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5. 12. 23:22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기적
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불기2554년 7월 11일
오늘 강연의 주제는 '기적'입니다.
우리가 기적이 이루어지길 원하잖아요. 기적이 어떤 조건에서 행해지는가 하는 그런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키사 고타미라고 하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성은 상위 카스트 출신으로 같은 카스트 출신의 총각과 결혼했습니다. 해와 달이 지나가니 아이가 태어납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아장아장 걸을 무렵에 그 아들이 갑자기 죽고 맙니다. 키사 고타미는 너무 절망스러워 뭐라고 말로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살릴 생각에 죽은 아이를 안고 이 곳 저 곳을 찾아다니는데, 사람들은 키사 고타미를 미친 여자 취급을 합니다.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습니다. 누군가 그런 그녀의 모습이 너무 불쌍해서 그녀에게 붓다를 찾아가 보라고 합니다. 그 아이를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죠. 그녀는 희망을 안고 부처님을 찾아가 자기 아이를 살려달라고 했죠. 키사 고타미에게 부처님이 말합니다. "아이를 살려줄테니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 " 그러자 그녀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고 묻죠. 부처님이 답하기를 "사람이 죽지 않는 집에 가서 겨자씨 하나를 얻어오라. 그것이 댓가이다" 왜 부처님은 아이를 그 자리에서 살리는 기적을 행하지 않고, 키사 고타미에게 겨자씨를 얻어오게 했을까요? 궁금하지 않습니Rk? 나는 사실 이것이 궁금했습니다.
다른 장면 하나, 즉 두 번째 장면.
밧찌 연합국의 베이샬리(Vaisali)에 가뭄이 들고,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 베이샬리에는 그 시신을 수습할 사람이 없을 정도 였습니다. 그럴 정신도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아예 도시 자체가 전염병으로 인해 공황상태에 빠졌습니다. 그 나라는 왕이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공화국이었습니다. 그래서 공화국에는 장로회의가있고, 이것이 통치합니다. 부처님께서도 이 나라의 정치제도를 칭찬했던 그 나라입니다. 장로회의는 국가의 재앙을 타개하기 위한 논의를 합니다. 그러다 훌륭한 종교지도자를 초청해 재앙을 벗어나기로 합니다. 많은 지도자가 방문했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부처님께 베이샬리의 재앙을 벗어나게 해달라고 초청합니다. 부처님은 먼저 제자를 보내어 발우에 물을 담아 도시 곳곳에 뿌리게 합니다. 그리고 보배의 경으로 알려진 경을 설한 다음 그것을 외우게 합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나중에 출발하죠. 부처님이 밧찌연합국의 국경선을 넘는 순간부터 비가 내려, 베이샬리의 성문을 들어서는 순간 많은 비가 내립니다. 적지도 많지도 않은 비가 알맞게 내립니다. 전염병 또한 사그러 들었습니다. 부처님이 그 도시에 들어선 순간 많은 사람들이 병에서 일어납니다. 부처님이 베이샬리에서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보면 그것은 기적입니다. 베이샬리는 죽음의 재앙에서 벗어났습니다. 베이샬리는 부처님의 은혜를 잊을 수 없어 성문에 부처님의 이름을 붙이고, 그 이후로는 불교의 중요한 거점이 됩니다.
베이살리에서는 기적을 행하면서, 키사 고타미에겐 왜 기적을 행하지 않았을까요? 왜 고타미에게 겨자씨를 얻어오게 했을까요? 베이샬리 한 국가에 기적을 행하면서, 고타미 개인에게는 기적을 행하여 왜 구원하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언제나 기적이 일어나길 원하죠. 기적이 일어나길 원해서 기도를 합니다. 그것도 이왕이면 나에게 일어나기를 바라죠. 그저 대입 철이 되면, 많은 절과 교회에 기적을 원하는 기도로 가득하죠. 내 애들만 합격하고, 남의 집 애들은 떨어지라고 기도합니다. 누구나 기적이 일어나길 원합니다. 경전에 기적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한 발우의 자바티로 온 대중이 먹어도 줄지 않고 그대로 였다는 것도 기적에 관한 얘깁니다. 수없이 기적을 행한 얘기기 나오는데, 왜 키사 고타미에게는 기적을 행하지 않은 걸까요? 기적을 행하였더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내가 얘기하기에도 좋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기독교 부흥회에서는 이런 기적이 아주 많이 일어납니다. 눈 먼 봉사가 눈을 뜨고, 곱추가 허리를 펴며,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을 이룹니다. 그런데 얼마 전 미국에서는 더 이상 제3세계의 선교에 이러한 기적을 행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그것은 사실 사기였던 것입니다. 멀쩡한 사람을 봉사로 만들고, 곱추로 만들고, 앉은뱅이로 만들어서 사람들을 현혹한 것입니다. 선교를 목적으로 한 마디로 사기를 친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 기독교가 이를 하지 않기로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기독교는 제3세계에 가서 여전히 이런 사기 수법을 쓰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키사 고타미에게 왜 이런 기적을 행하지 않았을까요?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러면 기적은 어떤 조건에 의해서 행해지는가? 내가 사실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베이샬리의 기적, 아나타빈티카의 발우 짜파티의 기적은 어떤 조건에서 행해지는가? 기적이 행해질려면 무엇에 부합되어야 하는가? 공동의 이익에 부합되어야 합니다. 공동의 선에 부합되어야 합니다. 공동의 가치에 부합되어야 합니다. 공동의 선, 공동의 이익, 공동의 가치에 부합되지 않으면 기적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다르마의 법칙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역시 다르마의 법칙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공동의 선, 이익, 가치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르마의 법칙에 위배됩니다. 그래서 키사 고타미에겐 기적을 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마약 그녀에게 기적을 행하면 모든 사람에게도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죽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끊임없이 기적이 일어나는 거죠. 왜냐하면 누구는 살리고, 누구는 안살리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장면, 즉 세 번째 장면.
부처님이 계시던 지방에 한발이 들어 흉년이 들게되자, 비구들의 탁발 역시 어려워졌습니다. 그러자 목갈라나 존자가 부처님께 청합니다. "부처님! 이 지방 사람들은 자기 한 입 먹기에도 양식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어찌 저희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저희들 신통자재로 아라한 비구와 함께 다른 지방으로 가서 음식을 구해 오겠습니다 " 목갈라나 존자는 신통제일이라고 불리는 제자입니다. 신통이란 기적을 만들어내는 힘을 말하죠. 즉 다른 비구를 데려가 풍년든 고장에 가서. 즉 똥개도 쌀밥을 먹는 곳에 가서 탁발을 해오겠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옛날도 아닌 20년 전까지만 해도 태백, 정선, 고한에는 똥개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녔다고 했던가요? 천원 짜리는 기분 나쁘다는 거죠. 그 곳이 그랬죠. 요새는 똥깨가 100원짜리도 없어서 못 물고 다닙니다. 그만치 살기 어려워졌다는 겁니다. 부처님은 그러나 목갈라나의 청을 거절합니다. 한 마디로 안된다는 거죠. 부처님은 목갈라나 말을 왜 허락하지 않았을까요? 부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의 비구는 신통을 얻어 그런 걸 해결할 수 있지만, 말세의 비구들은 신통이 없는데, 그 때는 어떻게 하겠는가?"
말세의 비구들을 위해 부처님은 허락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게 무슨 얘기일까요. 지금의 비구는 신통력이 있어, 이것을 발휘해 다른 지방에에 탁발해올 수 있지만, 이것이 공동의 이익, 공동의 가치, 공동의 선에 반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 세대에 저당 잡혀살아갑니다. 미래 세대 써야 할 것을 우리 세대에 다 써버립니다. 요새 청안이 자가용을 한 대 마련해 준 덕에 그 자전거로 소양강 강변에 아침 일찍 나가보곤 합니다. 그런데 봄에는 볼 수 없는 풍경이 펼쳐집니다. 소양3교를 지나 봉의산 쪽으로 바라보면, 경치가 아주 멋있습니다. 작은 섬들에 버드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 섬이 부처님이 말하는 빗빠입니다. 그래서 원어 빗빠는 섬이라는 뜻도, 등불이라는 뜻도 지닙니다. 소양강을 보면 알수 있죠. 물안개가 피어 오르고, 거기 있는 섬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어느 날은 물안개가 피지 않는 때도 있는데, 그 때는 그 때대로 좋습니다. 강물을 보고 있으면 이 사람 생각이 납니다. 이 명박 대통령말입니다. '이 사람이 강을 살릴지는 모르겠으나, 참으로 멋을 모르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4대강을 파헤쳐 골재를 캐어내 팔아 봐야, 그리고 그것으로 시멘트를 무얼 지어봐야, 미래 세대를 저당잡혀 사투를 벌이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얘기는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비구는 신통력이 있지만, 말세의 비구들은 신통력이 없어지는데, 그 때는 어쩔거냐 하는 것입니다. 목갈라나가 타 지방에 탁발가는 것이 공동의 선, 공동의 이익, 공동의 가치를 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나려면 공동의 선, 가치, 이익에 부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그것이 중도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도입니다. 중도는 알맞게 어우러지는 것입니다. 베이샬리에서 가뭄에 비가 내리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비가 알맞게 내렸다고 그랬습니다. 가뭄에 지나친 인심으로 많은 비가 내리면 그 자체가 재앙입니다. 가뭄에 비가 갑자기 오면, 땅이 뜨게 되어 산사태가 일어납니다. 비가 서서히 오면 500밀리가 온다 해도 산사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비가 오는 게 중요한게 아니라 알맞게 내려야 합니다. 중도라는 것은 알맞게 어울러지는 것입니다. 알맞게 어우러지는 것은 공동의 선입니다. 공동의 이익입니다. 공동의 가치입니다.
우라는 기적을 이루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죠. 그런데 여기에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요새는 월드컵 열기가 식어 월드컵 얘기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한국이 토너먼트에서 떨어졌기 때문이죠. 만약 한국이 결승에 올라갔더라면, 내일 새벽에 자는 사람은 역적으로 몰릴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국민 하나하나가 우승을 기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그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왜냐구요? 그것이 왜 이루어질 수 없냐구요? 허정무 감독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국축구가 조직력을 가지고는 16강까지는 가능하지만, 그 이상에는 올라갈 수 없다. " 즉 16강까지는 팀웍으로 가능하지만, 그 이상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허정무 감독에 이르러서 달리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까. 뻥 축구 아시죠. 기술이 없어 뻥뻥 내질르는 축구 말입니다. 이 시절에는 강조되는 것이 정신력이었습니다. TV중게의 해설자도 정신력, 아나운서 이창호도 정신력만을 강조합니다. 한 마디로 깡으로 버티자고 말을 못하겠으니까 정신력을 말하는 겁니다. 이제는 그 때 비하면 업그레이드 되었습니다. 이것을 시작한 감독이 히딩크였습니다. 히딩크 감독은 기술이 부족하니 조직력에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명을 제끼는 기술이 없습니다. 골키퍼를 앞에 두고, 이동국이나 이청용이 뻥 내질르는 것은 골키퍼까지 제끼는 기술이 없어서입니다. 그러니 히딩크는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듯한 조직력을 팀에 불어넣은 거죠. 이 조직력을 극대화 시킨 사람이 허정무 감독입니다.
약팀이 강팀을 이기는 것은 스포츠에는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한 번은 가능한데, 두 번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월드컵 같이 승자독식, 끊임없이 이겨야 올라가는 구조에서는 계속적으로 기적이 일어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한 두 번 일어나는 것은 기적이 아닙니다. FIFA 랭킹2위인 스페인과 4위인 네덜란드가 결승에 오른 것은 기적이 아닙니다. 4위인 네들란드가 1위인 브라질을 꺾는 것 역시 기적이 아닙니다. 한국팀이 우승을 기도한다고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도하다고 우승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게 이루어지게 된다면, 요행을 기대하게 됩니다. 2002년 한국이 4강에 오른 것은 실력만이 아닙니다. 실력 + 알파. 그랬기 때문에 그 이후 한국 대표는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없었습니다. 그저 겉멋만이 가득해진것입니다. 그 당시 선수로 성공했다고 하면 박지성 하나 정도 꼽습니다. 송종국 선수도 해외에 진출했지만, 실패했습니다. 매 경기를 월드컵 때처럼 뛸 수는 없었죠. 김남일도 그랬습니다. 도리어 독이 되었습니다. 자기가 가진 능력 만큼 얻어지는 것, 그것이 그 사람에게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내 실력 이상의 것을 가지면, 미안한 얘기지만 그것은 요행입니다. 요행을 얻게 되면, 교만해지죠. 그렇게 되면 결국은 자기 자신을 파멸시킵니다. 요새 라디오를 듣다보면, 총리실의 그 어떤 분이 그런 케이스입니다. 자기 능력을 넘어서 같은 고향이라는 것과 학연을 통해 불법과 탈법을 저지릅니다. 그것이 마치 자기의 힘인 것으로 착각해서, 학연, 지연으로 생긴 힘으로 저지르는 게 탈법, 불법인 줄 모릅니다.
법이란 무엇인가? 공동의 선, 이익, 가치를 지키는 것이 법입니다. 불법(佛法)이나 사회의 법이나 작동구조가 같습니다. 부처님의 법도 공동의 이익, 공동의 선, 공동의 가치가 부합될 때 행해집니다. 사회법도 이런 공동의 이익, 선, 가치를 위배하게 되면, 그 권력으로 인한 칼 끝이 결국 자기 목을 찌릅니다. 저번 강론에서 말했듯이 오조 법연이 제자 태평혜근에게 주지의 권한을 다 쓰면 말로가 불행해진다고 덕담이 아닌 경계의 말을 한 것은 공동의 이익, 선, 가치에 반해 스스로 사익을 챙기면 반드시 불행해진다는 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기적이 이루어지고, 기적이 행해질려면, 그것이 반드시 다르마의 법칙에 부합되어야 합니다. 다르마의 법칙은 공동 선, 이익, 가치에 맞아 떨어져야 합니다. 기도 할 때, 우리가 원력을 가지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원력이란 보다 큰 것입니다. 내 아이가 좋은 대학에 합격하기를 기도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자 본능입니다. 내 아이가 좋은 대학에 합격하기를 원하는 것은 공동의 선, 이익, 가치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어떤 분이, 저도 그 분을 잘 아는데 쪽집게 도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얼마나 쪽집게이냐면, 쪽집게 도사들만 모아서 쪽집게 강의를 합니다. 그 분은 가까운 분이 물으면 대답을 해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까운 도반이 어느 날 저녁 내내 조르자 불발탄이라 그랬죠. 그 분 성격이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의미죠. 어떤 분이 그 분을 찾아가 애의 대학 합격 여부를 물었습니다. 그러니 그 분의 말이 지원자들 모두의 것을 다 가져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세요? 다 놓고 보기 전에는 알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놈이 나를 찾아와 물을 때 장관이나 대통령이 될 것같이 나와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장관이 될 운이 있다고 하더라도, 대통령이 그 사람을 모르면 장관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크게 원력을 갖는다는 것은 좀 더 크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내 아이가 대학을 가서 큰 일을 할 것 같으면, 그 일에 마땅한 지혜를 주고, 그저 취업하여 직장생활을 영위할 것 같으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기도입니다. 내 아이가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기도가 옳으냐 그렇지 않으냐를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이루어지려면 다르마의 법칙에 부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기적이 일어나려면 공동의 선, 이익, 가치에 부합되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그것을 이루었을 때, 즉 기적이 일어났을 때 얼마만큼 공동의 이익이 있는가? 붓다는 고타미에게 겨자씨를 구해 오라 합니다. 하지만 기적을 행해 그녀의 아들을 살려주지 않습니다. 그녀의 아들을 살려주는 것은 다르마의 법칙에 위배됩니다. 그 아이를 살려주면, 모든 죽은 자를 살려주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붓다가 아닌 것입니다.
이번 주 수요일 법구경 강의에서, '선악을 초월해서'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초월'을 '선악에 관계하지 않고'라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인간은 친소관계에 따라 움직여지죠. 즉 나하고 친하냐 아니냐에 따라 생과 사의 개념이 달리 이해되고, 받아들여집니다. 여기 어떤 심각한 살인자가 있다고 합시다. 어떤 사람은 돌로 쳐 죽이고자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를 보호하고 싶어하죠. 범인은닉죄라는 것이 있습니다. 범인을 숨겨주면 처벌하지만, 친족은 예외로 하고 있는 법 규정입니다. 만약 부모 또는 자식이 부모 또는 자식이 행한 살인을 숨겨줘 처벌한다면, 부모는 자식을 고발하고 자식은 부모를 고발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중요한 문제가 생깁니다. 스탈린 체제에서 아이가 아버지를 고발하여 총살을 당했습니다. 국가는 그 아이를 인민의 영웅으로 칭송했지만, 시민들은 그를 패륜아라고 여기죠. 결국 그 아이는 성장해서 알콜 중독으로 죽게 되는데, 어느 누구도 자기 아버지를 고발해 죽게한 그를 사람대접하지 않아서 생긴 일입니다. 스탈린에게는 그가 영웅이지 몰라도, 인민에게는 인민의 적입니다. 공동 선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선악 얘기는 친소관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나하고 친하면 다 용서가 됩니다. 그 집단에 불이익을 주지 않는 한 다 용서합니다. 그러나 나하고 직접적 관계가 없으면 작은 것, 사소한 것 하나라도 다 들춰냅니다. 그러니 나와 경쟁관계에 있거나 적일 때는 말할 것도 없죠. 우리는 용서를 안하다가도, 나와 관계가 있으면 용서가 됩니다.
부처님은 친소관계에 따라 움직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친소관계에 따라 움직입니다. 부처님은 친소관계에 따라 행동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것이 다르마의 법칙에 부합할 때만 부처님은 행동합니다. 부처님의 기적도 여기에 부합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습니다. 무조건 기적을 다 행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조건에 의해 기적이 일어날까요? 그것은 다르마의 법칙입니다. 그것이 공동의 이익, 선, 가치에 부합하느냐의 여부입니다. 공동체는 개인의 결속과 연대를 추구합니다. 개인의 결속은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며, 연대는 혈연관계를 떠나 다른 사람과 지연, 학연 등으로 맺어집니다. 결속이 연대를 하게 되면, 그것이 공동체입니다. 공동체는 결국 개인에게서 출발합니다. 개인이 공동체적 가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개인이 공동체 지향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래 동화에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개암 아시죠? 나뭇꾼이 산에 갔다가 개암을 줍습니다. 착한 나뭇꾼은 엄마, 아버지 줘야지 생각하며 줍다가 날이 너무 저물어 허름한 빈 집에서 밤을 지새우게 되는데, 도깨비들이 나타납니다. 놀란 그가 개암을 깨물자 그 소리에 놀란 도깨비들이 도깨비 방망이를 놓고 달아나 그 나뭇꾸은 부자가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여기까지가 1부입니다. 이어서 2부가 등장하죠. 2부는 전혀 착하지 않는 나뭇꾼의 등장입니다. 이건 내가 먹고, 저것도 내가 먹고 하면서 개암을 줍다가 날이 어두어지길 기다려, 오두막의 도깨비 소굴로 찾아갑니다. 예상한대로 도깨비들이 신나게 잔치를 벌여 놉니다. 그 때 개암을 딱하고 깨뭅니다. 그러나 도깨비들이 한번 속지 두 번 속지는 않습니다. '얼레, 어저께 그 놈이 또 와 부렀네!'. 도깨비들은 도깨비 방망이로 사정없이 내리쳐, 그저 오뉴월 복날 강아지처럼 안마하듯이 실컷 두둘겨 맞고 나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도 공공의 선, 이익, 가치에 관한 코드가 들어 있습니다. 첫 번째 나뭇꾼은 가족생각을 하는데, 공동체는 이 가족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두 번째 나뭇꾼은 자기 생각만 합니다. 결국 동동체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지요. 부처님이 목갈라나의 신통력으로 이웃 지방을 탁발하는 것을 왜 허락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이 공동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은 위기를 극복할지 몰라도, 전체 입장에서는 공동체에 부담을 안깁니다. 당장에는 이익이 오지만 먼 미래를 보면 지금의 이익은 깨 한 톨에 불과한 것입니다. 도리어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이샬리에서는 비가 오고, 전염병이 사라지는 기적을 행하지만, 키사 고타미에게는 기적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 가지 장면(죽은 아들과 겨자씨에 대한 키사 고타미의 일화, 부처님이 행한 베이샬리의 기적, 목갈라나의 신통력 발휘에 대한 부처님의 반대)을 유의 깊게 봐야 합니다. 참 절에 가면 스님들이 답답한 소리를 많이 합니다. 애기가 울어야 젖주듯이 부처님께 징징대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엄마도 애기가 계속 징징대면 짜증을 냅니다. 어떤 엄마에게 '예쁜 딸 낳아서 행복하시죠?' 라고 물었더니, '하루에 딱 15분만요'라고 답했답니다. 하루 중 방긋 웃는 시간을 계산해보니, 15분 정도라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초보 엄마 입장에서는 죽을 지경이라는 것이지요. 아이가 우는데 배가 고파서 그런지, 기분이 나빠서 그런지, 추워서 또는 더워서 그런 것인지, 기저귀가 축축해 그런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징징거린다고 다 해준다면 이 세상을 살기가 참으로 쉽습니다. 연애 할 때 여자가 울면 남자가 달래줍니다. 연애하다가 헤어져 남자가 울면, '저 불쌍한 인간, 내가 살아 줘야지'하는 마음을 여자에게 생깁니다. 실제 이런 생각으로 결혼했다는 여자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결혼하고도 계속 징징댄다면 짜증을 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15년 산 부부에게서 이런 일이 있다고 가정해 보면, 알 것입니다. 징징거린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는 아이에게 젖을 주니, 징징대면서 기도하라고 말하는 스님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도 징징거리는 애들은 싫거든! 미운 애 떡 하나 더 준다는 옛말은 틀립니다. 요즘은 이쁜 애 떡 하나 더 주죠.
기도를 성취한다는 것은 부처님 입장에서는 기적을 행하는 것입니다. 기도로 무엇을 성취하고 싶으면, 공동의 가치를 가지고 기도하십시요. 공동의 가치는 나부터 출발합니다. 기도의 이유도 공동의 선, 이익, 가치에 부합되어야 합니다. 내가 기도로 성취하려면, 공동의 가치를 가져야 합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어떤 분이 다른 사람이 미운데, 그 사람에게 벼락 한 번만, 그것도 많이도 아닌 딱 한번만 내려 달라고 기도 했다고 하면, 그것은 공동의 가치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가족을 건강하게 해 주십시요라는 기도는 공동의 이익에 부합합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공공의 이익, 선, 가치에 부합하는 것이 다르마의 법칙입니다. 오늘 강론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장마가 시작한다고, 2, 3주 전부터 예보를 했는데, 오늘에야 비가 옵니다. 명나라 말 세금이 무거워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을 때. 도망령(?)은 가뭄이 드니, 비도 세금이 무서워 못 내리는가라고 했던가요. 지금 보면 장마철인데도 가뭄이 기승을 부립니다. 그 이유 때문인가요.
오늘 아침에 내리는 단비가 대지를 촉촉히 적시듯이,
부처님의 은혜와 축복이 몸과 마음에, 그리고 가족들에게 스며들기를 기도합니다.
싸두 싸두 싸 아아~~두. 자 내려 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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