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우주의 실상과 깨달음|******@불교의우주론@

2018. 4. 1. 09:49일반/생물·과학과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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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우주의 실상과 깨달음

고익진.김운학.목정배/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불교 교리는 12처설과 3세업보설로 다한 것이 아니다. 우주의 본질을 밝히려는 미묘한 교리가 그 뒤에 다시 중층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3세업보설은 그러한 중층적 교리 조직의 첫걸음에 불과하다. 그러나 현실 세계의 정확한 관찰과 그에 입각한 합리적인 가설의 수립 및 검토라는 방법론은 새로운 교리가 나올 때마다 한결같이 응용되고 있다. 그리하여 우주의 본질에 대한 보다 올바른 이해에 착실하게 접근해 가고 있다.

그러한 교리조직을 여기서 독자들에게 납득시킬 만큼 설명할 수는 없다. 필자는 앞서 업설 뒤의 교리 조직은 그보다도 훨씬 미묘하게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내용은 독자들의 연구에 맡겨두고, 중요한 교리들의 항목과 그에 대한 간단한 소개만을 해 두고자 한다.

1) 六식(識)설 2) 十八계(界)설 3) 4대(大)설 4) 六계(界)설 5) 五온(蘊)설 6) 四제(諸)설 7)十二연기(緣起)설 8) 六바라밀설 9) 一불승(佛乘)설

불교는 현실 세게의 모든 것이 12처에 포섭된다고 봄은 앞서 소개한 바이지만, 이러한 12처는 하나도 항구불변하는 것이 없다. 덧없이 생주이멸(生住異滅)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이 생하려면 반드시 인(因)과 연(緣)이라는 두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이것을 체계적으로 말한다면 '6식(識)은 6근(根)을 인으로 하고 6경(境)을 연으로 하여 일어난다.'고 할 수가 있다(6식설). 18계는 12처의 세계관에 6식이 발생하므로써 띠게 된 입체적인 구조를 보여준다.

한편 6근과 6경은 모두 지.수.화.풍의 四대 요소로 분석된다. 그렇게 되면 18계는 6계(지.수.화.풍.허공.식)로 파악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6식설에서 6계설에 이르는 교리들은 12처의 세계로부터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을 탐구해 들어가 그 근원적인 모습을 밝히고자 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불교 흥기 당시의 사문들이 과학적인 물질분석을 통해 우주의 근원을 탐구해 들어간 작업과 일맥 상통함이 있는 것이다.

5온설은 이러한 요소설에 입각해서 인간 존재의 구성 형태를 해명한 것이다. 5온은 색.수.상.행.식의 다섯을 가리키는데, 그 바탕이 되고 있는 색은 4대요소를 '나'라고 집착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4대 요소가 결합한 일시적인 형체(色)을 항구 불변적인 나로 집착하면 이로부터 개체를 형성하는 수.상.행.식이 발생하여 인간 존재의 근간부(蘊)를 이루게 된다는 말이다.

4제설은 5온설의 이러한 인간관에 입각해서 삶의 가치를 제시한 교설이다. 5온으로 이루어진 인간 존재는 그 자체가 괴로움(苦)이다. 이 괴로움은 5온이 집기(集起)한 때문이다. 따라서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그 원인을 멸(滅)하는 길 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에 대한 바른 견해(正見)를 갖고 종교적인 길(道)을 닦지 않으면 안된다. 4제는 이러한 고.집.멸.도의 네가지 뚜렷한 사실(諸)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4제를 닦으면 예류(預流).일래(一來).불환(不還).아라한의 4과(果)를 차례로 얻게 된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6식설에서 6계설에 이르는 교설들은 분석적인 관찰로 우주의 근본을 탐구해 들어간 일종의 우주론이라고 보겠고, 5온설은 그에 입각한 인간론이요, 4제설은 생의 가치론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업설에 비할 때 이 교리 조직은 우주의 근원과 생의 가치에 대해 새로운 차원을 열어 주는, 보다 심화적인 교설임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우주를 움직이는 근원적인 힘에 업설의 해명은 우주의 근본 요소에 대한 의식에는 아직 미치지 못할 것이며, 그것이 뜻하는 생의 가치 또한 안락한 과보(生天)를 얻는데에 머물러, 생사의 근본적인 해결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4제를 닦으면 차례로 4과를 얻게 된다는 것은 앞서 소개하였는데, 이러한 길을 완성하였을 때 명(明)이 발생한다고 한다. '명'이라는 말은 '실재(實在)하는 것, 발견되는 것' 등의 뜻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명에 대한 무지가 무명(無明)이며 이러한 무명이 인간의 마음속에 있을 때 이것에 연(緣)하여 행(行).식(識).명색(名色).육처(六處).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가 일어난다고 한다. 이것이 소위 12연기설이다. 그렇다면 '명'은 불교의 요소설에서 다시 한 걸음 더 들어가 우주의 본질을 밝힌 것이며, 12연기는 이에 입각해서 인간의 생사 괴로움이 어떻게 발생하였는가를 밝혀 준 인간론이라고 말 할 수가 있다. 생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는 새삼 논할 필요가 없다. 무명에서 연기한 인간의 생사 현실은 실체가 없다. 따라서 공(空)이다. 그러나 허무와는 다르다. 헛된 세계의 괴로움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을 멸진 해야 한다. 그렇다면 현실 세계는 유(有)라고도 못하고 무(無)라고도 못한다. 따라서 중도(中道)라고 한다. 이러한 내용의 12연기를 깨달은 사람을 벽지불이라고 부른다.

대승불교의 6바라밀은 우주의 궁극적인 본질에 대한 탐구를 새로운 차원에서 다시 한 걸음 더 밀고 나간 것이다. 4제나, 12연기설에 의하면 생사와 열반, 무명과 무며의 멸진과 같은 두 법은 엄연히 분별된다. 그리고 생의 가치는 후자에 있게 된다. 그러나 이 분별과 집착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열반이나 무명의 멸진이 있게 된 성립근거를 생각해 보자. 이들은 생사나 무명의 연(緣)으로 하여 발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연기한 법이요, 연기한 것이라면 실체가 공한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동시에 우주의 본질은 분별.집착을 초월한다고 해야 한다. 그러한 본질은 이제 어떤 개념으로 표현할 수가 있을까. 언설과 사유를 초월해 버렸기 때문이다. 구태여 이름을 붙인다면 '그런 것(如)'이라고 할까.

우주의 긍극적 본질에 대한 이러한 지혜를 '반야(般若)'라고 한다. 반야는 무분별지(無分別智)요, 평등지요, 공지(空智)이다. 그리고 그러한 반야의 실천을 통해 분별망념의 괴로운 존재형태에서 피안에 도달하는 것을 '바라밀'이라고 한다. 반야바라밀다에 행하는 자를 보살이라고 하는데, 일체의 분별과 집착을 떠난 그의 무한한 자아 부정적 실천은 남과 사회를 결코 외면할 수가 없다. 보살이 반야와 더불어 보시.지게.인욕.정진.선정을 포함한 6바라밀을 닦음은 이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불교 교리는 업설에서 6바라밀에 이르기까지 어느것 하나 인간의 궁극적 물음에 대한 답변이 아닌 것이 없다. 우주의 근원적 힘.요소.본질이 무엇이며, 인간은 어떻게 해서 현재와 같은 괴로운 생사에 전락케 되었으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가 중층적으로 해명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의 우주론을 거론한다는 것 부터가 새삼스러울 정도이다.

우리는 흔히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을 듣는다. 이보다도 더 간결한 우주론이 있을까? 육조대사가 이르되 "여기 한 물건이 있는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다. 이름도 없고 자(字)도 없다. 위로는 하늘을 받치고 아래는 땅을 받친다. 밝기가 해와 같고 검기가 칠흙과 같다. 항상 움직이고 사용하는 속에 있지만 거둬 들이지 못한다. 이것이 무엇인고?" 하였을 때, 이보다 더한 우주론은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승불교의 이러한 유심설(唯心說)에 입각해서 우주론적 신화 비슷한 이야기까지 설해진 예를 볼 수가 있으니 능엄경의 우주론이 그 한 예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우주의 궁극적인 본질에 대한 어떤 해명이 참다운 진리성을 띠면서 신의 계시에 의했다든가, 성인의 말이기 때문이라든가, 가설의 정당성이 현실적으로 검토되었다든가 또는 냉철한 이지적 사유에 의했다든가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갓이다. 실제로 그것이 체험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뜻에서 부처님은 법화경에서 끝으로 다음과 같이 설하고 계신다.

"우주(諸法)의 실상(實相)은 오직 부처와 부처만이 주고 받나니 소위 그러한 상(相).성(性).체(體).힘(力).작용(作).인(因).연(緣).과(果).보(報).본말구경등(本末究竟等)이니라."

우주의 실상은 깨달음을 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우주의 본질적 실상에 대한 언설적 해명은 불교에서는 다시금 없다는 말이 된다. 불교의 우주론을 듣고자 했던 우리들의 기대가 다시금 어그러지는 느낌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 해답을 영원히 깨달음 속에 묻혀 두시라는 것은 아니다.

"부처가 세상에 출현함은 모든 중생에게 부처와 똑같은 지견(知見)을 갖게 하고자 함이라"고 누누히 강조하고 계신다. 궁극적인 진리를 손아귀에 쥐고 있으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라도 중생들께 열어보여 주려고 계신다.

그리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정성들여 시설(施設)해 놓으셨으니 그것이 바로 지금까지 살펴왔던 중층적(方便) 교리 조직이다.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불승(佛乘)이 있을 뿐, 제2승. 제3승은 없나니라."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4제설(아라한승).12연기설(벽지불승).6바라밀(보살승)은 한결같이 부처님의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다.
"3승은 오직 하나의 불승에서 분별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불교는 우주의 궁극적 실상에 대해서, 이렇게 '깨달음'과 '깨달음에 이르는 길' 이라는 독특한 방식을 가지고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방법은 안이하게 궁극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을 실망시킬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에게 지워진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한 답은 그것을 쉽게 제시하였다는 데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참답게 제시되었느냐 하는 곳에 보다 중요한 의미가 있다. 진지하게 진리를 구하려는 사람들께 불교는 결코 실망을 주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