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 속의 새|…… 혜천스님설교

2018. 1. 1. 11:0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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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 속의 새

 

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 불기2554년 4월 4일)  


   

 

오늘 강론의 주제는 '병 속의 새'입니다.

혹시 <만다라>라는 소설을 읽어보셨습니까? '병속의 새'는 소설 만다라에 나오는 화두 이야기입니다. 원래 승려이던 김성동은 이 소설을 쓰고 치탈도첩 [褫奪度牒]을 당합니다.  승려에게 치탈도첩이란 사형과 같은 것이어서 영원히 복권될 수 없습니다. 그는 하지 말아야 할 집안 이야기를 썼다고 해서 승적을 박탈당한 것인데, 온 몸에 똥 뭍은 자들이 단지 밥 알 몇 개 옷에 뭍은 자를 벌하는 것과 같습니다.

 

1975년 《주간종교》의 종교소설 현상모집에 「목탁조」를 응모해서 당선이 되었으나 악의적으로 불교계를 비방하고 전체 승려를 모방했다는 오해를 받아 승적을 박탈당했던 김성동은 《한국문학》에 발표했던 중편 「만다라」(1978)를 1979년에 다시 장편으로 개작해서 출판했는데, 이 작품은 `입구는 좁지만 안은 깊고 넓은 병 속에 새 한 마리를 넣어 키우는데, 다 큰 새를 꺼내되 병을 깨서도 안 되고 새를 다치게 해서도 안 된다`는 `병 속의 새`라는 화두를 풀기 위해 고뇌하는 법운과 자기 식으로 부처를 찾고자 격렬하게 방황하는 파계승 지산이 성불을 찾아 고심참담하게 헤매는 이야기입니다.

 

화자인 '나(법운)'는 죽음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안고 노사(여기서 노사는 스승의 스승을 가리킨다. 스승은 은사, 스승의 스승은 노사라 함)에게서 받은 '병속의 새' 화두를 들고 출가 수행합니다. 하지만 화두는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법운의 구도와 방황은 파계승 지산의 기행과 모순된 구도적 순수성을 만나면서 점점 더 깊어진다. 지산은 허무와 절망과 고독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자살하고, 법운이 지산의 다비장을 치르고 창녀와 배를 맞대고 2층을 짓고 난 다음날 새벽, 산으로 가는 차표를 찢어버리고 저잣거리로 힘껏 달려가 환속하는 것으로 마지막 장면이 끝납니다. 

 

여러분이라면 '병속의 새'를 어떻게 꺼낼 것입니까?

 

소설 속에 나오는 '병속의 새'라는 화두는 중국 선종사에 있어 유명한 스님인 당나라 남전스님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남전 스님은 송나라 시대 임제종에서 굉장한 주목을 받은 조주스님의 스승으로 더 유명합니다. 제자가 유명해지면 덩달아 스승도 주목을 받습니다. 열반경에는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하루는 제자가 이렇게 물었다. 조주가 대답했다.'무無" 이 '무'라는 말은 쉽게 말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개에게 불성이 없다는 얘기는 불교의 근본 교리에 완전히 어긋난다. 그래서 제자가 다시 물었다. '세상 만가 지 사물은 , 즉 위로는 부처로부터 아래로는 개미새끼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성을 갖고 있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개에겐 불성이 없다고 하시는 겁니까?'그러자 조주가 대답했다.'전생의 업業 때문이지.'여하튼 송나라에서는 이 불성의 문제가 중심적인 화두였습니다. 

 

당나라 때의 유명한 선사인 남전(南泉)의 지인 중에 육긍(陸亘) 대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여기서 육긍은 이름이고 대부는 정2품 벼슬아치의 관직(우리 식이면 판서, 장관)에 붙은 명칭입니다. 육긍은 출가한 몸은 아니었지만 스님들과 담소하기를 좋아하는 선객으로 한때 어사대부까지 지낸 관리 출신 선비였다. 그래서 곧잘 남전의 처소를 찾곤 했는데, 남전 역시 그와 대화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어느 날 육긍이 남전에게 문제를 하나 냈다. 그들은 가끔 기괴한 문제로 선문답을 주고받던 사이였기에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스님, 문제를 하나 낼 테니 풀어보시겠습니까?" "그러지요." 남전이 흥미로운 눈으로 육긍을 쳐다보았다. "옛날에 어떤 농부가 병 속에 거위를 한 마리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위는 날이 갈수록 무럭무럭 자라 어느덧 병 밖으로 나올 수 없을 만큼 몸집이 커지고 말았습니다. 스님이라면 병속에 든 이 거위를 어떻게 꺼내시겠습니까? 단, 병을 깨거나 거위를 다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육긍이 말을 마치자 남전은 대뜸 그를 불렀다. "대부!" 어사대부를 지낸 육긍을 남전은 항상 그렇게 불렀기에 육긍은 반사적으로 '예'하고 대답했다. 그때 남전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벌써 나왔소." 

 

소설 <만다라>에서는 법운 스님이 '병속의 새'라는 화두를 참구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래 전에 읽은 소설인데, '병속의 새'가 무슨 의미인지, 병속에 새를 누가 넣었는지 또는 어떻게 나올 수 있을지에 나는 관심이 없습니다. 내가 강조하려는 것은 새가 아닙니다. 사실 새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오늘 강론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병'입니다.

 

병은 진짜로 존재하는 병일까요? 정말 병이 잇는가? 여기서 병은 무엇을 의미할까? 나는 여기서 '병'이란 '우리의 생각'이라고 생각합니다. 병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병이 있다고 생각한 것은 병속의 새입니다. 병속의 새가 병이 있다고 생각해 날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병입니다. 병에 새를 넣은 것이 아닙니다. 단지 병이 있다고 생각한 새가 날개를 폊 못하는 것입니다. 역기서 중요한 것은 병속의 새는 더 이상 새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새는 창공을 날아오를 때 새입니다. 그렇지 못한 새는 그저 새라는 명칭만 있는 새일 뿐입니다. 여러 번 애기했습니다만, 우리는 스스로의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병은 스스로의 사고의 틀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므로 병속의 새처럼 나오려 하지 않습니다. 새 스스로가 병이 있다고 생각하고 병에서 나오는 것을 두려워할 뿐입니다. 우리는 그 병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합니다. 왜일까요? 두렵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두려운가요? 병을 벗어나는 것이 두렵습니다. 우리 속담에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난 돌은 정을 맞을까 두려워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면,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즉 병 속에서 벗어나는 것이 두렵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것을 통해 압니다.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것 외에는 두려움을 갖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것 밖에 것은 하려하지 않습니다.

 

우리 전통문화에 따르면 돌아가신 조상님들에 대한 봉제사(奉祭祀)는 중요합니다. 반가라면 3대의 제사는 모셔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부모의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죄를 짓는 것 같고, 불효하는 것 같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사 지내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을 왠지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말 하기 싫은데, 음식을 차리고, 절을 합니다. 물론 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키지 않지만 의무로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며느리 입장이 특히 그렇지 않을까요? 얼마 전에 이런 기사가 났습니다. 퇴계 종손이 장가를 가지 못하다가, 어느 유학한 처녀에게 드디어 장가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퇴계 종손이 왜 번번히 처녀들에게 퇴짜를 맞았을까요? 처음에는 모르고 만났다가도 그가 종손인걸 알면, “다음 부턴 연락하지마”한다는 것 아닙니까? 퇴계의 종손 쯤 되면, 1달에 크고 작은 제사가 3~4건은 될 것입니다. 유학한 처녀가 이런 사실을 알고도 결혼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싫다고 그 사람 역시 그걸 싫은 건 아닐 수 있으니까요.

 

반드시 제사라는 것이 음식을 차리고 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피자 한판, 양념 반 후라이드 반 통닭을 시켜놓고 절 하십시요. 우리가 어렸을 때는 제사를 기다렸습니다. 왜냐하면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었으므로. 요즘 아이들 입장에서는 제사음식이 맛있는 음식이 아닙니다. 그리고 옛날 제사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요새처럼 문 걸고 지내는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옛날 제사는 어려운 시대 이웃과 일가친척에게 나눔이라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시대가 바뀌면, 제사나 제물도 바뀌어야 합니다. 법정스님이 어머니, 아버지 기일에 맞추어 양로원을 찾아 그 곳에 있는 분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은 훌륭한 제사입니다.  

 

혼자서 제사를 지내면 조상들이라고 뭣 하러 오겠습니까? 하기야 저승에서 다시 돌아왔다는 분의 얘기를 못들어 보았으니, 거기도 살기 좋은 곳 아니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보면, 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은 헛말인 듯 싶습니다. 옛날에는 그것이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 시대는 그럴 수밖에 없던 시대였습니다.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봄이 오면 봄옷을 입습니다. 봄이 오는데도, 우린 왜, 우리의 생각은 왜 겨울옷을 입으려 할까요? 아마 한 여름에 오리털 점퍼를 입고 다닌다면, 저 사람은 머리에 꽃을 꽂아야 된다는 취급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이 변하지 않았다고, 머리에 꽃을 꽂을 사람이라는 취급을 받지는 않습니다. 정말 내가 부모님의 영원한 안식을 원하면, 제사음식을 맛있게 먹어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제사상에 사진을 놓을 필요도 없습니다.

 

보육원의 아이들은 각각 개인들 앞으로 개인통장이 있습니다. 어떤 특정한 후원인이 어떤 아이를 후원하여 그 구좌에 돈을 넣어주면 그 아이의 용돈이 되는 것입니다. 다달이 지원되는 정부후원은 고등학교 때 까지만 유효합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보육원을 나와야 합니다. 정부가 지원하는 500만원의 자활기금으로 말입니다. 만약 그 아이의 개인구좌에 후원자의 도움이 없다면, 혼자 자립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500만원으로 찬바람 앞에 마주 서야 합니다. 만약 정말 내 부모, 내 조상을 위한다면 다달이 후원금을 넣어 보십시요. 이보다 좋은 제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제사음식도 필요치 않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고정되 사고의 틀에서 보면, 우리는 병 속에 든 새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머물러 있습니다. 제사에서 닭을 잡아 다리를 벌려 찌는 대신 양념 통닭을 올리고, 먹지 않는 전을 부치는 대신 피자한판을 올려 보시라. 생각해 보십시요. 내가 조상이라면, 매일 똑같은 제사음식을 올리는 후손이 괘씸하지는 않을까요? 자기들은 맛있는 것 먹고, 나는 매번 같은 것을 주냐고 말입니다. 자기들은 똑같은 반찬이 거푸 세 번만 차려져도 인상을 찌푸리면서, 나는 왜 제사 때마다 같은 것을 주냐고 핀잔하지 않겠습니까? 나도 서양식 닭, 서양 빈대 떡 먹어보고 싶다 하지 않을까요? 안 그래도 어차피  요즘의 제사상 음식은 거의 중국산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사고의 틀에 갇혀 있습니다. 사고의 틀이란 우리의 경험을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수행과 일상의 삶이 같은 것입니까? 다른 것입니까? 같습니다.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상합니다.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것이 수행이라고 생각한다면, 성황당 토지신이 더 잘 합니다. 100년 전부터 꼼짝 않고 있으니까요.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켜만 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개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개입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네 생각을 개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감정몰입이라는 말이 있는데, 감정을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그 병을 벗어나지 못하느냐 하면, 내 경험에 기초하기 때문입니다. 내 경험에 기초하여 항상 개입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내 아이의 성공을 보려면, 개입하지 마십시요. 지켜만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교육입니다. 즉 가르치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확히 얘기하면, 가르쳐선 안 된다. 지켜만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릴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가르치고 싶고, 개입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 아이, 내 남편, 내 이웃에 개입합니다. 개임하면 할수록 나빠집니다. '좋은 목수는 나무를 그대로 쓸 뿐 구부러진 나무라도 펴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 집들은 재미있습니다. 굽은 나무를 그대로 쓰기 때문입니다. 옛날 사찰에 가면 불상을 보지 말고, 천장을 유심히 쳐다보십시요. 그 비뚤어진 나무들이 제 자리를 차지하고 쓰였는데, 하나도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습니다. 우리 속담에 '국수 못하는 년이 안반 나무란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욕을 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무슨 얘기냐며, 좋은 목수는 재목을  탓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선인(善人)과 불선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성인과 소인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며, 천재와 어리석은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누구나 선인이고, 성인이고, 천재가 될 수 있습니다. 스스로 똑똑하다는 사람이 개입해서 망가뜨립니다. 스스로 병을 만들고, 병 속에 들어가 앉습니다. 엄마가 딸을 칭찬하는 일이 그렇습니다. 엄마의 틀에 맞추어 잘하면, 칭찬하고, 벗어나면 나무랍니다. 아무 말썽 없이 커는 아이는 오히려 걱정해야 합니다. 한 순간에 그 아이가 잘못된 생각이라도 한다면 그 아이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를 정도로 위험합니다.  적당히 말썽을 피우며 크는 아이는 극단적인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말썽을 피운다는 것은 아이가 불만을 호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학원을 가지 않고 빼먹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도대체 무엇이 되려 그러느냐하면서, 장비의 눈을 만듭니다. 아이가 학원 빼 먹는다는 것은 그 아이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365일 1년 내내 똑같은 컨디션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낳기를 사람으로 낳았다면 당연히 그러합니다. 기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장 좋은 교육은 개입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가장 좋은 교육입니다. 수행의 원리도 똑같습니다. 다만 지켜보는 것입니다. 부부관계도 사랑이란 이름으로 개입하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적어도 가족의 평화가 깨지는 일이 아니라면, 지켜보는 것이 부부의 사랑을 유지하는 법입니다. 우리는 항상 개입하려 합니다. 병 속의 새를 내가 꺼내려고 하면 할수록 꺼낼 수 없습니다. 꺼내려 애쓰다 화가 나면 마침내는 병을 깨기에 이릅니다. 처음에는 새가 답답해할까 안타까웠습니다. 이제는 병 속의 새를 꺼내지 못하는 게 화가 납니다. 새를 사랑하니까 자유를 주고 싶은 마음에 처음에는 노력합니다. 문제는 병 속의 새가 나오려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최상의 방법은 나올 때까지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화가 나기 시작합니다. 내가 새를 위해 보낸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에 순순했던 마음이 변합니다. 그래서 병을 깹니다. 처음에는 순수했던 사랑의 마음이 변하여, 어느 날 병을 던집니다. 그래서 병 속의 새가 나왔습니까? 지켜보는 것,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교육입니다. 병속의 새를 그저 지켜보는 것입니다. 

 

병 속의 새에게 핀셋을 집어넣는 것이 나의 입장에서는 새를 위한다지만, 새의 입장에서는 무시무시한 것이 내려와 자기를 강제로 집으려 하는 것입니다. 놓아두세요. 즉 개입하지 마십시요. 그러고 보면 미국으로 시집간 탤런트 이영애씨가 성인입니다. "너나 잘 하세요." 즉 너나 병속에서 벗어나라는 얘깁니다. 우리는 사고의 틀을 깨야 합니다. 법정스님이 부모님 기일에 양로원을 찾는 것이 사고의 틀을 깨는 것입니다. 저런 불쌍한 것을 봤냐? 라는 말은  읽기에 따라 두 가지로 쓰입니다. 정말로 불쌍한 사람, 불 쌍놈 이렇게 말입니다. 아침 6시가 넘어서면, MBC라디오에서 산골동네를 찾아가 노인들에게 옛날 얘기를 듣는 프로그램이 한 20분 나옵니다. 얼마 전에는 영남지방의  효성 지극한 한 할머니의 얘기가 소개되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지극한 효성으로 대통령표창인 효부상까지 받았었는데, 다 소용없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즉 당신이 평생토록 시부모를 지극 정성 봉양했지만,  자신이 80이 넘어 아프니까 나를 위한 놈이 하나 없어 다 소용없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스스로의 생각에 갇히다 보니까 다른 곳을 못 봅니다. 병 밖에 광활한 공간이 잇는 것을 보지 못하고, 스스로 날개 짓을 할 줄도 모릅니다. 그 안에 있으면 평안하고, 나오는 게 두렵습니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정신병동에 갇혀있던 사람들은 그 곳을 벗어나고자 하지만, 마지막 순간 결국 날지 못하고 남게 됩니다. 정신병동 담장 밖이 두렵고, 그 안이 평안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육받게 되면 그렇게 됩니다. 그것이 세뇌입니다. 우리는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세뇌하고, 세뇌 당합니다. 시골 할아버지들의 옳고 그름에 대한 논쟁에서, 어떤 결말이 이기는지 아십니까? "KBS뉴스에 나왔어"입니다. KBS가 진실하다고 믿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100% 진실하다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내가 보았다고 생각하고, 내가 보았는데도 진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나는 100% 진실하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요새 유언비어 통신이 난무하는 마음 아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온갖 설이 난무하는 천안함 이야기입니다. 첨단 해군을 지향하고, 세계 11위의 경제력, 세계 7위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나라가 배가 침몰했는데 원인을 모릅니다.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진실을 모릅니다. 함장이 진실을 모른다고 합니다. 그럼 누가 진실을 알까요. 아마 천안함만이 진실을 알 것입니다. 그러니 아니면 말구 식의 유언비어가 난무합니다. 완당평전에 보면, 추사선생이 아버지의 비문을 짓거나 쓴 일이 없다고 나옵니다. 최고의 서예작품 중 많은 것이 비문이니 아쉬울 만도 합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자신이 아버지 비문을 짓고 썼으니, 아버지의 비문을 자식인 아들이 짓거나 쓰지 말라는 법이 없기는 합니다. 그러니 제자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왜 추사가 짓고 쓴 비문이 있다고 말하시지 그럽니까? 그래서 나오면 예언이 탁월하다고 인정받을 것이며, 발견되지 않으면, 그러니 더 찾아봐야지라고 하면 될 것 아닙니까? 사람들은 자기의 사고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추측 기사의 언론과 뉴스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천안함이 좌초되었는데, 그 곳에 승선한 승조원들이 원해서 그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건 후 안보 관계장관회의를 열었는데, 대통령, 총리, 비서실장, 국정원장이 모두 군대에 갔다 오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것 아닙니까? 천안함 좌초와 함께 실종된 병사들이 권력자의 자식이라면 그 배에 탔을까요?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결론을 원합니다. 왜? 그들이 아는 것은 그것밖에 없으니까요. 왜? 그래야 술이 나오고 밥이 나오니까요. 그래야 그들의 명예를 지키니까요.   

 

병 속의 새는 단순히 그 무엇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병 속의 새는 우리의 생각을 뜻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병을 만들고, 우리 스스로가 병에 들어가고, 우리 스스로가 병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본래 병은 없습니다. 스스로 병을 마들고 나오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켜만 본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고사산수화(故事山水畵)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현이나 문사들의 역사적 행적과 문화적 일화 등을 제재로 삼아 그린 인물화라고 하여, 고사인물화라고도 합니다. 고사화라고도 하며, 화면에서 차지하는 산수배경의 비중이 클 경우 고사산수화라 부릅니다. 한대(漢代)부터 유교의 교훈을 보급하고 기리기 위해 권계적(勸戒的)인 목적을 띠고 그리기 시작하였는데,  송대(宋代)에 이르러 문인사대부들의 처사(處士) 성향과 결부되어 탈세속적이고 은일적인 성격을 지닌 고사(高士)들의 일화가 많이 그려졌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를 통해 인물의 전형화가 이루어졌고, 화면의 구성도 인물중심에서 점차 산수 건물 기물 등의 비중이 높아지는 경향으로 바뀌어갔습니다.

 

여기에는 후한의 광무제와 그의 친구 엄광에 관한 일화가 있습니다. 엄광(嚴光:기원전37년∼서기43년)은 어릴 적 후한의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와 함께 뛰놀며 공부한 사이였습니다. 광무제가 왕망(王莽)의 신(新)나라를 제압하고 제위에 오르자 모습을 감췄는데, 광무제가 사람을 시켜 찾아보게 했더니 “양가죽 옷을 입고 못에서 낚시하고 있다(披羊裘, 釣澤中)”고 하였습니다. 광무제는 세 번이나 사람을 보내 그를 조정으로 불러들였는데, 다. 광무제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그는 예전 친구사이처럼 대했고 황제에 대한 예를 갖추지도 않았습니다. 조정 대신들이 그의 무례함을 들어 벌을 내려야 한다고 주청했으나 광무제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는 광무제와 함께 밤새 얘기를 나누다 임금의 침상에서 함께 잠이 들었는데 예전의 버릇대로 광무제의 배 위에 다리를 걸친 채 잤다고 합니다. 이러한 그의 태도가 후대에 중국에서는 지조 있는 사람의 사표로 존경을 받게 됩니다. 권력을 지니면, 명에와 돈은 따라오게 마련입니다. 엄광이 물을 바라보는 풍경을 중국의 문인화가들이 즐겨 그린 이유는 그 모습이 그들의 이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관직을 벗어나지 못한 채, 산수를 동경합니다. 산수를 동경하지만 권력을 못 벗어났다는 점에서 이중적입니다. 그들은 엄광을 존경합니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엄광을 존경할지 모르지만, 그들의 몸이 엄광일 필요는 없었습니다. 흐르는 물을 지켜보는 것, 그리고 그런 엄광을 그리는 것이 고사관수도입니다. 그들은 흐르는 물을 막으려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자연을 지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홍수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몇 해 전 강릉에 홍수가 나서 하천이 범람해 새로운 물길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새 길은 예전의 원래의 물길이었습니다. 70년대에 농지정리를 하면서, 강폭을 좁히고 새로운 물길을 만들어 하천이 범람한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개입하려 합니다. 자연에 개입하고, 인간에 개입하려 합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개입하지 말라'입니다. 자연이 되었든 인간이 되었든 개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경험했다고 해서 그것이 정답입니까? 아닙니다. 왜? 환경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 세대에서는 단순 소박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저 배고프지 않고, 밥 세끼만 먹을 수 있으면 족했습니다. 재산 또한 그럴 정도면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고생을 하더라도 자식에 올인합니다. 자식이 영화롭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뜻과는 달리 자식이 영화롭게 살지 못합니다. 공부!공부!공부!합니다. 밥먹고 공부만하라는데, 그것조차 못하냐고 합니다. 그러나 밥 먹고 공부만 한다는 것은 정말 힘듭니다. 내가 하고 싶을 때는 괜찮겠지만, 인간은 기계가 아닙니다. 어머니는 광주리에 사과를 이고 시장에 내다 팔고, 아버지는 지게에 짐을 지고 일하는 것이 모두 자식을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럴 때 자식 또한 어머니가 이고, 아버지가 진 무게를 지고 앉아 있는 것입니다. 

 

수행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세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1)잘하려고 하지 말라 2)되게 하려 하지 말라 3)억지로 하게 하지 말라 입니다. 무모님의 기대가 클수록  잘하게 하려하고, 되게 하려하고, 억지로 시킵니다. 즐겁고 재미있어도 잘 안 되는 것이 공부입니다. 지나치게 부모님세대에서 자식의 일에 개입해서는 자식이 제대로 펼 수가 없습니다. 자식의 입장에서 꼭 공부일 필요가 아닐 수 도 있습니다. 부모들은 자식이 판사, 검사를 하고 높은 관직에  올라 권력을 잡기를 원합니다. 모두가 그럴 수도 없으며, 불가능합니다. 아이 스스로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부모님이 지켜봐줬어야 합니다. 무거운 짐을 지게 되면, 자기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자식의 일에 개입할 수는 없습니다. 요즘은 부부싸움이 나면, 시부모도 달려가고, 장인 장모도 달려가 그들끼리 다른 방에서 서로의 자식을 두둔하고 남의 자식을 탓하면서 한판 붙는다고 합니다. 개입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저 지켜만 보십시요.

 

병 속에 있는 새는 지켜만 보면, 스스로 나옵니다. 핀셋을 집어넣어 빼낼 생가도 말고, 바람벽에 병을 던지지도 마십시요. 그러면 병도 새도 모두 잃습니다. 지켜만 보는 것, 처음에는 이걸 잘 합니다. 그러다 이내 못 참게 됩니다. 내 경험 때문에 핀셋을 넣습니다. 아이가 사는 환경은 내 환경과 다릅니다. 그러am로 그것은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이 바뀐 것을 뜻합니다. 내가 옳다고 다른 사람이 옳은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르다고 다른 사람이 그른 것도 아닙니다. 때에 따라서는 그저는 묵묵히 지켜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병 바깥에 좋은 음식을 두고 기다리십시요. 새가 좋아하는 것을 병 밖에 두고, 내가 노래하고 춤추고 있으면, 어느새 새가 병 속에서 나와서 나와 함께 노래하고 춤을 출 것입니다. 병속의 새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병 속에 새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 자신이며, 그리고 너입니다.

 

천안함 침몰로 실종된 우리 형제들 한 분이라도 살아오길 희망합니다. 무엇이 고통입니까? 부처님이 말한 두카가 무엇입니까? 희망이 없는 것이 두카입니다. 희망이 있으면, 기쁜 마음으로 지게 짐을 질 수 있고, 30리 먼 길에도 사과를 광주리에 이고 팔러 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는 것은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희망이 있으면 즐겁습니다. 천안함 실종자의 형제와 가족들이 희망을 포기한다는 뉴스가 있습니다. 비록 모든 사람들이 희망을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배속의 그들은 희망을 잃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항상 복 짓는 나날되기를 기원하며, 봄날 매화꽃처럼 매화향기 가득하기를 기원하며, 매화길을 걷는 것같이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혜천스님 - 초기불교전공 흥천사주지 

가슴 시린 발라드 모음

 

1. 사랑은 가슴이시키다...버즈
2. 비가悲歌...강성
3. 너 없는 사랑...김재희
4. 보이지 않는 인사...강성훈
5. 두번째 이별...기주
6. 널 사랑해...란
7. 루淚...김세영
8. 비가...무,無
9. 미안하다 사랑한다,눈의꽃...서영은
10. 안녕...서영은


11. 인연...야다
12. 이미 슬픈사랑...야다
13. 시간에 기대여...김세현
14. 다시 사랑 할수있다면...조승우
15. 슬픈 초대장...한경일
16. 슬픈얼굴...ART
17. 미련한 사랑...JK 김동욱
18. 마지막 내 숨소리...M.C The Max
19. 깊은슬픔...Y2K
20. 소유하지않은 사...K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