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6. 2. 18:24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전법하라
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 불기2554년 8월 15일
지난 밤에는 새벽 3시 즈음인가요. 비가 대단했습니다. 아파트에 사시는 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양철 지붕인 여기는 무슨 천둥 소리인가 놀랄 정도였는데, 빗소리였습니다.
오늘 강론의 주제는 '전법하라'입니다. 부처님께서 율장에 보면, 비구는 농업과 상업에 종사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비구는 농업과 상업에 종사하면 안되죠. 왜 부처님은 비구가 농업이나 상업에 종사하면 안된다고 했을까요?
부처님이 바라문 까시 바라드와자가 500 마리의 소를 동원해서 밭갈이 하는 현장에 가죠. 원래 바라문은 농업에 종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시대에는 바라문의 수가 증가하여 농업에 종사하는 바라문이 있게 되죠. 마누법전에 보면-물론 마누법전에 문자화된 것은 부처님보다 늦은 시기이지만- 바라문들이 일시적으로 농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까시 바라드와자가 500개의 쟁기를 동원했다는 것은 굉장한 대농입니다. 까시 바라드와자가 밭갈이 중간의 참 때 인부들에게 우유죽을 나눠주고 있습니다. 지금은 이 우유죽이 별 것 아닌 것처럼 흔하지만. 그 옛날엔 호사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이 때 부처님이 한 곁에 서죠. 바라드와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슈라마나여 당신도 일을 하고 밥을 먹으시요" 이 문제는 훗날 중국에 와서도 굉장한 논쟁점이 됩니다. 승려들이 일하지 않는 것에 대해 유생들이 공격합니다. 손에 호미를 들거나 직접 농사 짓지 않는 것은 승려나 유생들도 마찬가지인데 말이죠. 그저 맑스식으로 말하면, 인민의 등골을 빼먹기는 승려나 유생이나 도사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이 대답하죠. "나도 농사꾼입니다" 그러자 까시 바라드와자가 다시 묻죠. 바라드와자는 이미 부처를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당신의 소와 쟁기는 어디 있소? 나는 당신의 소와 쟁기를 본 적이 없소" 그러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싯구를 말합니다.
믿음은 내가 뿌리는 씨 지혜는 내가 밭가는 보습 나는 몸에서 입에서 마음에서 나날이 악한 업業을 제어하나니 그는 내가 밭에서 김 매는 것. 내가 모는 소는 정진이니 가고 돌아섬 없이 행하여 슬퍼함 없이 나를 편안한 경지로 나르도다 나는 이리 밭갈고 이리 씨뿌려 감로甘露의 열매를 거두리라
그랬더니 까시 바라드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야말로 진정한 농부입니다" 그리고는 부처님께 우유죽을 바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 우유죽을 받지 않죠. "나는 법을 팔아 음식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것은 부처님이 싯구를 댓가로 음식을 구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라드와자는 그 자리에서 부처님께 출가합니다. 우리는 이 싯구를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위에 인용한 싯구는 마스타니 후미오(增谷文雄)가 축약해 번역한 것입니다. 나는 원래의 것보다 이 번역을 더 좋아합니다. 원본의 번역보다 더 감동적이기 때문이죠.
부처님은 왜 비구에게 농업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했을까요? 율장에 보면 '땅을 파게 되면 벌레가 죽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스님들의 해석이 그렇습니다. 긴데(스님의 독특한 '그런데'의 사투리) 우리가 그렇게 이해하기 때문에 부처님의 말씀에 진정으로 육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형식적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니 절에 수십 년을 다녀도 불교의 기본조차 모르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절에는 산신교, 칠성교, 신중교 제자들과 신자들이 넘쳐납니다.
부처님이 비구들에게 농업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시킨 몇 가지 중에 한 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농업에 종사하려면 주거가 일정해야 합니다. 즉 정착을 해야 농사를 지을 수 있습니다. 정착도 아주 오래해야 효과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습니다. 무슨 땅에서 나오는 벌레가 죽는다고 농사를 금했을까요? 만약 부처님이 진짜 그랬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좌우 앞뒤의 문이 꽉 막혀 있는 인간의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게 어찌 제대로 된 인간의 이야기이겠습니까? 부처님이 비구에게 농업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한 것은 농사를 지을려면 정착해야 하고, 그것이 전법에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 녹야원에서 5명의 제자들을 처음 받아들이고, 그 다음 야사라는 비구를 제자로 받아들입니다. 그러자 그의 친구 21명이 부처님의 제자가 되는데, 이 때 부처님이 전도선언이라는 걸 하게 됩니다. "비구들아, 전도를 따나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신과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그리고 두 사람이 한 길로 가지 마라!" 여기서 전도를 떠나는 이유를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라고 합니다.
여기서 '세상을 불쌍히 여기고'의 뜻은 세상 사람들이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현대어로 말하면 착각입니다. 즉 사람들이 착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은 후 '이것은 세상의 상식을 뒤집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착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마치 그것을 진실로 믿는 것을 말합니다. 지난 주 '불교란 무엇인가'라는 강론과 상통하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뭔가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보지 않습니다. 왜 둘이 같이 가지 말라고 하는가? 그것은 전도의 효율성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이야기를 기록한 5부 니까야를 읽어보면, 일관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해서'가 그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온 이유이기도 합니다.
농업에 종사할려면 반드시 정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후대 불교가 정주하는 것은, 산 속에 깊이 들어간 것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위배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 자신도 우기를 제외하고는 정주하지 않고, 생애 동안 끊임없이 전법여행을 했습니다. 인도에서 우기는 짧게는 60일, 길게는 90일이나 어어집니다. 우기가 되면 사람이 움직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율장에 보면 우기 때 돌아다니면, 벌레를 밟아 죽이기 때문에 우기에는 머무르는 것으로 말하지만, 그렇다면 우기 아닌 때에는 벌레가 없다는 말인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기 때에는 위험합니다. 인도에서는 없던 강, 급류, 계곡이 이 때 생깁니다. 인도라는 나라는 남북한을 합한 면적의 36배나 됩니다. 그것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방글라데시를 떼 주고 난 이후의 면적이 그렇습니다. 부처님의 고향을 멸망시킨 유리태자는 회군하다가 중간의 계곡에서 야영을 합니다. 그런데 그날 밤 모든 군사가 다 떠내려가 죽었다고 합니다. 야영하던 그 지역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내린 비 때문에 갑자기 불어난 물이 이들을 덮친 것입니다.
인도에는 가보지 않아 잘 모르지만, 미안마에서는 오늘 처럼 비가 많이 오면 탁발을 나갈 수 없습니다. 하루는 오늘처럼 비오던 날 아침에 밥을 먹고 밖에 나가보니, 얼레 이게 뭣이여? 사방이 호수가 되어 있습니다. 쉐우민 센터에 들어찬 물이 허벅지까지 옵니다. 그래서 미안마에서는 집도 2M 정도 높여서 짓습니다. 걸어다니는 길 참도(?)라는 것도 2M 30 정도로 높습니다. 유심히 보면 집이 모두 2층인데, 우기가 되어 비가 오기 시작하면, 평야지대라 물이 안빠져 모든 농지는 다 잠기고, 가옥은 수상 가옥이 되며, 길만 남습니다. 어떤 집들은 지붕위에 배를 매어 놓습니다. 왜냐구요? 우기 몬순 때 모든 곳이 호수로 변해 자가용 자동차는 없어도 배가 있어야 다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지리와 풍토를 알아야 거기서 태동된 문화와 사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도에서 우기에 돌아다닌다는 것은 머리에 꽃을 꽂은 남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즉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주하는 것입니다. 우기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기 이외에는 전법여행을 다닙니다. 부처님과 그 제자 스물 하나가 모여 농사를 지었다면, 만평 정도나 지었을까요? 그것은 비효율적입니다. 몇몇 사람이 정주해서 농사를 짓는 것이 비효율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법 여행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비구가 상업에 종사하는 것은 왜 금지시켰을까요? 인간은 근본적으로 무엇을 가지고 싸웁니까? 그것은 이해, 즉 이익 때문입니다. 상업이란 이익을 두고 다투는 것입니다.
중국의 한나라 양책의 대상인 여불위(呂不韋,여불휘)와 아버지의 대화를 보면 장사의 일면을 들여다 볼수 있습니다. 여불위는 조나라 상단에 장사를 갔다가 꾀죄죄한 공자를 한사람 만납니다. 그는 진나라 왕의 서자인 자초(子楚:훗날 진장앙왕)입니다. 그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조나라에 인질로 있었는데, 조희라는 조나라 출신의 무희를 만나 낳은 아들이 훗날 진시황입니다. 당시 왕이던 진소양왕의 태자는 안국군이었는데, 정부인 화양부인에게 아들이 없어 다른 많은 비첩들 사이에 태어난 공자가 20여명이나 됩니다. 자초도 그 중의 하나인데 한나라 여불위의 도움으로 화양부인의 양자가 되어 B.C 250년에 왕위에 오릅니다.
여불위가 어버지에 묻습니다. "100원의 물건을사서 200원에 팔면 이 장사꾼은 어떤 장사꾼입니까?"아버지의 답 "보통이다" 요즘 같으면 폭리입니다. 아마 사람들이 쳐 죽이려 할지 모릅니다.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물건을 100원에 사서 1,000원에 팔면 이 장사꾼은 어떻습니까?" "큰 장사꾼" 그러니 장사할려면 이렇게 해야 합니다. 여불위가 다시 묻습니다. "아부지! 그러면 한 나라의 왕을 갈아 치우면 어떨까요?" 아버지는 "그것은 계산불가.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장사꾼!"이라고 답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등에 업지 않고 큰 부자가 된다는 것을 불가능합니다. 지금의 우리나라 재벌들 중 권력과 연결되지 않은 기업이 있나요?
상업이라는 것은 이익을 놓고 각자가 다투죠. 이렇게 되면 어떤 문제가 있느냐? 고스톱판을 보면, 아버지와 아들의 경계,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경계가 무너집니다. "어머니 이게 아니잖아요. 똥 쌌잖아요" 왜 무너지는가? 이해관계가 충돌하니까 그런 것입니다. 언젠가 들은 얘기입니다. 며느리들과 시어머니가 설날만 되면 모여서 고스톱을 칩니다. 그 동안 언제나 시어머니가 고스톱판을 싹쓸이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설날 고스톱판에서는 며느리들이 잃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막내 며느리가 새로 들어와서는 고스톱판을 싹쓸이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됐겠어요? 시어머니는 뿔납니다. 그 전에는 고스톱으로 딴 돈으로 용돈도 하고, 손자들에게 인심도 썼는데... 집 분위기가 싸해 지고 맙니다. 막내 며느리가 눈치가 없었다는 거죠. 이해 관계가 걸리면 충돌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건 부모형제, 자식간에도 충돌합니다. 이해관계가 조정되지 않으면, 충돌이 일어납니다. 그러니 남남이 모여 이해관계가 생기면 언제나 다툼이 있게 마련입니다.
비구가 상업에 종사하는 것이 금지되는 되는 것은 이해관계 속에서 이해관계를 다투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의 입은 하나이니, 자기 혼자만 먹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식구(食口)라는 것은 같은 자리에서 밥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한솥밥을 먹는다는 것도 가족과 같은 개념입니다. 가족이 있는 경우는 식구가 많습니다. 옛날에는 청춘남녀가 만나 결혼을 하게 되면 반드시 +였습니다. 아이의 숫자가 5명, 7명 정도 되니까요. 출중한 능력을 지니신 분들은 12명 정도 되죠. 제가 전라도 있을 때, 아들을 보기 위해 내리 딸을 열하나를 낳고 열두 번째 아들을 낳은 집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고등학생이던 막내 아들은 위로 11명의 누나들에게 배워서 그런지 여성처럼 행동합니다. 호칭도 누나가 아닌 언니라고 합니다. 요새는 둘이 결혼하면 1명만 낳죠. 아니 한 집 건너 하나를 낳죠. 새로운 캠페인을 벌릴 판입니다. 대가족이 한 구역에 거주하면, 즉 식구가 많아 그 식구를 먹여 살리자면 전투적으로 싸워야 합니다.
전도선언에서는 '많은 사람들의 이익, 안락, 행복을 위해 전법여행을 떠나라' 합니다. 비구는 그것을 침해하면 안됩니다. 상업을 하게되면 이익을 침해하게 됩니다. 요새는 절에서도 장사합니다. 집에 가서나 할 일이지. 비구는 그래서 상업에 종사하면 안됩니다. 비구는 세상의 이익, 안락, 행복을 위해서 끊임없는 전법여행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속을 잘 하죠. 자기 식구들끼리 결속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 혈연과의 결속입니다. 넓어지면 일가 친척, 더 넓어지면 이웃과 결속을 합니다. 결속의 범위는 작은 집단이죠. 부처님은 결속을 넘어서 연대하라는 것입니다. 연대는 내가 소속된 집단을 넘어서 다른 집단과 함께 묶이는 것입니다. 우리도 결속을 넘어 연대를 하지 못해서, 오늘 같은 8/15 광복절을 맞습니다. 광복이라는 말이 맞는지 아닌지는 잘모르겠습니다만, 남들이 그렇게 부르니 나도 그냥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광복光復이라 하면 빛을 찾는다는 것인데, 우리가 무슨 빛을 다시 찾았다는 것인가? 일본의 지배권이 미국의 지배권으로 이동한 것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빛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광복이란 말을 써야할지는 재고해 봐야 합니다. 내가 지배권을 잃었다가 찾는 것이 광복입니다. 미안하지만 8/15는 광복절이 아닙니다. 친일파 마름의 지배에서 머리 검은 미국 추종세력의 지배로 변한 것 뿐입니다.
왜 우리가 주권을 잃었을까요? 저들끼리 결속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마지막 왕 이 형(또는 희라 일기도 함)은 무언가 자기네들끼리 특권을 지키려던 그 일족들을 대변할 뿐입니다. 요새 조선의 마지막 왕을 고종이라고 부르는데, 고종이란 일본 정부, 즉 일본 천황이 준 묘호이며 작위입니다. 그렇게 불러서는 안됩니다. 이형은 자기 이익을 위해 청나라 군사를 불러들입니다. 그래서 원세개袁世凱가 조선을 지배한 것 아닙니까? 이형과 민비는 모두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타국의 군대를 끌이어들인 것입니다.동학이 일어나자 청나라 군대와 일본군을 불러들인 것이 이들입니다. 이완용만 욕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네들 것을 지키려 백성과 연대하지 않은 것입니다.
전법여행은 연대하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보기에, 비구가 농업이나 상업에 종사하면 결속을 이룰지 몰라도 연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전법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연대를 하라는 거죠. 부처님은 바라문들이 기도를 통해 이루듯이 기도를 통해 모든 사람들을 한꺼번에 구할 수도 있을 터인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부처님은 한 사람 또 한사람 끊이없이 연대를 하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연대하면 두 사람, 다시 연대하면 네 사람, 다시 연대하면 여덟 사람,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연대하는 것입니다. <니까야>에서는 그것만이 미망을 깨뜨릴 수 있고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도대체 무엇을 전하라는 것일까요? 부처님을 믿으라. 이것은 맞는 말일까요 아니면 틀린 말일까요?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말입니다. 불교는 신을 믿지 않습니다. 불교는 신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신이 아닙니다. 부처님을 신격화해서는 안됩니다. 부처님은 불편한 진실을 말하죠. 종교에서 믿음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신은 영원하고 절대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거에 복종할 따름이며, 이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그렇죠. 다른 하나는 불교에서 말하는 믿음입니다. 불교에서의 믿음은 다르마의 실천입니다. 불교에서는 신의 영원성, 절대성을 부정합니다. 부처님은 다르마를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다르마가 무엇입니까? 간단하게 말하면, 다르마는 우주의 법칙, 생명의 법칙, 자연의 법칙입니다. 세계 모든 나라는 창조설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창조론을 부정합니다. 이것은 사고의 빈곤에서 나온 것이라는 거죠. 즉 누군가가 만들었다는 견해는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불교는 다르마의 법칙에 의해 합체되고, 유지되고, 해체됩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반복됩니다. 옛날에는 일본 만화가 유행했습니다. TV애도 나왔죠. 거기 보면, 평상시에는 배로, 기차로, 자동차로 달리던 것이 어느 날 합체합니다. 그리고는 어느 날 다시 해체되어 다시 원 상태로 돌아갑니다. 합체는 각자의 원소가 하나로 모이는 것이며, 해체는 각자의 원소가 흩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유지는 그런 상태들이 지속되는 것이죠. 이 합체, 유지, 해체의 과정은 마치 원을 그리듯 동그라미 세 개가 서로 맞물려 겹쳐서 그려지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은 다르마로서의 붓다입니다. "바카리야! 다르마를 보는 자가 나를 본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 나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격을 제어하고, 다르마로서의 붓다를 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전법을 하라고 합니다. 인도에서 바라문교는 통제 기능을 갖고 있지만, 불교는 이 바라문교가 주장하는 신의 영원성과 절대성을 부정합니다. 바라문교의 주장에 따르면, 신과 인간은 동등한 아트만입니다. 인간의 아트만은 소아, 신의 아트만은 대아로, 이 둘은 동격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라문들 스스로 자기들을 살아있는 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바로 이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변화하는 가운데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다'
어떤 분은 나를 쪽집게 도사처럼 여깁니다. '스님은 다 아시잖아요'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나는 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굳이 묻지 않은 것을 말할 필요까지는 없으니까요. 다만 '알면 내가 이 자리에 앉아 있겠소'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오릅니다. 영원한 것이 있다고 종교의 주장에 대해, 그런게 어디 있냐고 보자고 하면, '나를 믿지 않는 자! 유황불의 지옥에 떨어질지니'라고 협박합니다. 아프리카의 기독교 목사들은 아직도 마녀사냥을 한다고 합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부처님은 당시의 인도 바라문교에 대해 반대했습니다. 신의 영원성을 부정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면 다 된다는 주력만능주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우리나라 스님들도 흔히 하는 얘깁니다. 만약 그렇다면, 앉아서 입만 깔짝거리면 되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다르마의 실천 없이는 안됩니다. 그 당시 인도의 주력만능주의를 부처님은 거부합니다. 신묘장구대다라니는 원래 인도의 신을 찬양하는 내용이기도 하거니와 주력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불교는 주법을 쓰면 안됩니다.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주법을 쏼라쏼라 하면 현혹됩니다.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그러한 것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뜨리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지혜롭지 못해서, 그것에 현혹됩니다. 마치 무엇인가 있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인간은 3만년 동안 변한 것이 없습니다. 구석기 시대 인간이나 지금의 인간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땀흘려 일하지 않고 하늘에서 황금이 우수수하고 떨어지길 바라는 거죠. 하기야 실제 이렇게 되면 우리는 생명을 부지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달라진 게 없습니다. 요행으로 무언가 얻고 싶어 하죠. 그 요행을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집단이 권력집단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네가 땀흘려 일하라는 것입니다. 네가 땀흘려 얻으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이 땅에 온 것은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부처님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비구는 모든 사람들이 어두운 미망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익, 행복, 안락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불교가 지혜를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풍요로운 데도 사고는 여전히 석기시대 식으로 하고 있습니다. 석기시대는 살아남기 위해 투쟁해야 했습니다. 우리들 또한 지금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투쟁하고 있습니다. 좋은 교육을 받고, 직장에 다니고 하는 것이 다 그런 이유 아닙니까? 행복한 삶을 자각하고 그런 삶을 지향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루 하루 살아남기에 급급하죠. 부처님은 모든 사람이 행복한 사회, 모든 사람이 안락한 사회를 원합니다. 그래서 비구들에게 정주하지 말고 전법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가치, 새로운 희망을 얘기하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부처님의 뜻을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문 밖에 나가지 않고 한 절에 오래 있는 것이 자랑입니다. '30년 동안이나 문밖에 나가지 않았네'라고 자랑하죠. 그런데 밖에 나가보면 50년 동안이나 문밖에 나가지 않은 수도사들이 쌔고 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절에 오래 산 것이 자랑이 됩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근본 정신에 위배된 것입니다. 저도 5년째 이러고 있으니 위배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새로운 희망, 새로운 가치, 새로운 변화를 얘기하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혜롭지 못해 누군가로부터 지배 당하고, 조종 당하는 것입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러한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세상의 상식을 뒤엎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진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게 안되니까 진정한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행복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 변화를 받아들이고 네 스스로 깨어나라는 것입니다.
오늘 강론의 주제가 '전법하라'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제자 비구 21명이 생겼을 때, 많은 사람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해 전법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전법정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부처님이 전법선언을 하던 그 때, 그 장소로 돌아가야 진정한 부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만나고 있는 부처님은 그 때 그 부처님이 맞나요? 우리가 지금 만나고 있는 부처님은 역사적인 부처님입니다. 우리가 지금 만나고 있는 것은 역사적인 불교입니다. 그 때의 불교로 돌아가야, 그래야 비로소 참 부처님을 만날 수 있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눈 뜰 수 있습니다.
오늘 강론은 여기까지입니다. 김구씨의 부친께서 강대 병원에 내려오셨다니 돌아가며 문병을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전에 내가 이런 얘길 했더니 잘못 이해해서 모임을 만들었는데... 이 문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모두 형제입니다. 나는 그걸 얘기했던 것입니다. 형제란 아픔을 함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연대하자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문안에서는 결속을 잘하는데, 문밖에서는 결속하는 걸 잊죠. 결속을 하고 연대해야 합니다. 연대할 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항상 정과 사랑이 넘치는 복된 삶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혜천스님 - 초기불교전공 흥천사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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