죤 휠러의 이야기 / 몽지님

2018. 8. 19. 17:5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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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휠러(John Wheeler)의 이야기

나는 십대 시절부터 영적인 길 위에 있었다. 약 30년 동안 기독교, 신지학(神智學), 크리슈나무르티

(J. Krishnamurti)의 가르침(나는 1980년대에 오자이Ojai에서 열린 그의 강연회에 갔었다.),

 불교, 힌두교, 그리고 요가를 포함한 다양한 길들과 수행들에 참여했었다.

다른 길들과 스승들도 있었지만 너무 많아서 여기서 다 언급할 수 없다.

20대 중반에, 그들의 생애와 가르침에 관한 책을 통해, 라마나 마하르쉬(Ramana Maharshi)와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Nisargadatta Maharaj)를 알게 되었다. 그 위대한 인도인 스승들의

비이원적 영성은 확고부동해 보였다. 비록 내가 그들이 말했던 것을 완전히(또는 부분적으로도)

이해했거나 경험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수년에 걸쳐 그들의 가르침들로 돌아오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존 휠러>

그러는 동안, 나는 비이원적 영성과 관련 있는 많은 동시대의 스승들을 찾아 돌아다녔다.

그것은 분명 유익한 것이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는 완전히 만족스럽지 않았다.

나의 혼란 때문이거나 아니면 제공된 가르침에서 무언가가 충분히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앞의 이유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어떤 이유 때문인지 나는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의

서양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뱃사람’ 밥 아담슨을 만나야 할 운명이었다.

나는 혼자서 책과 명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진전은 있었지만 대개는 더디면서 직접적인 경험을 많이 얻지는 못했다.

희미하게나마 발전하고 있다고 느꼈지만, 정직하게 나의 경험을 바라본다면, 나는 스승들이

가리키고 있는 바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 나날의 삶이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나는 찾는 일이 끝나지 않았으며, 무언가가 빠져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밥 아담슨을 만나지 못했다면 찾는 일은 수십 년간 계속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적어도

참된 이해를 가진 누군가를 만날 때까지는 계속되었을 것이다.

그게 누구이고, 언제일지 누가 알겠는가마는, 그런 일이 없다면, 찾는 일이, 그리고 고통이,

오랜 시간 동안 계속되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한 때, 나는 자기 탐구의 길을 20년 내지 30년 간 걸어 온(여전히 그것을 하고 있으며,

나도 그렇게 될 뻔했다!) 라마나 마하르쉬의 몇몇 추종자들을 만났다. 나는 그들 수준의 헌신에

도저히 미치지 못했기에, 그러한 접근법이 내게 효과가 있으리라고는 거의 생각할 수 없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것은 라마나의 가르침이 잘못된 것이어서가 아니라, 어떠한 가르침도

하나의 수행으로 바꾸어 버리는 마음의 불가피한 경향 때문이다.

수행은, 내가 결국엔 알게 된 것처럼, 보통 끝없이 계속된다.

이것은 수행이 흔히 잘못된 전제들 위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직감적으로, 참된 본성을 깨달은 누군가를, 내가 신뢰할 수 있는 누군가를, 나의 의심과 우려를

공유하기 위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누가 진정한 스승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완전히 공감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예전에 나사르가다타 마하라지의 대화들을 자주 읽곤 했다. 인도인 특유의 장황함과

통역 문제(그는 원래 마라티어로 말했다)를 고려 할 때, 나는 그의 가르침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가 자유로운 존재임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많은 영적 구도자들은 그의 말을 읽음으로써, 비록 그들이 항상 그가 말한 모든 것들을 경험하지는

못할지라도, 그의 깨달음이 진짜라는 사실을 감지할 수는 있다. 나는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를

만나서 실제로 자기의 본성을 깨달은 경험을 한 누군가가 아직 생존해 있는지 궁금해 하곤 했다.

그러한 모든 탐색의 세월들이 지나고, 나는 마침내 밥 아담슨을 우연히 발견하였다.

무언가가 강렬하게 공명하였다. 그의 웹사이트의 페이지들을 읽을 때조차

 ‘어쩌면 바로 이것일지 모른다’라는 강렬한 느낌이 있었다.

밥 아담슨을 발견하기 바로 직전, 나는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의 생생한 꿈을 꾸었다.

꿈에서 그는 나에게 영적인 이해를 위한 탐구를 포기하지 말라고 용기를 주었다.

얼마 후 나는 밥 아담슨에 대해 알게 되었다. 진정한 스승을 만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가 살아있는 동안 그를 볼 기회를 놓쳤었기에), 나는 호주에 있는 밥을

직접 방문하기로 결심했다. 당신은 그가 어쩌면 나의 의심과 의문들을 명확하게 설명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은근히 기대하며 호주로 가는 나의 열의(어쩌면 절박함!)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참된 본성을 이해하는 것은 결코 책을 읽거나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통해서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발견했다. 가장 좋은 책들은 주로 과거의 어떤 시점에서 구도자와 스승

사이에서 벌어진 대화들을 기록한 것들이다. 그러한 책들을 읽을 때,

우리는 (책 속의 말과 개념을 통해) 과거에 일어난 경험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책은 살아있는 사람 사이의 대화 속에서 경험되었던 실제적인 무언가를 가리키는 지도와 같다.

보통 우리는 드러나고 있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마음으로 헤아리려고 애쓰고 있다.

이것은 고상한 시도이지만, 밥 아담슨이 그와 이야기한 잠깐 사이에 지적한 것처럼,

‘해답은 결코 마음에서 발견할 수 없다.’ 영적인 이해와 자유의 경험이 곧장 다가오지 않기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거기’(‘거기’가 어디든지)에 있지 않다고 가정한다.

우리는 거기에 도달하는 어떤 방법이나 길이 틀림없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암만해도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마음은 늘 똑같은 구속과 고통을 계속해서

만들어낸다. 이것은 절망적인 순환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책 속에서 한 가닥의 빛이나 진리를 직관적으로 느끼지만 그것을 실제로

경험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만났던 대다수의 구도자들은 비슷한 경험을 가졌다.

 많은 이들이 영적인 길에서 안내와 도움을 얻기 위해 살아있는 스승을 찾으려 애를 쓰게 된다.

그것이 바로 내게 일어난 일이었다.

<'뱃사람' 밥 아담슨>

나는 많은 스승들을 만났지만, 밥 아담슨을 만나기 전까지는, 내가 자신의 참된 본성을 완전히

깨달은 누군가와 상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했다. 내가 그러한 이해의 활력과 자신감,

에너지와 마주하게 되자 내게 있어 무언가 급격한 전환이 있었다. 그것은 놀랄만한 경험이었고,

나의 구도 과정에서 맞닥뜨렸던 그 어떤 경험과도 달랐다.

내가 도착한 뒤 첫째 날, 우리는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함께 자리에 앉자, 그는

내 눈을 바라보면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어떤 의문점이나 질문할 것이 있습니까? 당신이 알아야만 하는 무언가가 있습니까?”

그것은 어느 정도 나를 무장 해제시켰다. 왜냐하면 그는 아무런 의문이 없으며, 내게 바로

그 자리에서 동일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근본적으로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게 ‘구도는 끝났으며, 책 읽기는 끝났다. 너는 여기에 있다. 너는 지금 여기에서 철저히

이것을 선택할 준비가 되었는가?’라는 암시로 보였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나는 이론적 지식을 던져 버리고 내 가슴에서 진실한 의심들과 질문들, 문제들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상황은 매우 빨리 정리되었다. 그 명료함과 마주하는 것, 자유롭고자 하는 나 자신의

욕망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상황을 재빨리 전환하도록 허용하였다. 기초적인 가르침은 매우 단순하고,

너무나 단순하다. 너무나 단순한 나머지 마음은 그것을 간과한다.

내가 깨닫지 못했던 것은, 그것이 책 읽기나, 명상, 무언가를 하는 것, 해답을 구하는 것,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 등등과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 모든 방법들은 엉뚱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는 “이해하는 것이 전부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본질적으로 밥은

“바로 지금 직접적인 경험으로 당신의 실제 본성을 보세요. 바로 지금 당신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항상 무엇이었습니까?”라고 말하고 있었다.

생각은 여기에 쓸모가 없다. 왜냐하면 보는 것 또는 관찰하는 것은 전혀 개념적인 작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손 안에 있는 사과를 보는 것에 보다 가깝다. 그저 보면 된다. 생각하지 말고.

바로 지금, 당신이 이것을 읽고 있을 때, 당신은 존재하고 있으며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다. 당신은 의심할 여지없이 현존하고 있으며 알아차리고 있다.

다음 생각이 일어나기 전까지, 당신은 당신 자신의 존재와 당신 자신의 알아차림, 당신 자신의

현존을 절대적으로 확신한다. 이 알아차림이 바로 당신 자신이며, 항상 존재했던 당신 자신이다.

 모든 생각, 지각, 감각과 느낌은 그 알아차림 안에서, 또는 그 알아차림 위에서 나타난다.

이 알아차림은 절대로 움직이고 변화하거나 이동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자유로우며

전혀 훼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당신이 볼 수 있거나 파악할 수 있는 사물이나

대상이 아니다. 알아차림 안에서 일어난 단순한 생각인 마음은 그것을 파악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고, 그것에 대해 생각조차 할 수 없다.

허나, 밥이 말한 것처럼, 당신은 당신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너무나 명백하지만, 우리가 태어난 이래로 아무도 이것을 지적해 주지 않았다.

일단 한 번 지적해 주면 그것은 매우 빨리 파악되거나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아, 그것이 나 자신이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문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밝고, 빛나며, 텅 빈,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알아차림이다.

그것은 참으로 눈부시게 밝지만 형체가 없다. 그것은 겉보기엔 형체가 없는 듯하지만 당신

존재에서 가장 확고한 사실이다. 그것은 아무런 노력 없이 바로 지금 여기, 영원히 본래

그대로 있다. 한 걸음도 떼지 않고, 당신은 이미 도달해 있다. 당신은 집에 와 있다.

어떠한 수행도 이것을 밝혀낼 수는 없다. 수행은 시간 속에서,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수행은 어떤 결과를 목표로 삼지만, 당신은 (현존하는 알아차림으로서) 이미 여기에 있다.

 오직 당신만이 그것을 지적해 줄 때까지 모르고 있을 뿐이다. 일단 한 번 깨닫게 되면,

 당신은 그것을 잃어버릴 수 없다. 당신은 존재하기 위해 수행을 할 필요가 없다.

이것이 바로 그를 만난 첫 번째 대화에서 밥이 내게 지적해 준 것이다.

이것을 깨닫자마자, 나는 즉각 매우 분명하고 자유로운 느낌이 들었다.

잠시 후, 어떤 생각들이 올라왔다. 오래된 성격 패턴들, 나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 규정들이

나타났다. 나는 자신의 본성이 현존하는 알아차림이라는 명확한 이해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다음날, 나는 이에 대해 밥에게 이야기했다. 그가 말했다.

“한 번 살펴봅시다. 당신은 존재합니까? 당신은 알아차리고 있습니까? 당신이 그것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을 비추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순간, 고통이란 생각들은 늘 현존하는 알아차림에 의해 비춰지고 있는, 단지 일시적인 개념들일

 뿐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어떤 것도 전혀 잃어버린 적이 없었다. 우리 자신인 그 알아차림은

결코 모호하지 않다! 고통은 실제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의 참된 본성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에 우리는

 ‘나는 전혀 착하지 않아’, ‘나는 아직 거기에 도달하지 못했어’, ‘나는 꼼짝도 못해’따위와 같은

덧없는 생각들을 믿는다. 결국에 우리는 자신들이 그러한 생각들이 아니란 사실을 이해한다.

일단 한 번 우리의 진정한 자아가 드러나면, 고통은 그 힘을 잃게 된다.

밥은 여기에는 그 어떤 개인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개인은 하나의 허구적인 개념이다. 생각과 느낌과 지각이 있지만, 그것들은 문제가 아니다.

그것들은 마치 먼지처럼 우리 자신인 현존하는 알아차림의 빛 속에서 그저 일어났다가는 사라진다.

마음이 우리 자신의 참모습을 가장 근접하게 나타낼 수 있는 것은 ‘내가 있다’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그 생각이 정말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은 아니다. 그 생각이 있건 없건 간에 우리는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는 ‘내가 있다’라는 생각을 안다. 그 생각이 바로 한 개인, 분리되어 있는

 ‘나’라는 잘못된 감각의 출발점이다.

우리는 조금이라도 더 나은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 ‘나’라는 생각에다 ‘나는 착하다’,

‘나는 나쁘다’, ‘나는 이런 문제가 있어’ 등과 같은 다른 꼬리표를 붙였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들은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바로 그 ‘나’라는 생각 자체,

분리감은 실제로 우리의 참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당신이 ‘나’라는 생각의 허구성,

즉 우리 자신이 결코 독립적인 개인이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면, 일생 동안 가지고 있던

정체성과 관념들이 모두 무너지고 만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잘못된 전제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수행은 없다. 그것은 거짓 ‘나’는 가상의 존재란 사실을

단순히 보면 되는 문제일 뿐이다. 전체 메커니즘이 개념의 카드로 만든 집이란 사실을 알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일생의 고통이 사라져 버린다.

밥의 말처럼, 원인(‘나’)이 없다면 어떤 결과들(심리적 고통과 구속)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내가 그의 한 강연회에서 소파에 앉아 그가 ‘개인은 없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있었을 때,

갑자기 그 말이 나를 후려쳤다. 나는 그것을 바로 지금 여기에서 보았다. 거기엔 분리된

개인이란 결코 없었다. 그 순간, 나의 모든 의문과 혼란이 사라져 버렸다.

 모든 문제와 의문이 내 인생의 중심에 있다고 가정했던 ‘나’라는 감각에서 생겨났음을 깨달았다.

실제적인 관찰을 통해, 나는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15년간의 명상도 잠시 동안의 직접적인 관찰에서 일어난 일을 이루어낼 수 없었다.

그러한 인식 속에서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명료함과 평화로움이 생겨났다.

나는 직감적으로 찾아 헤매는 일이 끝났음을 느꼈다. 내가 손을 들고 밥에게 이렇게 물었던

것이 기억난다.

“우리 자신이 늘 현존하는 알아차림이고, 우리 자신이라고 상상했던 ‘나’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더 이상 의심도 없고, 질문도 없고, 문제도 없습니다. 이러면 된 겁니까?”

그는 그렇다고 확인해 주었다. 그 순간 이후로, 나는 어떠한 심각한 어려움이나 고통을 겪지

않았으며, 또한 찾거나, 명상하거나, 별다른 영적인 길을 추구하려는 욕망이나 충동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전체적인 전망이 달라졌고 나는 직감적으로 찾는 일이 끝났음을 알았다.

모든 것이 그 위에 세워져 있던 ‘나’는 없었다. 그렇지만 빛나는 현존하는 알아차림은,

우리 자신이 존재한다는 단순한 사실로서, 여전히 노력 없이 거기에 있었다.

마지막으로, 밥은 모든 것은 알아차림 속에서 일어나며, 결코 알아차림으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것이 유일한 실체이며, 유일한 빛이다.

그것이 모든 것이며, 그것은 둘이 아니다. 가야할 곳도 없고 얻어야 할 것도 없다.

모든 것은 해결되었다. 우리는 그 하나인 빛의 바다에서 ‘살고, 움직이며, 우리의 존재를 가진다.’

그리고 결코 거기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밥 아담슨 덕분에 내가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건 모두 말이지만, 어쩌면 희미한 무언가가 그것을 통해 전해질지도 모른다.

백미현 노래모음 50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