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업설에 의한 불교 우주론|******@불교의우주론@

2018. 3. 24. 19:56일반/생물·과학과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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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업설에 의한 불교 우주론

고익진.김운학.목정배/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궁극적 물음에 대한 종래의 종교에 이렇게 문제성이 있다면 이제 우리들이 해야 할 바는 무엇일까. 궁극적 원리에 대한 새로운 탐구 가 시작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고타마 싯다타가 일찌기 처자와 왕궁을 버리고 산에 들어가 맹렬한 구도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 동기가 이런곳에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진리 탐구 의 방법론은 현상 세계의 정확한 관찰로부터 시작하여 그것을 합리 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궁극적 원리를 탐구해 들어가, 그로부터 다 시 현상세계의 모든 현상을 설명해 보는 방법이어야 함은 다시 말 할 필요가 없다. 고타마 싯다타가 깨달음을 얻은 방법은 바로 이 길이었고, 그가 부처님이 된 다음 전 인류에게 제시한 것도 바로 이 길이었다. 원시 경전에 설해진 부처님의 깨달음은 십이연기설을 내용으로 하는데, "모든 부처님은 12연기를 생사(현실세계)로부터 시작하여 무명에 이르고 무명(현실세계의 원인)으로부터 다시 생사 에 이르는 순서로 관찰하신다"고 설하고 있는데서 그것을 엿볼 수 있다.

앞서 살펴 보았던 세가지 우주론은 현실 세계의 인간의 죄악과 의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진리성이 부정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새로운 진리탐구에 있어서는 '인 간에게 의지가 있다'는 것을 엄연한 사실로 확정하고 이로부터 그 배후의 원리를 탐구해 들어가야 할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부처님 의 교설을 볼 때 거기 나오는 십이처설은 우리들의 깊은 관심을 끈 다.

어느날 생문(生聞)이라는 바라문이 부처님께 "일체(一切)라는 것 은 어떤 것입니까" 라고 물은 일이 있다. 그랬더니 부처님은 서슴없이 "일체는 十二에 들어가나니, 소위 눈.귀.코.혀.몸.의지(意)와 색.소리.냄새.맛.촉감.법(法)이니라"고 답하고 계신다. 이것이 12 처설의 내용이다. 불교의 중측적(重層的)인 교리 조직에서 가장 기 초적인 교설이다. 그런데 모든 것이 포섭된다는 그 12 처를 보라. 인간의 여섯 감각 기관과 그에 대한 여섯 인식 대상으로 이뤄졌음 을 볼 것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들이 의지해야 할 바는 인식 가능한 현실 세계이며, 진리탐구는 이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입장과 상통한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세계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인간인데, 그 주체를 의지라고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의지의 존재를 엄연한 현실적 사실로 받아들인 것을 엿 볼 수가 있을 것이 다.

인간을 이렇게 의지로 파악하고 이런 견지에서 이제 그를 둘러싼 자연 환경을 살펴보자. 그것은 어떤 대상물을 나타나는가. 인간이 의지적인 작용을 가하면 '필연적인 반응'을 보이는 성질을 띤 것으로 나타난다. 가령 여기 어떤 물체에 5[kgf]의 힘을 가하면 그것은 그 역량 만큼의 반응을 반드시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 또한 우리들 이 현실세계에서 직접 보는 명백한 현상, 또는 사실이라고해야 할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부처님은 12처설에서 '의지' 즉 인간의 대 상을 '법'이라고 규정하고 계시는 것이다. 법이라는 말은 법률이라 는 개념으로 흔히 쓰이지만 인도에서는 그 밖에 자연 법칙, 필연적 인 것, 의지가 없는 것, 자연물 등의 뜻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인식대상을 이렇게 통틀어 법이라고 규정함을 보고 비난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것에는 자연물이 주가 되어야 하지만,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 지를 가지고 있는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이쪽에서 작용을 가하면 일 차적으로는 자연물과 같은 반응을 수행하려고 한다. 예를 들면 우 리가 어떤 사람을 밀었을 경우, 그가 의지적으로 버틴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을 경우는 자연물처럼 밀려나가기 때문이다. 12처설에서 의도하는 바는 인간의 의지에 대한 대상의 이러한 일차적인 반응의 성격을 명백히 하려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인간의 의지적 작용을 불교에서는 '업(業)'이라는 말로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업에 대해서도 그 대 상이 나타내는 필연적인 반응을 '보(報)'라고 한다. 업은 원인이고 보(報)는 결과이므로 업인(業因).과보(果報)로 표현하기도 한다. 업에는 반드시 보가 따를 것이고 그들의 성질은 상응할 것이다. 선 업에는 좋은 보가, 악업에는 나쁜 보가 따른다는 말이다.

우리 현실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은 원칙적으로 이런 업.보의 인과율에 의함은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 인과율이 전제되지 않으면 자연 과학은 성립 근거를 잃을 것이고, 노동과 보상 또한 업.보의 관계이며,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은 잘 살고 죄를 지은 사람은 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업과 보의 필연적 관계는 우리 현실 세 계의 엄연한 법칙이며, 모든 현상 또한 그에 의해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견지에서 우리 현실세계를 다시 한번 되돌아 볼 때 우리는 이따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발견한다. 모든 현상은 반드시 업.보의 법칙으로 설명되어야 할 텐데 그것으로는 도저히 설명 되지 않는 현상을 보기 때문이다. 가령 우주의 생성 소멸은 너무나 도 신비스러울 뿐만 아니라, 가까운 주변을 돌아 볼 때도 어떤 사람은 악업을 지었는데도 잘 살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착하고 착한 데도 왜 그렇게 고생만 하고 있는지, 이런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그러한 현상은 신의 힘에 의해서 발생한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또는 숙세에 지은 원인에 의해, 또는 아무런 원 인 없이 우발적으로 발생한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만일 그런 방법으로 이해한다면 그 견해는 앞서 살펴보았던 존우화작인설.숙작인 설.무인무연설로 전개될 것이고, 결국은 부처님의 그에 대한 비판 에서 본바와 같은 문제성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 아야 할까. 문제는 매우 복잡해졌지만, 그러나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이 세계에는 분명히 의지와 법, 업과 보의 관계가 엄연한 사 실로써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양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부처님이 "일체는 12처에 들어가나니라"고 못박은 뜻을 이해함직하다.

그럴 경우, 다시 말하면 업.보의 현실적 사실을 양보하지 않을 경우, 문제의 현상도 일단 그런 업보적 현상이라고 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볼 경우, 업.보의 관계는 이제 숙세(宿 世).현세.내세(來世)의 三세에 걸쳐 전개된다고 가정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문제의 현상을 분석해 보면, 어떤 현상이 나타났는데 그 업인이라고 할 만한 것이 인식되지 않을 경우와, 업인은 있는데 그 과보라고 할 만한 현상이 나타나지 않을 경우의 둘이다. 이런 두 현상을 업보적인 견지에서 본다면, 첫째 경우는 그 원인을 현세 이 전에 있었던 것으로 가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세 이전에는 숙세가 되고 현세 이후에는 내세가 될 것은 물론이다.

결국 우리들의 현실 관찰과 그것을 합리적으로 이해해 보려는 노력은 일종의 가설에 도달한 셈이다. 자연과학에서는 사물의 배후 법칙을 알아내기 위해 가설을 세워 그 정당성을 검토해 본다. 종교 적 진리탐구에 있어서도 이러한 방법을 굳이 꺼릴 필요는 없을 것 이다. 종교의 우주론이라는 것도 비관적인 입장에서는 일종의 가설 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러한 가설의 진리성에 있을 것이다. 종교 적 가설의 진리성은 그것으로써 현실세계의 현상이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를 검토해 보는 길밖에 없다. 이런 견지에서 이제 앞서 우리들이 도달한 '업.보이 三세 전개'라는 가설을 검토해 보 자. 존우화작인설이나 숙작인설 또는 무인무연설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현실세계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업.보가 三세에 걸쳐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인식하는 현세 상에는 그 '의아로운 현상'이 나타날 수 밖에 없으며 또 이러한 현 상의 존재는 업.보가 삼세에 걸처 전개되고 있음을 증명해 준다고 할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하고 계신다. "만일 고의 (故意)로 업을 지으면 반드시 그 보를 받나니 현세에 받기도 하고 내세에 받기도 하나니라. 그러나 고의로 짓는 업이 없으면 보를 받지 않나니라"<중아함 권 3 思經>. 이것이 불교에서 설하는 업설의 원리적인 내용이다. 업과 보의 종류와 그에 대한 설명은 다음 기회 에 미룬다.

불교의 이러한 업설에 의할 때, 인간의 현실 상황은 그가 짓고 있는 업에 대한 보의 총화(總和)가 바야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은 동시에 그의 새로운 업이 작용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눈앞에 불행이 닥쳤다면 책임은 오로지 자기에게 있는 것이지, 남이나 운명이나 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태개할 수 있는 것도 오로지 자기 힘이며, 남이나 운이나 신의 힘이 아니라는 것이 뚜렷해 진다. 불교의 업설을 흔히 숙명론과 혼돈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커다란 잘못이다. 니간타의 업설을 숙명론으로 본다면 몰라도, 불교의 업설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과거의 업보다는 현실을 태개해 나갈 현재의 인 간 의지와 그 노력에 커다란 비중이 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래서 불교의 업설은 강력한 인생관이 될 수가 있다. 업. 보의 필연적인 존재를 확실하게 이해한 사람은 악업을 지을 엄두도 못 낼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업설은 건전한 사회 윤리가 될 수가 있다.

업설은 또 우주를 움직이는 근원적인 힘이 무엇인가에 대한 불교 의 답변이기도 하다.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기독교는 우주의 근원 을 '신'으로 보고, 유교는 '역'으로 본다. 불교가 일어날 무렵 인 도의 정통파 바라문교에서는 '범(梵)'으로 보고, 이에 맞선 사문들 은 물질적인 '요소'로 보았다. 이제 불교는 어떻게 답하고 있는가. 불교의 업설에 의할 때, 우주를 움직이고 있는 궁극적인 힘은 바로 중생들 자신의 '업력(業力)'인 것이다. 불교학에서는 우주안에 있 는 전 중생들의 이러한 공동적인 업을 '공업(共業)'이라는 말로 표 현하고, '세계는 공업의 소성(所成)'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여러가지 우주론 중에서 이제 어떤 것이 정당한가는 독자들의 비판 적인 판단에 맡길 따름이다. 다만 여기서 한가지 말해 두고 싶은 것은 중생들의 업력은 우주를 능히 파괴할 수 있는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이다. 커다란 우주를 바라볼 때 인간을 포함한 중생들 은 너무나 미약한 존재이다. 이렇게 미약한 존재들이 어떻게 우주를 움직이는 힘이 될 수가 있느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 지 모른 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 인간을 보라. 가공할 만한 핵폭탄을 개 발해 내었으며, 이것이 만일 잘못 사용되면 그 연쇄반응은 전 우주 의 조화를 파괴할 원인이 충분히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업설은 불교의 우주론이 될 가능성이 있는데 경전에는 실제로 그것을 우주론에 적용시킨 예까지 발견된다. 장아함 끝(권 18~22)의 세기경이나 또는 그 별행경이라고 볼 수 있는 기세경.기 세인본경 등이 그 좋은 예이다. 우주를 신의 창조로 보는 종교에서 는 대개 우주론적 신화를 발생시키고 있다.

기독교의 구약성서 첫머리에 나오는 창세기에는 그런 종류의 신 화이다. 그런데 그와 비슷한 이야기가, 다시 말하면 우주의 구조. 생성.소멸 등에 관한 신화 비슷한 이야기가 세기경.기세경.기세본 경 등에 담겨 있다는 말이다. 그 이야기는 상당히 길어 간단히 소개할 수가 없다. 아함경의 교리를 체계화한 구사론이란 문헌이 있는데 이것에 의하면 그 요점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모든 중생들의 업력에 의해 허공에 바람이 일기 시작하여 풍륜(風輪)이 생긴다. 중생들의 업력에 의해 다시 풍륜 위에 구름 이 일어나 수륜(水輪)을 생하고, 업력에 의해 다시 수륜에 의해 바 람이 일어나 수면을 때리고 응결시켜 금륜(金輪)을 생한다. 금륜 위에 수미산이 솟고, 이것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일곱 산이 생하 고, 그 최외각에 철위산이 둘러 앉는다. 그리하여 각산 사이에 물 이 고여 여덟 바다가 생하는데, 수미산 부근의 일곱산 사이에 생긴 바다를 내해(內海)라 하고, 그들과 철위산 사이에 생긴 바다를 외 해(外海)라고 하고, 이 외해 속에 사대주(四大州)가 있어 수미산의 동서남북에 위치한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곳은 수미산 남쪽의 섬부주(贍部州)이며, 이 밑에 염라왕국(閻羅王國)이 있고, 그 아래 다시 八 대지옥이 차례로 위치한다.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은 수 미산을 둘러싸고 공중에서 돌아간다. 이것이 중생들이 몸 담게될 세계(器世間)가 형성되는 과정이다. 최초의 풍륜으로부터 이러한 세계가 완성되는데 1 소겁의 시간(1590만 8년)이 걸린다고 한다.

세계가 생긴 다음에 이곳에 중생이 생기는데, 그 순서를 살피기 전에 먼저 그들의 경계(衆生世間)부터 소개해 줄 필요가 있다. 중 생의 경계는 크게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의 3계로 갈라진다. 욕계는 욕심이 있는 경계로써 그로 말미암아 받게 되는 고통의 정도에 따라 지옥.축생.아귀.수라.인간.천신의 육취(六趣) 가 식별되고, 특히 천신은 다시 六천으로 세별되고 있다. 색계는 선정을 닦아 욕심을 멸하지만 형색은 남아 있는 경계로서 사선천 (四禪天)으로 나누기도 하고 18천으로 세별하기도 한다. 무색계는 색계의 형색마져 사라진 정(定)의 경계로서 사처(四處)를 헤아림이 보통이다.

중생들의 경계는 이와 같거니와, 이제 이들은 세계가 생긴 다음 그곳에 어떤 순서로 생하는가. 먼저 범천(색계의 최하위)이 하생하고, 계속해서 육계 六천에 해당되는 타화자재천.화락천.도솔천.야 마천이 하생하여 수미산 위의 하늘에 머물고, 도리천.四천왕이 생 하여 수미산의 봉우리와 허리에 각각 머문다. 그리고 또 인간이 생하여 四대주에 머물고 축생은 바다에 생하여 육지와 공중에도 살게 되며 아귀는 염라왕국에 생하여 떠돌아 다니고 지옥취는 지옥에 생 한다. 이밖에 다시 아수라가 있는데 이들은 수미산을 본거지로 하여 도리천과 항상 전쟁을 일으킨다. 이렇게 해서 천.인.아수라.아 귀.축생.지옥취의 여섯갈래 중생이 생하는데, 여기에 소요되는 시 간은 19소겁이 걸린다는 것이다. 세계와 중생이 편성되는 이러한 시기를 성겁(成겁)이라고 부른다.

성겁 다음에는 주겁(住겁)이라는 세대가 온다 그 기간도 20소겁이다. 이때 세계는 별로 변동이 없지만, 중생의 과보에는 많은 변 동이 나타난다. 초기의 중생은 형색이 아름답고 빛을 내며 하늘을 날을 수도 있으며 수명도 장구하다. 그러나 좋은 맛에 탐착하여 물 질적인 음식을 취하게 됨에 차츰 몸이 더러워지고 남.녀의 구별이 생하며, 음식에 대한 욕심이 일어나 싸움이 벌어진다. 그러자 이것 을 다스릴 국왕을 뽑게되고 형벌이 제정된다. 중생의 악업은 더욱 심해지고, 동시에 수명이 짧아지기 시작하여 마침내 10새에 이르게 된다. 그러자 도병(刀兵).질역(疾疫).기근(饑饉)의 三재(災)가 발 생하여 살아 남는 자 겨우 1만명을 헤아리게 된다.(제 1소겁). 3재 의 괴로움을 겪는 중생들은 자신의 죄업을 뉘우치고 다시 선업을 행하게 된다. 동시에 수명도 증가하여 8만세에 이르게 되고 풍요한 사회가 된다. 그러자 다시 욕심과 악업이 심해져 수명이 10세로 감 소된다.(제2소겁). 인간 수명의 이러한 증감이 그 뒤에도 19번 반 복된 다음 다시 10세에서 8만세에 증가하게 된다(20소겁) .

이 때 우주가 파괴되는 괴겁(壞겁)이 시작되는데 여기에도 20 소 겁이 있다. 먼저 중생이 파괴되는데 그 순서는 지옥취부터 시작하 여 최후에 천신이 파괴된다.(19소겁이 소요됨). 그런 뒤 화.수.풍 의 三재가 발생하여 풍륜으로부터 색계 제 三선천에 이르는 세계를 모조리 멸해 버린다.(제20 소겁). 괴겁이 지나면 허공만이 존재하 는 공겁(空겁)이 오는데 이 기간도 20소겁이다. 공겁 다음에는 다 시 중생들이 업력에 의해 성.주.괴.공겁이 반복하여 세계는 끝없이 생성.소멸한다는 것이다. 20소겁을 1중겁이라 하고 4중겁을 1대겁 이라고 하므로 결국 한 세계는 1대겁을 시간적 단위로 하여 생성. 소멸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성주괴공을 되풀이하고 있는 이러한 세계는 하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우주 속에는 무수한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 1천 세계를 합 한 것을 1소천(小千) 세계라 하고, 이 1소천 세계를 1천배한 것을 1중천 세계라고 하며, 1중천을 다시 1천배한 것을 1대천(大千)세계 라 한다. 이 소천.중천.대천을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고 하는데 이것을 한 부처님이 지배하는 세계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세계는 실로 무량하여 허공과 양과 같다는 것이다.

이상이 세기경.구사론 등에 설해진 등에 설해진 불교의 우주론적 설화의 대강이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특히 주목해야 할 바는 세계 의 생성을 중새의 업력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며, 변천. 소멸 그리고 다시 생성되는 과정에 있어서도 업력에 의한다는 입장 이 한결같이 유지되고 있다. 이것은 우주를 신의 창조로 보는 신학 적인 우주론이나 또는 성주괴공을 기계적으로 반복한다고 보는 우주론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으로서, 앞서 살펴 보았던 불교의 三세 업보설을 우주의 동력인으로 보고 그런 입장에서 전개시킨 우주론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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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본적 있나요



무심코 그냥 블랙홀에 빠진듯
마냥 빠져 들어 본적 있나요

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이고

그 미소
하나만으로도 세상에 무지개
떠 오르는 그런 사랑 그립다

생각하면
명치끝이 막혀 들어
숨도 못 쉬고 죽을것 같은 갈망에

손끝에서 부터
전율로 떨려오는 허덕임을
혀 꼭 깨물며 견디어 본적 있나요

말 한마디 안했어도
수없이 그 품에 안겨들어
활화산처럼 타오르다

화석이 되고 싶은
스스로를 준엄히 꾸짖다가
이럴바엔 차라리 혼절하여

 


정신 놓고 싶은
그런 미망에 허덕여 본적 있나요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랑
그대는 참 좋겠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여
아프고 모닥불 사위어가듯 스러져도
그대에게는 한마디도 말할 수 없으니

나는 천형의 굴레
벗을 수 없는 그대 사랑입니다
그대는 단 하나의 사랑을 해 보셨나요
 

-최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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