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붓다 |…… 혜천스님설교

2018. 5. 26. 23:4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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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의 붓다  

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 불기2554년 7월 25일 


 

대서가 그저께 였던가요. 오늘은 아침부터 날이 푹푹 찝니다. 그래서 5,000원을 벌었습니다. 싸우나비 말입니다.

 

오늘 강론의 주제는 '생명의 붓다'입니다.

부처님의 과거사와 많은 말씀을 집성한 것이 니까야( Nikya)입니다. 그 중에서도 <자타카>는 쿠다카 니까야(Khuddaka Nikya, 小部)에 속하는 초기불교 경전입니다.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로 알려진 자타카에서는 수 많은 생명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생명에 관한 얘기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기록인 니까야는 중요하지만, 거의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타카에 주목하지 않은 것은 원체 깨달음이라는 거대 담론에 익숙하다 보니까.  그저 그저 통증은 있지만 참을만한데도, 마치 4기의 암환자처럼 몰핀을 투여하는 것과 같습니다. 즉 깨달음이라는 원자폭탄을 맞다가 보니까, 그 이외의 얘기는 시시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전생이야기 <자타카>가 그 동안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왜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다룬 <자타카>를 읽어야 하는 걸까요? 부처님의 전생이야기가 불교를 이해하기 위한 상징 기호이기 때문입니다.

 

중국 위나라 시대 왕필이라는 천재가 있었는데, 그가 할약한 때는 17살부터 22살까지 단 5년간입니다. 그는 중국 역사상 천재 중의 천재입니다. 아이를 자랑할려면 적어도 왕필같은 천재를 낳고 미역국을 먹었다는 소리를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는 <노자>라는 책을 만든 사람입니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 TV에 나와  그를 중국식으로 '왕삐'라고 발음한 이후부터는 한국식 발음으로 왕필이라고 하면 어째 격이 좀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노자>라는 책은 여러 본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왕필의 주석본이 유명합니다. <노자>는 여러 본이 전승해오고 있으며, 얼마 전에는 죽간으로 된 <노자>본이 발견되었는데, 현대본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특히 왕필의 <노자>와 <주역>의 주해는 중국의 역사에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노자><주역>은 왕필의 주석을 벗어나 해석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가 이 책들의 주석을 단 것이 그의 나이 22살 때이니, 천재 중의 천재입니다. 

 

왕필의 얘기를 이렇게 길게 한 이유는 진리가 상징으로 표현된다는 왕필의 말을 인용하기 위해서입니다. 왕필이 살던 시대의 학문을 현학(玄學)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현玄은 '진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현학은 불교식으로 말하면, 진리를 학문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대 중국에서 '도道'의 개념과 같습니다. 왕필은 '진리란 상징으로 표현되고, 상징은 곧 언어로 표출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진리에 대한 왕필의 관점입니다. 진리는 결국 상징으로 표현되고, 상징은 언어로 표출됩니다. 여기에 입각해서 왕필이 <노자>와 <주역>을 해석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자타카>에서 많는 이야기를 보게 되는데, 그것은 그저 부처님의 전생이야기가 아니라 이를 통해 상징적으로 무엇인가 이야기 하려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타카>는 상징의 이야기이며, 그 상징이 언어로 표출된 것입니다. 다른 경전들은 직설적인데 비해, 자타카는 상징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자카카>에서는 무언가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거나 보여주지 않습니다. <자타카>는 불교에서 이해의 열쇠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재임시절 유행하던 표현으로 하자면, 코드 입니다. 즉 <자타카>는 불교를 이해하는 코드입니다.

 

<자타카>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부처님이 전생의 수행자였을 때, 숲에 어미 호랑이 암컷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호랑이가 어느 날 임신을 하고 새끼를 낳았는데, 사냥하다가 그만 부상을 당하고 맙니다. TV에 나오는 <동물의 왕국>을 보면 백수의 왕으로 일컬어지는 사자도 때에 따라 체면을 구깁니다. 어설프게 얼룩말을 공격하다 뒷발에 채이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물론 이런 일이 자주 있는 건 아니고, 아주 드물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장면을 카메라에 담는 것 역시 벼락 맞는 확률보다 적을 것입니다. 전문 카메라 맨도 일생에 한번 담을까 말까 하는 장면이죠. 보통의 경우에는 사자가 접근하면 얼룩말은 미리 알아차리고 도망을 칩니다. 그리고 사자도 얼룩말의 목을 공격하지 뒤를 공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얼룩말의 뒷 다리에 채이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초원보다는 밀림에서의 사냥이 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호랑이가 부상을 당한 것입니다. 그것도 새끼가 딸려 있는 호랑이가 말입니다. 맹수라 할지라도 부상을 당하면 사냥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에는 굶어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어미 호랑이는 사냥을 못하고, 그러니 수유할 수 없습니다. 먹은게 없으니 암호랑이인들 젖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의 전생인 수행자가 이걸 보고는 자기의 몸을 주죠. 그러자 호랑이는 처음에 이 수행자를 잡아 먹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가 수행자이기 때문이죠. 그러자 그 수행자는 그 스스로 자기 몸을 자해해 피를 흘립니다. 그리고 그 피는 결국 호랑이에게 숨어 있는 야성을 자극하게 만듭니다. 수행자는 결국 호랑이게 스스로 잡아 먹히는 거죠. 맹수는 길들여져 있다고 해도 피 냄새를 맡으면 흥분합니다. 그러니 야생의 상태에서는 말할 나위가 없죠. 서양의 대표적 귀신들인 뱀파이어, 드라큐라, 늑대인간도 피를 보면 흥분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뱀파이어, 드라큐라, 늑대인간의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일까요? 여기에는 인간이 영원히 살고 싶다는 욕망이 투여된 것입니다. 뱀파이어, 드라큐라, 늑대인간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전생의 붓다는 호랑이게 스스로 잡혀 죽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어미 호랑이와 새끼를 살렸습니다. 이것이 <자타카>에 나온 이 이야기의 줄거리입니다.

 

왜 이런 얘기를 하느냐? 왜 전생의 붓다가 굶어 죽어가는 호랑이 모자를 위해 자기 몸을 주는가? 우리는 이걸 잘 이해해야 합니다. 자기 몸을 준다는 것은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은 본능적으로 생명에 대한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영국 출신의 아잔 브라흐만이 쓴 <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교도소에서 만난 죄수 이야기인데, 이 죄수는 살인죄로 들어온 자라 굉장히 흉폭했습니다. 그래서 교도소에서도 그에 걸맞는 직책을 주는데, 도축장을 운영하게 한 것이죠. 그는 전기충격기로 들어온 소를 죽이는 일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교도소에서 조차 그의 전문성을 높이 산 것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는 소를 죽이면서 쾌감을 느낍니다. 거기에서 어떤 그 무엇도, 즉 가책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소가 들어와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는 충격에 사로잡혀 그 소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는 간수에게 청합니다. "제발 이 소만은 죽이지 않게 해 주십시요. 그리고 더 이상 이 짓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죄수의 입장에서는 교도소장의 지시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인간만이 생명의 위협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나 짐승, 하다 못해 지렁이조차도 밟으면 꿈틀합니다. 모든 생명체가 자기 생명에 극도의 보호보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물며 자기 생명을 다른 생명을 위해 준다는 것은 말이 쉽지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타카>에 왜 이런 얘기가 나올까요? 부처님과 동물 얘기 말입니다. 인간은 3차원의 중생입니다. 동물은 2차원, 지옥 생은 1차원, 신들의 세계는 4차원이죠. 비록 인간과 동물이 속한 세계는 다르지만, 생명 세계라는 본질적인 것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자타카>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2차원의 생물인 동물에 생명을 부여해 주는데, 하물며 3차원에 존재하는 인간 세계에 있어서는 말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부처님은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즉 모든 중생에 생명을 부여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중생은 부처님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부처님과 중생은 어떤 관계일까요? 부처님의 생명의 근원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것은 바로 중생입니다. 부처님 생명의 근원은 중생으로부터 나옵니다. 

 

그 전에 강론에서 제가 자타카에 나온 매와 비둘기에 관한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 때대 매와 비둘기의 관계는 수직관계 입니다. 비둘기가 매 위에 서있지 못합니다. 매가 주主라면 비둘기는 종從입니다. 이 관계는 수직관계입니다. 즉 직선의 관계죠. 여기서는 균형이 깨집니다. 수직의 관계에서는 균형이 유지되지 않습니다. 바로 부처님이 이 매와 비둘기의 수직관계에 개입하죠. 나가와 신이찌라고 하는 일본 학자는 대칭성을 중요시합니다. 그는 대칭성 인류학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내죠. 물론 이것은<야생의 사고>를 지은  레비스트로스의 이론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가와 신이찌는 대칭과 비대칭을 구분하는데, 비대칭은 주종관계이며, 수직관계이며,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은 관계, 즉 무질서의 관계입니다. 비둘기와 매 사이에 부처님이 어떤 역할을 하나요? 저울에 올라가 비둘기와 매의 비대칭 관계를 해소합니다. 그래서 대칭의 관계를 만듭니다. 비로소 매와 비둘기의 불균형이 균형을 잡게 됩니다. 부처님 스스로 저울에 올라감으로써, 기울여졌던 저울이 수평에 이루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대칭이 이뤄집니다.

 

<자타카>에는 이런 이야기가 많습니다. 250가지의 이야기가 있던가요. 거기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임금이 사슴고기를 좋아해, 사슴 사냥하기를 즐깁니다. 그러던 어느 날 꿈 속에서 황금 빛 사슴이 수많은 사슴 무리들에 둘려싸여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임금은 꿈에서 깬 다음 이런 명령을 내립니다. "황금빛 사슴이 있는 곳을 아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천금을 주겠다 " 요즘 식으로 말하면 광고를 낸 거죠. 마침 사냥군 하나가 황금빛 사슴이 있는 곳을 알고 있다고 신고를 합니다. 그는 전에 사냥을 나갔을 때, 늪에 빠져 죽게 되었을때, 이 황금빛 사슴의 도움으로 살아난 자였습니다. 죽은 뻔한 사냥꾼을 황금빛 사슴이 구해주면서, 다음과 같은 당부를 했습니다. "절대 나를 봤다고 말하지 마시요. 그 약속을 꼭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이 나뭇꾼이 천금 때문에 약속을 지키지 않고, 황금 사슴이 사는 숲을 알려준 거죠.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사냥꾼, 즉 인간이 동물을 배신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쭉 이어지지만, 나는 그 다음 이야기에 관심이 없습니다. 동물에 대한 인간의 배신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이 이야기와 동질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KBS 2에 요새 구미호 이야기를 다룬 여우전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1000년 묵은 여우 이야기가 전래 동화에는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100년 마다 꼬리가 하나 씩 나오면, 1000년이면 꼬리가 10개여야 하는데 왜 꼬리 아홉의 구미호인지 궁금합니다. 동양적 의미에서 숫자 9는 양의 수 중 가장 큰 수라는 의미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우들은 이상하게도 하나같이 인간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 또 하나는 왜 구미호는 꼭 여자로 변신할까요? 사실을 짚어보면, 여기에는 사실 굉장한 상징적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여성은 생산을 합니다. 그래서 어느 집단에서나 환영을 받죠. 이 뜻을 이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여성은 남자보다는 대칭입니다. 남자는 비대칭입니다. 구미호는 인간이 되려고 여자로 변신하여, 남자를 만나 살림을 차립니다. 그런데 이 천년 묵은 여우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어진 날짜를 채워야 합니다. 그런데 꼭 마지막날 저녁에 남자가  배신을 하죠. 그래서 구미호는 인간이 되지 못합니다. 마지막 날 밤 인간이 되기로 정해진 시간 자정이 되려면 0.1초,  막 시계 바늘 초침이 자정을 때리려 할 때 꼭 남자가 배신을 때려 여자를 화나게 합니다. 원래 여우는 인간을 해코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이란 자들이 꼭 저 달이 요만큼만 오면, 되겠다 싶을 때, 개피를 입에 문다든지 해서 그걸 깨뜨립니다. 

 

황금빛 사슴이야기나 천 년 묵은 여우 이야기나 같습니다. 별개가 아닌 같은 이야기입니다. 즉 인간이 배신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균형을 깨트리는 것입니다. 균형을 깬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처음 말한 것처럼 부처님이 중생에게 생명을 줍니다. 그 중생은 부처님에게는 생명의 근원입니다. 이 때 부처님과 중생의 관계는 수직이 아닌 원의 관계입니다.  부처님이 중생에게 생명을 부여해 주고, 중생은 부처님에게 생명의 근원입니다. 수직이란 폭포수처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지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과 중생처럼 수직이 아닌 원형의 관계는 대칭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균형을 이룹니다. 균형이 이뤄진다는 것은 질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깨지면 비대칭관계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무질서하게 됩니다. 불교는, 정확하게 말해 부처님의 가르침은 대칭성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3차원의 세게는 사실 비대칭입니다. 항상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무엇이 내려옵니다. 

 

지난 수요일 법구경 강의에서 선善이 물질적 행위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형이상학은 정신으로, 형이하학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고 정의하면서, 이 둘을 분류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솔직해져햐 합니다. 불교가 무엇입니까?  깨달음입니까? 아니면 지혜입니까? 아니면 자비일까요? 아니면 동남아에서 말하듯 분별의 가르침인가요? 여기서 분별이라 분석한다는 것으로, 하나하나를 비판적으로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보통은 이렇게들 정의하죠. 그 말도 맞습니다. 우리가 시험을 볼 때, 그저 이렇게 답안지를 채우면 여기 있는 불자 여러분들은 모두 100점을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지에선 100점을 맞을지 몰라도, 그 답으로는 꿈에도 불교를 볼 수 없습니다.

 

나는 불교를 불편한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순전히 내 생각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시간을 내어 따로 강론할 생각입니다. 우리 인간은 진실을 희구하면서, 진실을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진실을 알면 불편하기 때문이죠. 인간의 역사는 생물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100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적어도 인간이 야생의 사고를 하기 시작한 것이 3만년 전부터라고 합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실제적으로 인간은 불편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물질을 두고 투쟁해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질인 인간의 몸을 하고 있는 한, 물질의 도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내가 지어낸 말이 아니라 부처님 말씀입니다. 이게 내 말이라면 여러분은 나를 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내가 부처라면 이런 더운 날 고봉정상에서 팥빙수나 먹고 있지  여기 있지 않습니다. 나는 부처가 못 됩니다. 이런 팥빙수 생각이나 먼저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부처님의 이 말은 물질인 육체가 물질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생명의 유지를 위해 물질을 섭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물질을 취해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조차 어려웠습니다. 돌도끼를 던진다고 멧돼지가 알아서 자빠져 줄까요? 어줍잖게 돌을 던져서 사냥이 될까요? 법정 스님이 한 얘기입니다. 시아버지 모기가 저녁에 외출을 하면서 며느리에게 이릅니다. '아가 오늘 저녁 내 밥은 하지 말거라. 좋은 놈을 만나면 저녁대접을 받겠지만, 모진 놈을 만나면 살아 돌아 오겠느냐?' 모기에게 모진 놈 소리 안들으려면 처신을 잘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모기장을 사 놯습니다. 옛날에는 짐승을 사냥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고대인들은 짐승 사냥의 개념이 없었습니다. 동물들이 자기들에게 스스로 오는 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동물들이 자기들 스스로 인간에게 와서 잡혀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증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사냥에서 코끼리라도 잡히면 맘씨 좋은 덕분입니다. 맘모스라도 잡히면 와탕카죠. 그러니 공룡이라도 한 마리 만나면, 거의 로또 수준입니다. 요즘 동해 바다의 고래가 로또라던가요? 고래 한 마리가 3천에서 5천만원을 호가한다니 말입니다. 그 고래가 스스로 잡히는 것인지 어부들이 고래를 잡으려 그물을 치는지 알수 없지만 말입니다. 그러니 옛날에는 좋은 짐승을 만나면 선물을 안고 집에 돌아갈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날도 부지기수였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무엇이 선善이라고 했을까요?  부처님께서는 선은 로바lobha, 도다dosa가 줄어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악 또는 불선은 로바와 도다가 늘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로바는 탐욕, 도다는 분노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로바는 탐욕이 아니라 더 폭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물질을 추구하는 것, 소유욕이 로바입니다. 도다란 우리 집 코끼리가 다섯 마리라도 이웃집에 공룡 한 마리가 있으면, 그것이 도다입니다. 우리 집이 가난하다고 느껴져 마음이 불편해지 등 그 복잡한 감정의 일반을 도다라고 합니다. 화를 퍽퍽 내는 것이 도다가 아니라 우리가 정서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도다입니다.  그것이 내재하면 두카(苦), 그것이 표출되면 불만인 도다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줄어들면 선, 늘어나면 불선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물질을 두고 다툽니다. 그래서 균형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전부 돌도끼를 들고 나오면 어느 누구도 안전할 자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마지막 한 사람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국가는 국민이 있어야 합니다. 국민이 있어야 국가이고, 학생이 있어야 학교입니다. 학생이 없고 선생만 있는 곳은 학교가 아닙니다. 마지막 한 사람이 남게되면, 그 사람조차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밀림에는 맹수가 우글거립니다. 그렇게 되면 동물의 입장에서는 '얼레 선물 왔네'할지도 모릅니다. 호랑이, 사자에게 인간이 선물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눈에 인간은 먹을거리, 음식이지 않겠습니까? 인간의 입장에서는 개를 선물이라고 하겠지만, 개의 측면에서 보면 인간이 선물일 것입니다. 결국 일정 부분 스스로 양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사냥으로 맘모스 한 마리를 잡는다고 칩시다. 그 때 사냥에 참여하는 사람도 있고, 사냥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 때 모두 맘모스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것, 그것이 선입니다. 그것이 로바와 도다가 줄어드는 것입니다. 그럴려면 굉장히 정신적인 것이 필요합니다. 사회생물학으로 유명한 에드워드 윌슨은 우리는 마음이라는 유전자, 즉 문화적 환경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통섭>이라는 개념과 책을 만들어낸 사람입니다. 그에 의하면 마음이란 유전자 그리고 문화의 환경입니다. 문화의 환경이란 아주 최초의 인류부터 시작해 수없이 쌓인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분의 이론에 동의하느냐 동의하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정신은 물질적인 관계 속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걸 얼마나 인내하고 양보할 수 있느냐가 결국 문제라는 것입니다.

 

불교는 야생의 시대, 지식의 시대, 지성의 시대를 지나 지혜의 시대로 가야한다는 것이 불교가 지향해야 할 방향입니다. 야생의 시대는 석기 시대입니다. 지식의 시대는 신석기 시대일 것입니다. 춘천박물관에 들러 봤더니, 마제석기가 전시되어 있는데, 정교하게 간 것을 보니 신석기인들은 팔힘이 좋았을 것입니다. 한편 종교의 기원이 이 시대에 열리기도 합니다. 이 때 태동한 종교가 조로아스트교, 유대교인데, 이것들은 훗날 기독교의 기초가 됩니다. 기독교는 여러 종교가 융합된 것입니다. 신화의 도입 역시 이 시대에 이뤄집니다. 지금은 지식에서 지성의 시대로 넘어가는 단계입니다. 지혜의 시대에 이르면, 모든 사람이 물질로부터 자유로와 질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물질을 놓아 버릴 수 있습니다. 물질을 양보하는 마음이 선입니다. 맘모스를 사냥하는데 참가하든지 아니든지 간에 모두에게 고기를 먹는 권리를 부여해 주는 것, 그것이 선입니다. 그리고 공동선입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런 식의 책이라면, 나는 <선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책을 10권도 쓸 수 있습니다.

 

맘모스를 사냥한 사람만이 고기를 먹는 것은 사익이며, 맘모스를 사냥하지 않은 사람들도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것이 공동선입니다. 우리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선이 되었든, 그 무엇이 되었든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제도와 정신을 강조합니다. 제도만으로는 틈새를 메울 수 없습니다. 제도에는 반드시 사각지대가 나오게 마련입니다. 이후락씨의 표현대로라면, "떡을 만지니 손에 떡 고물이 묻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전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씨가 부정축재 혐의를 받으면서 공화당 정풍운동이 일었는데, 그 진영의 사람들이 공격하자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떡은 누가 먹었다는 것인가요. 결국 모든 것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것이 존재의 의미이며, 존재의 가치입니다. 

 

부처님이 호랑이에게 전생의 부처님인 자기 생명을 부여한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부처님은 생명입니다. 나와 부처님의 관계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나와 부처님의 관계는 대칭과 균형의 관계입니다. 정신이나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은 나에게 생명을 주고, 부처님에게 나는 생명의 근원입니다. 통섭되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손가락의 깍지가 끼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분리하면 손가락 5개지만, 쥐면 주먹입니다. 여기서는 손가락 개념이 배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손가락은 주먹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굳이 손가락을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주먹과 손가락, 손등과 손바닥 처럼 모두 들어가 있습니다.  부처님이 생명입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부처님 육신이 중생에게 생명을 부여합니다. 이것은 부처님 DNA가 나와 DNA가 합쳐지는 것과 같습니다. 주먹과 같은 것이죠. 엄지냐, 검지냐, 중지냐의 차이 일 뿐, 하나 하나의 지칭일 뿐입니다. 쥐어지면 주먹에 각각이 포함되어지는 것이며, 이것이 대칭이자 균형입니다. 

 

균형이 깨지고, 비대칭으로 가는 것은 무질서이며 혼란입니다. 사기의 저자 태사공 사마천은 역사를 일치일란 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치란 균형을 뜻하며, 란은 혼란, 전쟁, 동요를 말합니다. 란일 때는 하나 하나 흩어집니다. 손가락이 하나 하나 찢겨져 나가면, 더 이상 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자기 생명을 줌으로써 1차원, 2차원, 3차원, 4차원 그 자체의 모든 생명의 균형을 잡는 것, 즉 대칭이 이뤄지는 것, 그것이 지혜의 시대입니다. 부처님이 생명이다라고 이해하면 그저 한 80점 정도, 오늘의 강론처럼 여태까지의 애기를 이해하면 100점짜리입니다. 오늘 강론의 결론은 '붓다는 생명일 뿐이다'라는 것입니다. 그외의 말은 필요없습니다.

 

오늘은 날씨도 무더운데 앉아 있으시느라고 애들 많이 쓰셨습니다. 항상 부처님으로 인해 나의 생명이 부여되고, 나의 생명이 부처님의 근원이 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 그것이 수행입니다. 여기게신 불자님들의 몸과 마음 속에 부처님의 생명이 뿌리깊이 내려서 지혜의 시대에 행복한 삶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싸두 싸두 싸두.

 

 

혜천스님 - 초기불교전공 흥천사주지 

2016.02.02.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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