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니타, 너의 잘못이 아니다. |…… 혜천스님설교

2018. 4. 29. 20:5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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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니타, 너의 잘못이 아니다.

 

 

*경전 자료를 찾아 본바 강론에서 똥치기 수니타는 니다이, 그 일화에 나오는 빔비사라왕은 하시노쿠왕이 아닌가 합니다. 스님이 아마 착각하신듯 합니다. 여쭤 보시길 바라오며, 이 카페 줄탁동기 칼럼에 이 일화를 싣습니다.  

 

 

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불기2554년 6월 27 

 

 


 

오늘 강론의 주제는 ‘수니타, 너의 잘못이 아니다’입니다.

 

여기서 수니타는 사람 이름입니다.

수니타가 어느 날 남의 집 변소를 치고, 인분을 잔뜩 지고 골목을 막 빠져 나오고 있을 때, 부처님이 오시는 모습을 마주하게 됩니다. 수니타는 자신의 그런 모습을 보이기가 당황스러웠고, 부끄러웠습니다. 남의 집 인분을 쳐서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골목길을 빠져 나가는데, 하필이면 그 때 부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수니타는 빨리 그 곳을 벗어나야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이 급하면, 몸도 따라서 급해지죠. 마음이 급하면, 몸의 세포 하나하나 자율신경도 예민해집니다. 그래서 그 급한 마음에 수니타는 자빠졌습니다. 인분을 담은 나무통도 깨졌습니다. 그리고는 그는 온몸에 인분을 뒤집어쓰게 되는데, 부처님께 죄송하고, 자기 자신에게 부끄러워 엉엉 울며 눈물을 흘립니다. 자기 자신이 가련하고 불쌍하게 느껴집니다. 나는 어찌하여 똥치기로 태어나 똥치기로 사는가? 부처님은 그런 수니타를 잡아 일으켜 강가로 데려가 강물에 목욕을 시킵니다. 그리고 나서  부처님이 말합니다. “수니타여 나를 따라나서 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러자 수니타가 답하기를 “세존이시여! 저는 불가촉천민입니다. 어찌 저같은 불가촉천민이 고귀하신 부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단 말씀입니까?” 인도의 카스트 중 가장 낮은 신분이 남의 화장실을 청소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참 이상합니다. 내 몸 속에 있을 때는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것이 내 몸 속에서 나가면 그것을 더럽다고, 즉 부정하다고 생각합니다. 프랑스의 황제 루이 16세는 호화로운 궁전을 지은 왕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래서 그는 왕궁을 지으면서 화장실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 멋진 왕궁에 더러운 똥간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화장실을 못 만들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현상이 벌어졌을까요? 사람은 누구나 먹으면 배설합니다. 남자, 여자를 불문하고, 미인과 추녀를 막론하고 사람은 누구나 먹으면 쌉니다. 그러니 왕궁에 온 사람들이나, 일을 하러 온 사람들이 배설을 위해 어슥한 곳을 찾기 시작합니다. 나중에는 온 궁에 똥 냄새가 가득해집니다. 좀 과장하면 그저 사람들만 안 보이면 궁둥이를 까고 앉는데,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 삶에서 배설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배설을 천하게 여깁니다. 인도에서는 신분 상 가장 아랫 쪽에 있는 사람이 배설처리를 담당하는데, 이를 아주 천하게 여깁니다. 카스트는 원래 인도를 식민 통치한 영국이 지어낸 말인데, 인도 원어는 바루나입니다. 바루나는 그 의미가 색깔입니다. 즉 피부색을 뜻합니다.

 

얼마 전에 인도의 수도 뉴델리에서 명예살인이 일어났습니다. 상위 카스트의 딸이 하위 카스트의 청년과 결혼을 결심하는데, 집안에서 반대하지만 딸이 고집을 부립니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 오빠 그리고 친척들이 그녀를 죽였죠. 옛날 인도의 시골에서는 이런 식의 소위 명예살인이라는 것이 빈번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인도의 수도 뉴델리에서 명예살인이 벌어졌으니, 당연히 논란이 일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카스트 상의 신분 때문에 그녀를 죽였습니다. 더 어처구니 없는 것은 살인자들이 이런 행위를 당연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녀가 가문을 부정하게, 즉 더럽게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인도 사회가 이 정도이니, 부처님 당시에는 어떠했겠습니까?

 

똥치기 수니타가 비구가 되었다고 하자, 비구들이 탁발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수니타가 불가촉천민 출신인데, 그가 비구가 되었으니 불가촉천민에게는 공양할 수 없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탁발은 음식을 비는 것이 아닙니다. 인도의 전통 문화 관념에 따라 살아있는 신에 대해 공양물을 바치는 것이 탁발입니다. 원래 사제계급인 브라만은 생애 후반기 유랑을 하게 되는데, 남의 집 문턱에 서 있으면, 음식을 담아주는 전통이 그것입니다. 수니타가 출가했으니, 비구들에게 공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머리를 깎았으니, 그 놈이 그 놈 같아 구별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수니타를 비구들 중에서 구별할 수 없을 것이니, 아예 비구들에게 공양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그 사람의 얼굴, 주름살, 옷, 풍기는 느낌으로 사람을 판단합니다. 가장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의 손입니다. 그러니 누가 수니타인지 어떻게 가려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아무도 공양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불교교단이 출발한지 얼마 안 되어 일어난 일입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그 나라의 왕인 빔비사라왕이 부처님을 찾아갑니다. 빔비사라왕은 부처님께 믿음이 깊은 왕이기도 합니다. “똥치기가 출가하여 어느 누구도 공양하지 않는다고 하니, 저는 매우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분질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분제도가 무너지면 곤란합니다. 고대사회는 노예경제입니다. 즉 노예를 통해 모든 경제활동이 일어나기 때문에, 신분질서가 무너진다는 것은 노예제도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고려 광종 때, 노비안검법이라는 것이 실시되었습니다. 그간 전쟁을 통해 많은 포로가 생겨났는데, 이들은 모두 권문세가의 노비가 되었습니다. 권문세가에 따라서는 수 천 명의 노비를 거느린 집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동족을 노비로 삼는 드문 사례입니다. 고려 광종 때 이들을 전부 사면하게 되는데, 이는 지방 호족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약화시키려는 것입니다. 노비는 주인이 칼을 쥐어 주면, 싸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곧 사병입니다. 빔비사라왕은 왕이기 때문에 신분질서의 변동이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통치자 입장에서는 용인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그 당시의 빔비사라왕의 입장에서는 왕조의 흥망성쇠와 관련된 것입니다. 빔비사라왕이 부처님을 만나기 위해 베르바나로 들어올 때, 어떤 비구를 만납니다. 그 비구는 출가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고귀함을 풍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모셔서 공양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빔비사라왕이 부처님께 조심스럽게 수니타 얘기를 꺼내어, 교단의 걱정하고, 사회를 걱정하는 얘기를 합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이르기를 “수니타를 한 번 보겠는가?” 그리고 수니타를 데려오게 합니다. 그런데 빔비사라왕이 수니타를 보고 깜짝 놀라게 되는데, 바로 조금 전에 본 공양해야겠다고 생각하던 그 비구였습니다. 그래서 빔비사라왕은 자기 생각의 잘못을 알게 된다. 사람이라는 것이 본래부터, 즉 태어날 때부터 품성이 천해서 천한 것이 아닙니다. 그 뒤 왕은 수니타를 모셔 절을 세 번하고, 공양하게 되는데, 그것으로 동요가 일단락됩니다. 최고 권력자가 수니타에게 절한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왕이 절을 하는데, 그의 신하들이 절을 못할 것이 없으며, 신하들이 절하는데 그 외의 사람들 역시 그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이 수니타에게 말씀하신 것은 “수니타여 울지 말라! 부끄러워 말라! 그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다.”입니다. 여기서 ‘너의 잘못이 아니다’라는게 뭘까요? 넘어져 인분통을 깬 것일까요? 마음과 몸이 급해 넘어진 것인가요?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한 것은 그의 신분을 뜻합니다. 누군가의 자식으로 태어나는 것, 즉 누군가를 어머니로 하고, 아버지로 하는 것이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신분제도를 부정합니다. 현대 인도에도 신분제도는 살아있습니다. 명예살인이 엄존하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런데 2,500년 전에 이런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플라톤은 노예가 국가 존재의 필수 조건이라고 했습니다. 과거의 전쟁은 영토를 확장하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노예를 확보하기 위해 전쟁을 한 것입니다. 삼국지를 보면, 보통 나오는 군대가 100만대군이어서, 100만 대군이 죽었다는 식의 표현이 나옵니다. 진나라에게 백기를 든 조나라의 군사 40만명이 생매장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과연 삼국시대 중국 인구가 얼마나 되었을까요? 학자들은 보통 1000만 ~ 3000만 정도 봅니다. 그렇다고 보면, 중국 대륙의 대다수의 땅은 경작할 사람이 없어 놀고 있습니다. 그래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노예사냥을 하는 것입니다. 그건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이 수니타에게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부모로 하여 태어난 것, 누군가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선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그래서 신분질서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귀족 또는 노예로 태어난 것은 나의 노력의 결과가 아닙니다. 즉 출생이라는 조건에 따라 누군가가 부와 지혜를 더 많이, 또는 더 적게 갖는다는 것은 불공평합니다. 즉 부당합니다.

 

현대 미국도 소수인종 우대 정책이라는 걸 씁니다. 명문대학의 로스쿨 입학생을 선발할 때 입학성적과는 별도로 가난한 집안 출신, 동양계, 라틴계, 아프리카, 중동 출신자들을 선발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학교 성적과는 관계없이 일정 TO를 부여해서 선발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부모로 해서 태어난 것으로 같은 출발점에 서지 못한다면, 그것은 부당한 것입니다. 그것은 정의와 가치에 반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미래가 그것으로 성공 여부가 좌우 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소수인종우대 정책이 나온 것입니다.

 

부처님은 2,500년 전 그걸 얘기하는 것입니다. 수니타를 직접 보지 않아도 지금 우리는 그가 어떤 출신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선주민이어서 키가 작고 까무잡잡합니다. 지배자이자 정복자들은 백인입니다. 그들은 브라만으로 사제신분입니다. 그 아래 크샤트리아가 군사를 담당하고, 일반 사람들은 바이샤 신분입니다. 크샤트리아는 왕위계승권을 가진 집단으로, 부처님도 이 출신입니다. 사실 높은 신분의 사람이 낮은 신분의 사람들을 같은 인간으로 평등하게 대한다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렇게 했습니다. 왕위를 물려받지 않은 것은 부처님의 생각과 관련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아버지는 숫도다나 왕입니다. 고타마 싯타르타가 아버지의 왕위를 물려받는다는 것은 노력의 댓가로 얻어지는 결과가 아닙니다. 땀 흘려 얻지 않은 것으로 그가 누린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고 보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꿈꿉니다. 행복을 원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내가 땀 흘려 얻지 않으면, 누린다고 해서 행복하지 않습니다. 내가 노력을 통해 이룬 것만이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습니다. 부모의 높은 지위를 물려받는다고, 부모덕에 많은 돈을 물려받는다고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일본에서 어떤 사람이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았습니다. 그것도 아버지로부터가 아니라 친척 중 그가 가장 가까운 혈연이라 물려받은 것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당숙이 죽었는데, 그 슬하에 자식이 없어 재산을 물려받는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이 많은 재산을 물려받은 그가 전혀 행복하지 않습니다. 하루 아침에 벼락부자가 되었으니, 많은 사람들이 돈을 빌려 달라고 손을 내밀며, 몇 억씩 빌려갑니다. 그러나 빌려가는 사람들의 태도가 영 고마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옛날보다 수 천배의 돈을 빌려감에도 말이죠. 그 전에는 작은 도움에도 그 사람에게 고마워했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된 지금에 이들은 돈을 빌리면서, 이런 표정을 짓습니다. “이거 원래 이꺼 아니잖아”하는 표정으로 돈을 빌립니다. 이 사람은 차라리 그 돈을 상속받기 이전이 더 행복했습니다. 그 때는 작은 것에도 행복했습니다. 이제는 무엇이 행복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옛날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어디에 돈을 기부해도, 선의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횡재에도 불구하고 더 불행해진 것입니다. 만약 그 분이 노력해 얻은 것으로 도와줬더라면, 사람들이 고마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횡재로 번 돈으로 도와주니 고마워하지 않습니다.

 

내가 스스로 노력해 떰 흘려 얻은 것만이 너를 행복하게 해준다.’는 것이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가난한 집 아들인 것, 내 부모가 부자가 아닌 것, 내 부모가 권력이 없는 것, 이런 것은 내가 선택한 환경이 아닙니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환경에 대해서 내가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처님은 태생에 의해 귀해지거나 천해질 수는 없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직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따라, 그가 천해지고 귀해 지는 것입니다. 그가 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해야 합니다. 태생적인 것으로 걸맞고 또는 걸맞지 않는 대우를 한다면, 그것은 부당합니다. 불공평합니다.

 

지금은 옛날과 달라 대한민국이 많이 변해 구호나 표어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때 전두환의 집권시절 정의사회구현을 강조한 적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정의를 이야기 할 수 없는 분들이 정의를 말한 것입니다. 그들은 권력의 장악을 위해 동족을 죽인 사람들입니다. 아직도 1980년 5월 광주에서 군인이 민간인에게 총을 쏘라고 지시한 사람이 누구인지 밝혀진 게 없습니다. 추측만이 있을 뿐이죠. 그런데 이들이 정의를 주장합니다. 환경에 의해 그 사람이 불공정한 대우를 받는다면, 그 사회는 정의사회가 아닙니다. 부처님은 그걸 얘기하는 것입니다. 환경에 의해 기회가 박탈되는 사회는 불공정한 사회입니다. 환경에 의해 부자가 되고, 귀해지고, 명예를 얻는 사회는 불공정한 사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카스트 제도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승가를 여러 층의 신분의 사람으로, 여러 집단으로 구성합니다. 그 당시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상위 집단은 이을 경멸합니다. 카시 바라드와자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브라만 출신인데, 그의 조카가 붓다의 제자가 되자 이렇게 말합니다. “천한 몸아! 우리 가문을 모독하는구나.” 같은 카스트끼리는 같은 자리에서 밥을 먹지만, 카스트가 다르면 같은 자리에서 밥조차 먹을 수 없습니다.

 

20여 년 전 안동 하회마을을 간 적이 있습니다. 유성룡을 비롯한 풍산 유씨 집성촌이 있는 곳으로, 집들이 참으로 좋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집에 이르기 전 강가에는, 즉 오른 쪽에는 개딱지 같은 초가집들이 즐비합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큰 기와집들이 있는데 말이죠. 이건 보나마나 종들이 살던 집이죠. 우리의 경우는 적어도 천한 신분들이 같은 마을에라도 삽니다. 그런 점에서는 인도보다 낫습니다. 불가촉천민은 상위 카스트의 우물을 뜰 수도, 마실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인도를 너무 많은 환상을 가지고 봅니다. 부처님은 같은 자리에서 밥을 먹는 것으로 부정해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도의 카스트는 피부색깔에 근거합니다. 피부의 색깔에 따라 지배자와 피지배가, 정복자와 피정복자가 갈라집니다. 하회마을이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관계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종족은 동족을 노예로 부린 특이한 종족입니다.

 

카시 바라드와자가 조카의 불교 귀의를 모독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부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도에서 현재에도 명예살인이 일어나는 이유 역시 부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도에서 바라문은 종교권력을, 크샤트리아는 정치권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라문과 크샤트리아는 통혼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바라문 남자와 크샤트리아 여자가 결혼하면, 그 자식의 신분은 바라문입니다. 반대로 크샤트리아 남자와 바라문 여자가 결혼해 아이를 낳으면, 그 자식은 바라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제집단이 정치권력의 서포트를 받아 유지되고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그래서 통혼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부처님의 제자들과 불교가 부처님의 이러한 입장을 계승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왜 부처님의 이러한 생각들을 이해하지 못했을까? 부처님의 제자들은 이걸 집중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어떤 바라문에서는 반대자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말씀을 성스러운 말이라고 하며, 성스러운 언어라고 합니다. 인도에서 지배계급의 언어는 부처님의 말과는 다릅니다. 즉 산스크스트어입니다. 그런데 불교 경전의 기록이나 부처님의 말씀은 빨리어입니다. 빨리어는 속어로 일반 민중의 말입니다. 부처님이 이들 민중의 언어를 쓸 때, 브라만 출신의 제자들이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들을 배제하고파 하는 것입니다. 유럽의 중세 지식인들 역시 그 나라의 언어가 아닌 라틴어를 썼습니다. 영국 왕실도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를 씁니다. 프랑스를 누가 지배하느냐를 두고 영국과 프랑스간 100년 전쟁이 일어납니다. 영국을 지배하고 있는 왕실은 프랑스 남부출신으로, 프랑스 왕실과 영국왕실은 같은 혈통입니다. 잔다르크는 이 전쟁이 낳은 영웅이죠. 영국 궁정이나 귀족은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영어를 싼 것으로 취급합니다. 바라문들이 부처님이 산스크리스트어를 쓰게 하려는 의도는 교단에서 그들 이외의 다른 집단을 배제하려는 것입니다. 산스크리스트어는 아리안족, 즉 정복자들의 언어입니다. 피정복자인 선주민의 언어를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국 인디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의 경우 인디언의 숫자가 많고, 지배자가 소수입니다. 소수지만 자기들끼리의 결속을 위해 같은 부류, 혈연, 동향, 학연으로 뭉쳐, 다른 집단을 배격합니다. 집단과 집단이 결속하게 되면, 그 외의 것은 반드시 배타적입니다.

 

<마을로 간 한국전쟁>이라는 책을 보면, 6.25때 죽은 많은 민간인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민간인 희생자들은 군인들의 총이나 대포에 맞아 죽은 숫자보다 같은 마을에서 주민들이 서로 살육해 죽은 숫자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같은 마을에서 친족, 혈연, 가문에 얽혀 서로 죽고,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이 전쟁으로 죽은 사람보다 많다는 것입니다. 단지 자기 집단에 속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즉 혈연, 학연, 이념이 같지 않다는 이유로 학살한 것입니다. 우리는 특정 집단에 대해 백안시하거나 배척합니다. 그렇게 하면, 미래의 희망이 없습니다. 결속보다 중요한 것이 연대입니다. 연대는 집단과 집단 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연기도 연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떤 태생도 누구의 잘못이 아닙니다. 즉 그의 잘못이 아닙니다. 수니타가 똥치기 아들이어서, 그가 똥치기여서 그가 머리를 깎고 비구가 되었는데도 굶겨 죽이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바입니다.

 

현대사회의 우리들은 연대를 잘 못합니다. 아래의 똥치기부터 위의 브라만까지 연대해야 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모든 인간이 동일하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은 그 어떠한 인간도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나지 않은 자를 본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힌두교가 말하는 다음과 같은 것에 대한 비판입니다. 힌두교에 따르면, 브라만은 범천의 입으로 만들어 고귀하고, 크샤트리아는 범천의 양쪽 팔로 만들어 그 다음으로 고귀하고, 바이샤는 범천의 넓적다리로 만들어 그 다음으로 고귀하고, 수드라는 범천의 발가락으로 만들었으니 천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아래인 불가촉천민은 얼마나 천한다는 말입니까? 부처님은 브라만이 왜 입에서 태어나지 않고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나는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모태에서 태어나는데, 귀하고 천한 것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환경에도 불구하고 모두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니타의 잘못이 아니다. 즉 그런 그의 부모 밑에서 태어난 것이 수니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얻으라! 네가 노력해서 얻으라! 그것이 네 것이다. 그것이 너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라는 것이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어떤 일본인이 갑자기 뜻하지 않은 많은 유산을 물려받게 된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결코 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습니다. 스스로 지혜를 얻을 기회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기본적으로 신분질서를 부정합니다. 조선시대는 신분사회입니다. 투명한 유리의 신분제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좋은 조건, 즉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부로 보다 낳은 조건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좋은 부모를 만나 보다 나은 조건에서 공부하면 성공할 기회가 높아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은 그만치 개천에서 용이 나기 어렵다는 것을 뜻합니다.

 

부처님은 2,500년전 모든 사람이 연대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모두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우리가 고민해야 할 부분입니다. 완고한 반상 질서는 무너졌지만, 유리 같은 반상 질서가 그대로 엄존합니다. 그걸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부처님의 이런 정신을 우리가 이해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이 자유경쟁을 부정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오해입니다. 부처님은 모든 사람이 나눠가져야 한다고도 말한 바 없습니다. 부처님은 노력하지 않고 환경에 의해 얻는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부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저번 강론에서 말했다시피 부처님은 사람이 1)재물 2)명예 3)장수 4)사후의 안락, 이 네 가지를 추구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재물, 명예, 장수, 사후의 안락을 얻기 위해서는 1)믿음 2)계율 3)관용 4)지혜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네 가지를 성취하게 되면, 재물과 명예와 장수와 사후의 안락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네가 땀 흘려 얻으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불공정한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피자 한판을 어떻게 키우느냐 또는 그 피자를 어떻게 나누느냐 하는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내가 땀 흘리면 그것을 먹을 수 있다는 얘깁니다. 다만 땀 흘려 모든 것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내 환경에 대해서 부끄러워 말라는 것입니다. 왜? 너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엊그제가 6.25 60주년 기념이라고 합니다. 나는 이 기념이라는 말도 어색하고 탐탁하지 않습니다. 좌우지간 내의 개인사를 보면, 외삼촌은 인민군에 잡혀 소 끌려가듯 끌려가고, 부친은 징집되고, 어머니는 군군의 밥과 인민군의 밥을 번갈아 하느라 좌불안석이었습니다. 어찌되었건 국민을 굶주리게 하는 지도자는 지도자가 아닙니다.

 

법회를 마치면서 이땅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산화하신 그 분들께 영원한 안식을 기도합니다. 경상도 말로 오늘 제가 이렇게 지껄이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 날 그 분들의 덕입니다. 그 분들이 없었다면, 이런 것도 못합니다. 우리는 그 때 피 흘려 자유와 평화를 지켜낸 그분들의 피와 상처를 있어서는 안 됩니다.

싸두 싸두 싸아~아아 두.

 

 

혜천스님 - 초기불교전공 흥천사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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