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불상부단|******@불교의우주론@

2018. 6. 9. 15:11일반/생물·과학과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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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불상부단(不常不斷)

- ‘있다’와‘없다’로 우주 파악은 불가능 -
- 오직 연기에 의해 모든변화·인과 살펴야 -

존재자가 자성을 가지고 생멸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것을 보임 으로써 무자성공인 열반의 입장을 나타낸 것이 불생불멸이라 한다면, 용수보 살이 불상부단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존재자의 연속성에 관한 논의이다.

여기서 상(常)이란 상주(常住)로서 변하지 않는 자성을 가지고 계속하여 존 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단(斷)이란 단멸(斷滅)로서 연속성의 단절을 의미한 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연기무자성공의 입장에서의 불생불멸이 이미 불상부 단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으나, 이를 구분하여 본다면 불생불 멸이 생멸의 과정 즉 생멸이라는 상태 전이에 주목하는 것인데 반하여 불상 부단은 생한 존재자와 멸한 존재자 간의 연속성에 관한 논의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불상(不常)은 일단 생한 존재자가 생이란 상태를 계속하여 유지하 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부단(不斷)은 멸한 존재자의 멸이란 상태가 계속 유지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생(生)과 상 (常)을 혹은 멸(滅)과 단(斷)을 같은 의미로 파악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이와 관련하여 다시 원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여 보자. 수소분자는 수소 원자 두개가 결합하여 이루어 진다. 이때 수소분자를 이루는 두 개의 원자는 결합 하기 이전의 원자와 어떤 관계에 있게 되는지를 불상부단과 연관시켜 보자.

수소 원자란 전에도 말했듯이 하나의 양성자 주위를 하나의 전자가 도는 것 이다. 수소분자란 두개의 양성자 A와 B가 어느 정도의 거리만큼 떨어져 있 는 상태에서 이 두 양성자 주위를 두개의 전자가 도는 것이다. 여기서 강조 되어야 할 점은 수소분자의 상태가 말랑말랑한 공 두개를 풀로 붙여 놓은 것 과 같은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점이다. 공 두개를 붙여 놓았다면 각각의 공 은 자신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게 된다. 수소분자의 경우가 이러한 공 의 경우와 같다면, A라는 양성자 주위를 돌던 전자는 수소 분자로 결합되고 나서도 그대로 양성자 A의 주위를 돌아야 되고, B라는 양성자 주위를 돌던 전자는 그대로 B의 주위를 돌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의 수소 분자의 상 태는 그렇지 않다. A라는 양성자 주위를 돌던 전자나 B라는 양성자 주위를 돌던 전자가 모두 똑같이 양성자 A와 B의 주변을 돌며, 서로의 영역을 넘나 들게 된다. 양자역학은 다만 두개의 전자들이 공간상의 각 점에 있을 확률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말해줄 뿐이다. 그렇다면 어느 전자가 양성자 A의 주 위를 돌고 있던 전자였는지를 말한다는 것도 역시 불가능하다. 우리가 수소 분자에 대해 알 수 있는 유일한 정보는 두개의 전자가 양자역학의 해가 제시 하는 확률분포를 따라 두개의 양성자 주위에 분포하고 있다는 것 뿐이다. 그 러므로 수소 분자는 수소원자의 상태가 그대로 연속 된 상(常)의 상태가 아 니므로 불상(不常)이다. 그러나 수소분자가 수소원자에 의해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므로 이 둘을 단(斷)의 상태라고 말할 수도 없으니 또 한 부단(不斷)이다. 결국 수소원자와 수소분자의 관계는 상도 아니요 단도 아 니니, 불상부단일 수 밖에 없다.

불상부단의 논리가 원자의 세계에서만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목재를 다듬어 집을 짓는 경우를 생각하여 보자. 기둥을 이루는 어떤 목재의 기능은 집이라 는 구조물 속에서만 파악될 수 있다. 집을 떠나서 기둥이라는 의미는 존재하 지 않는다. 따라서 기둥을 이루는 목재는 예전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 는 것이 아니어서 불상이며 그래도 예전의 상태로 부터 연유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므로 부단이다. 이러한 논의는 싹과 씨에 대해서도 역시 성 립된다. 싹은 씨에 연유하여 소생하지만 싹을 씨라고 할 수는 없다. 싹이 씨 에 연하여 소생하였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으므로 부단이요, 싹이 소생하여 도 씨는 이미 멸하였으므로 불상이다.

싹과 씨, 목재와 집, 수소원자와 수소분자 간의 모든 관계는 따라서 상도 아 니요 멸도 아니다. 이렇듯 인과란 자성이 없이 일어나는 것이어서 연기적이 며 상대적이니, 단상(斷常)이라는 양극단의 견해에 떨어지지말고 연기무자성 공의 입장에서 인과관계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 불상부단이라 하겠다. 이를 용수보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사물이 연을 따라 생한다면 이는 원 인과 같은 것도 아니요 또한 다른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단멸하는 것도 아 니요 상주하는 것도 아니다. (중론 관법품 제18장 제10계)” “굳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상에 집착하는 것이며 굳이 없다고 한다면 단멸에 집착하는 것 이다. 그러므로 현자는 마땅히 있다거나 없다는 것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중 론 관유무품 제15장 제10계)” 따라서 상주라는 절대적 동일성이나 단멸이라 는 절대적 차별성으로 우주를 온전히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오직 연 기에 의해 모든 변화와 인과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 희론(戱論)을 적멸(寂滅) 하여 열반에 이르게 하는 중도사상의 핵심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용수보살 은 다시 이렇게 말한다. “버릴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으며 단멸하지도 않 고 상주하지도 않으며 불멸이고 불생인 것을 열반이라 한다.(중론 관법품 제 18장 제7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