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선 |…… 혜천스님설교

2018. 4. 14. 22:0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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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두선  

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불기2554년 6월 13일


 

 

오늘 강론의 주제는 구두선(口頭善)입니다. 보통 구두선은 화두선(話頭禪)의 반대되는 말입니다. 그 의미는 근본을 보지 못한다는 것, 본질을 보지 못한다는 것, 핵심을 보지 못한다는 것, 주변부나 지말에 쓸데 없이 치중하는 것입니다. 구두선은 원래 노선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하게 세치 혀를 놀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많이 쓰이는 말입니다. 

 

부처님은 본질을 보라, 근원을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질과 근원을 못 봅니다. 지말을 보고 주변부를 어른 거리는 것입니다. 근본과 본질을 본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가 무엇입니까? 결국은 사는 문제입니다. 부처님께서는 8만 4천의 법문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 많은 법문도 결국 사는 문제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당면 문제는 사는 문제입니다. 사는 문제란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즉 내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나의 문제 입니다. 부처님은 " 바보야! 지금 문제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너의 문제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을 보라는 것도 나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내가 힘들고 괴로울 때, 나를 위로해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결국 나의 문제입니다. 몸을 보라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결국은 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몸이 아플 때, 누가 나를 대신해 아파줄 수도 없고, 내가 몸이 힘들 때 누가 대신 힘들어 해줄 수 없고, 잠이 안와 불면증으로 사흘 정도 꼬박 지낸다고 누가 대신 그 고통을 감내해 줄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몸을 보라는 것도 나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대상을 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대상을 남의 문제로 취급합니다.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 처음에는 쓸데 없는 것을 솎아내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아리안족의 순수 혈통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유대인과 집시를 지목하고 그들을 죽이기 시작합니다. 유대인과 집시에게는 비로소 그들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히틀러가 그들을 학살한 이유는 아리안족의 성스러움을 오염시킨다는 것입니다. 그 때 그들 이외의 집단은 침묵하거나 심지어 교화되기도 했습니다. 남의 일이었기 때문이지요. 아마 어떤 이들은 속으로 환영했을지도 모릅니다. 유대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한 이유로 벌을 받는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 때 로마 교황청도 침묵했습니다. 이 때 죽은 유대인은 그 숫자라도 알려졌지만, 집시들은 죽은 사람이 수 십만인지 수 백만인지 그 숫자를 모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그들에게는 호적도 없었으니까요. 

 

히틀러는 어느 날 카톨릭을 압박하기 시작합니다. 독일은 개신교의 발상지입니다. 그 다음 순서로는 개신교마저 손대기 시작합니다. 그 때가 되어서야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가 반발하기 시작합니다. 그 전에는 즉 자기와 상관없을 때는 침묵하거나 심지어 동조했습니다다. 그러다 막상 그게 제거되고 난 후 그 화살이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에게로 돌아오자 그 때 거기에 대해 저항하기 시작합니다. 히틀러 스스로는 자기가 그리스도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그래서 부패한 성당과 교회를 척결하고, 새로운 성당과 교회를 세울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2차대전에서 연합국이 승리함으로써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실패해 2차대전이 종식되지 않았다면, 카톨릭과 개신교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대상을 보라는 것은 대상의 문제가 곧 나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본질, 근원을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동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인간에 비유하는 이야기를 우화라고 합니다. 우화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사람이 개에게 돌덩이를 던지면 개는 돌을 뭅니다. 사람이 사자에게 돌덩이를 던지면, 사자는 그 돌을 던진 사람을 뭅니다" 개는 그 근원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사자는 돌을 던진 사람을 본 것입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7대손으로 북인의 영수이며 선조 때 영의정의 지낸 이산해(李山海), 그의 아들인 조선 중기의 시인 이경전(李慶全:1567~1644) 은 9살 때 卽事(즉사 : 눈앞의 풍경)라는 시에서 "한마리 개가 짖으니 온 동네 개가 다 짖는다"고 했습니다.

 

(일폐군폐一吠群吠 한 마리 개가 짖으면 동네 개가 모두 짖는다)

 

一犬吠 (개 한 마리 짖어대)

二犬吠 (옆집 개가 짖어대고)

萬犬隨吠 (동네 모든 개들이 따라 짖어대네)

呼童出門看 (아이 불러 문 밖에 나가 보라 하니)

月卦梧桐第一枝 (달만 오동나무 높은 가지에 걸렸다 하네.)

 

첫 번째 개는 무언가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도둑일 수도 있고, 떨어지는 낙엽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복날을 지내고 나서 여름 날 밤 뒤척이다 죽는 꿈을 꾼 악몽일 수도 있습니다. 첫 번째 개는 어쨌거나 짖는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개는 본 것이 없습니다. 첫 번째 개는 근원과 본질을 본 것이지만, 나머지 개는 근원과 본질을 본적이 없습니다.   

 

명 말(明末)의 사상가 탁오(卓吾) 이지(李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공자가 위대한 성인이라고 생각하는데, 나 역시 위대한 성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모두 노자와 부처는 이단이라고 생각하는데, 나 역시 이단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같이 위대한 성인이나 이단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알지 못한다. 그저 부모와 스승의 가르침을 통해 익숙하게 들어왔을 뿐이다. 부모와 스승 역시 위대한 성인이나 이단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알지 못한다. 그저 선대 유학자의 가르침을 통해 익숙하게 들어왔을 뿐이다. 그리고  선대 유학자 역시 위대한 성인이나 유학자 역시 위대한 성인이나 이단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알지 못한다. 그저 공자가 다음과 같은 말들을 했기 때문에 이단이라고 생각할 따름이다."

 

(그는 지불상원에서 공자상을 공양했는데,  게다가 참지 못하고 <지불원 공자상에 부쳐(題孔子像於芝佛院)>를 써서 자기의 심정을 표현했습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성인의 가르침을 배웠지만, 정작 성인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공자를 존경하지만, 공자의 어디가 존경할 만한지 알지 못한다. 이것은 난쟁이가 사람들 틈에서 연극을 구경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잘한다는 소리에 덩달아 따라 하는 장단일 뿐이다. 나이 오십 이전의 나는 한 마리 개에 불과했다. 앞에 있는 개가 자기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같이 따라서 짖었던 것이다. 만약 누군가 내가 짖은 까닭을 묻는다면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쑥스럽게 웃을 수밖에...”

 

"사람들은 모두 공자가 위대한 성인이라고 생각하는데, 나 역시 위대한 성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모두 노자와 부처는 이단이라고 생각하는데, 나 역시 이단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같이 위대한 성인이나 이단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알지 못한다. 그저 부모와 스승의 가르침을 통해 익숙하게 들어왔을 뿐이다. 부모와 스승 역시 위대한 성인이나 이단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알지 못한다. 그저 선대 유학자의 가르침을 통해 익숙하게 들어왔을 뿐이다. 그리고  선대 유학자 역시 위대한 성인이나 유학자 역시 위대한 성인이나 이단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알지 못한다. 그저 공자가 다음과 같은 말들을 했기 때문에 이단이라고 생각할 따름이다. 그들은 공자의 '성인의 경지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聖卽吾不能)'라는 말을 겸손의 말이라 하고, '이단을 공격한다(攻乎異端)'는 말은 필시 노자와 부처를 두고 한 말이라고 하는 것이다"  

 

"선대 유학자는 억측으로 그 뜻을 말하고, 부모와 스승은 이를 답습하여 암송하고, 어린 아이들은 눈이 멀고 귀가 먼 채 그 말을 듣는다. 만 명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한결같이 똑같아서 깨뜨릴 수가 없다. 수천 년을 일률적으로 내려왔는데 자신들은 알지 못한다. 그런데 솔직하게 '그들의 말을 암송했을 뿐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이미 그 사람을 안다'라고 말하고, 솔직하게 '모르는 것을 억지로 안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아는 것을 안다고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지금 사람들은 비록 눈이 있어도 쓸모가 없다. " 

 

"나는 어떤 사람인가? 감히 눈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나 역시 그저 '대중을 따를' 뿐이다. 대중을 따라서 성인이라 여기고, 또한 대중을 따라서 공경하고 숭배하니, 그러므로 '나는 대중을 따라서' 지불원에서 공자를 섬긴다." )

 

탁오 이지는 '선유, 즉 스승과 아버지가 그렇게 얘기했을 뿐'이라는 데 의문을 제기합니다. 즉 내가 이단 또는 성인이라고 하는 것이 누군가의 말을 추종하는 것입니다. 내가 알아서 성인이라고 또는 이단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 또한 세상을 따르는 것'일 뿐입니다. 공자는 근원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근원을 보지 못했습니다, 추종할 뿐입니다. 부처님은 나(부처님)를 비판할 수 있어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맹목적으로 나(부처님)를 추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그것은 부처님의 관점이기 때문입니다. 나(너,여러분)의 관점, 나(너,여러분)의 체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부처님의 체험입니다. 

 

나는 인간의 본성이 부귀공명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 인간이 부귀공명을 추구하는지 아세요? 그것은 인정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여기 자식이 10명 있습니다. 그 중 어떤 애는 공부도 잘하고, 부모의 속도 안 썩이고, 엄마 아빠의 바람대로 나중에 부귀공명을 얻습니다. 우리는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을 비유적으로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말합니다. 맞는 얘기입니다. 문제는 왕창 깨무는가 아니면 살짝 깨무는가의 차이입니다. 요즘은 자식이 단 하나인 사람이 많습니다만, 둘만 되어도 그 중 이쁜 자식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바람에 부응한다는 것은 부모로부터 인정받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회로부터 인정받는 것이기도 합니다. 인정받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선택된다는 것입니다. 인정받게 되면 선택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대학 연구소에서 이런 연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연인이 헤어졌을 때 남녀 중 누가 더 상처 받을 까'에 대한 연구입니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여자가 더 상처받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연구 결과는 반대로 나왔습니다. 표면적인 상처는 여자가 받는 듯 하지만, 남자가 훨씬 더 내상이 깊습니다. 헤어졌을 때 남자가 훨씬 더 깊은 상처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상처를 치유하는데, 여자는 대일 밴드 한장이면 끝날 것을 , 남자는 병원에 입원하고 수술해야 합니다. 남자가 훨씬 상처를 많이 받는 다는 비유입니다. 그렇다면 왜 남자가 더 상처 받을까요? 헤어졌다는 것은 인정받지 못하고, 선택받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택은 남자가 아닌 여자가 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동물학자 로빈 메이커는 이런 말을 많이 합니다. 결국 인간이나 동물 세계는 누가 남자를 차지하느냐의 전쟁입니다. 일본 소설 <덕천가강(도쿠가와 이에야쓰) >의 저자 야마오카 소하치는 '이 전쟁의 승리자는 여자이다'라고 했습니다. 즉 일본의 전국 시대 100년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종식시켰지만, 그 최후의 승리자는 여자라는 것입니다. 남자는 여자의 대리인으로 그저 피 터지게 싸웠을 뿐이라는 얘깁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느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에게 색신이 둘만 있어도 도를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 하나 뿐이어서 깨우침을 얻을 수 있었다 "고 했습니다. 우리는 인정받고, 선택받고, 부귀공명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존재의 의미입니다. 미안한 얘기지만, 그런데 우리는 핵심에 다가가지 못합니다. 근원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부귀공명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얘기하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습니다. 부귀공명을 추구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것 처럼 보여야 인정받고, 존중받습니다. 저 사람은 욕심이 없고 겸손하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부귀공명을 추구한다고 대 놓고 말하변, 멸시와 경멸을 받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그렇게 교육받아 왔기 때문입니다. 좀 덜 떨어진 사람, 탐욕스런 사람이 부귀공명을 추구하는 것으로 치부합니다.

 

중국의 <장자>를 읽으면 속이 시원하다는 분이 많습니다. 얼마나 시원한지 한 여름 삼복 더위도 덮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시원하다고 말입니다. 장자는 세상을 조롱합니다. 장자는 세상 사람들이 달팽이, 그것도 달팽이 뿔을 차지하려고 서로 다툰다고 말합니다. 이런 말에 속이 시원합니다. 왜? 그런데 사람은 참으로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가진 자는 말하지 않습니다. 없는 자가 말합니다. 있는 자는 불평하지 않고, 없는 자가 불평합니다. 그래서 장자가 세상을 초월을 말합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보면, 정말 그럴까요?  지배자의 입장에서 보면, 장자가 정말 이쁠 것입니다. 지배자 입장에서는 장자와 같은 생각이 많으면 편할 것입니다. 가장 편하고 쉬운 삶이 장자의 삶입니다. 어차피 잃은게 없으니까 용감한 것입니다.

 

일제 식민지 시대 소설가 이상에게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다방에서 그 지역의 깡패 보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시비가 일자 이상이 말합니다. '나가서 웃통 벗고 나와 한 판 붙자'고 말입니다. 그 때 이상은 페병 말기인지라 내일 죽을 지 모래 죽을 지 모르는 목숨이었습니다. 깡패 두목이 폐병으로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나서 기타를 칠수 있을 정도로 깡마른 소설가 사내가 웃통을 까고 걸어 온 싸움에 어떻게 대처하겠습니까?  보스는 일어나더니 후다닥 36계 도망을 치더랍니다. 그 두목의 입장에서 이상에게 손을 대서 얻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당시의 깡패는 그래도 요즘의 논두렁 깡패와는 다릅니다. 힘없는 사람에게 주먹질을 한다는 것은 깡패 두목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두목은 이상과 싸워 얻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잃을 것만 있습니다. 그랬더니 이상이 이랬다지요. "왜 내가 무섭냐? 왜 도망가냐? 이 XX야" 이상은 아무 것도 잃을 게 없습니다. 그래서 깡패 두목도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어떤 할머니가 저녁에 TV를 보고 있는데 강도가 들었습니다. 강도가 외칩니다. "있는 것 다 내놔!" 그랬더니 할머니는 태연히 일어나 강도를 안내해, 장농이며, 서랍이며 친절히  다 열어 보여 줍니다. 가난한 할머니에게서 강도가 가져갈 물건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할머니가 말합니다. "우쩔꺼나, 미안혀서, 커피라도 한 잔 타줄까?" 강도가 어깨가 축 쳐져서 나갑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아예 강도의 등 뒤에 대고 못을 박는 말을 날립니다. "다음에 또 와! 그 땐 뭐라도 좀 준비해 둘께" 할머니에게서 강도가 가져갈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두려울 게 없습니다. 농 속에 파란 지폐 덩어리나 패물이라도 있었더라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런지도 모르죠. 그렇습니다, 잃을 것이 없으면 용감합니다. 

 

왜 부처님이 본질을 보라고 했을까요? 인간의 본성이 부귀공명을 추구하는 것이며,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본질을 보지 않는 한 부귀공명을 추구하는 마음을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부처님은 부자인 아나타빈티카에게 가난해지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왕인 빔비사라왕에게 권력을 놓아버리라고 말한 적도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내가 부귀공명을 이루고자 하는 본질을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질을 볼 때 떠날 수 있습니다. 

 

내가 재밌는 얘기 하나 해 줄까요. 내가 처음 절에 갔을 때는 참 배고픈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참선을 하는 스님에게는 떡을 줘도, 학승인 책 읽는 스님에게는 밥을 넉넉히 주지 않습니다. 내 친한 스님의 얘깁니다. 그 스님의 어머니가 언제나 들을 수 있게 아들에게 염불을 녹음해줄 것을 부탁했는데, 그 스님은 그 긴 염불을 녹음하다가 녹음을 끝내고 마지막에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자기도 모르게 '아이구 배고파 죽겠네'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테이프에 녹음이 된 것입니다. 어머니는 그 염불 테이프를 들을 때마다, 중이 되어 배고픈 아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지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형이 찾아와 눈을 부라리며, 왜 너는 중이 되어 매일 어머니를 울게 만드느냐고 따지더랍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내가 나중 공부를 끝내고 선원에 갔더니 과일이며, 빵이며 먹을게 널려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참 재미있습니다. 옆에 있으면 안 먹는다는 것입니다. 선원에 갔을 때 처음 일주일은 신납니다. 일주일이 되고나니, 그 음식들을 거들떠 보게 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실제적으로 보면, 육체적 배고픔도 배고픔이지만, 더 고픈 것은 심리적인 것입니다. 학인이었을 때는 먹을 것이 없습니다. 선원에는 먹을 것이 많습니다. 여기에는 먹을 것이 많고, 저기에는 먹을 것이 없습니다. 내가 언제든지 가지고 싶을 때 가질 수 있는 것은 욕심을 내지 않습니다. 가지고 싶을 때 가질 수 없는 것에 욕심을 부립니다. 부귀공명도 마찬가지입니다. 후한의 광무제와 그의 친구 엄광에 관한 일화가 있습니다. 엄광(嚴光:기원전37년∼서기43년)은 어릴 적 후한의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와 함께 뛰놀며 공부한 사이였습니다. 광무제가 왕망(王莽)의 신(新)나라를 제압하고 제위에 오르게 된 데에는 친구 엄광의 공이 컸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를 불러 은혜를 갚으려 했습니다. 광무제가 사람을 시켜 찾아보게 했더니 “양가죽 옷을 입고 못에서 낚시하고 있다(披羊裘, 釣澤中)”고 하였습니다. 광무제는 세 번이나 사람을 보내 그를 조정으로 불러들였는데,  광무제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그는 예전 친구사이처럼 대했고 황제에 대한 예를 갖추지도 않았습니다. 조정 대신들이 그의 무례함을 들어 벌을 내려야 한다고 주청했으나 광무제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는 광무제와 함께 밤새 얘기를 나누다 임금의 침상에서 함께 잠이 들었는데 예전의 버릇대로 광무제의 배 위에 다리를 걸친 채 잤다고 합니다. 엄광이 왜 그럴 수 있을까요? 엄광은 얻으려고 하면 언제나 얻을 수 있었습니다. 명나라 주원장이 이 고사를 읽으며, 책상을 내리쳤다나요? 엄광을 불충한 자라고 분개해서 말이죠. 주원장이 집권했을 때도 많은 이들을 벼슬길을 마다하고 있었습니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천한 출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대부들은 그 정권이 1, 2대 안에 끝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죠. 괜히 그 정권에 협조했다가 그 후 멸문지화를 당할 것이 뻔한데 누가 벼슬에 나서겠습니까?  엄광은 광무제가 왕망의 신나라를 멸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죽마고우이기도 합니다. 엄광은 얻으려고 하면 언제든지 얻을 수 있습니다. 엄광이 광무제의 부름에 나가지 않을수록 그의 값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고관산수도라고 해서 선비가 물을 바라보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의 주인 공이 엄광입니다. 그 일로 엄광은 후대에 존경을 받게 됩니다. 

 

얻을 수 있는 사람은 탐하지 않습니다. 얻을 수 없는 사람이 탐합니다. 부귀공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부처님이 본질을 보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본질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부처님은 본질, 근원을 보라고 하십니다. 누구로부터 인정받고, 선택된다고 해서 나의 문제가 해결 될까요? 나의 문제는 무엇인가요? 행복입니다. 내가 행복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행복은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누군가의 비교로부터 행복한 것입니다. 옛날 어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것은 자식들을 입에 들어가는 하루 세끼의 밥'이라고 했습니다. 그 때는 밥 세끼를 먹기도 힘든 시절이었습니다.그 러니 굶지 않고 밥만 먹을 수 있어도 행복합니다. 요즘 이런 말을 하는 부모가 있다면, 무능한 부모라는 얘기를 듣습니다. 대다수는 이 수준을 넘어갔다는 말입니다. 옛날엔 이런 말도 있었습니다. 젊은 새댁이 버스를 타고선, 아이에게 " 이 담에 커서 애비만큼만 되라'고 말합니다. 옆에서 그 아이 아버지가 무얼 하냐고 묻죠. 답합니다 "이장'이라고. 요새 이장하고는 얘기가 다릅니다. 즉 시대가 다릅니다. 이제는 좀 더 차원이 높죠. 우리가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 상대적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다는 것, 무엇을 하고 있다는 것과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무엇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됩니다. 뭔가 거시기합니다. 뭔가 끌쩍찌근합니다. 

 

부처님께서는 행복한가 아니면 행복하지 않은가는 네 자신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상대적 행복이 아니라 절대적 행복이죠. 비교를 통한 행복이 아니라 철저히 내 자신의 행복입니다.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내 자신의 문제입니다. '누군가의 나'로 존재하는 것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내 자신'으로 존재해야 행복합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나'로 존재합니다. 여기에 '나로서의 나'는 없습니다.  우리는 나보다는 우리, 1보다는 전체, 개인보다는 국가를 강조합니다. 하버드대 정치철학 교수인 마이클 센델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공동체주의를 주장합니다. 공동의 선이라는 것인 무엇인가요? 공동선을 추구하여, 그렇게 되면 '나'라고 하는 것은 어디에 존재합니까? 여기 법화선우님이나 청안선우님께서는 자동차부속이 몇 개인지 아시는지 모르지만, 나는 자동차 부속이 몇 개인지 모릅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를 자동차에 비유하면, 하나의 부속인가요?  부처님은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그리고 자문자답하게 하는 것입니다. "너는 전체 중의 하나인가 아니면, 네 자신으로 존재하는가?" 우리는 남의 문제에 대해서는 기를 쓰고 싸웁니다. 어제 100만명이 넘는 인파가 비를 맞으며 길거리에서 축구경기를 응원했다고 합니다. 나는 잤습니다. 나는 그런 데에 관심이 없습니다. 더 솔직히 말하면 TV가 없습니다.(선우님들이 이말을 진짜로 알아듣고 TV를 들여놓자고 한 때 수~울렁). 우리는 축구경기를 보기 위해 기꺼이 비를 맞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 자신의 문제에서는 비를 맞기 꺼려합니다. '비 그치면 가서 하지'라면서 미루죠. 정작 자신의 문제에서는 결단하지 못하죠. 나도 가끔 찾아오는 이들에게 쪽집게 도사보다 더 결단을 잘해 줍니다. 그러나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도 그럴까요? 얼마나 자신의 본질을 잘 알까요? 

 

조선 후기 연담 유일 연담유일蓮潭有一이라고 하는 스님이 있습니다. 전남 해남 대흥사라고 하는 절에 있던 스님입니다. 아! 아마 초의선사가 증손자뻘이라고 하면 쉽게 알겠군요.  그는 자기 자신을 相半(치힐상반)이라고 했습니다.  癡는 어리석다는 뜻이며, 은 교활하다는 뜻입니다. 즉 나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음과 교화함이 반반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진실한가? 우리는 공명을 이룰수록 공명을 멸시하고, 부귀를 이룰수록 부귀를 탐함니다. 백장(百丈)은 ´평상심이 도이며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한 8세기 경에 살았던 마조도일 선사의 제자입니다. 백장선사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를 먹지 않는다´는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의 백장청규를 만들고 실천한 승려이다. 어느  날 백장선사가 차를 마시다가 갑자기 가래침을 뱉었습니다. 이에 시자가 그 이유를 묻자 답하기를 "내가 조금 전에 차를 마시다가 깊이 도를 생각하게 되었다" 고 말합니다. 시자가 되묻기를 "그건 좋은 일이 아닙니까?" 그에 대한 답"나는 그것이 혐오스러워 침을 뱉은 것이다" 과연 백장 선사가 왜 침을 뱉은 것일까요? 이런걸 화두라고 합니다. 연담스님이나 백장스님은 왜 그런 말을 할까요? 우리는 가식이 많습니다. 즉 꾸며서 말합니다. 왜일까요? 왕따가 두려워서, 즉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을까봐 두려워서 그런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법구경을 비롯한 여러 경전에서 진실을 말합니다. 진실은 꾸미지 않는 것입니다. 꾸미지 않는다는 것은 감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연담유일스님이 치힐상반이라고 말하고, 백장회해 스님이 도에 침참한 것이 혐오스럽다고 말하는 것은 감추지 않는 것입니다. 연담유일 스님과 백장회해 스님이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는 것은 감추지 않아서 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바보야! 문제는 네 자신이야!"라고 말합니다. 나의 문제, 즉 내 자신이 문제입니다. 한 번 자기 자신을 냉정하게 평가해 보세요. 한 번 자기 자신의 본질을 냉정하게 보세요. 나는 부귀공명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나 자신도 그렇습니다.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행동한다고 했습니다. 못하니까 이리 앉아서 오늘도 말품을 팝니다. 나는 하늘을 우러러서도 한 점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나는 아예 하늘을 안보니까 부끄러워할 것이 없습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하늘을 안보면 됩니다. 우리는 어렵게 생각하죠. 예전에 수학공부를 할 때, 어떤 말을 들으셨습니까? 수학공부를 어렵게 공식을 풀지 말라, 간단하고 단순하게 생각하라. 그렇습니다. 단순합니다. 결국 나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나의 문제에 대한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구두선은 말이 있고, 실체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용두사미도 그런 비슷한 의미입니다. 처음에는 거창하지만, 끝이 없는 것입니다. 포장은 훌륭하나 상품이 형편없는 것도 이런 것입니다.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선물을 받을 때, 포장지는 거창한데, 내용물은 '이게 뭐야?'하는 경우입니다. 소갈비를 선물받았는데, 그것이 헤엄쳐 온 것일 때, 장모님이 사위에게 씨암탉을 잡아 줄 줄 알았는데, 후라이드 반/ 양념 반의 치킨을 주문할 때도 그런 경우입니다. 사위로서는 이 때 아쉽죠. 

 

오늘 강론의 결론은 바로 그것입니다. 씨암탉을 내 놓으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모든 것은 나의 문제만 존재합니다. 그외의 문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  강론에 힘입어 어느 새 비가 그치고 해가 납니다. 그저 비온 뒤의 햇살처럼 행복하십시요. 오늘 강론은 여기까지입니다. 


 

 

혜천스님 - 초기불교전공 흥천사주지 



가을 향기 물씬한 아름다운 선율

01. Angels of venice - sad Lisa 02. Ralf E. Barttenbach - Loving Cello 03. Rebecca Luker - Una Furtive Lagrima 04. Giovanni Marradi - Una Furtiva Lagrima 05. Ernesto Cortazar - Noctunal Melancholy 06. Daveed - In Trance 07. Phil Coulter - Greenleaves Of Summer 08. Giovanni Marradi - with you 09. Meav - one I love 10. Sissel -Summer Snow 11. Yuhki Kuramoto - Paris In Water 가을이면... 신 영

가을이면, 몸이 아파져 오는 오랜 지병이 있습니다. 사근사근 온몸에 파고드는 아리고 저린 병이 마음이 아파져 와 몸이 아픈 건지 몸이 아파져 와 마음이 아픈 건지 모를 가슴앓이에….
 

이 가을에는
가슴앓이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몇 번을 다짐해보지만….
오래 묵은 천식처럼
그렁그렁 끓는 가래 같은 몹쓸 병인가 봅니다.
가을이면 앓는 이 지병은.


오색 단풍이 물드는 가을이면,
몸이 아파 견딜 수 없는 날이 있습니다.
물들이기 위해 
제 몸의 살갗을 긁어내는 나뭇잎들을 보면서
몸이 아파져 오고
마음이 아파져 옵니다.


해마다 이 가을이면,
마음에 묵은 다짐을 하며
내년 가을에는 이렇게 아프지 않겠노라고….
이 아름다운 오색 단풍을 즐기기만 하겠노라고.
그렇게 몇 번을 마음먹어 보지만
또 모를 일입니다.

그래도 가을이면,
삶을 엿볼 수 있어 고맙습니다.
인생을 묵상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저 아름다운 자연을 통해서
창조주의 은혜 하심과 피조물인 나를 고백합니다.
아프지만 그래도 행복합니다

저 오색 단풍을 보면서 떨어지는 가을 낙엽을 보면서…. 하나 둘 갈바람에 흩날리고 갈비에 젖어 하나 둘 땅의 색깔을 찾는 저 자연을 보면서 삶의 이치를 배웁니다. 오늘의 호흡하는 이 시간의 감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