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언약 |…… 혜천스님설교

2018. 8. 25. 17:2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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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언약

  

 

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불기2555년 1월 9일


 

 

오늘 강론의 주제는 '붓다의 언약'입니다

 

흔히 불교 최고의 축일을 부처님 오신 날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성도일이 최고의 축일입니다. 내일 모레가 부처님 성도일인데, 일요법회에 오신 분들은 참석하지 못할 것 같아 오늘 강론 제목을 부처님의 언약으로 정했습니다.

 

우리는 3가지에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 부처님 탄신제, 둘째 범청권청일, 셋째, 전도선언일이 그것입니다. 즉 첫 번째는 부처님의 탄생일, 두 번째는 부처님께서 성도하고 난 후 범천, 즉 브라만의 권청으로 설법하기 시작한 범청권청일, 세 번째는 21명의 제자들에게 전도를 따나게 한 전도선언일인데, 이 3가지를 주목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 3가지를 주의해 읽지 않으면 불교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즉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게 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과 상관없는 것을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됩니다.

 

내가 절에 다닌 경력이 50년인데 무슨 소리냐고 할 것입니다. 실제 불교는 알아요.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우리가 말하는 불교는 역사적인 불교입니다. 이 역사적인 불교와 부처님의 가르침은 같지 않습니다. 마치 역사적인 불교를 부처님의 가르침인 양 잘못 알고 있습니다. 새해는 불멸 2555년입니다. 성도년으로 계산하면 2599년입니다. 내년이면 부처님이 성도하진 지 2600년째 됩니다.

 

부처님이 출가해 처음 한 것은 요가 수행으로, 처음 스승으로 섬긴 알라라 깔라마도 요가 수행자였습니다. 붓다는 요가수행에서 최고의 경지를 맛보았지만, 그 수행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고행을 합니다. 그리고 그 고행도 그만두게 되죠. 고행을 그만 둔 계기를 경전에서는 고행을 하지만 안락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히려 나는 예전에 쟘부나무 아래서 확고한 진리를 보지 않았던가? 극도의 고행과 단식은 해탈에 이르게 하는 바른 길이 아니다. 쇠약한 육신으로 해탈을 얻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균형을 잃어버린 마음, 목마름과 굶주림으로 지쳐버린 육신, 맑고 선명하지 않은 정신, 이렇게 마음과 육신이 조화롭지 않고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해탈을 얻을 수 있겠는가? 완전한 행복은 다섯 감각기관이 항상 편안한 때 얻어진다. 깊은 삼매로부터 최상의 평화를 얻는다' 그리고는 고행을 그만두고 네란자라 강에서 목욕을 합니다.

 

여기서 네란자라강에서 목욕을 한다는 것은 굉장한 의미가 있습니다. 단순히 목욕했다고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그런 이해는 제대로 살피지 못하는 것입니다. 네란자라 강물에서 목욕한다는 것은 과거와의 결별을 의미합니다. 조로아스터교는 아리안족의 과거의 전통적인 종교였습니다. 여기서도 그 교주인 조로아스터가 과거의 사유체계를 벗어날 때 아즈라 마후다를 보죠. 그것이 이 종교의 시작입니다. 그 때 조로아스터 역시 강에서 목욕을 하는데, 과거와 결별한다는 의미입니다.

 

붓다는 과거의 사유체계와 결별하고, 그리고 보리수좌에 앉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깨달음을 얻죠. 그 때 새벽 샛별이 빛나 부처님의 성도를 축하합니다. 샛별이 빛난다는 것도 굉장한 의미를 가집니다. 고대 아리안족의 사유체계에서 별, 해, 달, 불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늘에서는 별, 해, 달이 빛나고, 땅에서는 불이 빛납니다. 부처님의 성도에 샛별이 빛났다는 것은 진리의 빛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전에는 그 후에 있던 해, 달, 별이 없었느냐? 그 뜻이 아닙니다. 진리의 빛이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도하고 나서 일성으로 외쳤다는 것이 탄생게입니다. 경전에 보면 이 탄생게는 태어나면서 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탄생게는 사실 성도하고 나서 한 것을 거기에 끌어다 쓴 것입니다. 붓다가 태어난 것이 너무 맹숭맹숭하니까 성도 때의 것을 끌어다 쓴 것입니다. 탄생일을 돋보이게 할 장치가 필요했던 거죠. 즉 부처님이 성도하시고 한말을 거기에 끌어다 붙인 것입니다. 어느 전승에 의하면 그것은  성도하고 하신 말이라고 합니다.  바로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 之'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태어나면서 했다면 얼마나 경악스럽겠는가? 아마 갓 태어난 아이가 이런 말을 한다면 엄마는 악마가 씌웠다고 아이의 입을 막았을지도 모릅니다. 불교의 시작은 부처님이 성도했기 때문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했기 때문에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 (天上天下 唯我獨存 三界皆苦 我當安之)를 해석해 보죠. 천(天)은 신입니다. 인도말로 데바이죠. 그러므로 천상은 신들의 세계입니다. 중국에서 이 데바를 하늘 天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신이라는 현대적 개념이 원래 천입니다. 천은 신의 개념입니다. 중국 고대사상에 따르면 인간이 죽게 되면 하늘로 가죠. 하늘은 천제가 다스리고, 땅 위는 황제가 다스립니다. 천제의 자식이 황제입니다. 그리고 천도를 황제를 통해서만 이 인간세계에 전달됩니다. 중국 상나라 시대, 이 시기를 은나라 시대라고 표현하는 것은 폄칭입니다. 은은 하은주 할 때 은을 말하는 것으로 은은 멸시적 표현입니다. 주나라인 상나라를 멸시하는 표현이 은입니다. 마치 조선을 이조라고 부르는 것과 같죠. 황제가 죽으면 3년이 지나야 천제 옆에 가죠. 이 3년이 거상기간으로, 인간의 영혼이 신으로 바뀌는 기간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구멍을 막는 것 역시 귀신이 빠져나가지 못하게하는 것입니다. 3년이 지나면 하늘에 가서 신이 되죠. 중국에서 신이란 그걸 뜻합니다. 현대적 의미의 신은 천天입니다. 천상은 신들의 세계, 천하는 하늘 아래 인간들의 세계, 즉 모든 생명체를 말하죠.

 

유아독존은 '유일하게 나만이 우뚝' 그런 뜻이죠. 즉 신들 세계에서나 인간세계에서 나만이 존귀하다는 것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인간의 존엄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배웠습니다. 그러나 고타마 싯타르타는 스스로 자신이 존엄하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본래 존엄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너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다 자신이 존엄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이 존엄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새 이 말이 성립되는 모르겠습니다. 구제역이라고 120만 마리의 산짐승을 생매장합니다. 그런데 더한 것은 그걸 위해 천도제를 지내는 이들입니다. 나는 이들을 경멸합니다. 이 말의 본래 의미는 부처님은 신과 인간의 세계에서 유리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불교는 원래 유일불 사상입니다. 붓다 하나만을 인정합니다. 깨달으면 모두 부처가 된다는 말은 사악한 견해입니다. 용납될 수 없는 견해입니다. 불교에서는 오직 한 분만 부처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깨닫는데, 그래서 길거리에 넘쳐나는게 부처입니다. 엄마가 야단치면 우리은 어땋게 합니까? 내가 그러지 말아야지라고 합니다. 그것도 깨닫는 것입니다. 길을 가다가 돌부리를 차버려 아프면, 정신차려서 걸어야지 라고 생각하는데 그것도 깨닫는 것입니다. 오직 부처는 한분만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붓다는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깨달았습니다. 그 시대에도 '나 깨달았어. 부처야!'하며 자칭 붓다라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지금 당장 바깥에 나가보면 이 땅에도 부처라는 사람이 내가 딱 세어보니 얼추 10만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자칭 깨달았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가을 낙엽 떨어지듯 많습니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이 지리산에 도를 닦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그 도에 대한 인가비가 3,000만원이었습니다. 인가를 받아 돈을 냈는지, 돈을 받아 인가를 내어 주었는지 그 선후관계는 나도 모릅니다. 인가를 받은 이 분이 지리산을 내려오는데, 구름 위를 걷는 듯 합니다. 그리고는 집에 들어가 집에 계신 남편께 그 자랑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남편이 내가 힘들어 번 돈 3,000만원을 그렇게 날리다니 뚜껑이 열려 참을 수 없다며 불같이 화를 내며 냅다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랬더니 그 행복한 감정이 순식간에 다 어디가고 없더라는 것입니다.

 

부처님 시대, 그 당시에도 자칭 붓다가 수없이, 깨알같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시대에 우리의 붓다가 붓다로 받아들여진 것은 붓다의 권능의 위력 때문입니다. 처음 우르빈나 가섭을 제압할 때도 그 권능으로 가능했습니다. 가섭은 그 당시 마가다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였습니다. 온 세계 가득찬 붓다를 보고서야 가섭은 붓다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내가 깨달았다는 사실은 그 권능을 만들 수 있는가가 기준입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아라한과만 얻어도 기적을 만듭니다. 그게 안되면 깨달은 자라고 하면 안됩니다.

 

삼계는 욕계, 색계, 무색계를 말합니다. 불교에서 삼계는 25 존재의 세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삼계개고는 모든 생명체들은 모두 두카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카의 의미는 불만족스러운 것, 뒤틀려 있는 것, 즉 비정상을 뜻합니다. 중국에서 이 두카를 고苦라고 번역한 것은 잘못 번역된 것입니다. 두카는 불만족스러운 것, 뒤틀려 있다는 것입니다.

 

아당안지. 내가 즉 누가? 붓다가. 안은 안락하게 해준다. 여기서 안은 빨리어 원어로는 모크샤인데 해탈로 번역됩니다. 삼계개고아당안지는 그래서 '부처님이 모든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두카를 내가(부처님이) 해탈하고 해방시켜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 때 부처님이 한 언약입니다. 이 언약으로 불교가 시작됩니다.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결국 이 언약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 언약을 믿지 않으면 미안하지만 불교가 아닙니다. 이 언약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 언약의 주체는 우리입니다. 우리에게 그 언약을 하는 것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는 부처님이 우리에게 주는 언약입니다. 우리는 그 언약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이 언약이 없다면, 부처님의 성도의 의미는 없습니다. 붓다의 성도의 의미와 우리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다릅니다. 붓다의 성도는 우리와 관계가 있어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붓다가 자기 혼자서 깨달았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 때문에 결국 전도선언을 하게되고, 제자들을 전사로 떠나보내게 됩니다. '비구들이여, 나는 모든 속박에서 벗어났다. 그대들도 또한 모든 속박에서 벗어났다. 중생의 이익을 위하여, 중생의 행복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 세상에 대한 자비심을 가지고,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자비심을 가지고, 신들과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  전도선언은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안락과 행복을 위해 전도를 떠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21명의 제자를 전사로 보냅니다. 나는 이들 제자를 전사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은 크샤트리아 출신이고, 전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크샤트리아입니다. 부처님은 철저히 크샤트리아 교육을 받은 전투사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왕자로 생각하니 문제가 생깁니다. 조선이나 중국에서 말하는 그런 왕자가 아닙니다. 전쟁에서 이기는 교육을 받은 사람이 크샤트리아이고, 부처님은 전사입니다. 부처님은 21명의 전사를 전도 말씀과 함께 각 지역에 보냅니다. 부처님은 크샤트리아지만 칼을 놓죠. 그 전사는 자비의 전사입니다. 칼을 놓고 부처님은 자비의 말씀을 전하는 전사가 됩니다. 자비의 말씀은 바로 부처님의 언약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을 두카로부터 해방시켜 주겠다는 것입니다.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 말하는 것은 웃기는 짬뽕입니다. 깨달음을 얘기하는게 불교밖에 없나요?  불교만이 깨달음을 얻는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맨날 깨달음을 얻는데... 내가 오늘 아침 일어나보니, 너무 추워습니다. 그걸 깨닫고는 오늘은 방콕해야지하며 했습니다. 깨달음을 불교의 고유성으로 보면 안됩니다. 이런 착각 때문에 불교를 제대로 못보는 것입니다. 자애심이 없으면 진리를 체현할 수 없다고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은 자애심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조금 지적으로 표현하면, 꾸살라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행입니다. 꾸살라는 중국에서 선善으로 번역했지만, 유익하고 좋은 것이 꾸살라입니다. 끊임없이 내 마음에 꾸살라를 일으키는 것, 그것이 수행이자 명상입니다. 우리가 들숨과 날숨을 관찰하는 것도 그것을 위한 것입니다. 들숨과 날숨의 관찰로 깨달음을 얻으려 하니 아무 것도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미안마있을 때, 탁발을 나간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남루한 옷을 입고 맨바닥에 꿇어앉아 있는 한 아이를 보았습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저 아이는 나에게 한 숟갈의 밥을 주는데, 나는 저 아이를 위해 무엇을 줄 수 있겠는가? 내가 여기 와서 도를 닦겠다고 이러고 있는게 죄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 이야기를 했더니, 그 아이의 전생의 죄업이니 어쩔 수 없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계획에도 없이 나는 그 다음 날 돌아왔습니다. 수행이란 내가 그 아이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 답을 내놔야 합니다. 그게 그 아이의 업이라고! 그런 불교는 세상에 필요없습니다. 이렇게 무책임하고, 이렇게 부도덕하고, 이렇게 타락한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붓다의 일성이 모든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두카를  해탈하고, 해방시켜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바로 붓다의 자애심입니다. 붓다의 마음입니다.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 모두가 다 행복한 삶을 누리게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붓다의 언약입니다. 우리는 그 언약을 믿고 따르면 됩니다. 그 언약을 믿고 정심, 정언, 정행하면 됩니다. 불교의 실행은 8정도의 실행입니다. 8정도는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입니다. 그런데 8개는 너무 길잖아요. 우리는 너무 바빠요. 그걸 줄이면 정심, 정행, 정언인데, 그게 불교의 수행입니다. 우리가 할 건 그것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언약받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정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이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함께 하는 사람은 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내 가사 자락을 붙들고, 내 발자취를 그림자처럼 따른다 할지라도 만약 그가 욕망을 품고 조그만 일에 화를 내며 그릇된 소견에 빠져있다면 그는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고, 나 또한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법을 보지 못하고 법을 보지 못한 이는 나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이 내게서 천리 밖에 떨어져있을지라도 그가 욕망 때문에 격정을 품지 않고 화를 내는 일도 없으며, 그릇된 소견에 빠져 있지 않고 도심道心이 견고해서 부지런히 정진하고 있다면 그는 바로 내 곁에 있는 거나 다름이 없고, 나 또한 그 곁에 있는 거나 다름이 없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법을 보는 자이고, 법을 보는 자는 곧 나를 보는 자이기 때문이다. 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는 나와 함께 하는 것이며, 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자는 나와 함께하지 않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란 부처님의 언약을 믿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부처님의 언약을 믿고 정심, 정언, 정행하면 됩니다. 여기에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다리를 꼬고 앉아 투자된 비행기 삯을 뽑으려 비빈다면 누군들 못하겠는가? 내 양심상 솔직히 말한다면, 너처럼 처자식을 먹여살릴 걱정을 않고 다리를 꼬고 앉아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너만 좋은게 아니라 누구나 그렇게 하면 모든 사람에게 다 좋습니다. 오죽하면 이건희 선생이 세금을 포탈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었다가 3개월만에 풀려나면서하는 말이 '국민들이 정직했으면 좋겠다'였겠습니까? 갑자기 이건희 얘기를 하는데 그게 무슨 관계냐고 하실 것입니다. 이건희 정도로 편안하면 그런 말이 나온다는 얘기입니다. 이 말에 의심이 가고, 수긍하기 어려워 동의할 수 없다면, 이건희처럼 주머니에 3조 정도 있어보면 압니다. 10분만 있으면 바로 그 얘기가 나올 것입니다. 내 얘기가 성인의 말씀입니다. 살아 있는 성인이 혜천입니다. 길거리에 가득찬 것이 성인이라고 여러 번 말했습니다. 우리는 무언가 잘못 이해하고 뒤틀려 있습니다. 그게 두카입니다.

 

정심하지 않는데, 정행하지 않는데, 정언하지 않는데 다리를 꼬고 앉아 무엇을 얻는다고? 그렇지 않습니다. 정심은 모든 생명에 대해 사랑이 가득차는 것입니다. 불자 여러분들에게 전생의 붓다처럼 매의 먹이가 되기 위해 비둘기를 대신해 저울대에 올라가라는 얘기를 안합니다. 나 또한 전생의 붓다처럼 저울에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 앉아 얘기를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행이란 무엇인가? 부처님이 제일 먼저 얘기한 것이 정행입니다. 그것은 보시입니다. 남에게 나누라는 것입니다. 너 혼자 호의호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장 쉽게 말하면 같이 먹고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심성이 그래서인지 보드라운 말을 잘 못합니다. 니 혼자 뒤룩뒤룩 살찌지 말고 함께 살라는 것입니다. 선업을 쌓는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되지 못한다면 아무 것도 못합니다. 그것도 하지 않으면서 다른 것을 한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마음이 나지 않아서 못한다 합니다. 이런 얘기는 선잠이 못깨서 하는 소리입니다.

 

죽어서 없어지는 삭신을 병원에 기증하십시요. 일생에 지은 죄를 한꺼번에 씻는 방법이 이 시신기증입니다. 내가 덤으로 알려주는데, 이렇게 하면 돈도 굳습니다. 병원에서 화장까지 해주니까요.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마지막에 그거 하나만으로도 정행을 한 것입니다. 이 세상 최고의 나눔은 내 육신을 주는 것입니다. 어차피 죽고 나면 땅 속에 묻히고, 땅 속 벌레들 차지가 되고, 불속에 들어가면 불들이 고마워할 것입니다. 어차피 마찬가지입니다. 죽은 뒤 묘에서 살아 나올려고? 우리가 정행한다는 것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간단합니다. 마지막으로 멋진 회향을 하라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반대한다고요? 예의상 하는 반대이니 믿지 마십시요. 반대하지만 돌아서면 굉장히 고마울 것입니다. 내가 가끔 장례식장에 가보면 가장 마음 아픈 것이 거기 혼자 서 있는 남겨진 가족을 볼 때입니다. 우리는 정행한다고 하면 너무 어렵게 생각합니다. 실컷 먹고 싶은 것 먹으십시요. 마지막 한 판 뒤집기가 있습니다. 맨날 선행하는 것은 힘들고 귀찮습니다. 솔직히 맨날 선행하라면 어떤 날은 짜증나기도 합니다.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정행하기 위한 마지막 기회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정심, 정행, 정언하면 됩니다. 요가할 때 다리를 쭉 뻗고 앉아도 됩니다. 다리를 꼬고 앉는 것은 정심하기 위해서입니다. 정심한다는 것은 자애심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약속을 믿고 따르면 됩니다. 달리 할 것이 없습니다. 그걸 모르니 항상 불만족에 쌓여 있습니다. 불교는 부처님의 언약에 기초해 있습니다. 그 언약은 불교의 시작이자 끝입니다. 그래서 언약을 믿고 따르는 것이 불교도, 즉 바우또와입니다. 붓다를 믿고 따른 사람을 인도에서는 바우또와라고 합니다. 우리는 불교도라고 합니다. 부처님의 언약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이 불교도입니다. 부처님의 언약의 말씀을 믿고 따르지 않는다면 사실 우리는 불교도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나의 이 불만족스러운 , 뒤틀려 있는 것을 벗겨서 온전한 행복에 이르게 합니다. 이걸 믿는 것이 불교도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형이상학적이거나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메시지는 간단합니다. 간단하다는 것은 누구나 들으면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도선언을 보십시요. 거기에는 어떤 주석이나 설명도 필요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안락과 행복을 위해서'라는 것이 부처님의 언약의 말씀입니다. 언약의 말씀이라니까 역전 앞 같이 잘못된 단어같지만 그래야 뭔가 좀 확실히 전달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경전 편집자가 성도에 한 말을 탄생게로 바꾼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항상 그 기본에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기본을 무시해요. 기본을 무시하다 보니까 굉장히 부실합니다. 미국이 재체기하면, 일본은 감기에 걸리고, 한국은 앓아 눕는다는 얘기도 기초가 부실해서 작은 것에도 맥을 못춘다는 걸 말하는 것입니다. 왜 구제역이 만연하는가? 고민해야 되는데, 고민을 안하니까 그런 것입니다. 못막았는지 안 막았는지 모르지만 거기에 대한 고민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소 몇 백만마리야 언제든 가겠지만, 대한민국이 얼마나 부도덕한지 그걸보면 알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고민했으면, 거기에 이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도 기본에 충실해야 합니다. 이 때 기본에 충실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이 물과 기름처럼 분리됩니다. 유명 스님들의 융단 폭격에 이리저리 휩쓸리고 어리벙벙해집니다. 간단합니다. 그것은 행복입니다. 내가 너희들을 행복하게 해주겠다. 그러니 그걸 믿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걸 믿으면 돼! 믿는 것, 그게 불교 입니다. 무엇을? 부처님의 언약을 . 부처님의 언약을 믿는 것, 그것이 불교입니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행복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부처님이 행복의 언약을 하는 것입니다. 그 행복의 언약은 두카를 없애고 니르바나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니르바나, 이것이 행복입니다. 단어만 다를 뿐입니다.

 

내일 모레가 성도제일입니다. 부처님이 언약한 날입니다. 우리를 두카로부터 해방시켜 온전한 행복에 이르게 하겠다는 것이 그 언약입니다. 우리는 이걸 믿고 따르면 됩니다.

 

우리는 항상 이분법적입니다. 고차원/저차원을 나눕니다. 그런데 무엇이 고차원이고, 저차원입니까? 우리가 고차원이라고 생각하는 게 진짜 고차원이고, 저차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진짜 저차원입니까? 전에도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피카소의 작품이 아무리 비싼 가치를 지녔다고 하더라도, 아마존 부족들에게 가져가면 토끼 한마리와도 바꿔 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피카소의 그림을 수 백억 주고 살지 몰라도 그들에게는 토끼 한 마리 값도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부족에서 최고의 남자는 사냥을 잘 하는 것입니다.수학이나 물리를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고차원이니 저차원이니 하는 것은 미안하지만 편견입니다.

 

우리는 기본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 기본이 결말입니다. 그 기본이 가장 고차원적입니다. 오늘은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주는 언약의 믿음에 대해서 얘기했습니다. 우리는 그 언약을 믿고 충실히 따르면 됩니다. 부처님의 성도의 의미는 그 언약에 있습니다. 부처님의 성도가 그 언약이 없다면 성도의 의미가 없습니다. 항상 부처님의 언약을 따르면 됩니다. 오늘 강론은 여기까지로 하겠습니다. 

 

 

팔정도(八正道) 

 

1.정견(正見)은 산스크리트(Sanskrit)어 삼약-드르스티(samyak-drsti)를 의미에 맞게 의역한 것으로써 바르게 본다는 뜻입니다. -올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으로 진리를 바로 이해하는 것이다

 

2.정사유(正思惟) 산스크리트(Sanskrit)어 삼약-삼카르파(samyak-samkalpa)를 의미에 맞게 의역한 것으로써 바르게 사유한다 또는 바르게 마음먹는다는 뜻입니다. -올바른 생각 

 

3.정어(正語)는 산스크리트(Sanskrit)어 삼약-바크(samyak-vac)를 의미에 맞게 의역한 것으로써 바르게 말한다는 뜻입니다. 네가지 선한 구업(口業)업을 뜻합니다. -곡학아세하지 않는다 

 

4.정업(正業)은 산스크리트(Sanskrit)어 삼약-카르마-안타(samyak-karma-anta)를 의미에 맞게 의역한 것으로써 바르게 일한다는 뜻입니다. 세가지 선한 신업(身業)을 뜻합니다. -올바른 행동 

 

5.정명(正命)은 산스크리트(Sanskrit)어 삼약-아지바(samyak-ajiva)를 의미에 맞게 의역한 것으로써 바르게 생활한다는 뜻입니다. 불교에서는 정당한 방법으로 적당한 의식주를 구할 것이 권해지고 있다. -올바른 삶-생을 유지하는데 남의 생명의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 

 

6.정정진(正精進)은 산스크리트(Sanskrit)어 삼약-브야야마(samyak-vyayama)를 의미에 맞게 의역한 것으로써 바르게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불교에서는 끊임없이 노력하여 물러섬이 없이 마음을 닦는 것이 권해지고 있다. -올바른 노력, 정당한 노력 

 

7.정념(正念)은 산스크리트(Sanskrit)어 삼약스-무르티(samyak-smrti)를 의미에 맞게 의역한 것으로로써 바르게 기억한다는 뜻입니다. -올바르게 집중해서 아는 것, 즉 깨어있는 것. 정념수행은 이런 뜻 

 

8.정정(正定)은 산스크리트(Sanskrit)어 삼약-사마디(samyak-samadhi)를 의미에 맞게 의역한 것으로써 바르게 집중한다는 뜻입니다.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라는 뜻으로써 삼매(三昧)라는 음역(音譯)을 통해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마음이 올바르게 안정되어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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