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6. 24. 15:39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처럼,
수용과 용서의 호흡관도
들숨과 날숨이라는 '지금 여기'의 호흡에 맞춰
호흡이 들어 올 때는 '수용합니다'
라고 말하며,
호흡을 내쉴 때는 '용서합니다'
라고 말함으로써
호흡에 맞춰 수용과 용서라는
생활수행 최상의 진언을 외는 수행법이다.
수용과 용서를
생활수행 최상의 진언이라고 하였는데,
말 그대로 수용과 용서야말로
우리가 생활 속에서 수행하는데 있어,
최상의 '진리의 말' 진언이기 때문이다.
수용은
생활 속에 닥쳐오는 일체의 좋고 나쁜 경계를
분별하지 않고, 판단이나 해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별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모든 명상수행과 불교의 핵심 실천법이다.
왜 받아들여야 할까?
그것은 내가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지가 지은 업에 대해 내가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업의 가르침에 의하면,
한생각 일으킨 것 또한 의업으로써
현실세계에 일정부분 영향을 미치며
어떤 방법으로든 결과를 가져온다.
쉽게 표현하면,
그동안 살아오면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 모든 것들이
심지어 스쳐지나가던 한 생각 조차
고스란히 과보를 불러오는 것이다.
내가 뿌리지 않은 것은 거둘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생에서 나쁜 과보를 받으며,
역경과 고통으로 괴로워하고 있다면
나쁜 악업을 많이 지어서 그렇고,
그렇기에 나는 나쁜 사람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누구나 수미산을 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업장을 지어왔다.
우리의 지난 생만 하더라도
겐지즈 강의 모레알의 수 만큼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그 생애를 통해 지어 온 업장은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그 업 자체는
크게 보면 하나의 에너지에 불과하다.
선업이나 악업이라고 편의상 나누어 놓았지만,
근원에서 본다면 선악이 아니라,
다만 에너지의 불균형이 있고,
그 불균형을 바로잡아 균형을 맞추는
우주적인 대평등의 작용이 있을 뿐이다.
똑같은 행위가
어떤 시대, 어떤 나라, 어떤 사람에게는
악업이 되지만,
다른 곳에서는 선업이 되기도 하지 않은가.
선악은 없다.
그렇기에 무수한 악업도 선업도 지었지만,
단순하게 우리에게는 무수한 업 그 자체가 쌓여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무리 업이 많더라도,
그것을 악업이니, 선업이니 하며 분별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악업이라는 분별에 빠져 두려워하고
죄의식에 시달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사실은 바로 이 무수한 중립적인 업에 대해
우리의 분별심이 선업이니 악업이니 판단해 놓고,
자신의 삶에 대해 좋으니 나쁘니 해석하면서,
자신은 잘 될꺼야 혹은 망할꺼야 하면서,
나는 나쁜 사람이야 좋은 사람이야 하면서
스스로의 의식으로
선업과 악업을 불러들이는 것일 뿐이다.
부처님께서도 소금물의 비유를 들어,
악업을 지었을지라도
그 이후에 참회하고 용서하고 비워
완전히 죄의식에서 놓여나고,
새롭게 복과 지혜를 쌓아간다면
악업의 과보를 오히려 달게 받을 수도 있다고 하셨다.
즉,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업보설은
선업은 선업으로,
악업은 악업으로만 받아야 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결정론적인 것이 아니란 소리다.
과거에 지은 업장 보다도,
현재의 의식이 더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천수경에서도
죄무자성종심기 심약멸시죄역망
죄망심멸양구공 시즉명위진참회 라고 했다.
죄(악업)라는 것은 본래 자성이 없어
마음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의식이라는 그 마음이 멸하면
죄 또한 소멸되어 없어지는 것이다.
죄라는 것도 죄의식이라는 것도
모두가 공하다는 것을 깨달으면,
이것이 바로 진정한 참회라고 하였다.
이 가르침이야말로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 중에 핵심이다.
이 말씀에서 부처님께서는
죄의식에서 놓여나고
죄를 지었다는 두려움에서 놓여나라고 설하신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시무외인을 수인으로 하고 계시고,
시무외자라고 하여 두려움을 없애주는 분이라고 하지 않는가.
우리는 그 무엇에 대해서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죄의식을 느껴야 할 필요가 없다.
다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업에 대한 과보는 현실에서 재생되어져 나온다.
그렇기에 우리 삶은 때때로 행복하지만,
또 때때로 역경도 불행도 괴로움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오는 것은
모두가 우리를 돕기 위한 우주법계의 작용이다.
무한한 사랑과 자비의 일환이다.
왜 그럴까?
우주법계의 업의 법칙, 균형의 법칙은
언제나 우리가 업을 지어 균형을 깨뜨렸을 때,
그 불균형을 균형있게 맞추는 쪽으로 삶을 설계한다.
아니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자연법칙인 것이다.
그러니 악업을 지었다면
균형을 맞추기 위해 괴로운 상황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균형의 법칙, 업의 법칙은
사실 그 이면에 균형잡기 위한 목적 말고
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일깨우기 위한 목적이다.
균형을 깨뜨렸다면
균형을 바로잡는 방법을 일깨우는 것이다.
악업을 지은 사람에게
악의 과보를 받게 함으로써
더이상 악업을 짓지 않을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사 한 사람이라면,
고스란히 타인에게 폭력을 당하게 함으로써
자신이 행한 폭력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몸소 깨닫게 해 주는 것이다.
이런 방법이 바로
우주법계의 균형의 작용이다.
여기에는 그 어떤 의지도, 심판도 없다.
그저 자연스러운 자연법칙이 있을 뿐이다.
괴로운 역경을 당했을 때
신께서 우리를 심판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우리의 생각이고 판단일 뿐,
신은 우리를 심판하지 않는다.
심판은 자기 자신이 하는 것일 뿐이다.
신은, 우주법계는 다만
자연스럽게 우주 전체에게
골고루 평등하고도 균형잡힌
자연스러운 이치대로 흐르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야말로
부처님의 무한한 자비이며,
하느님의 대자대비하신 사랑이다.
이처럼 자비와 사랑의 본질은
자연스러움이며, 균형과 평등에 있다.
부처님과 하느님은 누군가가 악행을 했다고 해서
화가 나서 그를 당장에
지옥의 불구덩이에 떨어뜨리는 일을 하지 않는다.
아무리 최악의 죄를 지었더라도
어머님은 자식을 무한정 사랑하는 것 처럼,
부처님과 하느님의 사랑은
그보다 더한 무위의 무조건적인 자비인 것이다.
거기에 어떤 화도, 감정도, 미움도 없다.
그렇기에 부처님은 하느님은 결정코
우리를 미워하지 않는다.
증오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그저 단순하게 지켜볼 뿐이다.
지켜보는데는 좋거나 나쁜, 선악의 분별이 없다.
무한한 자비와 용서가 있을 뿐이다.
그러니 어떠한가?
우리 앞에 등장한 삶의 그 어떤 경계라도
받아들이고 수용함으로써
우리는 그 상황을 통해
균형잡힌 질서를 배우고,
업장을 소멸하며,
지혜를 배워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이 우주법계가, 삶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인생의 목적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지혜로운 행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역경이든 순경이든,
불행이든 행복이든,
그 어떤 경계라도 다 받아들이고 수용해
그것을 통해 깨어나고 진보하는데 있다.
수용할 때,
받아들일 때,
삶의 영적인 성숙은 빨라지며,
업장소멸은 급격하게 일어나고,
배워야 할 진리를 빠르게 흡수하게 된다.
그러나 배격하고 부정하며 거부할 때
영적인 퇴보가 일어나고,
업장은 소멸되기는 커녕 더 늘어나게 되며,
삶에서 배워야 할 것을 전혀 배우지 못하게 된다.
배워야 할 것을 배우지 못하면
우주법계는 그것을 다시 배우게 하기 위해
또 다른 비슷한 역경과 불행을 준비할 수밖에 없다.
업장을 소멸시켜주고자 하는 것이
우주법계의 뜻이기에,
균형을 맞춰주는 것이 법계의 뜻이기에
또 다른 불행과 좌절을 안겨주는 것이다.
언제까지?
그것을 배우고 깨달을 때까지 말이다.
그것을 결국 받아들이고 수용할 때까지.
그러나 역경과 불행이 왔을지라도
수용하고 받아들이면
업장은 빠르게 소멸되었고,
배워야 할 진리를 이미 깨달았기 때문에
더 배울 것도 없고,
받아야 할 업장도 빨리 소멸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받아들여 수용할 때
모든 불행은 빨리 소멸된다.
우리에게 일깨움과 지혜만을 남긴 채.
불행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것을 받아들여,
그 속에서 일깨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빨리 깨닫고 넘어가는 것이다.
수용과 받아들임은
마음이 활짝 열린 상태를 말한다.
마음이 활짝 열려 있기 때문에
열린 문을 통해 무엇이든 빨리 들어온다.
막아 서지 않으므로 진도가 빠른 것이다.
깨달음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지만,
그 깨달음을 향해 우리가 마음을 닫아 걸고 있기 때문에
깨달음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는 것일 뿐이다.
마음을 연다는 것은
그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좋거나 나쁜 어떤 상황, 사건, 사람에 대해서도
아무런 분별 없이, 해석이나 차별없이
고스란히 통째로 받아들여 수용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완전히 열린 상태,
완전한 수용의 상태일 때
이미 있던 깨달음이 비로소
들어올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수용'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수행이며
마음공부의 자세다.
물론 받아들여 수용하고 싶지만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수용과 받아들임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 사람에게 마음을 열고 그 사람을 받아들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용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용서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상담했던 20대의 한 젊은 친구는
용서해야 한다는 말에 몸을 부들부들 떨며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용서란 말만 들어도 온몸이 떨립니다.
죽여 버리고 싶습니다'
라고 말했다.
도저히 '그 놈' 만은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다 용서해도 그 사람은 안 되는 것이다.
그 사람에게는 도저히 마음이 안 열리는 것이다.
받아들여 수용하려면
먼저 용서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용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용서보다
더 넓고 깊은 의미를 가진다.
용서는 단순히 상대방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만이 아니라,
죄가 본래 없음을,
죄무자성종심기 죄망심멸양구공의 의미를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용서를 할 대상은 누구일까?
먼저 상대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
우리가 가장 용서 못하는 대상이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을 용서한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완전히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을 용서한다는 것은
곧 두려움과 죄의식에서 놓여나는 것을 의미한다.
앞에서 두려움과 죄의식이란 환상에 불과하다고 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죄의식과 무의식적인 두려움에 쌓여 있다.
자신이 지은 과거의 잘못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며,
과거의 업장으로 미래가 잘못될까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죄의식이 죄의 과보를 끌어들이며,
미래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실제 미래의 삶을 두려움으로 바꾸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용서해 주는 것이야말로,
사실은 용서 수행의 핵심이다.
외부세계란 사실 내면의 투영이기 때문이다.
외부에 누군가가 미워 죽겠고,
증오와 화의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자기 안에 용서되지 않은
무언가의 불덩이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내면을 완전히 용서한다면
외부 세계 또한 용서된
청정하고 깨끗한 경계들이 드러날 것이다.
어디를 가든 좋은 일만 일어날 것이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용서해 줄 때
내면이 맑게 비워지고,
텅 빈 공(空)으로 돌아가며,
무엇도 남기지 않은 청정함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용서는
단순한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말끔히 닦아서 청정하게 하며,
죄의식을 남김 없이 소멸하고,
텅 빈 충만의 공과 하나되는
최상의 수행이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용서해 주라.
두려움과 죄의식에서 완전히 벗어나라.
그리고 나야 비로소 타인을 용서하고
타인을 받아들이며
그 모든 대상을 향해 마음을 열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용서한 뒤에는
외부의 모든 이들을 용서해 줄 수 있다.
미워하고 증오하며 원망하는 모든 이들을
완전히 용서해 주는 것이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할 때,
사실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이다.
미워하고 증오하는 그 마음은
바로 나의 마음이기 때문에,
나의 마음이 먼저 오염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홧병으로 시달리던 사람도
용서함과 동시에 병이 낫기도 하고,
그 때부터 좋은 일이 생기기도 하는 것이다.
외부에 대한 용서는 사람에게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 환경, 단체나 직장, 가정,
심지어는 내가 몸담고 있는 건물이나 집,
자동차나 컴퓨터에게도 행해야 한다.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회사나 정부에 대해,
자신의 집에 대해
못마땅하거나, 싫거나, 미운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을 얼른 지켜보고
용서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 생명이 있는 대상이든 없는 대상이든
미워하고 싫어하는 마음은
곧 '내 마음'이기 때문에
그 싫은 마음이 또 다른 싫은 대상들을 불러들이고,
나와 나의 환경을 끊임없이 오염시키는 것이다.
그렇기에 내부와 외부 모두를 용서해야 한다.
그러나 내부와 외부는 결국 둘이 아니다.
자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기 마음 가운데
무언가 하나라도 걸림이 있고,
오염과 싫은 마음이 있고,
미움, 증오, 짜증, 화, 탐욕이 있다면
바로 그 마음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
글을 읽으며 느끼셨겠지만,
이처럼 용서는
완전한 마음 비움과 다르지 않다.
용서의 대상은
죄만이 아니라, 온갖 탐진치 삼독,
화, 탐욕, 미움, 원망, 슬픔 등
일체 모든 번뇌와 혼탁한 찌꺼기 마음을 말한다.
그리고 또한 원인은 무엇인지 모를지라도
어떤 좋지 않은 일이 생겼거나,
역경, 괴로움, 병, 힘든 일이 생겨났다면
바로 그 괴로운 상황에 대해 용서해 주어야 한다.
그것은 분명 내면에서 나온 것이기에,
그 책임도 내 안에 있으며,
그렇기에 내 안에 있는 무엇이 원인이 되어
이런 괴로운 일을 불러들였는가 하고 관조하며
무언지는 모르지만 바로 그 내면의 원인에 대해
완전한 용서를 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용서란
다른 말로 하면 참회이기도 하다.
내면의 어떤 업이 원인인지는 모르겠지만,
과거 전생부터 이어져 온
그 원인의 업력에 대해
지금 이 자리에서 마땅히 참회하고 용서함으로써
억겁의 업장일지라도 놓여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안팎을 완전히 용서해 주게 되면,
이제 우리 내면에는
더이상 찌꺼기가 남지 않는다.
이렇게 내면이 완전히 청정해지면
곧 외부 환경 또한 청정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기억하라.
수미산을 넘는 그 엄청난 업장이
어떻게 그리 빨리 끝장이 나기를 바라겠는가.
우리는 이번 생에
그 업장이 끝나기를 바랄 필요는 없다.
그저 삶이란 그 업장을 녹여내는 과정이며,
그 과정을 통해 삶의 성숙을 이루고,
본래의 고향, 본향을 향해 한발 한발 나아가는
귀의(歸依)야말로 우리 삶의 목적임을 알고
묵묵히 현재의 한 발자국을 내딛으면 될 뿐이다.
바로 이러한
모든 존재의 삶의 목적인
귀의를 향해 나아가는
이 숭고한 우리의 여정을
보다 앞당겨주고
괴로움을 빨리 끝내주며
일깨울 수 있도록 하는 모든 과정이
바로 우리의 수행이다.
그리고 그 수행의 정점에
수용과 용서가 있다.
수용과 용서를 통해
우리는 진보와 성숙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며,
업장을 소멸해 가고 깨어남을 앞당기는 것이고,
행복과 평화, 자유와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영적인 진보,
혹은 수행력이 어느 정도인가가 궁금하다면
다음의 물음에 답해 보라.
"나는 나에게 주어진 삶을 얼마나 받아들이는가?"
"나에게 용서할 것이 얼마나 더 남았는가?"
삶을 거부하지 않고
통째로 수용하여 받아들이는 삶을 산다면,
그래서 주어진 삶에 만족하고 행복해 한다면
당신의 삶은 머지않아 본향에 다다를 것이다.
지난 삶을 돌아보건데
모든 것을 용서하여
더이상 미워하고 원망하며 증오하는 이가 없다면,
그 무엇이든 부딪치는 순간 용서할 수 있다면,
당신의 삶은 머지않아 본향에 다다를 것이다.
이 두 가지 치유와 수행의 진언
그것이 바로 '수용'과 '용서'다.
또한 수용과 용서가 진행되는 곳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다.
그 어떤 과거의 업장이며, 죄업들도
지금 이 자리에서 받아들이고 용서할 수 있다.
그렇기에 수용과 용서라는 진언을
'지금 여기'에서 실천하는 것이 바로
'수용과 용서의 호흡관'이다.
들숨과 날숨의 호흡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 진행되는
살아있음의 증거이기 때문에,
바로 그 '지금 여기'라는 현존의 순간에
호흡을 관찰하며
그 현존 속에서 수용과 용서를
염불하듯 반복해서 외치는 것이다.
언어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특별한 에너지와 파장을 띈 현실 창조의 업력이다.
언어를 불교에서 구업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 말 자체가 업보를 창조하는
창조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말로써 수용합니다, 용서합니다를 반복한다면
그것은 진언이 되어
특별한 진동으로 우주법계에 전달되고,
우리의 내면과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수많은 업장에 전달되어
곧바로 치유가 일어날 것이다.
수용과 용서의 호흡관을
지금 여기에서부터 시작해 보라.
들숨에 호흡을 관찰하며 '수용합니다'
날숨에 호흡을 관찰하며 '용서합니다'
들숨에 '수용'
날숨에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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