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종교의 진리성|******@불교의우주론@

2018. 3. 18. 12:22일반/생물·과학과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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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종교의 진리성

고익진.김운학.목정배/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부처님은 이렇게 우주의 기원이나 본질에 관한 궁극적인 문제에 대해 언어에 의한 답변을 피하고 계시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부처님은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 아예 관심이 없으셨던가. 결코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면 왜 그것을 기독교나 유교처럼 명케하게 설해 주시지 않으시는 것일까. 불교를 믿는 사람에게 이 점은 매우 불만스럽게 느껴지는게 사실이다. 그러나 사실은 오히려 그러한 곳에 종교적 진리에 대한 부처님 자신의 진지한 태도가 엿보이고 있다.

우주의 기원이나 본질과 같이 그렇게 중요한 물음에 대한 답변은 그것을 덮어 놓고 제시하는 데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해명을 하였느냐에 뜻이 있을 것이다. 모든 종교는 각기 독자적인 우주론을 제시하고 그에 입각해서 교리를 전개시키고, 그의 절대적인 진리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우주론의 내용이 왜 서로 질적인 차이를 나타내고 있을까. 기독교와 유교만 보더라도 전자의 신학적 우주창조설과 후자의 역학적(易學的) 우주변역설(宇宙變易說)은 결코 동질의 것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쪽의 해명을 우리는 진리라고 해야할 것인가. 동일한 대상에 대해 이질적인 두 개의 진리는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느 한 쪽이 진리라면 다른 한 쪽은 허위일 것이다. 또는 둘다 허위일지도 모르고, 또는 그들은 진리의 전체가 아니라 어는 일부분만을 파악하여 그것을 전체로 착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만일 그들의 우주론이 허위이거나 또는 미진(未盡)한 것이라면, 궁극적 물음에 대한 우리들의 탐구는 다시 시작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종교의 진리성에 대한 이러한 회의는 여러 종교가 난립하여 각자의 진리성을 강력하게 주장할 때 그것을 대하는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회의가 일어 났다면 덮어놓고 신앙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신의 제시에 의한 것이라거나 성경에 씌여 있다거나, 또는 깨친 사람의 교시라는 종교적 권위만으로는 진리라고 받아 들일 수가 없다는 말이다. 종교의 개창자도 하나의 인간으로서 궁극적인 문제를 탐구하여 해답을 얻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한 것이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수준으로 내려오게 된다. 동시에 그들도 인간이 이상 오류를 범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미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이제 그들의 주장이 과연 참다운 것인가 하는 것을 검토해 보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매우 흥미롭게도 부처님은 단지 인도의 여러 종교사상의 우주론에 대해서 그러한 비판적 검토를 하고 계시는 것을 본다. 이런 부처님의 비판적인 검토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당시 인도의 각 종교 사상이 어떤 우주론을 전개시키고 있었던가를 소개할 필요가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불교가 일어나던 당시의 인도 사상계는 크게 두 계통으로 갈라져 있었다. 하나는 베다.범서.삼립서.우파니샤드라는 일련의 문헌의 성립 속에 전개된 전통적인 바라문사상이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바라문 사상에 도전한 새로운 사상가들, 다시 말하면 불교 경전에 소위 육사외도(六師外道)라고 불리우는 사문(沙門)들의 사상이다. 이 두 계통 중에서 먼저 정통적인 바라문의 우주론을 살펴보자.

베다 문헌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리그 베다인데 여기에는 벌써 신학적인 우주창조설이 나타나고 있다. 즉 우주를 창조한 것은 '조일체신(造一切神)'으로서 그는 마치 목수가 나무로 집을 짓는 것과 같이 우주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우주창조설은, 만일 그렇다면 그 재료는 애초에 어떻게 있게 되었느냐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 리그 베다에 나오는 우주출산설(宇宙出産說)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이에 의하면 우주는 '생주신(生主神)'에 의해서 마치 부모가 애를 낳는 것처럼 산출되었다는 것이다. 아기의 출산에는 재료가 따로 필요치 않으므로 문제의 우주창조설의 재료문제가 일단 해결된 셈이다. 그러나 아직도 문제는 완전히 해결된 것이 아니다. 능생자(能生者)와 소생자(所生者)의 차별은 타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주개벽설의 이러한 문제를 태개하기 시작한 것은 범서(梵書)와 우파니샤드 문헌에 나타나는 범신론적(梵神論的)인 우주전변설(宇宙轉變說)이다. 먼저 범서의 전변설부터 간단히 소개하면, 생주신이 열을 일으켜 천.공.지의 삼계를 발생하고 이들은 다시 일체를 발생한 다음 생주신은 그 일체 속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생주신의 열을 동력인으로 하고, 생주신의 몸을 질료인으로 하여 우주가 전개되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능생자와 소생자의 차별문제는 사라지게 되며, 따라서 '생주신'이라는 이름도 바뀌어야 할 필요가 생긴다. 그리하여 '범(梵)'이라는 이름이 채택되는데, 이 낱말은 인격신으로서의 성격(男性)과 중성원리(中性原理)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어 알맞는 것이다.

범서의 이러한 우주전변설은 우파니샤드에 이르러 철학적으로 완성된다. 즉 태초에 유일자(唯一者)인 '유(有)'가 있어, 이것이 많아지려는 욕심을 일으켜 화(火)를 발생하고 화는 다시 욕심을 일으켜 수(水)를 발생하고 수는 또 욕심을 일으켜 지(地)를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이 화.수.지의 셋이 복합물을 만들고 '유'는 그 속에 '목숨의 자아(命我)' 형태로 들어갔다. 그래서 명색(名色)을 발생하고 명색에서 일체가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우주론에 의하면 인간은 욕심을 바탕으로 목숨을 지닌 개아적(個我的) 존재로서 생사에 윤회하게 될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괴로운 생사윤회를 해탈하려면 '범'과 '나'가 동일하다는 알음(智)에 의해 범행(梵行)과 선정(禪定)을 닦아 범계(梵界)에 돌아가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불교가 일어날 무렵 인도의 정통사상은 적어도 이 정도의 종교사상을 발전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 사문들은 어떤 사상적 도전을 하고 있었던가. 사문들의 사상 계보는 복잡하고 자료가 빈곤하여 확실한 내용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바라문의 우주전변설이 자기네의 사회적 지위를 확립, 유지하기 위한 독단론이라고 단정하고, 종교적 교설에 대한 회의론을 펴거나, 또는 확실한 논거 위해서 궁극적 문제를 해명코저 하였다. 이런 입장에서 우주의 근원을 몇개의 요소로 보고 그런 요소들의 이합집산(離合集散)에 의해 세계와 인간의 생성.소멸이 있게 되는 것이라고 설하였다. 예를 들면 아지타는 우리들이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우주의 근원은 지.수.화.풍의 네가지 요소라고 하였다. 파구다는 아지타의 이러한 四대설에 목숨.괴로움.즐거움의 셋을 추가한 칠신설(七身說)을 주장하였는가 하면 고사라는 여기에 다시 허공.얻음.잃음.생.사의 다섯을 추가하여 12요소설을 내놓았다.

생의 가치관에 있어서도 사문들은 바라문의 해탈 사상과는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었다. 아지타의 4대설에 의하면 인간은 죽으면 그만이다. 따라서 그는 현세의 쾌락이야말로 인생 최대의 가치라고 주장하였다.(順世派). 한편 파구다는 7신설과 고사라의 12요설에는 목숨과 고.락.생.사 등이 불변의 요소로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인간의 삶은 싫든 좋든간에 이미 결정된 것으로서 그것을 충실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뜻이 뚜렷하다. 그들이 생활파(生活派)라고 불려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바라문의 종교적 이념이 생사윤회를 해탈하려는 것과는 정반대의 입장인 것이다.

한편 자이나교의 개조 니간타는 사문계통에 속하면서도 그와는 달리 해탈사상을 편 곳에 그의 독특한 입장이 있다. 니간타는 우주의 근원적 구설 요소는 목숨(命)과 목숨 아닌 것(非命)의 둘이라고 하고 전자에게는 의지(意志)와 상승성(上昇性)이 있다고 하였다. 후자는 법(운동의 조건). 법 아닌 것(정지의 조건). 허공. 물질의 넷으로 세분되는데 물질은 업(業)을 일으켜 괴로운 생사의 원인을 지으며 하강성(下降性)을 띠고 있다고 한다. 니간타의 이러한 오실체설(五實體說)에 읳면 인간의 실존(實存)은 영혼(목숨)이 육체(물질)에 계박되어 생사에 윤회하는 모습으로 부각된다. 따라서 그는 육체의 계박을 멸할 극렬한 고행을 통한 영혼의 순화를 해탈의 요체라고 설하고 있었다.

인류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거의 모든 우주론이 당시에 출현했던 듯한 인상을 준다. 이러한 여러가지 우주론에 대해서 부처님은 이제 어떠한 태도를 취하고 계셨을까. 그들은 무비판적으로 받아 들일 수는 없으셨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에는 이미 종교적 진리에 대한 회의론이 행해지고 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부처님은 그래서 우선 당시의 우주론이 다음과 같은 세가지 범주 속에 모두 포섭된다고 보고 계신다.
  1) 존우화작인설(尊祐化作因說) (참고 신 중심사상이라고도 함)
  2) 숙작인설(宿作因說) (참고 운명론 사상이라고도 함)
  3) 무인무연설(無因無緣說) (참고 우연론 사상이라고도 함)

첫째의 존우화작인설은 우주의 창조는 물론, 그 안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그 원인이 신(尊祐)에게 있다는 견해로서, 정통 바라문의 우주론이 여기에 포섭될 것이다. 둘째의 숙작인설은 그러한 원인은 과거에 지은 바에 있다고 보는 견해로서, 니간타를 여기에 포섭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왜 그러냐면 니간타의 五실체설에서, 목숨은 의지적 생명성이 있고 물질은 업을 일으키는 활동성이 있다고 하지만, 그들은 불변의 요소로 보고 있는 한 그러한 작용들은 기계적으로 나타난다고 판단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셋째의 무인무연설은 모든 현상은 아무런 원인 없이 발생하고 있다는 우연론(偶然論)으로서, 니간타 이외의 사문들은 이곳에 포섭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요소들의 이합집산에 대한 이유나 설명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부처님은 이 세가지 우주론에 대한 진리성을 다음과 같이 검토하고 계신다. "만일 모든 것이 신의 뜻에 의해 일어났다고 하면, 우리들이 나쁜 업을 짓는 것도 그 때문에 짓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해야 한다, 이것은 해서는 안된다는 의욕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또 노력이라는 것도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또 만일 모든 것이 과거에 지은바에 의해 일어난다고 하면, 우리들이 나쁜 업을 짓는 것도 그 때문에 짓는다고 해야 할 것이고, 의욕도 노력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또 만일 모든 것이 아무런 원인 없이 일어난다고 하면, 우리들의 나쁜 업을 짓는 것도 일어난다고 해야 할 것이고, 의욕도 노력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중아함 권 3 ).

다시 말하면 위의 세가지 우주론은 인간의 죄악이라는 현상을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니, 죄악이란 범한 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가 있을 때에 한해 성립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인간에게 자유의지(自由意志)와 그에 입각한 노력이 있다는 엄연한 현실적 사실도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세가지 우주론은 진리라고 말 할 수가 없다. 왜 그러냐면 종교의 우주론이란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세계의 배후에서 그것을 지배.조종하고 있는 궁극적인 원리.본질 또는 원인에 대해 해명이므로, 만일 그것으로써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조금이라도 나타난다면 그것은 궁극적인 진리라고는 말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당시 종교의 우주론을 이렇게 비판하고 계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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