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란 무엇인가 (필독)|…… 혜천스님설교

2018. 6. 9. 19:4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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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란 무엇인가 

 

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 불기2554년 8월 8일

 

 

 

오늘이 말복인데 아침부터 덥습니다. 오늘이 일요법회를 시작한지 3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오늘의 강론 주제는 '불교란 무엇인가'입니다. 3년간 일요법회를 했는데, 새삼스럽게 불교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강론하겠습니다.

 

<완당평전>이라는 유홍준 선생의 책을 보면 글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세상에는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 불교 또한 그렇죠. 어느 누구도 불교를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불교를 제대로 정의하지 못하죠. 보통 불교를 무신론이라고 이해하죠. 그런데 그 말이 맞습니까? 불교를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스님들도 그런 얘기를 합니다. 명백히 알아야 할 것은 종교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어떠한 종교의 틀에도 속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것부터 알아야 합니다. 

 

종교의 기원은 3만년 전 구석기 시대로 봅니다. 프랑스에서 발견된 라스코 동굴 벽화 속에는 누군가가 어떤 제의의식을 행하였다는 상징적인 그림이 있습니다. 라스코 벽화는 가장 오래된 벽화로 종교학자들은 이 벽화의 그림을 근거로 종교의 역사를 3만년 전으로 추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라는 틀이 갖춰진 종교의 역사는 사실상 만년 전부터 입니다. 야생의 시대인 신석기 시대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종교의 기원인 신화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런 신화는 각 지역 여러 민족 모두에게 있습니다. 야생의 시대란 프랑스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가 붙인 이름입니다. 실제적으로 종교의 기원은 만년 전이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고등 종교의 형성은 지금부터 끽해야 5,000년 정도 전부터입니다. 유대교의 역사가 4,000년, 우리가 알고 있는 고등 종교, 종교다운 종교의 시작이  3,000년정도입니다. 고대 폐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를 창시한 조로아스터를 2,600년 전의 사람으로 추정합니다. 일설에는 3,200년 전의 사람으로 늘려 잡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종교의 틀이 형성된 것은 2,600년전의 일입니다. 

 

그 무렵 인도에서는 불교가 출발했습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조조가 있는 종교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종교는 있었습니다. 조로아스터교는 본래 있던 배화교에 조로아스터가 배합한 한 것입니다. 모든 종교가 신을 대상으로 합니다. 본래 신화시대의 신은 자연신입니다. 천둥, 번개, 폭풍우, 바람, 비 같은 것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초월적인 현상으로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인간이 이것을 신적인 것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 다음 여기에 인격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감정을 가진 신이 탄생합니다. 인도 최고의 신인 인드라신은 천둥과 번개의 신입니다. 절에 가면 신전단 중앙에 있는 신입니다. 엄격하게는 절에 두면 안되는 신입니다. 신전단 자체가 반불교적입니다. 모든 신은 인격화된 것입니다. 이집트의 아즈라마후다 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하나로 뭉쳐진 것이 오늘의 기독교입니다. 

 

모든 신은 절대성, 영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는 신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불교를 무신론이라고 하는 것은 미안하지만 무식해서 하는 얘기입니다. 불교 경전에는 무수한 신이 나옵니다. 불교에서는 신을 얘기(인정)하는데, 신의 절대성, 영원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좁혀서 말해 기독교와 불교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신은 영원하고 절대적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은 모든 것이 무상하다고 합니다. 무상하는 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허망하다, 허무하다의 뜻이 아닙니다. 인생이 덧없다는 식의 뜻이 아닙니다. 원어 아니짜는 영원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그에 비해 기독교의 신은 영원하고 절대적입니다. 이들에게 속俗은 무상합니다. 즉 인간세계를 무상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신의 세계는 영원합니다. 무상하다는 것이 불교만의 얘기는 아닙니다. 주역이나 기독교에서도 무상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영원하지 않은 가운데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불교하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자비, 깨달음, 열반? 그 외에도 여러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경전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나가 그렇게 이해합니다. 옳은 얘기이기도 합니다. 한 발 더 나아가 정확히 말한다면, 불교는 '불편한 진실'입니다. 불편한 진실이 무엇일까요? 종교에서는 항상 커튼, 장막을 쳐 놓죠. 안은 보여주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 야훼는 아브라함에게 자기의 이름만 가르쳐 줍니다. 유대교 모세가 기독교신 야훼를 만났을 때, 이름만 가르쳐 주고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커튼 뒤에 숨죠. 자기를 보여 주지 않습니다. 커튼 뒤의 세계는 영원의 세계입니다. 

 

일본 교토의 정토종 본부라는 건물의 법당은 넓죠. 아주 큰 건물로, 목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실내의 평수만 해도 한 500평은 될 것입니다. 그런데 건물 안에 들어가면, 중간이 막혀 있습니다. 1M정도의 홍살문이 가로막고 있죠. 그 안으로는 일반 신도들은 들어 갈 수 없습니다. 스님만이 들어갈 수 있도록 기둥으로 막혀 있습니다. 항상 뭔가를 경계지어 놓죠. 특히 기독교에서 신의 영원성을 주장합니다. 그런데 신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대답해 주지 않습니다. 커튼 뒤의 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야훼는 인간과 소통하지 않습니다. 그 중간에 천사를 두죠. 이 천사가 커튼의 앞 뒤를 왔다 갔가 하면서 인간과 소통합니다. 모습의 보여주지 않으니, 기독교의 신은 알 수 가 없습니다. 왜냐햐면, 야훼가 이름만 가르쳐 주어 본 사람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신을 만났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과연 어떤 신을 만난 것인지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커튼 뒤에서는 절대적이고 영원한 존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무릎 꿇고 복종하는 일 밖에는 없습니다. 

 

조선의 사극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어떤 신하도 대전 내관인 환관을 거치지 않고는 임금을 볼 수 없습니다. 무슨 사안이 있을 때 문을 열고 임금에게 직접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내관을 통해 임금의 지시가 떨어지고, 내관을 통해서만 임금을 만날 수 있습니다. 조선 조 어떤 당파도 대전 내관을 자기 당파로 끌어들이지 않고서는 권력을 잡을 수가 없었죠. 내시가 권력을 농단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요즘은 청와대 대변인이 대통령의 말을 맛사지 한다고 하던데, 그것과 같습니다. 마치 천사라고 하는 것이 그와 같죠. 단지 인간은 장막 뒤, 커튼 뒤 신이 무엇을 하는지는 천사를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부처님은 장막을 걷어내고, 장막의 뒤를 보여주죠. 와서 보라고 끌고 들어가죠. 네 눈으로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무슨 절대성, 영원성이 있는가?'라고 얘기하죠. 나는 이것이 불편한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커튼 뒤가 궁금합니다. 그러나 궁금하기는 해도 커튼을 열어 제끼고 보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심지어는 아무 것도 없는 걸 보고서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부흥회의 간증을 겪은 어떤 사람의 고백입니다. 어떤 기독교 부흥회를 갔더니 목사가 간증을 행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이 야훼의 기적을 행해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눈먼 장님은 눈을 뜨고, 앉은뱅이는 일어납니다. 자기 감동이 일어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는 성도 하나를 불러서 일어나라 하니 일어나고, 쓰러져라 하니 쓰러지더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 차례로 자기가 불려갔습니다. 앞에서의 성도와 똑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 사람은 집에 돌아와서 생각했습니까? 그것이 성령일까? 그리고는 생각했습니다. 만약 그 자리에서 쓰러져라라고 하는 목사의 외침에도 쓰러지지 않았더라면, "사탄에게 사로잡혀 있다"는 말을 들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는 저주의 말이 두려워 쓰러졌던 것입니다. 그것이 어찌 자기 한 사람만의 일이겠는가? 미국의 기독교는 그 동안 제 3세계 선교에서 성령이 친히 임한다라고 했지만, 이같은 행위들이 사기임을 인정했습니다. 만약 그 상황에서 쓰러지지 않으면 신앙심이 없는 것입니다. 사탄의 속삭임에 사로잡혀 지금 임하는 성령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만이 그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닙니다. 모두들 그래서 쓰러진 것입니다. 

 

같지만 서로 다른 두 분의 군대 이야기입니다. 어떤 분이 원주군단에 근무했는데 좀 고지식했던 모양입니다. 자기보다 작은 고참이 이유없이 한 방 날리는데, 맞을만해 버텼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고참이 발로 차고 깨물고 난리더라는 것입니다. 도 다른 한 분은 키가 1미터 80 정도 되는 건장한 체격에 70년대에 군대를 다녀왔는데, 못하는 운동이 없어 태권도, 18기 등 모두 합하면 12단 정도 되는 무술 내공이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특기란에 그걸 모두 적었더니 수경사에 배치되었습니다. 첫날 밤 고참이 너 바깥에 있을 때 운동 좀 했다는데, 맞는 것도 잘하냐며 패서, 이유없이 맞았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날도 다른 고참이 불러 맷집 좋게 생겼다면 또 두둘겨 팹니다.그런데 이 사람은 하룻밤 사이에 적응력이 좋았던지 주먹이 닿는 순간 멋지게 뒤로 날라 나가떨어졌습니다. 때린 고참 본인도 의아할 정도였습니다. "짜식! 운동 좀 한다더니 별 것 아니네. 야 임마, 니가 12단이면 난 15단이야!" 그 다음 부터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알아서 날라가 이쁨을 받았다는 얘기입니다. 쓰러져야 할 때는 쓰러져 줘야 합니다. 난 그 기독교인이 쓴 글을 읽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근본적으로 신앙이라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쓰러져라라고 하면 멋지게 쓰러졌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탄의 속삭임에 빠지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내 눈으로 보았다고 하면, 그것을 진실이라고 받아 들일까요? 한 때 우리나라 언론에도 등장한 일본의 오옴 진리교 사건이 있습니다. 살인가스로 테러한 혐의로 교주 아사하라가 체포됩니다. 그런데 그 교의 골수분자들은 아직도 교주가 일본 정부의 음모에 빠져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믿고 있다고 합니다. 아사하라가 결백하다고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실이 밝혀졌는데도, 진실을 믿지 않고 불편해 하는 것입니다. 신의 영원성, 절대성, 그리고 우리는 그 앞에 복종할뿐입니다. 우리는 기껏해야 100년 정도 삽니다. 100년 넘게 사는 사람이 많은 걸로 조사된 장수국가 일본이 요즘 발칵 뒤집어 졌습니다. 죽은 뒤에도 연금을 타기 위해 사망 신고를 하지 않는 등 고령자 숫자가 부풀려졌다는 것입니다. 전수조사를 해보면 일본이 장수국가라는 것은 진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영원한 존재, 즉 영원성과 절대성이 있는 것에 대해, 나도 영원성을 얻고 싶은 것입니다. 보상받고 싶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복종하고 굴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불교는 처음부터 오픈되어 있습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감추죠. 커튼 뒤는 보여 주지 않습니다. 커튼 뒤는 성스러운 곳에 속하여서, 속된 인간은 볼 수 없습니다. 불교는 아예 커튼을 달지 않죠. 거기에는 절대성, 영원성이란 없습니다. 영원하지 않은 가운데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변화하는 가운데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신이라는 존재도 영원성이 없습니다. 불경에 보면, 신도 유한한 존재입니다. 신도 언젠가 깨진다는 것은 영원성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는 맹물과 같죠. 맹물은 맹숭맹숭 하잖아요. 약수터에 약수를 한 말 먹는다고 갈지자 걸음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맹숭맹숭하기 때문이죠. 그렇디고 약수에 절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강원도 영원레 주천이라고 하는 마을이 있습니다. 요새 소고기로 유명한 마을입니다. 여름이라 더워서 그런지 소도 가죽을 벗고 몰려들고, 겨울이 되면 인간이 추울까봐 가죽을 벗어주고 몰려듭니다. 그러다 보니 벗은 소와 놀려는 인간 또한 많이 몰려드는 곳입니다. 주천이라는 고장의 전설이 있습니다. 주천酒泉이라는우물이 말그대로 술이 샘 솟는 우물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술 사랑하는 주당들이 모두 살고 싶은 동네입니다. 그런데 이런 전설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것처럼 어떤 인간이 혼자 먹으려 해서 그 우물이 말라 버리는 것입니다. 술은 한 잔만 먹어도 자극적이고 격렬합니다. 술의 종류도 여러가지여서 맥주 소주등 다양하며, 그 도수 또한 그렇습니다. 소주는 40-50도 하는데, 증류를 거듭하게 되면 도수가 높아져 독해집니다.

 

불교는 물과 같죠. 마시면 시원한데 맹숭맹숭합니다. 술은 먹으면 자극적이죠. 신을 믿는 종교는 마치 술을 먹이는 것과 같습니다. 강렬합니다. 강렬한 것을 먹으면 자기 통제가 안 됩니다. 내 자신이 내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마약, 환각물질, 술이 그러한 것들입니다. 나를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은 내 자신이 누군가의 지배하에 있는 것입니다. 물은 맹숭맹숭합니다. 내가 통제하고 지배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 전에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의 의지가 있습니다. 누군가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자유의지와 동시에 절대적인 힘에 복종하려는 복종의지가 그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자유롭고 싶은 자유의지와 동시에 절대적인 것에 복종하는 복종의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권력자에게 복종함으로서 편안해지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유를 가지고도, 자유를 두려워하고, 진실을 알고도 진실을 두려워 합니다. 때에 따라서는 내가 몰랐어야 하는 것이 인생을 살다 보면 많지 않습니까? 알아서 불편한 것 말입니다. 우리는 그럴 때, 때에 따라 그걸 회피하고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모세는 신 야훼를 만났을 때, 두려워서 바라보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진실을 바라보기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우리를 끌고 가서 그걸 보게 하죠. 어쩌면 부처님이 가장 무서운 분입니다. 진실을 보여주는 그 사람이 가장 두려운지도 모릅니다. 부처님은 커튼 뒤를 보여 줍니다. 아예 커튼을 치지도 않죠. 이것은 세상의 상식을 뒤엎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세상의 사고와 인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는 신이 영원하다고 말합니다. 신의 절대성을 주장합니다. 인간은 거기에 복종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저 남의 짐 머슴살이와 같습니다. 머슴은 편합니다. 주인 집 농사가 풍년인지 풍년이 아닌지에 상관할 바 없습니다. 머슴의 입장에서는 달라질 것이 없으니까요. 조선의 선비는 노동하지 않습니다. 꽃밭은 매도 곡식밭은 매지 않습니다. 전남 함평의 한 유명한 선비는 보리타작을 할 때 손도 까딱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바쁜데 점심밥은 꼬박 뜨신 밥을 차려야 합니다. 하루는 아내가 보리를 널고 밭일을 나갔는데 갑자기 소낙비가 왓습니다. 그런데도 보리를 걷지 않아 보리가 빗물에 몽땅 떠내려가 버렸습니다. '선비가 어찌 소낙비가 온다고 보리를 걷는가?" 했다나요. 부인을 둔게 아니라 종을 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부인은 부엌에서 밥을 먹고, 자신은 상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꽃밭은 본인이 손수 맨다는 것 아닙니까. 강현의 <양화소락>(?)은 선비가 꽃을 가꾸는 얘기입니다. 인간의 사고는 이렇게 재미있습니다. 조선의 선비가 가난한 이유는 종들이 농사를 짓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짓는 농사는 자영농 소출의 절반밖에 되지 않습니다. 종이 무슨 이유로 관계도 없는 논밭에 열심히 하겠습니까. 그저 지시만 받고 움직일 뿐입니다.

 

자유는 내가 다 결정하고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다 감당하고 결정하여 잘못되었을 때는 쪽박을 차게 됩니다. 인간은 사실 자유의지보다 복종의지가 강합니다. 절대왕권이나 정부에 맞서 싸운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언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절대적으로 보이지 않는 절대성, 신에게는 복종합니다. 신을 만난다는 접신도 모두 자신의 인식일 뿐입니다.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것은 내부의 청각일 뿐이며, 신을 보았다는 것도 내부의 시각일 뿐입니다. 어느 절에서 관세음보살 기도를 하면 뭘 준다는 것도 내부의 시각입니다.

 

고대의 신은 자연의 현상입니다. 자연은 그것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바람, 천둥, 번개, 비의 여러 현상들이 그렇습니다. 이런 것들은 인간의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즉 우리가 통제할 수 없습니다. <삼국지>에 보면 조조가 유비에게 묻습니다. 천하의 영웅은 누구인가? 유비는 여포, 원소, 유포, 유장 등을 꼽죠. 조조가 말합니다. "아니다. 천항의 영웅은 바로 너!" 유비는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합니다. 아이고! 살아남지 못하겠구나라고 생각하죠. 유비는 좋은 말로 하면 덕이 많고, 나쁜 말로 하면 잉기응변이 능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천둥과 번개가 치자 유비가 술상 밑으로 숨죠. '나는 천둥이 너무 무서워!'하면서 말이죠. 이 때 조조가 멸시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사람을 잘못 보았다는 둣이 말이죠. 삼국지에 보면, 그 다음 날 유비는 처 자식을 버리고 자기만 살겠다고 말을 타고 도망치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3만년 전, 천지 하늘에 씨커먼 먹구름이 몰려들고 소낙비에 천둥 번개가 칠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머리를 박고 숨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요새도 천둥 번개를 무서워 합니다. '마른 하늘에 벼락 맞을 X'는 아주 무서운 욕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천둥 번개는 아주 무서운 신입니다. 어떤 부족에게는 악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악을 달래려 뇌물을 바치기도 하죠. 인간 세상과 다를 바 없습니다. 뇌물을 바쳐 이쁨을 받으려는 것입니다. 자연현상을 인간의 사고로 그려냅니다. 언제나 찾아온다는 것도 그 곳에 절대성과 영원성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고대의 종교의식은 환각약물을 먹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마초 정도가 아니라, 인도에서는 광대버섯, 멕시코 같은 곳에서는 선인장의 환각물질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면 세상이 황홀해 보입니다. 그 때 종교의식을 치르는거죠. 그러면 신도 만나고, 신은 좋은 소리도 들려 주겠죠. 그래서 고대의 명상이 사실 그렇습니다. 요기들은 거의 숨을 안쉬고 가사 상태에 이릅니다. 그러면 뭔가 보이죠. 우리가 이이들 적 놀이로 그저 안죽을 만큼 목조르기도 합니다. 그 순간 희열이 강합니다. 문제는 너무 강하면 돌아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술 한 잔이 두 잔, 세 잔 되어 결국 집에 못들어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종교의 출발은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무언가를 먹었는데, 뭔가가 보이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커튼을 열어젖히는 것은 그 곳에는 영원성과 절대성이 없다는 것을 부처님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불교는 신을 믿느냐 안믿느냐를 초월해 있습니다. 즉 유신론이냐 무신론이냐를 넘어서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그 영원성을 제거하면 인간의 카테고리가 열려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육두윤회라는 톱니바퀴가 있을 뿐입니다. 어떤 것도 영원성을 지니지 못합니다. 맞물려 돌아갈 뿐, 영원성, 절대성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었을 때, "이것은 상식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바라문으로부터 세상을 혼란시키고 어지럽힌다고 비난받는 것입니다. 본래 불교는 인도 사회에서 반힌두교적으로 시작했습니다. 기존의 모든 틀을 해체한 것입니다. 해체한다는 것은 장막을 걷고 커튼을 없애는 것입니다. 불편한 진실입니다.커튼 너머에는 어떤 영원성과 절대성도 없다는 것입니다. 절대성, 영원성은 네 사고 속에 있다는 것이죠. 인간은 절대로 버릴 수 없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생각입니다. 머리 속에 든 것을 누가 와서 없앨 수는 없습니다. 자기자신도 없앨 수 없습니다. 인간은 생각을 없애지 못합니다. 인간의 생각은 변화시킬 수는 있지만, 없앨 수는 없습니다. 네 사고가 영원성과 절대성을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돌아오면, 불교를 무신론/ 유신론 그런 범주로 규정지으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불교는 신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신의 영원성, 절대성을 거세한 것입니다. 신의 영원성, 절대성을 부정하죠. 기독교는 신의 영원성과 절대성을 주장합니다. 그리고는 장막 뒤에 숨기고는 보여주지 않죠. 마치 양반과 상민의 중간에 마름이 있듯이 신과 인간 중간에 매개를 통하게 합니다. 사도 밑의 6방 관속은 월급이 없습니다. 그러니 백성들을 등쳐 먹고 삽니다. 양반들이 좋은 제도를 고안한 것입니다. 직접 충돌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마름이나 육방 관속을 두고, 좋은 일이면 자기것으로, 나쁜 일이면 여기로 미뤄버립니다. 불교는 부처가 중생이고, 중생이 부처입니다. 중생과 불교가 같죠. 거기에는 어떤 장막이나 베일도 없습니다. 바로 보고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불교의 성격을 이해해야, 그리고 종교의 성격을 이해해야 합니다. 종교는 야생의 시대에 출발해, 지식의 시대에 꽃 피우고, 지금은 지성의 시대로 들어가는 단계입니다. 토마스 아퀴니스처럼,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주장은 더 이상 존립하기 어렵습니다. 불교가 지향하는 것은 지혜의 시대입니다. 지혜의 시대에 이르면, 비로소 인간은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야생의 시대는 길고, 지식의 시대는 1만년, 지성의 시대는 더 짧습니다. 지혜의 시대에는 종교가 필요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내가 보는 견해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불교란 결론적으로 불편한 진실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진실을 원하지만, 진실을 알았을 때는 불편합니다. 환각물질로 희열을 보려면 그 중간 과정이 고통스럽습니다. 그것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