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삶에서 깨어나기|******@불교의우주론@

2018. 8. 25. 16:44일반/생물·과학과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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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삶에서 깨어나기

- 인간의 위대함은 불성을 자각한다는 것-
- 맹목적 삶에서 절대자유의 세계로 전환-

소크라테스는 현자를 만나고 싶어 하였다. 그래서 지혜의 신인 아폴론의 신전을 찾아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신탁의 결과는 소크라테스 자신이 이 도시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그 신탁을 이해할 수 없어서 고민하였다. 혼자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던 그는 현명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하나씩 찾아가기로 하였다. 그렇게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나서 그는 그 신탁이 옳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소크라테스가 이전에 훌륭했다고 여겼던 사람들은 그들 자신들이 무지하다는 것을 몰랐다. 소크라테스는 적어도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다른 사람보다는 현명했던 것이다.

오늘날의 현명한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처럼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전을 찾아가서 누가 가장 현명하느냐고 물으면 두 말않고 인간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왜 그러냐고 다시 물으면 인간은 언어나 도구 혹은 불을 사용하기 때문에 다른 동물과는 구별되며 그런 차이 때문에 인간은 가장 훌륭하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인간과 여타 생물을 어떻게 해서든지 차별하여 구분지으려는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다. 다른 동물들이 위험 신호를 서로에게 전달한다거나 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인간처럼 고도의 언어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언어라는 것이 인간에게만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또한 도구나 불을 사용하는 것도 인간에게 손과 지능이 진화를 거치면서 어느 수준 이상 발달되었기 때문이지 뭐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진화의 단계를 거치면서 인간이라는 종에게는 지능이라는 능력이 특히 발달된 것 뿐이다. 그런 식으로 굳이 구분을 짓는다면 하늘을 날지 못하니까 새보다 열등하며, 물 속에서 빠르지 못하니까 물고기보다 열등하다고 해야할 지 모른다. 각각의 생물종이 저마다 자신의 특별한 능력을 키우며 진화해왔는데, 생물종의 우열을 지능이라는 일률적인 잣대로 잰다는 것이 그렇게 쉽사리 정당화될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인간의 위대한 점은 어디에 있는가? 인간에게 만약 위대한 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불성을 자각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소크라테스가 무지를 자각함으로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듯이, 우리 인간은 불성을 자각함으로써 위대해질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왜 위대하다고 해야 하는가?
지구의 나이는 약 45억년 정도이고 그 땅위에 생명이 태어나기 시작한 것은 약 30억년 전이라고 한다. 그렇게 생물종이 있은 이후 그들은 오직 살기 위해 살았을 뿐이다. 쇼펜하우어가 말했듯이 맹목적인 생의 의지 만으로 삶을 영위하며 종을 번성시켜 왔다. 그들 중생에게 세계는 자신이 잡아먹을 수 있는 것, 자신이 잡혀 먹힐 수 있는 것, 그리고 종족을 번성시킬 수 있는 대상으로서만 의지를 갖는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감관은 밖으로 열려있어야만 하였다. 그래야만 먹고 먹히는 것을 구분하는 데에 편리했기 때문이다. 진화의 한 정점에서 인간이라는 종이 이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지만 그 어느 다른 생물종보다도 심한 탐욕을 가진 존재였을 뿐이다.

이 중생적 삶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온 우주적 사건이 바로 불성의 자각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셨으므로 이 가능성이 우리에게 알려진다. 밖으로만 향했던 우리의 감관이 안으로 모아지고 상과 견해의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로와지면서 모든 법이 평등하다는 깨달음의 소식을 전해듣게 된다. 진화의 고리에서 나왔음에도 더 이상 맹목적 생의 의지에 끌려다니지 않는 주체적이고 절대적인 자유로운 삶의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이는 실로 30억년의 역사를 가진 맹목적이고 중생적인 삶에서 깨어나는 일이다.(얼마전 나온 책의 이름인데 그 이름이 좋아 이 글의 제목으로 인용한다) 무기물에서 유기체가 생기고, 유기체에서 생명이 생기고, 그 생명의 한 가운데에서 생명을 뛰어 넘으면서도 생명을 버리지 않는 해탈의 연꽃이 피어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