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불교의 침묵|******@불교의우주론@

2018. 3. 11. 09:46일반/생물·과학과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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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불교의 침묵

고익진.김운학.목정배/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주지하는 바와 같이 기독교는 우주의 기원에 대하여 아주 명확한 답변을 해주고 있다. 구약성서 제 1 장 창세기 첫머리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나니라"라는 말이 나온다. 우주의 근원은 신(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입장이다. 그리하여 이 신의 기본 성격을 기독교 신학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세계와 인간은 창조하고 그 운명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힘'이고, 최고의 윤리성을 지닌 신성한 인격체이다.

그리고 그러한 신의 피조물인 인간이 오늘날과 같은 비참한 괴로움을 겪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아담과 이브의 신화를 통해 아주 명 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은 순수 무구한 성품 을 지녀 에덴 동산의 지극한 즐거움 속에 창조되었다. 그러나 선악 의 나무에 열린 과일을 따먹음으로써 저주받은 지상에 떨어져 분노와 증오에 싸인 자손을 낳으면서 죄의 대가를 치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제 자신이 죄인임을 의식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속죄하고 그 구원을 받는 길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동양 민족의 생활윤리를 지배해 온 유교도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해서 아주 간결한 해명을 해 주고 있다. 유교사상을 철학적으로 심화하고 체계화한 것은 송(宋)대의 주자(朱子)인데, 그가 저술한 유교 철학의 입문서인 근사록(近思錄) 첫머리엔 다음과 같은 말이 실려 있다. "극(極)이 없음이 곧 태극(太極)이다. 태극이 움직여서 양(陽)을 낳고 움직임은 극에 이르러 고요해진다. 고요해짐은 음(陰)을 낳고 고요해짐이 극에 이르러 다시 움직인다." 그리하여 이러한 음양이 결합하여 수.화.목.금.토의 五행(行)을 발생하고, 음양 五행이 결합하여 천지 만물을 발생시켜 무궁한 변화를 계속시킨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우주의 근원을 '신'으로 보고 있는 것과는 판이하게 유교는 그것을 '역(易)'으로 파악하고 있다. 동일한 우주에 대해서 기독교와 유교는 그 견해를 이렇게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는 유교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오직 인간은 그 중에서 빼어남을 얻어 가장 신령스럽다. 형체가 생하여서는 정신이 발하여 인식을 한다. 五상(仁義禮智信)이 감동 하고 선.악이 갈려져 만사가 나온다." 인간의 본성을 착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우주론에 상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이 왜 오늘날과 같은 비참한 현실로 전락해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유교는 기독교나 불교처럼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은 듯하다. 그에 대한 묘사가 강열하지 않기 때문이 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의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성인은 그것을 정하되 중정인의(中正仁義)로써 하여 고요함을 위주로 인극 (人極)을 세우고, 군자는 그것을 닦아 길(吉)하며 소인은 그것을 패(悖)하여 흉(兇)하나니라." 인간의 현실상황을 '흉'으로 파악하고, 성인의 가르침을 따라 마음을 닦을 뜻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다.

기독교와 유교는 이렇게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해서 명확한 답변을 해 주고 있다. 그러면 불교는 어떤가. 이런 각도에서 불교 경전을 볼 때 뜻밖에도 불교는 기독교나 유교와는 전혀 다른 입장 을 취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기독교의 창세기는 구약성서의 제일 처음에 위치하고 있으며, 유교철학의 태극설도 근사록의 제일 처음에 위치하고 있다. 종교의 궁극적인 문제에서 우주의 기원이나 본질에 관한 것이 가장 근본이 되므로 그러한 서술 순서는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불교는 어떤가. 불교의 원시경전은 아함경이며, 그 중에서도 장아함이 제일 앞에 위치한다. 그런데 이 장아함을 볼 때 그 제일 처음에 우주의 기원이나 본질에 관한 것이 아니라, 과거 일곱 부처님의 탄생.출가.수도.항마.성도.전법륜.열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다시 말하면 다른 종교에서는 우주론이 설해질 장소에 불교는 부처님에 대한 이야기를 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의 우주론적 신화에 해당시킬 수 있는 것은 세기경(世紀經)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 경은 장아함의 제일 끝에 수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세기경은 남방불교의 불전에는 수록되어 있지도 않으니 이것은 그 경전 의 성립이 매우 늦다는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그만큼 불교에서는 중요시되지 않았던 내용이라는 뜻이기도 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부처님은 우주의 기원이나 본질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언어의 해설을 좀처럼 베풀려고 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부처님 당시에 만동자라는 비구가 있었다. 그는 부처님이 다음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 해명해 주시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매우 불만을 갖고 있었다.

  1) 세계는 영원한가, 무상한가, 영원하기도 하고 무상하기도 한가, 영원하지도 않고 무상하지도 않은가.
  2) 세계는 유한한가, 무한한가,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한가, 유한하지도 않고 무한하지도 않은가.
  3) 영혼과 육체는 하나인가, 둘인가.
  4) 여래는 사후에 있는가, 없는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가.

이 열 네가지 문제는 분명히 인간의 궁극적인 물음에 관련된 것들임을 볼 수가 있다. 1)과 2)는 세계의 시간적.공간적 성질에 관한 것으로서 종교의 우주론에 관련되며, 3)은 인간의 본성에 관한 것으로서 인간론에 관련되고, 4)는 그러한 인간이 깨달음을 열었을 때의 소식을 묻고 있는 것으로서 생활론에 관련되고 있기 때문이 다.

만동자는 이러한 문제를 내걸고 만일 부처님께서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명확한 답변을 해주시지 않으면 수도 생활을 버리고 부처님 곁을 떠나겠노라고 다그쳤다. 그는 분명히 인간의 궁극적인 물음에 번민하고 있었으며 그 해결을 부처님에게서 구하려고 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이에 대해서 부처님은 어떤 답변을 해주시고 계실까. 뜻밖에도 부처님은 만동자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주고 계실 뿐이 다.

"만동자여, 내가 일찍이 너에게 그런 문제를 답변해 주기로 약속한 일이 있었던가. 그리고 너 또한 내게 그런 답변을 듣겠다는 조 건 아래 내게 출가했던 것인가. 그런 일이 없었는데 네 이제 내게 그런 부질없는 항변을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네가 제기한 그런 문제를 내가 설명해 줄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만일 그것을 너에게 설명해 주고 있노라면 너는 그것을 다 듣기도 전에 목숨을 잃고 말 것이다.

비유하건데 여기 어떤 사람이 독묻은 화살을 맞았다고 하자 이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 독이 온몸에 퍼지기 전에 화살을 뽑아 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고집하여 말하되, 화살을 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이며 주소는 어디인지 등을 알기 전에는 화살을 뽑지 않겠다고 한다고 하자. 또는 그 화살이 나무로 만들었는지 대로 만들었는지 뿔로 만들었는지 등을 알기 전에는 그것을 뽑지 않겠다고 한다고 하자. 또는 화살촉이 쇠로 되었는지 돌로 되었는지 뼈로 되었는지 등을 알기 전에는 그것을 뽑지 않겠다고 하자. 그 사람은 그것을 채 듣기도 전에 목숨을 잃고 말 것이니라. 너의 질문 또한 그와 같은 성질의 것이다. 그러한 질문은 너의 깨달음과 지혜와 해탈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나니, 네가 성급 하게 알고 행해야 할 바는 너의 현존재가 괴로움이라는 사실과 나 아가 그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길이니라." 중아함(권 60)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다.

인간의 궁극적인 물음에 대해서 부처님은 답변을 회피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 열네가지 질문을 불교에서는 '무기(無記)'라고 한다. 그러한 질문이 제기될 때마다 부처님은 언제나 침묵을 지키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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