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뿐인 기회|…… 혜천스님설교

2018. 5. 19. 21:5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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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번 뿐인 기회

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불기2554년 7월 18일

 

 

이번 주의 강론 주제는 '한번 뿐인 기회'입니다.

 

지난 주에 강론 주제 '기적'에서는 기적이 어떤 조건에서 행해지는가를 말했습니다. 그 때 키사 코타미 얘기를 했습니다. 키사 코타미는 아이가 죽자 살려달라고 부처님께 가죠. 그 때 부처님이 사람이 죽지 않는 집에 찾아가 겨자씨를 얻어오라고 합니다. 그 말에 코타미는 첫 번째 집에 가서 겨자씨 한 웅큼을 얻고는 이 집에 사람이 죽은 적이 없는지를 묻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은 내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모두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겨자씨가 필요없다고 말하고,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집을 다니죠. 그런데 그 어느 집도 사람이 죽지 않는 집은 없다는 거죠. 처음 그녀는 아이를 살릴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가졌지만, 집을 다니면서 좌절하고, 마지막에는 절망하게 됩니다. 키사 코타미는 서서히 현실을 보게 되죠. 사람이 죽는 것이, 내 아이만 죽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그리고는 아이를 살리는 게 의미가 없다는 걸 알게 되죠. 그러자 이이의 시신을 안고 숲에다 갖다 놓습니다.

 

인도의 장례 풍습은 화장을 하거나 숲에다 시신을 갖다 놓습니다. 시신을 숲에 두는 것은 풍장과 비슷한 것입니다. 풍장은 시신을 산에 놓고 묻지 않는데, 백골만이 남을 때 묻습니다. 인도에도 풍장의 풍습이 있는 것이죠. 시다림(尸陀林)이란 시체들을 갖다 놓는 곳입니다. 그녀는 다시 부처를 찾아가 말합니다. "세존이시여, 사람이 죽지 않는 집은 그 어느 집도 없었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십니다. "기사 코타미여, 그렇다! 죽지않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욕망을 채우기 전에 죽음이 몰아간다"  사람이 욕망을 채우기 전에 죽음이 몰아간다는 것이 무슨 뚯일까요? 내 욕망을 채우기 전에 죽음이 몰려가니, '노랫가락 차차차'의 가사처럼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인가요. 부처님께서는 삶의 진지함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낭비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국가 대표 축구 경기가 있을 때, 해설자나 아나운서가 특히 지고 있거나 동점인 상황일 때 이런 말을 자주 하곤 합니다.주어진 시간이 다 되어 추가 시간이 주어질 때 하는 말입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1분만 더 있어도 승리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역전할 수 있는데..." 그저 상투적으로 하는 말입니다. 축구 경기는 아쉬워 하는 것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아쉬워 하는 것으로 끝날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에게는 한 번 밖에 삶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풀리그라는 경기 방식은 져도 다른 팀과 돌아가면서 계속 게임을 하지만, 토너먼트 방식은 지면 그것으로 끝이며, 다음 게임은 없습니다. 우리가 이번 월드컵 조별경기에서 이르헨티나에 지고도 게임을 계속했지만, 16강전에서는 우르과이에 지고나자 다음 게임이 없는 것은 이런 경기 방식의 차이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다음 게임이란 없습니다. 그러나 쓸데 없는데 시간 낭비를 하고 있습니다. 시간 낭비만이 아닌 인생 낭비를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키사 코타미에게 욕망을 채우기 전에 죽음이 몰아간다고 얘기한 것은 우리는 영원히 시간이 주어진  듯이 살지만, 우리의 삶은 한번의 기회에 불과하다는 걸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비포장의 길처럼 터덜거리고 행복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잡다한 데 너무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문제에는 너무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도 결국 나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고3 수험생들에게 선생님이 하나 같이 강조하는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선택과 집중'입니다. 공부에만 선택과 집중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도 선택과 집중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선택은 누가 하는 것이 아닌 내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선택해서 그 선택한 것을 얼마나 집중할 수 있느냐가 문제의 관건입니다. 결국은 선택과 집중의 문제죠. 선택고 잘 못하고, 집중도 잘 못하면 그 때는 곤란합니다. 선택과 집중을 잘못하게 되면 기적을 바라게 되죠. 기적이 일어나 무언가 바뀌길 원하게 됩니다.

 

중국에는 전설적인 의사가 두 사람있죠. 삼국지에 나오는 편작과 그 이전의 사람 편작이 그들입니다. 당시의 왕이 편작에게 물었죠. 편작은 위로 형제 둘이 더 있었는데 모두 의사였죠. 편작이 막내였습니다. "삼형제 중에서 당신은 명성이 높은데, 형들은 어찌 별루인가?" 그러자 편작이 대답합니다. "저희 삼형제 중 명성은 제가 제일 높을지 모르겠사오나, 의술로 따지면 큰 형이 제일이고, 그 다음이 작은 형, 제가 제일 낮습니다." 그러자 왕이 다시 묻죠. "그런데 어찌 사람들은 두 형보다 자네에게 명성을 주었단 말인가?" "큰 형은 병이 생기기 전에 예방하고, 둘째 형은 병이 시작될 때 약을 쓰며, 저는 병이 깊어져 죽을 때 고쳐줍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저에게만 고마워하는 것입니다" 큰 형이 병이 생기기 전에 고친다는 것은 요즘 용어로 하면 예방의학이죠. 편작은 사람들이 죽을 고비에 이르러 병을 고치니 사람들이 고마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범한 것보다는 비범한 것을 원합니다. 마치 편작이 기적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말이죠. 가장 의술이 뛰어난 사람은 큰 형이지만, 우리는 그런 것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마치 편작과 같죠. 우리는 뭔가 화려한 것에 관심을 두고, 감동을 받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닙니다. 처음부터 병이 없는 것보다는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뭔가 극적인 것을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중한 것을 놓치죠. 어느 한 순간 무엇이 바뀌길 원합니다. 선택과 집중을 못합니다. 선택과 집중은 시간이 필요합니다.우리는 한 순간에 극적인 것을 좋아해서,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필요한 선택과 집중을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쉬운 길을 찾지만, 쉬운 길은 없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마라도나나 펠레 같은 선수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박지성 같은 선수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 선수들은 오랜 세월 선택과 집중을 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걸 못합니다. 우리나라 선수들은 키만 커지면 골 넣는 걸 좋아해 수비를 안하려고 한답니다. 수비를 잘한다고 박수를 쳐주지 않기 때문이죠. 이번에도 김남일 선수가 수비를 하다가 실수를 해 골을 먹으니, 아내의 홈피에 까지 몰려가 욕을 했다지요. 그런데 공격수인 박주영 선수가 골을 넣지 못했을 때는 다음에 골을 넣으면 된다고 격려를 했다지요. 재능있는 선수들은 골만 넣으려 들죠. 그것도 편하게 넣으려 합니다. 축구협회 이회택 기술위원장의 말에 의하면, 우리 나라 선수들 중 역대 오른 발 킥이 가장 강한 선수가 이동국선수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이동국 선수의 위상이 그 정도일까요? 그 선수는 뛰는 걸 싫어하고 몸싸움하는 것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국내대회에서는 공을 갖다 바쳐주니그가 골을 넣을 수 있지만, 세계 무대에서는 그렇지 못한 것이죠. 한 마디로 골을 만드는 능력이 없는 것이죠. 그것은 어려서부터 노력해야 생기는 것입니다. 

 

마라도나는 선수 시절에도 대단한 선수였습니다. 그가 월드컵 우승을 이루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 기억으로는 당시 영국과 아르핸티나는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 전쟁에서 아르헨티나가 패한 지 3년 후 월드컵 8강전에서 영국과 만났습니다. 그 때 아르헨티나가 1:0으로 지고 있었습니다. 이 경기는 축구가 아니라 전쟁이었죠. 그런데 이 때 마라도나가 손으로 볼을 걷어 넣은 골로 동점을 만듭니다. 다 봤는데 심판만이 못 본 것이죠. 마라도나는 신의 손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사실 이것은 축구선수로서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그런데 몇 분후 마라도나는 하프 라인서부터 단독 드리볼로 영국 수비수 5명을 제끼고 골을 넣었습니다. 손으로 넣은 공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골로 비난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마라도나 두 번째 골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한 번은 요행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지만, 그 다음 두 번은 안 됩니다. 축구 경기는 손으로 쳐서라도 골을 넣을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의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한 번의 선택과 한 번의 집중 밖에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이 다르마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어떤 인재가 만들어져서 이 땅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천재, 수재, 범재, 둔재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반드시 천재라고 행복하고, 그 사람이 일을 성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둔재라고 해서 불행하며, 일을 성취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누구나 한번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걸 누가 가져가느냐가 문제입니다. 즉 기회는 공평하게 주어지는데, 그걸 누가 가져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쓸데없는데 동작이 빠른데, 정작 중요한 데에서는 동작이 느리죠. 키사 코타미가 죽은 아이를 안고 각 집을 돌다 중요한 걸 깨닫죠. 죽음이 아이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문제임을 말이죠. 죽음이라는 것이 아이에게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닥쳐올 문제라는 것입니다.죽음은 언제 어디서 오는지 예측할 수도 없게 오는 것입니다. 남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소홀하고, 남의 문제에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죠. 남의 허물을 찾는데는 어찌 그리 눈이 밝은 지 몰라. 거의 2.0 수준이라고 할까. 자기 자신의 허물을 찾는데는 거의 시각 장애인 수준이죠. 자기 자신에 대해 우리는 둔감한데, 남에 대해서는 민감하죠. 거의 해파리 수준으로 촉수가 발달해 있습니다. 우리 몸 중에서 가장 감각이 둔한 데가 어디인지 아세요? 발입니다. 그에 비해 손은 굉장히 예민하죠. 그런데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굉장히 둔감하죠. 무엇이 그렇게 만들까요?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 바라보는 것이 짧습니다. 남을 위해 쓰는 시간이 많은데 비해, 자기를 위해 쓰는 시간이 적은 것입니다. 우리는 외출을 할 때 거울을 봅니다. 특히 여성들은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그런데 요즘은 남성들도 거울 보는데 오랜 시간을 들인다더군요. 그런데 정작 자기 자신을 살피는데는 소홀합니다. 다들 왜 그리 바쁜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손자병법에서도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 했습니다. 자기를 알고 대상을 알면 백전 백승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모르는데, 어찌 승리할 수 있을까요? 남의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는 알고 정작 자기 집이 사정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내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습니다.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80년 90년을 산다해도 왕성하게 무엇을 할 수 잇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노세 노세 젊어 노세'라고 노래한 것은 역설적으로 삶의 여유가 그만치 없었다는 증거입니다. 이 시기에는 행복하냐 또는 행복하지 않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옛날에는 생존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였습니다.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은 여력이 생겼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옛날의 삶의 방법을 버리지 못합니다. 우리나라 학생들의 학업성취도가 OECD국가 중 1위라고 합니다. 그런데 행복지수는 OECD국가 중 최하위라고 합니다. 땀흘려 일하는 것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땀흘리는 것이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무의미합니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자살률 1위라고 합니다. 한국은 경쟁을 강조하다보니, 발전도 빠릅니다. 그러나 동시에 스트레스도 가장 많은 것입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무한 경쟁을 하니, 아이들부터 노인들까지 스트레스를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문제입니다. 양면의 칼인 것이죠. 물질적 풍요를 가져왔을지 몰라도 마음의 평화를 빼앗겨 버린 것입니다.

 

물질은 행복의 조건입니다. 물질이 없으면 우리의 삶 역시 아쉽죠. 물질을 얻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얻는 것이 급하고 조급한 게 문제입니다. 요새는 그런 분이 없을 줄로 알지만, 천렵을 가면 낚시나 족대로는 성이 안차죠. 그래서 투망을 던지죠. 이 정도도 군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나간 분은 아예 빳데리로 지지는데, 이렇게 되면 물고기가 산란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정도도 군자입니다. 아예 농약을 풀어버립니다. 이렇게 잡은 고기를 먹고 싶을까? 이렇게 되면 큰 것, 작은 것 할 것 없이 모든 물고기가 죽어 싹 다 떠오릅니다. 얼마나 무모한 짓입니까? 다음에는 영원히 물고기를 안잡아 먹겠다는 것일까요? 요즘 동해에서 명태가 잡히지 않는 것도 기후 탓도 있지만, 남획에도 그 원인이 있습니다. 우리가 노가리를 좋아해 명태새끼인 노가리를 마구 잡은 것도 한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노가리 깐다고 할 때 그 노가리가 이 노가리인가요?).

 

우리는 한 번의 기회 밖에 얻지 못합니다. 이 한번의 기회에서 미래를 담보해 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합니다.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삶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삶을 낭비하게 되면 미래는 줄어드는 것입니다. 비구들이 모여 떠들고 있을 때 부처님이 무슨 얘기를 했느냐 고 묻습니다. 비구들이 자기 자랑 아니면, 장기 자랑을 하고 있었을 테지요. 부처님께서 이르기를 "비구는 두 가지 태도를 지녀야 한다. 진리를 얘기하든지 아니면 침묵하라" 고 했습니다. 진리를 얘기하라는 것은 생산적인 이야기를 하라는 것입니다. 동해안에 가서 노가리를 잡아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노가리까지는 잡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고기 잡기 위해 농약을 풀지 말라는 것입니다. 생산적인 얘기를 하지 않을 바에는 차라리 뒤비져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쓸데 없는데 관심이 많습니다. 관심많은 중생입니다. 저도 관심이 많습니다. 특히 남 욕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욕할 사람을 잘 선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사람을 선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뒷담화입니다. 

 

부처님은 뒷담화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뒷담화는 마치 바람을 안고 보리타작을 해,보리타작을 날리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예전에는 보리를 얻기 위해 보리타작을 한 뒤, 바람에 날린 후 떨어진 알곡을 얻습니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자리를 다리 사이에 끼고 바람을 만듭니다. 그런데 바람을 안고 타작한 보리를 날리면 뒤집어 쓰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스스로의 마음이 거칠어 진다는 것입니다. 뒷담화는 그 자체가 마음을 거칠어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칭찬하지는 못할 망정, 안 좋은 것으로 미워하는 마음 없이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행복입니다. 

 

가수 심수봉의 <백만 송이 장미>는 러시아 원곡을 번안해 부른 것입니다.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없이'라는 구절이 딱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이 곡의 탄생하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습니다.한 가난한 화가가 톱 배우를 연모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가난한 화가가 어찌어찌해 겨우 모은 돈으로 장미 백만 송이를 사서 그녀가 묵고 있는 호텔 앞에 장식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화가가 그 여배우의 사랑을 얻었을까요, 얻지 못햇을까요? 그 여배우는 '꽃을 사는데 그 돈을 사버렸으니 결혼을 한다면 무엇으로 살까?'라고 했답니다. 나라도 그랬을 겁니다. 시인이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시를 지었고, 이 시에 러시아 여가수가 곡을 붙여 노래 한 것이 <백만 송이 장미>였답니다. 우리가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없이'를 단순히 유행가 가사로 들으니 그렇지 좋은 얘기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것이 행복입니다. 아낌없이 사랑을 주는 것이 행복입니다. 부처님께서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남을 미워하는데 시간을 보냅니다. 남을 원망하는데 시간을 보냅니다.

 

이런 방송국의 사연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고생을 하면 사는 아주머니 얘깁니다. 학교 다닐 때, 책이 하두 귀해서 책을 싸서 모셔 두었답니다. 한 마디로 공부를 안했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사연인 즉슨, 당신의 부모가 한 번도 공부를 하라고 야단을 쳐 주지 않아서 자기가 공부를 안했고, 그래서 이 고생을 하고 사니,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부모가 원망스럽다는 것입니다. 이걸 보면, 남의 부모 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공부하라고 야단을 치면 공부만 하란다고 원망하고, 공부를 하지 않는데도 야단을 치지 않으면 그 때 야단을 쳐 주었으면 이 고생을 안 할텐데라고 원망합니다.  그 분의 마음이 이해가 가면서도, 그 분은 그 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별 개인 것 같지만 사실은 같습니다.삶은 내가 사는 것이 내 부모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내가 불행한 것이 부모를 잘못 만난 탓이 아닙니다. 공부하라고 몽둥이 찜질을 했으면, 그 아주머니가 공부를 했을까요? 아마 집을 나갔을지도 모르죠.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그 어떤 이야기를 해줘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태풍도 남태평양의 수온과 여러 기압이 맞아야 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데, 김흥국 처럼 '들이대'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키사 코타미에게 왜 아이를 살리는 기적을 연출하지 않았을까요? 그랬더라면 그녀는 그 본질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본질이란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채우기 전에 우리의 삶이 끝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는 단 한 번뿐입니다. 모든 것을 불살르지 않으면, 다음 경기에 나갈 수가 없습니다. 경기를 이기는 팀은 준비된 팀만이 이깁니다.

 

월드컵 때 라디오와 신문은 스페인이 네들란드 팀을 무력화시킨 것은 스페인팀이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합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개인 기술이 좋은 팀입니다. 스페인선수들은 주로 자국 리그인 레알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 소속이어서 평상시에 발을 맞춥니다. 그러나 브라질, 이르헨티나 선수들은 유럽 리그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경기를 하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자기만 손해를 봅니다. 그러니 어쩌다 발을 맞추면 톱니바퀴처럼 공간을 지배하는 스페인팀과는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축구란 기술 + α , 즉 조직력이 있잇어야 하는데, 그것이 안되는 것입니다. 스페인팀은 같이 한 팀에서 뛰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팀이 우승하면 모든 선수들에게 돈과 이익과 명예가 돌아갑니다. 반면에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팀은 팀이 우승을 한다고 해도 자신의 기량이 뛰어나지 않으면 불러 주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한번의 기회에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다음 게임을 위해서도. 그럴려면 이 게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 게임에 나갈 수 있습니다. 미래를 담보해 내지 않으면, 다음 게임에 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마치 보장된 것처럼 행동합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하늘에 대고 침뱉는 격이지만, 스님들이 항상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입만 열면 업, 업, 업 합니다. 그러나 정작 업을 믿지 않는 것은 스님들이란 말이 있습니다. 정작 자기 자신은 말을 하면서도, 그것이 육화(肉化)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육화된다는 것은 내 DNA하나하나에 그것이 각인되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은 일순간에 변화될 수 있지만, 몸은 일순간에 변화되지 않습니다. 마음은 변화하지만 정작 행동은 그렇지 못합니다. 왜일까요?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다고 생각해 여유로와는 그런 것입니다. 야구 경기는 흔히 9회말 2아웃부터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9회말 2아웃 이후에 그 경기를 뒤집는 것은 1년에 100번 중 한 두번 있을까 말까한 것입니다. 매번 일어날 수 없습니다. 보통의 경기에서는 5회 이전에 이기고 있는 게임에서 역전패란 거의 없다고 합니다. 그만치 한 순간에 극적으로 뒤집어지는 경기는 몇 게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평상시에 우리가 뭔가 노력해 선택과 집중을 하지 않으면, 미안한 얘기지만 다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다음을 얘기하죠.  오늘 놀고 내일부터 잘 해야지. 그런데 내일이 되면 '다음에 하지, 깨알 같은 날이 남았는데'라고 하면서 다음으로 미룹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한번의 기회 밖에 없다. 그러니 선택하라. 그리고 선택을 했으면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말라는 것은 금강심을 지니라는 것입니다. 한 번의 기회에 선택해 집중했으면, 후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번의 기회에 선택해 집중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후회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역량을 다 불살랐으면, 경기에 졌다해도 회한이나 후회가 없습니다. 후회가 남는다는 것은 무언가 내가 가진 역량을 다 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방랑시인 김삿갓이 화순에서 숨을 거두면서 마지막으로 한 말이 "촛불을 꺼 주시요"라고 합니다. 왜 그는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요? 우리는 밝은 태양 아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밝은 태양과 같습니다. 한 번의 기회에서 미래를 담보하시길 바랍니다. 

 

베트남 신부가 한국에서 정신병의 남편을 만나 생명이 끊어진 슬픈 얘기가 전해집니다. 우리 사회가 과거를 잊고 살만해졌다고 해서, 힘없는 사람들에게 못된 짓을 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픕니다. 약한 자를 무시하고 능멸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사리지기를 기도합니다. 이 땅에 행복한 꿈을 이루려 왔지만, 그걸 이뤄보지도 못한 그 베트남 신부에게 부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하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같은 한국인으로 그 분께 참회를 올립니다.

 

싸두 싸두 싸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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