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송구집강설(제8회) / 정원스님

2018. 8. 5. 10:3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시 [禪詩]

728x90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선림송구집강설(제8회) / 정원스님


 


치문경훈십(緇門警訓十) 찬불하며 전법하는 게(讚佛傳法偈)에 이르되 


가사정대경진겁(假使頂戴經塵劫) 

신위상좌편삼천(身爲床坐遍三千) 

약불전법도중생(若不傳法度衆生) 

필경무능보은자(畢竟無能報恩者)

 

가사 정수리에 이고서 진사겁을 지내고  

몸이 좌상이 되어 삼천계를 두루하더라도  

만약 전법하여 중생을 제도하지 않는다면  

필경 능히 보은하는 자가 아니니라.

 

진겁(塵劫; 塵沙劫)이란 티끌 모래와 같이 많은 겁이니 한량 없는 세월이다.

삼천(三千; 三千界)이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준말.

기신론소필삭기이(起信論疏筆削記二)에 이르기를 지도론(智度論)에 이르되 

가사 정수리에 이고서 진사겁(塵沙劫)을 지내고 몸이 좌상이 되어 삼천계를

두루하더라도 만약 전법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지 않는다면 필경 능히

보은하는 자가 아니니라.  

만약 바른 법장을 전지하여 교리를 선양하고 군생을 제도하며 수습하여

일념이 진여에 계합함이 있다면 이것이 곧 참으로 여래에 보은하는 자이다

(假使頂戴經塵劫 身床座遍三千 若不傳法利衆生 畢竟無能報恩者

若有傳持正法藏 宣揚敎理度群生 修習一念契眞如 此是眞報如來者).  


이 게는 현재의 지도론에는 있지 않지만 그러나 지도론일백(智度論一百)

기재(記載)에 의하자면 구마라집이 지도론을 번역하면서 10분의 1로

줄였다 했으니 지론(智論)의 게가 맞을 것이다.

지도론을 다 번역했다면 1천 권 가량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지론의 말씀과 같이 만약 바른 법장을 전지(傳持)하여 교리를 선양하고

군생을 제도하며 수습하여 일념이 진여에 계합함이 있다면 이것이 곧 참으로

여래에 보은하는 자다.  대장경의 여러 전적(典籍)을 살펴보매

손가락을 태우거나 팔을 자르거나 심장을 도려내거나 내지 몸을 불살라

불은(佛恩)에 보답한 자들을 이루 다 셀 수가 없다. 그러나 불은에 보답함에

있어 전법(傳法)과 오도(悟道)를 능가할 보은은 있지 않다.

67

 

옛 사람이 이르되 이 몸과 마음을 가져 진찰을 받들어야 이것이 곧

불은에 보답함이다(將此身心奉塵刹 是則名報佛恩) 했다.

보불은덕(報佛恩德)의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속고승전구(補續高僧傳九) 대통선본선사전(大通本禪師傳)에 이르되

스님은 이르는 곳에 불보살의 가거나 선 상을 보면 감히 앉지 않았고

재식(齋食)의 반찬에 어육(魚肉)으로 이름한 것은 먹지 않았다.

그 참다운 성심(誠心)으로 불사(佛事)를 공경하고 마음을 방지하여

허물을 여의는 종류가 이와 같았다.

정토성현록오(淨土聖賢錄五)에 이르되 덕청(德淸)은 자가 징인(澄印)이며

만년의 호가 감산노인(?山老人)이다. 피를 내어 화엄경을 썼는데

매번 한 번 붓을 내릴 적 마다 염불일성(念佛一聲)이었다.

오래되자 동정(動靜)이 일여(一如)했다.

사경지험기삼(四經持驗記三)에 이르되 송나라 석조남(釋祖南)은 남악(南嶽)

운봉(雲峰)에 거주하며 피를 내어 아미타경 500권과 금강경 100권 법화경

10부를 썼는데 27년만에 마쳤다. 다 피를 써서 썼으므로 말년에 피가 말라

뼈만 앙상했다.

염불 소리는 끊어지지 않았으며 어느 날 방장(方丈)에 있으면서 앉아 죽었다.

 미간(眉間)에서 사리가 쏟아져 나오는데 바로 취하면 바로 나왔다.

그러나 큰 노력을 들이지 않더라도 보은하고 불도를 성취한다.

법화경 방편품에 이르되 어떤 사람이 산란(散亂)한 마음으로 내지 한 송이의

꽃을 불화나 불상에 공양하더라도 점차 무수한 부처를 친견하느니라.  

혹은 어떤 사람이 예배하거나 혹은 다시 다만 합장하거나 내지 한 손을

들거나 혹은 다시 조금 머리를 숙이거나 이로써 불상에 공양한다면 

점차 무량한 부처를 친견하리라

(예배하거나 합장하거나 한 손을 들거나 머리를 숙이는 등의 행위로 불상에

공양한다면 점차 무량한 부처를 친견하리란 것이다).  


또 이르되 어떤 사람이 산란한 마음으로 탑묘 가운데 들어가 한 번 나무불을

일컬어도  다 이미 불도를 성취했느니라

(若人散亂心 入於塔廟中 一稱南無佛 皆已成佛道). 

한 번 부처님에게 나무한다고 일컬어도 다 이미 불도를 성취했다 하니

남쪽 남, 없을 무, 나무(南無)란 범어(梵語)이다. 남무라고 발음하지 않고

나무라고 발음한다. 법화경요해(法華經要解)에 이르되 나무란 귀의한다는

말이라 했고 법화의소(法華義疏)에 이르되 나무란 귀명(歸命)의 뜻이라 했다.

귀명이란 곧 목숨을 다해 귀의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불도를 성취하기가 쉽다.

그래서 원각경에 이르되 일체중생이 다 원각을 증득했다(一切衆生 皆證圓覺).

68

 

육조단경(六祖壇經)에 이르기를 위자사(韋刺史)가 가로되 화상이 설하시는

바는 가히 이 달마대사의 종지(宗旨)가 아니겠습니까. 스님이 가로되 그렇다.

()이 가로되 제자가 듣기로 달마가 처음에 양무제(梁武帝)를 교화하는데

무제가 물어 이르되 짐이 일생 동안 절을 짓고 승려를 득도(得度)시키고

보시하고 재를 베풀었는데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 달마가 말하되

실로 공덕이 없습니다 했으니 제자가 이 이치를 통달하지 못했습니다.

원컨대 화상이 설하십시요. 스님이 가로되 실로 공덕이 없으니 옛 성인의

말씀을 의심하지 말아라. 무제는 마음이 삿되어 정법을 알지 못했다.

절을 짓고 승려를 득도시키고 보시하고 재를 베푸는 것은 이름해 복을 구함이다.

복을 가지고 곧 공덕을 삼음은 옳지 못하다. 공덕은 법신 가운데 있고

복을 닦음에 있지 않다.

스님이 또 말하되 견성이 이 공(功)이며 평등이 이 덕()이며 생각 생각 막힘이

없어서 늘 본성의 진실한 묘용을 봄을 이름해 공덕이다.

내심으로 겸손해 낮춤이 이 공이며 밖으로 예를 행함이 이 덕이며 자성으로

만법을 건립함이 이 공이며 심체(心體)가 생각을 여읨이 이 덕이며

자성을 여의지 않음이 이 공이며 응용하매 물듦 없음이 이 덕이다. (중략) 

선지식이여, 공덕은 반드시 자성 내에서 보아야 하나니 이 보시와 공양으로

구하는 바가 아닌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복덕과 공덕은 다르나니 양무제가

진리를 알지 못했음이지 우리의 조사가 허물이 있음이 아니니라.

혜능대사는 복덕과 공덕을 이와 같이 확연히 구별해서 해석했다.


불조역대통재이십이(佛祖歷代通載二十二)에 이르되

황제(皇帝; 元世祖니 쿠빌라이)가 승려를 불러 대궐 내에서 독경하며 향을

사르는데 모시는 신하가 아뢰어 이르되 승려(僧侶) 중에 글자를 알지 못하는

자가 많이 있습니다. 황제가 이에 이르되 다만 경을 펴서 먼지를 닦게 만

하더라도 또한 공덕이 있다. 곧 글자를 모르더라도 경을 펴게 되면 자연히

먼지가 날아가고 저절로 먼지가 닦인다는 뜻이다.  

또 이르되 황제가 열 명의 고승을 내전에 불러들여 공양하는데 황제가

단정히 거처하며 움직이지 않았고 모든 대덕도 또한 묵연했다.

황제가 이에 이르되 이것이 곧 진실한 공덕이다.

69

 

또 이르기를 아합마승상(阿合麻丞相)이 아뢰되

천하의 승니(僧尼. 비구 비구니)가 혼람(混濫)이 파다(頗多)하니 불법에

정통(精通)한 이는 윤허(允許)하여 중이 되게 함이 옳겠지만

무지무문(無知無聞)한 이는 마땅히 속인(俗人)이 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담파사부(膽巴師父)가 아뢰어 이르되 많은 사람이 장수(長壽)를 비는 게

좋습니까, 많은 사람이 노여움을 내는 게 좋습니까. 황제가 이르되

많은 사람이 장수를 비는 게 좋습니다. 그 일을 곧 그치게 했다.

곧 사태(沙汰)를 면한 것이다. 사태란 사금(沙金)을 일어서 금을 남기고 모래를

버리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불교 탄압(彈壓)은 대개 정화(淨化)의 기치(旗幟)

아래 자행(恣行)되었는데 원세조가 이를 간파한 듯하다.

대승대집지장십륜경삼(大乘大集地藏十輪經三)에 이르되

비록 이 무식한 축생(傍生)의 죽은 시체라도 소는 우황이 있고 사향노루는

사향이 있어 능히 무량무변한 유정에게 큰 요익(饒益)을 지음이 된다.

파계 필추(苾芻; 비구)도 또한 다시 이와 같아서 비록 나의 법 비나야(毗奈耶; 律)

중에서 이름해 죽은 시체가 되지만 출가한 계덕(戒德)의 여세가 있어 능히

무량무변한 유정(有情)에게 큰 요익을 지음이 된다. 또 이르되

첨박가화(瞻博迦華; 瞻蔔華. 향나무의 이름)가 비록 시들더라도 오히려 저 모든

여타의 꽃보다 수승하나니 파계하고 악행하는 모든 필추가 오히려 일체의

외도 무리보다 수승하니라

(瞻博迦華雖萎悴 而尙勝彼諸餘花  破戒惡行諸苾? 猶勝一切外道衆).

지장십륜경은 당 현장이 번역했는데 10권이다.

경의 내용이 대부분 이와 같은 문장으로 서술되어 있다.

 

자수혜심선사어록이(慈受懷深禪師語錄二)  스님이

어린 행자(童行)를 훈계(訓戒)한 송에 이르되


막설타인단여장(莫說他人短與長)

설래설거자초앙(說來說去自招殃) 

약능폐구심장설(若能閉口深藏舌)

편시수신제일방(便是修身第一方)


타인의 단점과 장점을 말하지 말지니  

설해 오고 설해 가면서 스스로 재앙을 초래하느니라  

만약 능히 입을 다물고 혀를 깊이 숨긴다면  

곧 이 수신의 제일방이니라.


십송률사(十誦律四)에 이르되 무릇 사람이 세간에 처하면 도끼가 입속에서

생기나니 이로써 스스로 몸을 벰은 이는 악언을 짓기 때문이다

(夫人處世間 斧在口中生 以是自斬身 斯由作惡言).  

악한 말을 하면 입속에 도끼가 생겨서 스스로 자신의 몸을 벤다는 뜻이다. 

70

 

고인이 이르되 입은 곧 화를 부르는 문이며 혀는 곧 몸을 베는 도끼다

(口是招禍之門 舌是伐身之斧). 또 선구(禪句)에 이르되

한마디의 말이 이미 나가면 네 마리 말로도 쫓기 어렵다(一言已出 駟馬難追).

패가망신(敗家亡身)하는 일이 번번히 말로 인해 발생한다.

그래서 세 번생각하고 한 번 말한다(三思一言) 란 말도 있고 또 선구(禪句)

이르되 날카로운 칼로 살을 베면 상처가 오히려 봉합되지만 나쁜 말로 사람을

상하면 한이 사라지지 않는다(利刀割肉瘡猶合 惡語傷人恨不消) 했다.

동산양개선사어록(洞山良价禪師語錄)에 이르되 (隋)나라 하약필(賀若弼)

아버지인 하숙(賀孰)이 우문호(宇文護)의 시기(猜忌)하는 바로 살해되었는데

형장에 임해 경계하여 가로되 내가 혀 때문에 죽는다.

(아들인)하약필의 혀를 당겨 송곳으로 그것을 찔러 피를 내었으니 입을 삼가게

했던 것이다.


무문관(無門關) 제45칙에 이르되 남의 활은 당기지 말고 

남의 말은 타지 말고 남의 그름은 분변하지 말고 남의 일은 알지 말아라

(他弓莫挽 他馬莫騎 他非莫辨 他事莫知).

 

잡독해일(雜毒海一) 백장회해(百丈懷海) 초석기(楚石琦)가 송하되


야압고비락원정(野鴨高飛落遠汀)

득비두동(??得鼻頭疼) 

사량개양무자미(思量箇樣無滋味)

소불성혜곡불성(笑不成兮哭不成)


들오리가 높이 날아 먼 물가에 떨어지니  

사람을 속여 코끝을 비틀어 아프구나  

이 모양을 사량하매 자미가 없어  

웃음을 이루지 못하고 곡도 이루지 못하더라.

71

 

백장회해선사어록(百丈懷海禪師語錄)에 이르되 스님(百丈懷海)이 마조

(馬祖)를 모시고 가던 차에 한 무리의 들오리가 날아 지나감을 보았다.

마조가 가로되 이 무엇인고. 스님이 가로되 들오리입니다. 마조가 가로되

어느 곳으로 가는가. 스님이 가로되 날아 지나갔습니다.

마조가 드디어 머리를 돌려 스님의 코를 가져 한 번 퉁겼다.

백장이 아픔을 지고 실성(失聲)했다. 마조가 가로되 또 날아 지나갔다고

말해라. 스님이 언하에 살핌이 있었다. 시자료(侍者寮)에 돌아와서 애애

(哀哀)하며 대성통곡했다. 동료(同僚)가 물어 가로되 네가 부모를 추억하느냐.

스님이 가로되 아니다. 가로되 사람에게 욕을 먹었느냐. 스님이 가로되 아니다.

가로되 곡해서 무엇 하느냐. 스님이 가로되 나의 콧구멍이 대사의 퉁김을

입었으나 아픔이 사무치지 못했다. 동료가 가로되

무슨 계합치 못한 인연이 있었나. 스님이 가로되 네가 화상에게 물으러 가거라.

동료가 대사에게 물어 가로되 회해시자(懷海侍者)가 무슨 계합치 못한

인연이 있어 시자료 중에 있으며 곡합니까.

화상에게 고해 모갑을 위해 설하시게 했습니다. 대사가 가로되

이는 그가 알았으니 너는 스스로 그에게 물어라. 동료가 귀료(歸寮)하여 가로되

화상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안다 하시며 나로 하여금 스스로 너에게 물어라 하셨다.

스님이 이에 하하 대소했다. 동료가 가로되 아까는 곡하더니 여금엔 무엇 때문에

도리어 웃는가. 스님이 가로되 아까는 곡함이고 여금은 웃음이다.

동료가 어리둥절했다. 

다음 날 마조가 승당(陞堂)하고 대중이 겨우 모이자 스님이 나와서 방석

(方席)을 걷어버렸다. 마조가 곧 하좌했다. (중략) 스님이 다시 참알해

시립(侍立)하던 차에 마조가 눈으로 승상(繩) 모서리의 불자(拂子)를 보았다.

스님이 가로되 이 용에 즉함입니까 이 용을 여읨입니까(卽此用 離此用).

마조가 가로되 네가 향후에 양편피(兩片皮; 입)를 연다면 무엇을 가져 사람들을

위하겠는가. 스님이 불자를 취해 세워 일으켰다. 마조가 가로되

이 용에 즉함인가 이 용을 여읨인가. 스님이 불자를 구처(舊處)에 걸었는데

마조가 위엄을 떨치며 한 번 할(喝)했다. 스님이 바로 3일 동안 귀먹음을 얻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백장삼일이롱화(百丈三日耳聾話)다.

여러 선록(禪錄)의 글이 조금씩 다르지만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앙산록(仰山錄)에 이르기를 위산(?山)이 스님에게 묻되 백장이 마조를

재참(再參)한 인연에 이 두 존숙의 의지(意旨)가 무엇인가. 스님이 이르되

이것은 이 대기대용(大機大用)을 나타낸 것입니다. 위산이 이르되 마조가

84인의 선지식을 배출했는데 몇 사람이 대기를 얻었으며 몇 사람이 대용을

얻었는가. 스님이 이르되 백장이 대기를 얻었고 황벽이 대용을 얻으셨습니다.

나머지는 다 이 창도지사(唱導之師)입니다. 위산이 이르되 이와 같고 이와 같다. 

창도(唱導)란 법을 선창(宣唱)하여 사람을 교화해 인도함이다.

부처님 시대에 사리불(舍利弗)과 부루나(富樓那)가 첫째가 된다.

즉 불법을 잘 알고 설법을 잘하는 스님을 창도지사라 한다.

72

 

이 백장재참화(百丈再參話)를 자수회심(慈受懷深)이 송하되 부자가 상봉하매

취미가 같아서 용천보검을 다시 가는구나 마조 당년의 할을 밝히기를 요한다면 

대지와 산하가 다 귀먹었다 하노라

(父子相逢臭味同 龍泉寶劍再磨?  要明馬祖當年喝 大地山河盡耳聾).

용천보검이란 조정사원일에 이르기를 월절서(書; 春秋時代 越國의

흥망을 기록한 책)에 이르되 초나라 왕이 풍호자(風湖子)를 불러 오월(吳越)

가서 구야자(歐冶子)와 간장(干將)을 상견케 하고 그들로 하여금 철검 세 개를

만들게 했는데 하나는 가로되 용천(龍泉)이며 둘은 가로되 태아(太阿)

셋은 가로되 상시(上市)다 운운.

구야자는 춘추시대 월나라 사람으로서 검을 잘 만든 장인(匠人)이며

간장은 오나라 사람으로서 또한 검을 잘 만든 장인이다.

이 백장이롱화(百丈耳聾話)를 정원(淨圓)이 송했다.  

허공이 땅에 떨어지고 창명이 마르고 일월이 빛이 없고 건곤이 캄캄하도다 

만약 거꾸로 떨어져 기절한 후에 소생하지 않았거든 

사람 앞을 향해 참학사를 얘기하지 말아라

(虛空落地滄溟竭 日月無光乾坤黑 若不撲落絶後生 休向人前談參學).

이 송은 1998년에 지었다.

 

선문념송(禪門拈頌) 제997칙 현사(玄沙)가 상당(上堂)하여 꾀꼬리 소리를 듣고

이에 이르되 깊이 실상을 얘기하고 잘 법요를 설하네(深談實相 善說法要).

바로 하좌했다.   법진일(法眞一)이 송하되


자연비래요화량(紫燕飛來繞?梁)

심담실상향랑랑(深談實相響瑯瑯)   

천언만어무인회(千言萬語無人會)

우축류앵과단장(又逐流?過短墻)


붉은 제비 날아와 화량을 맴돌면서  

깊이 실상을 얘기하는 음향이 낭랑하구나  

천언만어를 아는 사람이 없어  

또 유랑하는 꾀꼬리를 따라 짧은 담장을 지나네


연등회요십구(聯燈會要十九) 약산유엄선사장(藥山惟儼禪師章)에 이르되 

스님이 오래도록 상당(上堂)하지 않았다. 원주(院主)가 사뢰어 이르되

대중이 화상의 가르침을 오래 소원하였습니다.

스님이 이르되 종을 치거라. 원주가 종을 치매 대중이 겨우 모여 입정

(入定)하자 스님이 문득 하좌(下座)하여 방장으로 돌아갔다.

원주가 뒤따라가 묻되 화상께서는 대중을 위해 얘기하겠다고 허락하시고선

무엇 때문에 한마디도 베풀지 않습니까. 스님이 이르되 경에는 경사가 있고

논에는 논사가 있거늘 또 어찌 노승을 괴이히 여김을 얻겠는가

(經有經師 論有論師 又爭怪得老僧).

73

 

또 연등회요십구 약산유엄선사장에 이르되 스님은 심상(尋常)에 사람들에게

경을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느 날 경을 가져 스스로 보았다.

중이 묻되 화상은 심상에 사람들에게 경을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더니

무엇 때문에 스스로 보십니까. 스님이 이르되 나는 다만 눈을 가리려고 한다

(我只要遮眼). 이르되 모갑도 화상을 배워 경을 본다면 괜찮겠습니까.

스님이 이르되 네가 만약 본다면 소가죽도 반드시 뚫을 것이다(牛皮也須穿)

했다. 곧 문자에 집착함이 심할 것이란 표현이다.

연등회요이십삼 현사사비선사장(玄沙師備禪師章) 경청(鏡淸)이 묻되

학인이 막 총림에 들어왔습니다. 스님에게 입로(入路)를 지시해 주시기를 빕니다.

스님이 이르되 네가 언계(偃溪)의 물소리를 듣느냐. 이르되 듣습니다.

스님이 이르되 이 속으로 좇아 들어가거라(從這裏入).

오등전서육십일 거천해선사(巨川海禪師)가 풍령송(風鈴頌)이 있어 가로되  

구리 입술 쇠 혀가 매우 첨신하나니  누각에 매달린 게 몇 봄인지 기억치 못하겠네  

말씀 밖의 백천 가지 삼매법을  바람을 인해 개중의 사람에게 설해 주더라

(銅脣鐵舌太尖新 樓閣懸來不記春 言外百千三昧法 因風說與箇中人).


정원상좌(淨圓上座)도 한 수의 송이 있으니 제목은 야단법석(野壇法席)이다.

층층의 여름 구름은 천 층의 누각이며 빽빽한 소나기는 만 개의 내 천 자며 

울울한 청송은 머리 숙여 생각하고 괄괄한 유수는 하하 웃는구나.  

돌멩이와 풀들은 조사의 마음을 보이고 꾀꼬리 입 까치 부리는 반야를 얘기하고 

풍령은 크게 부르짖으며 아야야하고 지나가는 바람은 피리 불며 리라라하네

(層層火雲千層樓 森森銀竹萬川字 鬱鬱靑松低頭思 ??流水笑呵呵

石頭草頭見祖心 鶯口鵲嘴談般若 風鈴大叫阿耶耶 過風吹笛???)

 야단법석이란 들판에 단()을 시설하여 대중을 모아 임시로 설법하는 자리.

()하여 시끌벅적한 것을 말한다. 불 화 구름 운 화운(火雲)은 여름철의

구름이며 은죽(銀竹)은 소나기의 형용이며 풍령은 풍경(風磬)이다.

이 송은 2003년 작이다. 정원의 게송집인 태화당수세록(泰華堂隨歲錄)

약 890수의 게송이 실려 있는데 이 중에서 이 송이 가장 낫다고 자부(自負)한다.  

 

공곡집사(空谷集四) 제55칙 관휴(貫休) 시에 이르되


자전단탑육칠급(紫?檀塔六七級) 

홍함화삼사지(紅??花三四枝) 

선객상봉지탄지(禪客相逢只彈指)

차심능유기인지(此心能有幾人知)


붉은 전단탑은 육칠 층이며

붉은 함담화는 서너 가지로다  

선객이 상봉하면 다만 손가락 퉁기나니  

이 마음을 능히 몇 사람이나 아는가.

74

 

함담화는 연꽃의 다른 이름. 관휴(貫休)는 시를 잘 지었던 당말오대(唐末五代)

스님이니 서화(書畵)에도 능했으며 특히 라한화(羅漢畵)를 잘 그렸다.

촉주왕건(蜀主王建) 선월대사(禪月大師) 호를 내렸고 시집 선월집(禪月集) 

30권 있다. 전등록이십칠 선월(禪月)의 시에 이르되 선객이 상봉하면

다만 손가락 퉁기나니 이 마음을 능히 몇 사람이나 아는가.

대수화상(大隨和尙)이 이 구를 들어 선월에게 묻되 무엇이 이 마음인가.

선월이 대답이 없었다. 정원(淨圓)이 말한다. 선월이 대답이 없었다고

말하지 말지니 그 소리가 우레와 같다 하리라.  

이 마음을 능히 몇 사람이나 아는가 했는데 장경혜릉선사(長慶慧稜禪師)가 이르되

도반과 부딪쳐 어깨를 교차해 지나면서 일생의 참학사를 마친다

(撞著道伴交肩過 一生參學事畢). 또 고인이 이르되 주장자를 알면 일생의

참학사를 마친다(識得?杖子 一生參學事畢). 또 이르되 

바로 모름지기 바늘 잡은 사람을 알아야 하리니 원앙의 아름다운 깃털을

말하지 말아라(直須識取把鍼人 莫道鴛鴦好毛羽). 즉 수놓아진 원앙새를

아름답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그 원앙을 수놓은 사람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또 이르되 원앙을 수놓은 다음 그대의 보는 대로 따르지만 금침을 잡아

타인에게 건네 주지는 못한다(鴛鴦繡了從君看 莫把金針度與人).

또 이르되 타인에게서 구함이 자기에게서 구함만 같지 못하다(求人不如求自己).

이런 등등의 현묘(玄妙)한 선구(禪句)가 있다.


맹자(孟子) 진심장(盡心章)에 이르되 맹자가 왈 만물이 모두 나에게

갖추어졌다(萬物皆備於我矣). 대혜록십팔(大慧錄十八) 스님이 이르되

부처님이 처음 탄생해 하강하면서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이르기를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라 하셨다.

소이로 이르되 삼계에 홀로 존귀함을 아(我)라고 이른다.

이른 바 아라는 것은 인아(人我)의 아가 아니다. 맹자가 이른 바 만물이

모두 나에게 갖추어졌다 함과 같다 했다. 곧 천상천하에 오직 나홀로

존귀하다 한 나란 나다 남이다 하는 나가 아니란 것이다.

삼계에 홀로 존귀한 것이 나란 것이니 쉽게 말해서 천상천하가 다 나란 것이며

나 뿐이란 것이다. 그래서 존귀함이 된다.

앙산록(仰山錄)에 이르되 어떤 한 행자가 법사를 다라 불전에 들었다.

행자가 부처를 향해 침을 뱉았다. 법사가 이르되 행자가 거취가 적구나,

무엇 때문에 부처님께 침을 뱉느냐. 행자가 이르되 부처가 없는 곳을 가져와서

모갑이 침을 뱉게 해 주십시요. 법사가 대답이 없었다.

스님이 법사를 대신해 이르되 다만 행자에게 침을 뱉겠다.

또 이르되 행자가 만약 말이 있다면 곧 그를 향해 말하되 나에게 행자가 없는

곳을 송환해 오너라. 곧 너가 아닌 곳이 어디에 있겠는가 한 것이다.

곧 피장파장이다.

75

 

40여년 전 일우선사(一愚先師)의 법문이다. 어떤 때 기독교인(基督敎人)

대담을 했는데 그 교인이 이르되 하느님 아버지가 천지만물(天地萬物)

창조하셨다. 스님이 묻되 당신은 하느님 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이 있느냐.

그 교인이 대답을 안했다. 스님이 말하되 하느님 아버지가 태초(太初)

천지만물을 창조하고는 잠시 사유하셨다. 자신의 아들 딸에게 아버지의

얼굴을 보여 주어야 겠다.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는 자식이 어디에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방법을 써야 할까 고심 끝에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 내셨다.

그래서 자신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被造物)에 자신의 얼굴을 새겨 넣었다.

그리고는 스님이 그 기독교인에게 말하되 당신은 눈을 크게 뜨고 앞을 보아라.

하느님 얼굴이 보이느냐. 그 교인이 가로되 불교도 우리 기독교와 같네.

 

선종송고련주통집이십오(禪宗頌古聯珠通集三十五) 불감근(佛鑑懃)의 송에 가로되


채운영리신선현(彩雲影裏神仙現)

수파홍라선차면(手把紅羅扇遮面) 

급수착안간선인(急須著眼看仙人)

막간신선수중선(莫看神仙手中扇) 


오색 구름의 그림자 속에 신선이 나타나서  

손으로 붉은 비단 부채를 잡고 얼굴을 가렸도다  

급히 착안하여 선인을 봄을 쓰고  

신선의 수중의 부채를 보지 말아라.

76

 

설당행화상습유(雪堂行和尙拾遺錄) 원오극근(圓悟克勤)이 이르되

그(佛鑑慧懃)의 이 송은 무릇 불조의 기연(機緣)에 모두 쓸 만하다.

벽암록 제1칙에 이르되 산 너머 연기를 보면 벌써 이 불인 줄 알고 담 너머

뿔을 보면 바로 이 소인 줄 안다(隔山見煙 早知是火 隔牆見角 便知是牛).

이른 바 색빛을 보다가 문득 마음임을 본다 함이다(見色便見心).

금강경에 이르되   만약 색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함인지라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하느니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원각경에 이르되 수다라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나니 만약 다시

달을 본다면 가리키는 것은 필경 달이 아닌 줄 똑똑히 알것이다

(修多羅?如標月指 若復見月 了知所標畢竟非月). 수다라는 범어이다.

번역하면 곧 경이다. 경률론 삼장 가운데 경장(經藏)이다.

이 경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다는 것이다. 달을 보게 되면 손가락은

달이 아닌 줄 안다는 것이다. 달마대사 파상론(破相論)에 이르되 

발로 인해 물고기를 구하나니 고기를 얻으면 통발을 잊고 언어로 인하여

뜻을 구하나 뜻을 얻으면 언어를 잊어라

(因筌求魚 得魚忘筌 因言求意 得意忘言) 했다.

이런 말씀이 다 무엇을 암시 하는가. 본래면목을 보라는 것이다.

불법도리를 설명함에 있어서 비유만큼 친절한 것이 없다.

그러나 화엄경십오에 이르되 비유로써 나타내 보이려고 한다면 마침내 능히

이에 비유할 비유가 있지 않다(欲以譬而顯示 終無有能喩此) 했으며

고인이 이르기를 눈을 그리면서 능히 그 맑음을 그리지 못하고 달을 그리면서

능히 그 밝음을 그리지 못하고 꽃을 그리면서 능히 그 향기를 그리지 못하고

샘을 그리면서 능히 그 소리를 그리지 못하고 사람을 그리면서 능히 그 정을

그리지 못한다 했으니 비유와 언설은 족히 도를 나타내지 못한다.

지게미(糟粕)에 불과하다.

77

 

    지게미란 선림보훈필설권중(禪林寶訓筆說卷中)에 이르되 제환공(齊桓公)

당상(堂上)에서 독서를 하는데 윤편(輪扁)이 당하(堂下)에서 바퀴를 깎다가

끌을 놓고 물어 가로되 감히 묻사오니 주군(主君)께서 보는 바의 것은 무슨 책입니까.

환공이 가로되 성인(聖人)의 말씀이니라. 윤편이 가로되 성인이 존재합니까.

환공이 가로되 성인은 죽었느니라. 윤편이 가로되 그렇다면 주군께서 읽는 바의

것은 지게미(糟粕)입니다. 환공이 노해 가로되 과인(寡人)이 독서하는데

바퀴 만드는 사람이 어찌 나무라는가. 설(說)이 있으면 곧 옳으려니와 설이 없다면

곧 죽으리라. 윤편이 가로되

(臣)의 일로 이것을 살피건대 신이 바퀴를 깎음을 당해서 느리면 곧 달아서(甘)

견고하지 못하고 빠르면 곧 써서(苦) (끌이)들어가지 않으므로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아야 하나이다. 이를 얻음은 마음에서며 이에 응함은 손에서이니

입으로 능히 말하지 못하지만 기술은 존재해 있습니다.

이 능히 신의 자식에게 일러 주지 못하고 자식이 능히 신에게 받지 못하나이다.

신의 나이가 칠십이라 늙도록 바퀴를 깎았지만 옛적에 바퀴를 깎은 자가 그것

(기술)을 주려고 해도 가히 전하지 못하고 죽은 자가 많습니다.

고로 주군께서 보는 바의 것은 지게미인가 합니다.

환공이 크게 기뻐했는데 장자 천도편(天道篇)에 나온다.

    신선의 비결은 부자지간이라도 전하지 못한다(神仙秘 父子不傳) 했다.

하물며 대장경 오천여 권이 문자가 아니며 사십구 년 동안 일찍이 설하지 않음

(五千餘卷非文字 四十九年未曾說) 도리이겠는가.  

대장경 오천여 권이란 지승(智勝)이 지은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의 기재에

의하자면 당나라 개원년(713~740)까지의 대장경 총 권 수가 오천사십팔 권이었다.

그 후로 오천사십팔권은 대장경의 대명사가 되었는데 지금은 대장경이

약 2만여 권이라 한다.  

 

畢竟水須朝海去 到頭雲定覓山歸


 
초대~69대 복면가왕들의 우승곡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