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중도철학과 원자론|******@불교의우주론@

2018. 6. 2. 17:14일반/생물·과학과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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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 가득한 밤에' by 동물원


<22>중도철학과 원자론

- 찰라생멸하는 무수한 미립자 본성 없어 -
- 중도철학은 양극단을 포섭한 空의 세계 -

데모크리토스 이래 서구의 원자론은 물질의 궁극적인 요소를 탐구하고자하는 것이었고, 더 이상 분해될 수 없는 이 물질의 궁극적인 요소를 원자라고 불 렀다. 물질의 구성 요소로서의 원자에 대한 초보적인 이해는 주기율표가 완 성되면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접하는 물질은 종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해 보이지만, 이를 구성하는 원자는 1백여 종 밖에 안된다는 점이 밝혀졌다. 이 원자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분자를 이루고, 무수히 많은 수 의 분자들이 모여 우리가 보고 만지는 물질 즉 거시세계를 이룬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이렇게 주기율표를 완성시키기는 하였으나, 그때 까지 원자 자체 의 구조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그 이후 원자 구조를 탐구하면서,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구성되어 있고 원자핵은 다시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로써 원자론이 본래 의미하였던 바와는 달리, 원 자는 물질의 궁극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점이 밝혀졌다.

우선 이 원자의 구조에 대하여 잠시 알아보도록 하자. 가장 간단한 구조의 원자는 수소 원자이다. 수소 원자는 하나의 양성자가 원자핵을 이루고, 그 주 위를 전자가 돌고 있다. 양성자나 중성자의 질량은 전자 질량의 1천8백배 가 량이므로 원자의 질량은 거의 대부분 양성자의 질량이다. 따라서 수소 원자 의 경우 원자핵의 질량은 전자 질량의 1천8백배 가량이 되며, 다른 원자의 경우 이는 대부분 전자 질량의 3천6백배 이상이다. 그러나 원자핵의 반지름 이 10-15 m 정도이고 수소 원자의 반지름은 5×10-11m정도이니 그들이 차 지하는 공간적 부피는 그들의 질량과는 오히려 반대이다. 워낙 작은 숫자들 이니 이해를 돕기 위하여 양성자를 반지름이 1Cm 정도인 구슬로 부풀린다 고 하자. 그러면 수소 원자의 반지름은 5백m정도이다. 이 모형에 의하면 원 자 질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원자핵은 반지름 1Cm인 구의 작은 공간 안에 존재하지만, 원자 질량의 1/1,800 밖에 안되는 전자는 반지름 5백m의 구가 차지하는 삼차원 공간을 도는 것이 된다. 더우기 이 두 구가 차지하는 부피 의 비는 1:125,000,000,000,000정도이다. 가령 우리 몸을 구성하는 원자들의 전 자를 다 떼어내고 원자핵 만으로 뭉쳐 놓는다면, 반지름이 0.01mm 쯤 되는 구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 앞에 놓여있는 어떤 물체를 보고 있다 하더라도, 사실 그 물체의 질량의 대부분은 100조분의 1이라는 작은 공간에 몰려 있을 뿐이 고, 그 나머지 부분은 거의 텅빈 공간일 뿐이다. 우리는 사실 그 텅빈 공간을 보고, 만지고, 맛보고, 돌고 하면서 아름답다거나 추하다고 하고, 매끄럽다거 나 거칠다고 하고, 맛있다거나 맛없다고 하며 깨끗하다거나 더럽다고 한다. 20세가 초의 과학자 일부는 원자의 구조를 알고 나서 자연의 궁극적인 모든 구조가 밝혀졌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탐구의 시작이었다. 원 자핵이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이것 역시 궁극적 인 물질은 아니었다. 이 양성자와 중성자는 다시 수없이 많은 미립자로 이루 어져 있다. 이 미립자들의 수명은 불과 10-23 초에 불과하니, 순식간에 이어 지는 생과 멸은 분자 그대로의 생과 멸이 아니다. 생과 멸 서로가 서로에 대 해 동인(動因)으로 존재한다. 생과 멸이 동시적으로 공존하며, 역동적으로 결 합하여 있다. 바로 생즉멸이요 멸즉생의 세계이다. 이러한 존재 양식은 생이 나 멸 그 어느 것으로도 온전히 표현될 수는 없으니, 이를 일러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할 수 밖에 없다. 월정(月正)스님이 불생불멸의 멸이 찰라멸이라 고 해석한 것은 현대물리학의 관점과 연관된다 하겠다.

이처럼 순간에 생하고 멸하는 이 미립자들이 고정된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자성을 가지지 않는 무수한 미립자들이 관계의 틀 속에서 양 성자와 중성자를 형성하니, 이것이 곧 연기요 공이다. 우리 앞에 나타나지만 그 모든 것이 오직 연기일 뿐이니 공이요, 공이지만 연기에 의해 우리 앞에 현현하니 그것이 색이다, 그러므로 연기무자성공(緣起無自性空)혹은 색성공 (色性空)이라 한다.

불생불멸만이 아니라 용수보살이 설한 팔불중도(八不中道)의 불상부단(不常不斷) 불일불이(不一不異), 불거불래(不去不來), 그리고 반야심경의 불구부정 이나 부증불감 모두는 어느 한 극단이 아닌 중도의 철학을 나타낸 것이다. 성철스님은 이 양극단을 떠나 중도를 행하는 것이 반야바라밀이라 하였다. 이때의 중도란 양극단의 중간쯤에 위치한 어떤 것이 아니라 양극단을 여의면 서도 양극단을 포섭하는 것이어서 공가중(空假中)의 삼제가 원융하니 천태의 기본교의와 연관된다. 또한 양극단을 여윈 중도의 깊은 이치는 생이나 멸등 의 양극단의 문자가 의미하는 바에 의해서는 나타내질 수 없으니 언어나 문 자, 관념의 한계가 발생하게 되며, 이는 승의제와 세속제나 선불교에서의 언 어도단(言語道斷)과 연관된다. 더구나 현대물리학에서의 원자는 미립자의 기 본 단위들을 그저 단순히 쌓아놓은 것이 아니라 미립자 상호간의 관계의 종 합으로 파악해야만 하는 것이므로, 서로가 걸림없이 무한히 이어지는 중중무 진 법계연기(重重無塵 法界緣起)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하겠다. 

신케이-하늘에 별빛이 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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