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스승은 누구인가|…… 혜천스님설교

2018. 4. 22. 10:3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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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승은 누구인가

 

 

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불기2554년 6월 20일 


 


오늘 강론의 주제는 ‘나의 스승은 누구냐?’입니다.


부처님께서 보리수좌에 앉아서 성도 하실 때, 3주간 그 곳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처음으로 설법하러 가시게 됩니다. 최초의 설법지는 녹야원이라고 불리는  베레나스인데, 이곳은 불교의 4대 성지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부처님은 가야와 우루벨라 사이에 있는 큰 길을 걸어가는 길에, 아지비카 교파(한역 邪命外道)인 우파카를 만납니다. 아지비카는 사상의 핵심은 모든 가치의 기준을 존재 또는 삶 그 자체에 둔다는 것으로, 어떤 형태의 존재 또는 어떤 형태의 인생도 지위고하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존재한다는 그 자체로 지극히 가치가 있다는 입장을 취했는데, 우파카는 아지비카 가르침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가 부처님에게 말했습니다.

 

“그대의 감관은 매우 깨끗하고 모습은 아주 밝습니다. 그대는 누구를 모시고 있으며, 그대의 스승은 누구입니까. 또 그대는 누구의 법을 따르고 있습니까.” 한 젊은 사문(沙門)의 질문을 받은 부처님이 게송으로 답했다. “나는 모든 것을 이겼고, 모든 것을 알았고, 모든 것에 더럽혀지지 않았고, 모든 것을 버렸다. 갈애가 다한 해탈을 얻었다. 스스로 깨달았으니 누구를 따르겠는가. 나에게는 스승이 없다. 천신을 포함하여 이 세상에 나와 같은 자는 없다. 어떤 자도 나와 동등하지 못하다. 나는 세상에서 완전한 자이므로 내가 최고의 스승이다. 나는 홀로 모든 것을 깨달아 적정한 경지에 이르렀고 열반을 얻었다. 법륜을 굴리기 위해 나는 카시(바라나시)로 간다. 어두운 이 세상에 불사의 북을 울리기 위해.” 우파카가 반신반의하며 말하기를, “그대의 주장대로라면 그대는 무한의 승리자일 수밖에 없군요.” 그러자 부처님은 다시 게송을 읊습니다. “나와 같은 자가 있다면 그들은 참으로 승리자이다. 번뇌를 쳐부수어 승리했기 때문이다. 우파카야, 모든 그릇된 법을 나는 부수었으니 진실로 나는 승리자이다.” 그러자 우파카가 말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리고는 머리를 가로 저으면서 다른 길로 가 버렸습니다. 


부처님은 스승이 누구냐고 묻는 우파카의 질문에, 나의 스승이 누구냐고 도리어 반문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것이 한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권위를 업고 나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마호메트는 예언자라고 말합니다. 예언자란 신의 전달자란 의미입니다. 그리고 공자는 주공을 업고 나옵니다. 공자는 하루도 주공을 꿈에서 만나지 않은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청말 홍수천 (洪秀泉(홍수전 洪秀全))은 과거에 네 번이나 낙방한 사람입니다. 그에 실망한 나머지 정신착란을 일으키게 되는데, 그 착란 중에 누군가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날 우연히 성경을 읽다가 야훼를 알게 됩니다. 그러자 자기가 만난 것이 야훼이며, 예수가 하느님의 첫째 아들이며, 자신이 둘째 아들이라고 주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상제회를 만듭니다. 마테오릿치가 중국에서 선교할 때 기독교 신 야훼가 상제라고 한 것입니다. 이 상제회의 교세가 커져서 반란을 일으키고, 민심을 얻는데 성공하여 양자강 이남을 13년간이나 지배하게 되는데, 이것이 태평천국의 난입니다. 결국은  자중지란으로 망하게 되지만, 홍수전도 권위를 업고 민심을 얻어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누군가의 타자로 존재합니다. 예수, 마호메트, 공자, 홍수전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를 반드시 업고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것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어느 누구도 내세우지 않습니다.


불교는 힌두이즘을 비판하고 극복하면서 등장합니다. 부처님은 철저히 자기 자신으로 섭니다. 그것이 불교입니다. 신의 이름을 빌리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으로 섭니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복의 계승자, 물질의 계승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복이나 물질의 계승자가 되는 것은 나를 욕보이고 비난받게 한다고 말합니다. 무엇이 복이며, 무엇이 물질입니까? 우리는 물질이라면 보통 재물을 연상합니다. 재물이라 하면 머니(money)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오해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불교는 물질을 부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물질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니까야에 따르면, 인간이 네 가지를 추구합니다. 1)재물 2)명예 3)장수 4)사후의 안락입니다. 사람은 이 네 가지를 추구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부처님 말씀은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것들이 탐욕이자 욕망이니 버리라고 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재물, 명예, 장수, 사후의 안락을 어떻게 성취할 수 있을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 네 가지를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해 말합니다. 그것은 1)믿음 2)계율 3)관용 4)지혜입니다. 이것을 성취하게 되면, 재물과 명예와 장수와 사후의 안락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믿음입니다. 믿음은 부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유일한 분임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나를 행복하게 하고, 고통으로부터 건져주는 유일한 분임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계율입니다. 계율은 오계를 뜻합니다. 오계는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을 사랑하고, 땀흘려 일하고, 스스로 절제하고, 진실하며, 시간 낭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것들은 부처님 이전부터 수행자들이 지켜야할 덕목이기도 합니다.


셋째, 관용입니다. 관용이란 무엇인가요? 우리는 보통 관용을 덕(德)이라고 생각합니다. 덕이란 추상적인 용어입니다. 박덕하다, 덕이 있다 할 때 그 덕입니다. 추상적 용어인 덕은 때에 따라 필요할 때 편의적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1941년 오대산 상원사 한암선사(漢岩禪師)에게 당시 총독부의 총독 미나미(南次郞)가 방문을 청합니다. 그러나 그는 나는 오대산을 들어온 이후로는 동구밖을 나간 적이 없다면 거절합니다. 그러자 자기가 직적 방문하기에는 그렇고 해서, 당시 정무총감(政務總監)이던 오오노(大野緣一郞)를 보냅니다. 정무총감은 총독부의 2인자로 , 식민지 조선의 실질적 지배자입니다. 총독이 상징적 지배자라면, 정무총감은 일본 내지의 내각의 명을 조선에 하달해 시행하는 책임자인 것입니다. 정무총감은 엄청난 권력입니다. 그런데 이 당시의 사정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지 얼마 안 되어 일본이 승승장구 하던 때이므로, 있는 힘을 쓸 대로 쓸 때입니다.  일본은 진주만 기습 점령했는데, 이것은 일본 해군의 지도자 야마모도 이소로쿠가 기존의 옛날 항로가 아닌 새로운 항로를 개척함으로써 미국이 당한 것이었습니다. 일본이 연전 연승하던 때로, 미국이 항복을 고려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시기에 오오노 정무총감이 한암선사에게 “이 전쟁에서 누가 이기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스님들은 아연 긴장합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받으면 당황할 것입니다. 속마음으로는 일본이 망했으면 하여도 그렇게 대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망설임 없이 말합니다. “덕자 승(德者勝. ” 즉 덕이 잇는 자가 이긴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오오노는 “스님 말씀을 깊이 새기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일생의 지침이 될 만한 말씀 한 마디를 해달라고 청합니다. 이에 한암은 붓으로 한문 “正心”을 써주면서, 면담이 끝납니다.


우리는 관용을 말할 때 덕이라는 용어로 대신합니다. 그러나 덕이란 추상적인 용어입니다. 그러면 부처님께서는 관용을 무엇이라고 했을까요? 부처님은 관용을 나눔이라고 했습니다. 나누는 것이 관용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눠 주는 것 -그것이 정신이든 물질이든 문화적인 것이든 학문적인 것이든-이 관용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관용입니다.


넷째, 지혜입니다. 지혜를 성취하라는 것입니다. 지혜를 성취하기 위해서 해야 할 것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의심하지 말 것이며, 탐욕을 부리지도 말 것이며, 한 세상을 뜬 구름처럼 살지 말 것을 말합니다. 즉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책임 있는 행동 , 책임 있는 마음자세, 책임 있는 얘기를 하라는 것이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이 곧 지혜입니다. 덕이나 지혜가 추상적인 용어라는 것은 시대에 따라 그 뜻이 다르고, 정의도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지혜는 책임 있는 행동과 책임 있는 마음 자세입니다.


부처님은 네 가지를 말합니다. 즉 재물, 명예, 장수, 사후의 안락이 그것입니다. 이것을 얻기 위해서는 1)믿음, 2)계율, 3)관용, 4)지혜가 필요합니다. 부처님은 물질, 명예를 얻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얼른 죽으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 번 인간의 본성이 부귀공명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냥 지어낸 얘기가 아닙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중국고사에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친구 네 명이 미래의 희망에 대해 말합니다. 한 친구가 소주자사가 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소주는 물생이 풍부한데가, 이쁜 여자가 많기로도 유명합니다. 그 곳은 중국최고의 비단산지이며, 기름진 옥토를 지니고 있습니다. 중국의 지방관리는 그 지역에 한해 황제나 다름없는 권력을 누립니다. 즉 그는 귀해지고, 좋은 미녀를 얻기 위해 소주자자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다른 친구는 허리에 황금 10만 냥을 차고 싶다고 합니다. 재벌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친구는 학을 타고 신선이 되고 싶다고 합니다. 장수에 대한 바램이지요. 그런데 나머지 한 친구가 침묵하고, 말을 않고 있더랍니다. 그러자 친구들이 ‘너는 무욕, 즉 욕심이 없느냐? 왜 말을 하지 않느냐“고 채근합니다. 그러자 그 친구가 답합니다.“나는 소주자사가 되어 허리에 황금 10만 냥을 차고, 학을 타는 신선이 되고 싶네.” 즉 지금까지 친구들이 말한 세 가지를 모두 갖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 네 번째 친구에 비하면, 다른 셋의 소원은 소박하지 않습니까?우리가 이것을 옳다 또는 그르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처님은 재물, 명예, 장수, 사후의 안락을 긍정합니다. 이 네 가지를 얻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무욕(無慾)하라는 것은 비구들에게 한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비구는 땀 흘려 일하지 않습니다. 노동하지 않는 자가 갖는 것은 죄악입니다. 물질의 계승자가 되지 말라는 것은 부처님의 권위를 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세가 되면 나를 팔아 밥벌이 하는 자가 넘쳐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을 판다는 것은 부처님의 권위를 빌리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그것은 나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하긴 부처님의 이름을 훔쳐 팔지 않으면, 누가 이 시간에, 이 자리에 앉아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저 부처님의 권위를 훔쳐 팔기에 바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있는 그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부처님의 권위를 빌리지 않으면 모여 앉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은 그걸 긍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부처님의 권위를 빌ㄹ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물질의 계승자는 나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대신 법의 계승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법의 계승자란 자기 자신으로 서는 것입니다. 어떤 권위도 빌리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서는 것입니다. 권위를 빌린다는 것은 타자로 서는 것입니다. 우파카가 부처님에게 던진 질문에, ‘나의 스승이 누구냐?’고 반문하는 것은 자기 자신으로 서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자기 자신을 배려하고 말합니다. 여러 번 했던 얘기지만, 오늘 이 이야기를 끌어오기 위해 다시 말하겠습니다. 불교는 신에게로 나아가는 종교가 아닙니다. 불교는 언제나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나에게 돌아오는 그 지점에서 부처님을 만납니다. 그 자리에 부처님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비로소 진리를 체득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자기를 인식한다는 것은 부처를 인식한다는 것이며, 자기를 성찰한다는 것은 부처를 성찰한다는 것이며, 자기를 배려한다는 것은 부처를 배려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인식, 자기성찰, 자기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인식, 자기성찰, 자기배려가 없으면,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없습니다. 이것들이 없다면, 우리는 타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은 상대적인 행복이 아닙니다. 비교되는 행복이 아닙니다. 불교서 말하는 행복은 절대적 행복입니다. 나 자신으로서의 행복입니다.


인간의 인식과 배려는 고대 그리스 철학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철저한 자기 인식, 그리고 철저한 자기 배려가 기독교와 만나죠. 그런데 기독교는 자기인식은 철저히 받아들이지만, 자기 배려는 부정하고 비난합니다. 왜 그럴까요? 기독교적 가치에서는 자기 스스로 자기를 보살핀다는 것, 안아준다는 것, 쓰다듬는다는 것, 공감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신만이 줄 수 있는 권능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이것을 부정하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데카르트의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고대 그리스 철학의 자기배려를 그 시대의 어법으로 표현할 것에 불과합니다. 기독교에 있어서 모든 것은 신의 권능입니다. 누구를 보살피고, 쓰다듬고, 안아주는 것은 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며, 신만이 하는 것입니다. 근대 서양의 발전과 변화는 탈기독교에서 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언제나 자기를 인식하고, 자기를 성찰하고, 자기를 배려하라고 말합니다. 이걸 두고 너무 불교는 자기중심적이지 않느냐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천지만물에서 내가 중심입니다. 우주가 어떻다느니 말하지만, 이 세상의 중심은 나 자신입니다. 나를 제외하고, 나를 배제하고 이 세상 얘기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이기적이냐 또는 이기적이지 않느냐의 얘기는 불필요한 논쟁입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입니다. 누가 칼을 들고 쫒아오면 어떻게 합니까? 도망가죠. 왜일까요? 그것은 자기를 지키려는 것입니다. 자기가 무슨 금강지신이라고 그냥 버티겠습니까? 물론 이런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무협지에 등장하는 방탄지공에서는 찌르면 칼이 부러집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런 일이 없습니다. 도망가는 것은 이기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를 인식하고, 성찰하고, 배려할 수 없는 사람은 대상을 인식하고, 성찰하고, 배려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가정 폭력이 있는 이유는 자존감이 낮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는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존감이 낮다는 것입니다. 자존감이 낮아서 아내를 배려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존감이 없다는 것은 저기 자신이 바닥이라는 것입니다. 자존감이 낮아 내 아애, 내 아이를 어떻게 해줄 것인가를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동물적 욕구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죠.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너 자신이다, 그리고 모든 존재 또한 그러하다”라고 부처님은 말합니다. 자기 인식, 자기 성찰, 자기 배려가 없는 사람은 대상을 인식할 수도, 대상을 성찰할 수도, 대상을 배려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오직 자기 자신으로 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으로 서는 지점에서 우리는 부처님을 만납니다. 그래서 사실 바깥에 눈 돌릴 여유가 없습니다.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깥에 눈을 돌리죠. 남의 허물이나 잘 못된 것은 잘 보고, 남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다투는데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누구 한 마디에 우르르 몰려갑니다. 마치 조종당하는 로봇처럼 말이죠.


인간은 한 100년 삽니다. 태양은 100억 년이나 존재한다고 그러죠. 그러나 이것조차 추정일 뿐입니다. 혹시 장수하시는 분은 이걸 보고 기록해 보시기 바랍니다. 재미있는 것은 태양이 100년을 존재한다면, 인간은 10초를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쓸데없는 데 시간을 보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성찰하고, 배려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우리는 남을 아는 데 엄청난 시간을 보냅니다. 자기 자신조차도 행복하지 못하면서, 누군가 인상을 찌푸리고 있으면 궁금해 하죠. 남편하고 싸웠나? 애들 점수가 안 나왔나? 하고 말이죠. 부처님은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성찰하라고 말합니다. 자기 자신을 모르는데, 남을 어찌 알겠습니까? 나는 가끔 ‘그 사람을 잘 압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며, ‘잘’은 빼고 그냥 ‘조금 압니다’라고 답합니다. 어떤 분은 두 번만 만났어도 그 사람을 잘 안다고 말합니다. 나는 한 10년이나 한 지붕 아래 같이 있었던 적이 있는 이에 대해서도 잘 안다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왜냐구요? 제가 그분을 그 동안 얼마나 알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그냥 그분을 아는 거죠. 잘 안다고 할 때, ‘잘“은 뻥이 좀 들어간 얘깁니다. 친하다는 것과 잘 안다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친할 수는 있지만, 잘 안다는 것은 따른 문제입니다. 잘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을 읽어낼 수 있을 때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맘의 생각을 읽을 수 없습니다. 남의 생각을 읽는 것을 타심통이라고 하죠. 실제로 남의 생각을 읽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스스로의 생각조차 읽어내기 어렵죠.


명말 사상가 탁오 이지는 성인이 무엇이냐고 묻자 이렇게 답하죠. “사람들은 모두 공자가 위대한 성인이라고 생각하는데, 나 역시 위대한 성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모두 노자와 부처는 이단이라고 생각하는데, 나 역시 이단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같이 위대한 성인이나 이단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알지 못한다. 그저 부모와 스승의 가르침을 통해 익숙하게 들어왔을 뿐이다. 부모와 스승 역시 위대한 성인이나 이단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알지 못한다. 그저 선대 유학자의 가르침을 통해 익숙하게 들어왔을 뿐이다. 그리고  선대 유학자 역시 위대한 성인이나 유학자 역시 위대한 성인이나 이단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알지 못한다. 그저 공자가 다음과 같은 말들을 했기 때문에 이단이라고 생각할 따름이다. 그들은 공자의 '성인의 경지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聖卽吾不能)'라는 말을 겸손의 말이라 하고, '이단을 공격한다(攻乎異端)'는 말은 필시 노자와 부처를 두고 한 말이라고 하는 것이다 ” 즉 그는 성인이나 보통 사람이나 다를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보통사람이란 악인을 순화한 말이죠. 악인이 성인이 될 수 있고, 성인이 악인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조선후기 가장 유명한 스님으로 꼽히는 연담유일스님은 치힐상반(癡黠相半)이라고 했습니다. 癡는 어리석다는 뜻이며, 黠은 교활하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어리석음과 교활함이 반반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진실된 말입니까?  


우리는 그렇죠. 언제는 부처와 어깨를 나란히 하다가도, 언제는 마라와 다를 게 없습니다. 내가 행복하면 세상이 아름답죠. 장미희처럼 ‘아름다운 밤이예요’입니다. 그렇지만 24시간 그럴수야 없죠. 어떤 때는 그 반대입니다. 어떤 때는 이뻐 죽겠다가도, 어떤 때는 미워  죽겠습니다. 어떤 때는 남편이나 아내가 이쁘다가도 어떤 때는 밉습니다. ‘내가 이 사람과 결혼하길 정말 잘 했지’라고 생각하다가도 ‘내가 눈에 콩깍지가 씌웠지’라고 말합니다. 어떤 때는 부처님 마음과도 같죠. 관대합니다. 그러다가 어떤 때는 미라의 마음과 같죠. 찬바람이 돌아 바늘 꽂을 곳도 없을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조차 잘 모릅니다. 부처님이 마음을 보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내 마음을 알아야 나를 콘트롤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기에 문제가 됩니다. 알면 문제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모르기에 찌밋찌밋하고, 알면 간단합니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오죽하면 ‘아는 게 힘’이라는 말이 나왔겠습니까? 부처님이 자기를 인식하고, 자기를 성찰하고, 자기를 배려하라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인식이 있어야 성찰할 수 있고, 성찰이 있어야 배려해 줄 수 있습니다. 이 배려가 다름 아닌 사랑입니다.


붓다는 출가하고 나서 알라라 깔라마(Alara Kalama)와 웃다까 라마뿟따(Uddaka Ramaputta)라는 두 사람에게 지도를 받지만, 곧 그들을 떠납니다. 그리고나서 보리수좌에서 깨달음을 얻은 후 우파카의 질문에 스승이 없다고 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철저히 자기 자신으로 선다는 것입니다. 누구의 권위도 빌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항상 남에게서 빌려옵니다. 그것이 지식이 되었건  도구가 되었건. 내가 안다고 하는 것도 알고 보면 빌려온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 빌려서 삽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비생산적인 생명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난입니다. 인간은 생산하지 않습니다. 오직 소비밖에 못 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빌려 옵니다. 모든 것을 자연에서 빌려 옵니다.


우리는 일주일만 굶어도 얼굴이 뜨고 힘이 쭉 빠집니다. 선비의 안빈낙도도 사실 따지고 보면, 아내의 희생으로 가능합니다. 아내의 희생이란 남의 밭일이거나 길쌈으로 하는 품팔이입니다. 예전에는 남의 길쌈을 해주면, 품삯으로 그 반을 줍니다. 옛날 선비의 아내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남편이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에서 ‘유붕이 자원방래’ 어쩌구는 다 아내의 희생을 대가로 한 것입니다. 연암 박지원은 술을 워낙 좋아했지만, 너무 가난해서 아내가 하루에 술 한 잔씩만 주더랍니다. 박지원은 명문가 출신이지만, 조실부모 하여 어린 나이에 친척집에서 더부살이를 한질, 15세가 되어도 글을 배우지 못했답니다. 하늘 천 따지를 모르는 지라 결혼해서 아내가 글을 가르쳤으니, 그 삶을 알 정도일 겁니다. 할아버지가 문자는 재앙이라 하여 가르치지 않았다지만, 글자를 배우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다는 말입니다. 장가를 가려면 똑똑한 아내에게 가야 합니다. 물론 너무 똑똑한 아내 허난설헌과 그 덕에 빛이 바랜 남편 김성일 같은 예외도 있습니다. 박지원은 그래서 술이 더 먹고 싶으면, 지나가는 사람을 아무나 데리고 집에 들어옵니다. 그러면 아내가 손님 술까지 두 잔을 내 오는데, 그 두 잔을 자기가 다 마시기 위해서입니다. 조선 선비의 안빈낙도에는 그 아내의 피눈물이 있는 거죠.


우리가 자기를 인식하지 못하면, 대상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성찰하지 못하면 대상을 성찰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배려하지 못하면, 대상을 배려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배려한다는 것은 공감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공감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공감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좋은 스승은 공감을 이끌어 내는 스승입니다. 강요하거나 매를 때리는 스승이 아니라 스스로 공감할 수 있게 이끌어 내는 것이 좋은 스승입니다. 좋은 부모도 공감을 이끌어내는 부모입니다. 좋은 지도자는 공감을 이끌어내는 지도자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우리는 공감하지 못하는 걸까요? 그것은 자기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성찰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김국환의 노래 <타타타>에 ‘내가 나를 모르는데, 내가 너를 알겠는가’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내가 너를 알려면, 그리고 네가 나를 알려면 공감해야 합니다. 부처님이 우리들은 형제라고 말합니다. 형제라는 것은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공감한다는 것은 마음이 서로 열려져 잇는 것입니다. 마음이 닫혀 있으면, 쌍둥이로 태어났다고 할지라도, 형제라 할 수 없습니다. 피를 나눴다고 형제, 자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거기에 플러스 알파여야 합니다. 그것은 서로 마음이 열려 지는 것입니다. 부부나 부모자식 간에도 마음이 닫혀 있으면, 부부나 부모자식 사이라 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열려 있으려면 자기인식, 자기성찰, 자기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이 누가 나의 스승이겠는가라고 반문하는 이유는 오직 자기 발로 선다는 것입니다. 지기 발로 걷는다는 것입니다. 자기 입으로 먹고, 자기 코로 숨 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중병으로 병원에 입원하면, 간병인이나 보호자가 음식을 떠먹여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소화시켜 줄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스스로가 소화시켜야 합니다. 스스로가 얻으라는 것이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그 사람의 사랑과 생명을 지켜주기 위해 음식을 줄 수 있지만, 소화시켜 줄 수는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음식을 투입해 줄 수는 있지만, 소화시켜 줄 수는 없다는 말하는 것입니다. 왜? 나는 너 자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해줄 수 있는 것은 99.9%입니다. 나머지 0.1%는 자기 자신이 해야 합니다. 때에 따라 우리는 길을 열고, 물위를 헤엄치고, 어둠 속을 걸을 때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단계는 자기 스스로 해야 합니다. 부처님이 자기 스승이 누구냐의 질문에 마지막 단계는 부처님 스스로, 부처님 자신이라고 답하는 것입니다. 항상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성찰하고, 배려해야 합니다. 그래야 대상을 인식하고, 성찰하고, 배려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사람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은 스스로를 의지 삼고, 법을 의지 삼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등(燈)의 원어는 딧빠입니다. 그것은 등불, 섬, 의지처로 번역됩니다. 귀의처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무엇으로 해석하든 이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은 사람을 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즉 타인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나의 스승이 누구냐의 물음에 대한 답은 인간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는 다만 법을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법은 다르마입니다. 다르마는 모든 것이 존재하는, 일어나는, 생겨나는 법칙입니다. 부처님이 법의 계승자라고 말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부처님이 99.9%를 이뤄 줄 수 있지만, 나머지 0.1%는 내가 이뤄야 합니다. 부처님이 이것까지 얻게 해 줄 수는 없습니다. 부처님이 99.9%를 이뤄 줄 수 있지만, 나머지 0.1%는 내가 이뤄야 한다는 것이 다르마입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오늘 강론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복된 삶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혜천스님 - 초기불교전공 흥천사주지 

 

 

 

01 상처 / 조용필
02. 가을사랑 / 신계행
03. 님의 향기 / 김경남
04. 찾고 싶은 내 사랑 / 김연숙
05. 후  회 / 이  용
06. 고독한 연인 / 김수희
07. 아직도 못다한 사랑 / 솔개트리오
08. 너를 사랑하고도 / 전유나
09. 그리운 사람이여 / 김성봉
10. 날  개 / 허영란

11. 문밖에 있는 그대 / 박강성
12.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께요 / 장혜리
13. 홀로 가는 길 / 남화룡
14. 그대는 바람 / 손현희
15. 당  신 / 최성수
16. 마지막 여인 / 한혜진
17. 사랑하는 날까지 / 김종환
18. 애정의 조건 / 최유나
19. 그대 그리고 나 / 소리새
20. 이별의 끝은 어디인가요 / 양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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