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첫차를 기다리며 |…… 혜천스님설교

2018. 3. 18. 13:5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728x90

  

好景彩다시 첫차를 기다리며  

 

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5월 5주차: 불기2554년 5월 31일) 

 

 

 

오늘 강연의 주제는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입니다. 이 주제는 정태춘 선생의 노래 제목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에서 슬쩍 쌔벼왔습니다.

 

<자타카>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자타카>는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모아 놓은 것인데, 우리는 흔히 단순히 부처님의 전생이야기를 모아 놓은 책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자타카>의 의미를 잘 모릅니다. <자타카>는 무엇인가 이야기 하려는 게 있습니다. 이것을 모르면 매일 읽어도 그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 어느 날 토끼가 야자나무 밑에서 낮잠을 잡니다. 그 토끼가 거북이와 경주하는 그 토끼인지, 수궁가에서 용왕에게 간를 떼일뻔한 토끼인지는 나도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이 잠자던 토끼는 갑자기 지구가 두 쪽 나는 소리에 놀라 도망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도망을 가면 어딜 가겠습니까. 토끼는 허겁지겁 살겠다고 도망을 칩니다.

 

어찌 우리가 이 토끼같은 모습 아닙니까? 한 때 김영삼씨가 대통령에 출마하면서 공약이 서울-부산에 고속철도를 깐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에도 이런 공약은 줄을 잇게 됩니다. 서울-광주, 서울-속초 등. 미안한 얘기지만 서울-속초간 고속도로가 생기면 속초사람들은 다 죽는다는 얘기가 나올 것입니다. 청량리 정신병원에서 막 나온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공약을... 그런 공약을 하는 사람의 수준을 알만합니다. 그걸 기대하는 사람의 수준 역시 알만합니다. 중국의 등샤오핑이 이런 얘기를 했답니다. "손바닥만한 나라에서 어디 그리 빨리 가려 하나?"

 

다시 토끼 얘기로 돌아가면, 토끼가 도망치다가 여우를 만납니다. 여우가 물으니 "여우님 빨리 도망가세요. 지구가 갈라져요." 이런 식으로 멧돼지며, 코끼리며 만나는 동물마다 얘기하니, 모두 줄을 이어 온갖 동물들이 무리를 이루며 함께 도망칩니다. 드디어 사자를 만났는데, 사자가 왜 도망가냐고 묻자 동물들이 자초지종을 말합니다. 그러자 사자는 "지구가 갈라진다고 누가 말했느냐?"고 물으며, 코끼리, 멧돼지 순으로 확인하여, 드디어 토끼가 잠자던 그 곳에 가보게 됩니다. 그랬더니 토끼가 자던 곳에는 야자 열매가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솝우화에도 이런 비슷한 얘기가 있습니다. 이솝우화는 독자적인 창작물이 아니라 원래 인도, 아랍, 중근동의 이야기들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 하려는 것은 무엇일까요? 보통은 사자의 지혜에 초점을 맞춥니다. 스님들 또한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뻔한 이야기의 뻔한 정답에 대해선 빵(0)점을 주겠습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토끼입니다. 토끼가 왜 도망쳤을까요? 그것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원초적인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다시 말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생존입니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투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가장 근본적인 공포와 두려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공포와 두려움은 비생존에 대한 두려움, 즉 살아남지 못할까봐 가지는 두려움과 공포입니다. 우리가 길을 가다가 낯선 사람을 만나면 섬짓합니다. 왜일까요? 생존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석기시대의 인간은 해가 떨어져 어두워지면, 바깥을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 역시 생존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인간은 많은 도구와 물건을 만들어 냅니다. 그 말은 인간이 생존하기에 지구는 그렇게 좋은 조건이 아니라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도구 없이는 인간이 생존하기 힘들기 때문에, 생존하기 위해 인간은 그렇게 많은 도구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석기시대 인간들은 어둠이 지기 시작하면, 맹수의 습격 등으로 생존하기 힘들었을 것이므로 동굴에 피해 밤을 지냈을 것입니다. 이것이 원초적인 인간의 두려움입니다.

 

그러므로 생존하기 위해서, 석기시대에는 먹을 수 있을 때 배불리 먹어 둡니다. 왜냐하면 오늘 먹지 않고 아껴 둔다고 해서 내일 먹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냥도 쉽지 않았을 것이므로, 사냥을 하게 되면 먹을 수 있을 때, 배터지도록 먹어두는 것입니다. 동시에 저장할 수 있을 때, 가급적 많이 저장해두려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배터지게 먹고, 썪을 때까지 저장하게 됩니다. 생존을 위해 뇌가 발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발달이 석기시대에서 멈추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석기시대의 원초적 두려움을 현대인도 똑같이 지니고 있습니다. 춘천에 아파트가 즐비하게 들어서 있습니다. 석기시대로 돌아가보면, 이것은 밀림이었을 것입니다. 아파트 숲이 밀림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동굴의 맹수는 여전히 날 노립니다. 현대인도 먹을 수 있을 때 먹어두어야 한다는 DNA가 축적되어 있습니다. 어떤 이는 비만을 걱정하지만, 나는 살이 안쪄서 걱정입니다. 참으로 재미있지 않습니까? 레비 스트로스<야생의 사고>는 석기시대 사고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원초적인 본능을 지니고 있는데, 석기 시대 이전이나 이후인 현대에나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고는 별로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생존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생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번성, 번창하는 사업이 있는데 아십니까? 점집요? 그도 그렇지만 점집이 구멍가게라면, 종교사업은 산업입니다. 서울에서 2100억인가 하는 교회를 짓는다고 하는데, 내부적인 반발도 있다고 합니다. 많은 돈을 들여 교회를 짓는다고 구원을 받습니까? 이것은 절집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른바 종교사업이 번창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래를 불안해하고 두려워 합니다. 그래서 점집에 가서 묻는 것입니다. 로또 복권이 도입된 초창기 '로또 번호를 찍어 드립니다'라는 점집의 광고가 유행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400억 로또가 당첨된 춘천은 명당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재미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태국에 가장 존경받는 스님 아잔차 스님은 미래를 꿰뚫어 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신도 한 사람이 끈질기게 스님께 로또번호를 일러달라고 졸라댑니다. 이 신도는 평소 공도 많은 분이라, 절을 위해 많은 일도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잔차 스님은 이 신도에게 모진 말을 합니다. "내가 만약 로또 번호를 알고 있다면, 내 형재 자매, 일가 친척들에게 말하지 왜 네게 말하겠는가? " 그렇죠. 점쟁이가 로또 번호를 알고 있다면, 복채 몇 푼을 받고 그 번호를 일러 주겠습니까? 청량리 정신병원을 갖나온 찐빵이 아니고서야. 미래를 알려 달라고 하도 졸라대는 사람에게 아잔차 스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미래를 확실하게 이야기 해줄 수 있다. 확실한 미래는 당신의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확실하지 않은 것을 확실하게 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원초적인 두려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미래가 불확실해서 그 불안을 벗어나지 못해 두려운 것입니다. 석기시대나 현대나 우리의 삶은 토끼와 같습니다. 마구 달려 갑니다. 마지막 차를 타기 위해서. 인간의 두려움, 공포, 절망, 좌절은 이 '마지막'이라는 단어 때문입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왜일까요?  그것이 마지막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좋다는 수없는 이야기를 해도, 그 곳에서 돌아온자가 없습니다. 탈출할 수 없을 것 같은 감옥, 쇼쌩크에서도 탈출하지만, 천국이나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그것이 마지막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슬픈 영화를 보면, 보면서 웁니다. 그런데 희얀한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울다가도 '영화 끝'이라는 자막이 올라가면 자리에서 일어나 영화관을 나갑니다. 왜일까요? 끝이기 때문이지요. 약속된 수학공식은 아니지만, 끝이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하지요. '마지막'이라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껌을 씹을 때도, 저기 현수처럼 어릴 때는 단물이 빠지면 그저 '퉤'하고 뱉습니다. 그렇지만 성인이 되면 껌을 질감을 느껴 오래 씹으면서 양치질을 대신하기도 하지요. 어린이에 비해 성인은 껌의 질감을 즐기는 것이죠. 

 

우리는 끝, 마지막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며, 절망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 마지막 차라고 하면, 그저 그것을 타려고 정신없이 뛰어갑니다. 왜? 거기에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붙었기 때문입니다. 홈쇼핑에 중독되었는지 여부를 가리는 자가진단법이 있습니다. 쇼 호스트의 '마지막 5분' 이라는 멘트에 정신이 혼몽해지면서, 자기도 모르게 전화기 버튼에 손을 올려 눌러대고 있다면 중독입니다. '마지막 5분, 20세트 한정, 30% 할인' 이런 자막이 뜨면 나도 모르게 전화번호를 누릅니다. 이 마지막 5분이라는 말에 마음이 두근거리면, 홈쇼핑의 중독증세가 있다는 것이 정신과 의사들 얘깁니다. 우리는 '마지막'이라는 단어에 어떤 두려움을 느낍니다. 마지막 30세트 한정이라고 선전할 제품이 정말로 그 다음에 다시는 안 나옵니까? 

 

우리는 마지막이라는 단어에 원초적인 두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생존의 법칙에서는 마지막 차에 올라타지 않으면, 생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마지막 차가 떠나면 다시오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역대 정권의 교육 전문가, 아닌 입 가진 자들은 모두 공교육을 살리고 사교육을 없애야 된다고 말합니다. 학부모들도 요즘 아이들 불쌍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막상 내 아이가 낙오될까 두려워서 피땀흘려 번 돈을 불확실한 곳에 투자합니다.  낙오될까 두려워서, 마지막 차를 타지 못할까 두려워서 그러는 것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김대중 정권, 노무현 정권, 이명박 정권은 동일합니다. 이 정권들의 공통점은 신자유주의라는 마지막 열차를 타지 못할까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유주의라는 마지막 열차에 올라타기 위해 애를 씁니다. 독일의 본회퍼라는 신학자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잘못된 기차를 탔다면, 기차의 복도에서 반대 방향으로 뛰어봤자 소용없다" 우리는 잘못된 기차인데도, 그것이 마지막 기차라는 이유로 그 기차에 올라타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의 종말은 뻔 합니다.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없습니다. 독과점 체제는 붕괴합니다. 그런 사회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힘의 균형이 깨지면 붕괴합니다. 

 

중국 역사상 가장 강성한 때의 하나가 당나라 현종 때 입니다. 그런데 당나라가 왜 멸망했습니까? 8년에 걸친 안록산의 난을 진압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일까요? 안록산이 난을 일으킬 정도면, 이미 당 나라 내부는 곪아터져서 그걸 수습할 수 없는 지경이라는 것입니다. 미안한 얘기지만, 힘의 균형을 잃으면 그 체제는 붕괴하고 맙니다. 공자께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재물의 부족을 걱정하지 않는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 재물이 공평하게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인간의 가장 큰 두려움은 굶주림에 대한 공포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밥을 굶고 있다는 것은 조건이 아주 열악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못된 줄 알면서도 두려워서 그 마지막 기차를 올라타려고 싸웁니다.  그리고 그 기차에 올라서는 누가 주도권을 가질지를 두고 또 싸웁니다. 그러나 기차는 얼마가지 않아 낭떠러지로 떨어집니다. 그 순간에도 우리는 권력 싸움을 합니다. 그 이유는 그 순간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 두려움은 생존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 두려움을 권력을 통해 연장하기 때문에, 그 순간에도 싸우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행복의 큰 장애는 두려움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폭력을 두려워 합니다. 20년 넘께 발전되어 오던 민주주의가 이명박 정권 2년반 만에 다 무너졌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권력을 두려워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옛날 뉴스를 틀면, 제일 처음 멘트가 '전두환 대통령은..."이라는 대통령 동정 보도였습니다. 그 이후로 뉴스가 이런 식으로 다시 나오는 것은 이명박 정권이 처음입니다. 오죽 하면 "땡"하는 시보 다음 첫 글자가 '전'으로 시작된다고 해서 '땡전뉴스'였겠습니까? 그 땡전뉴스가 사라지게 된 것은 극우파 지도자로 잘 알려진 당시 정무장관 김용갑이었습니다. 그가 처음 그런 식의 뉴스를 반대하고 나서자 당사자인 전두환은 자신이 모든 사람에게 물어봤지만, 내가 뉴스 첫머리에 나오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습니다. 김용갑은 육사후배이기도 해서, 공석, 사석을 가리지 않고 직언하기를 두려워 하지 않는 인물이었던 모양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땡전뉴스가 문제 없다고 해도 , 이건 문제라고 주장해 결국 그런 식의 뉴스가 없어졌다고 합니다. 우리가 왜 이명박 대통령이 떡볶기 사먹는 걸 뉴스로 들어야 합니까? 이렇게 길게 얘기한 이유는 우리가 권력에 두려워 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행복의 장애는 두려움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 마음 속에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보의 춘야희우春夜喜雨(봄밤에 내리는 기쁜 비)라는 시에,  好雨知時節(호우지시절: 좋은 비는 시절을 알아)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좋은 비를 때를 알고 내린다"는 뜻입니다. 때를 모르고 내리는 비는 좋은 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불행한 일생을 보낸 시인이기도 합니다. 번성했던 당제국이지만, 안록산의 난이 있는 시절에 살았습니다. 그는 삶이 어려워 자식이 굶어 죽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시는 반사회적이고, 서정적인 것이 많습니다. 이 구절 역시 그의 서정시의 일부입니다. 요새 비가 시도 때도 없이 내립니다. 세월이 하 수상하니 비조차 때를 모릅니다. 비조차 경찰이 무서워, 못내리다가 아무 때나 내리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 경찰이 우리 절에 찾아와 공무집행을 넘어선 짓을 했습니다. 내가 방문한 경찰을 돌려 보낸 후, 담당자를 찾아 기본조차 안된 사람들을 민원에 내보냈다고 엄히 질책했습니다. 무능해서 만만해 보였던, 노무현 시절에도 없던 일이었습니다. 그들 정권이 국민을 천시하고, 멸시하고, 협박하는 것을 내가 눈으로 봤습니다. 이런 정치 애기를 하면, 어떤 분들은 거부 반응을 보이십니다만,  이 정권이 이런 이야기를 안할 수 없게 만듭니다. 

 

삼국지에 보면, 유비 현덕과 관우가 와룡 공명을 찾아갔을 때 그는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공명은 잠들지 않았지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유비는 그를 깨우지 않고 돌아갑니다. 세 번째 찾아왔을 때야 비로소 짐짓 놀란 척을 합니다. 단잠을 깨우지 않는 지도자가 좋은 지도자입니다. 자기 일을 위해 남의 단잠을 깨우는 지도자는 폭군입니다. 맹자께서 말씀하시길 폭군은 끌어내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왕이 아니라 필부라고 했습니다. 공명은 유비가 세번이나 찾아온 이후에나 출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의 지식인들은 권력이 부르면 개처럼 부리나케 달려갑니다. 그리고는 자기 주장을 뒤집고 본래부터 그랬던 것인양 행동합니다. 시인 두보는 비도 때를 알고 내릴 때야 좋은 비라고 했습니다. 그 고생해서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지식인들이 권력이 부르면 쫓아 갑니다. 그리고는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겁박하고, 위협합니다. 나는 경찰 개인에게 전혀 감정이 없습니다. 그들은 박봉과 격무에 시달립니다. 그래서 사진을 찍으라고 했습니다. 그런 후 경감인가를 전화로 불러, 너희들은 기본도 안된 이들을 대민 업무에 내보내느냐고 나무랬습니다. 내가 이명박을 그냥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일이 부처님 오신 날 전날에 있었습니다. 나는 권력이 두렵지 않습니다. 나는 그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 정면을 바로보고 말하지 못하는 걸 보고 알았습니다. 그 때 그가 정직한 자가 아니라는 걸 말입니다. 그 때는 정말 그가 정면을 바로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권력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 두려워 해야 할 것은 권력 때문에 내 자신이 두려워하는 그 마음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생존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존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권력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것입니다. 미안한 얘기지만, 스스로 지킬 수 없는 사람은 생존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지킬 수 없는 사람은 살려고 마지막 차를 탑니다. 진정 두려움이란 마음 속에 있는 두려움입니다. 마음 속의 두려움을 버려야 합니다. 부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 마지막 차를 타지 말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차를 타면 할 일은 잠자는 일일 뿐입니다. 마지막 차를 보내고, 그 자리에서 첫차를 타십시요. 

 

소동파로 더 잘 알려진 시인 소식은 "여유로우면 영화롭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차를 떠나 보내고, 그 자리에서 여유롭게 첫 차를 타라는 것이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불교에서 '인욕바라밀'을 말합니다. 여기서 인욕은 오른 뺨을 맞고 왼쪽 뺨마저 내미는 것이 아니다. 미안한 얘기지만, 그것은  인욕이 아니다. 그것은 지혜도 사랑도 아니다. 미버리(?)일 뿐이다. 누가 오른 뺨을 때리면, 우리는 분명히 말해야 합니다. 흥부가 뺨을 내민 것은 매품이라도 버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맞고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인욕은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기다리는가? 완성하고 성숙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바라밀은 완성, 완전의 뜻입니다.

 

우리가 집을 지으려면, 기초 공사를 하고 그 위에 벽돌 한장한장씩을 쌓습니다. 그럴려면 기다려야 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벽돌을 쌓을 때, 하루 3칸 이상을 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루 종일 다 쌓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서양의 집들은 견고하고 오래 갑니다. 우리하고 다른 재료의 벽돌, 콘크리트를 쓰는게 아닙니다. 콘크리트도 타설하고 나서 소위 양생기간이라는 걸 거치는라 오래 기다립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는 공기단축을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그러니 20년만 되어도, 새로 짓습니다. 서양에는 100년이 넘는 건물들이 수두룩합니다. 우리는 기다림을 못 합니다. 한 순간에 뭔가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합니다. 기다리지 못합니다. 바쁩니다. 밥도 뜸이 들어야 맛이 있습니다. 성질 급한 사람은 밥솥에서 완료 신호음이 나자마자 먹습니다. 나도 그럽니다. 그렇지만 내가 그런 것은 성질이 급해서가 아니라 배가 고파서 입니다. (몇몇 피~식 웃음)

 

인욕바라밀은 그것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걸 못합니다. 민주주의도 한 순간에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가 한 순간에 안된다고 그저 아스팔트로 나갑니다. 부처님께서는 원인없는 결과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 분이 마치 헬기라도 타고 온 것처럼 여기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전두환 장군처럼 예외도 있습니다. 그래도 박정희는 요식행위라도 하고 정권을 잡았습니다. 우리가 그 분을 모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선택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다림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왜 기다림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지 아세요? 기다리는 사이 누가 훌쩍 먹어버릴까봐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산에가서 열매라도 발견하면 다 따먹습니다. 심지어 덜 익은 것조차. 두었다가는 다른 사람이 다 따갈까 하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80년대에 회자된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전라도 사람은 음식을 준비하고, 경상도 사람은 밥상을 펴, 밥을 푸는데, 막상 밥숟가락들 들고 우적우적 먹는 것은 충청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아다시피 충청도 사람은 말도 느리고, 움직임도 느립니다. 그런데 밥상머리에서 밥을 먹는 이는 충청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건 단순한 우스갯 소리가 아닙니다. 동파 소식의 말처럼 여유로우면 영화롭습니다. 여유롭게 기다리는 것이 인욕바라밀입니다. 오늘 강론의 주제가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입니다. 마지막 차를 타면 안 됩니다. 여유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막차가 떠나간 그 자리에서 첫차를 기다리면, 하루를 온 종일 쓸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그 자리에서 첫 차를 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걸 못합니다. 서두에서 말했다시피 '두려움'때문입니다. 인간의 원초적 두려움은 생존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질 높은 생존을 위해서는 두려움을 버려야 합니다.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일본 전국시대 걸출한 3인이 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울지 않는 새는 소용없다. 죽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멍청이 소리를 들을 정도로 개성이 뛰어난 인물입니다. 이마가에 요시모도를 부하 세명을 데리고 밤에 몰래 목을 벱니다. 사무라이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치욕입니다. 승리하지 않는 전쟁은 쓸모없다고 생각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려합니다. 그러던 그는 그가 했던 것처럼 혼노사에서  부하 미시이떼에 의해 기습을 받고 죽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울지 않는 새는 울게 만든다"고 합니다. 도쿠카와 이에야쓰는 "울지 않는 새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 고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에도 막부 260년을 여는 주인공이 됩니다.

 

우리는 마지막 차를 타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을 버려야 합니다. 그 자리에서 첫차를 기다렸다가 그 차를 타십시요. 두려움은 내 마음 속의 환상일 뿐입니다.

오늘 강론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정과 사랑이 넘치는 복된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참고자료:

 

聞誅一夫紂矣 未聞弑君矣-양혜왕梁惠王

필부인 주를 죽인 것은 들었지만, 임금을 시해했다는 것은 듣지 못했습니다.

 

<대학>에서는 "신수(身修) 이후에 가제(家齊)하고 가제(家齊) 이후에 국치(國治)하고 국치(國治)이후에 천하평(天下平)이라"고 했다. 이것은 내 몸 내 가정도 제대로 못하는데 나라를 다스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수신 제가를 못했던 은나라 주왕은 스스로 방탕한 생활을 했고 숙부이면서도 충신으로서 유명한 비간을 죽였으며 폭정으로 인하여 나라가 엉망이 되었다. 이 때문에 훗날 주나라 무왕이 되는 발이 강태공의 보필을 받아 주왕을 죽이고 주나라를 건국했다. 신하인 발이 임금인 주왕을 죽인 것에 대하여 제나라 선왕이 맹자에게 "신하가 임금을 죽여도 됩니까?"라고 묻자 맹자는 "인의(仁義)를 해치는 임금은 범부일 뿐이니 무왕 발이 범부를 죽인 것이지 신하가 임금을 죽였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며 무왕이 주왕을 죽이고 새나라를 건국한 것에 대하여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결국 주왕은 수신, 제가를 못했고 치국은 물론 평천하를 못하여 모든 것을 빼앗기고 자신도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혜천스님 - 초기불교전공 흥천사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