국 같은 현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 내는가 하는데서 오는 차이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정진은 막혀있고 멈춰있는 사고의 틀을 꺠는 일이고, 이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다리 꼬고 앉아서 명상에 잠기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입ㅈ니다. 생각의 틀을 바꾸는 일, 생각의 틀이라는 담장을 바는 일, 담장이 있기에 안과 밖이 있는 것입니다. 담이 없으면 안과 밖이 있을리 없는 것입니다.

 

누차 말하지만, 이 세상은 나와 대상만이 존재합니다. 대상이 없는 나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고로 나는 대상속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없는 대상 역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세계는 나와 대상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존재할 때만 대상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내가 없는 대상은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대상속에 있고, 대상 속에 내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의 존재적 이유를 읽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소유하는 것입니다. 아까도 벌써 법정이 그립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가 존경받을 이유는 단지 가난하게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 많이 가질 수 있었는데, 가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가질수 있는데도 갖지 않는 것과 가질수 없기 때문에 갖지 않는 것은 다릅니다. 전자는 충만한 기쁨속에 있는 것이고, 후자는 슬픔만 있는 것입니다. 기쁨과 슬픔은 큰 차이입니다. 이렇듯 항상 정진하고 노력하는 것은 나와 대상을 읽어내는 것입니다. 나와 대상을 읽어내지 못하면 삶이 팍팍하고 고단해집니다. 이것저것 다 싫으면 머리에 꽃을 꽂을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려면 나와 대상이라는 이세계를 바르게 읽기 위한 노력을 부단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붇다가 정진을 그토록 강조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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