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8. 19. 18:20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부처님의 권화權化
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 불기2555년 1월 2일
오늘 강론의 주제는 부처님의 권화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근본적인 이해를 하기보다는 후기 불교에 대해서만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일국의 왕자로 태어나고, 마치 권력과 부귀영화가 보장된 왕의 자리를 물리치고 출가를 선택했다는 식의 단순한 이해 역시 부처님에 대한 근본 가르침을 잘못 인도하는데 기여합니다.
부처님은 크샤트리아라는 카스트로 왕족 출신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부처님이 왕족이라는 것보다는 크샤트리아라는 카스트 출신이라는 것에 방점을 두어야 합니다. 크샤트리아는 칼을 들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무사계급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당시에는 크샤트리아라는 전문화된 무사계급만이 전쟁에 참가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부처님은 크샤트리아 출신입니다.
중국의 경우도 춘추전국시대까지만 해도 농민은 전쟁에 동원될 수 없었습니다. 군자만이 전쟁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유교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그렇다고 중국의 문화형성 과정을 잘 아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유교를 잘 아는 이이李珥도 아마 중국의 문화 형성 과정에 대한 이해는 부족할지 모릅니다. 원래 군자란 제후의 자식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원래 왕은 정치적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왕도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치는 누가 하는냐? 제후가 합니다. 주나라 시대에 왕, 즉 주왕의 역할은 사제 즉 하늘에 제사 지내는 것입니다. 하늘의 제왕이 천제天帝, 그리고 왕은 그의 아들 천자天子입니다. 왕은 하늘의 왕과 소통할 수 있는 인간의 왕인 것입니다.
예禮라는 것도 왕이 하늘에 제사 지내는 의례를 말하는 것입니다. 군자君子는 원래 제후의 자식을 말합니다 시대가 지나면서 제후의 자식인 군자의 지위를 잃은 사람들을 사士라고 한 것입니다. 중국의 고대에서는 이 군자만이 전쟁에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이 때 전쟁의 모습을 보면 이렇습니다. 전쟁을 만나 적에게 화살을 쏩니다. 그런데 첫번째 화살이 빗나갑니다. 그래서 두번째 화살을 쏘려고 겨누죠. 그런데 이 때 적이 말합니다. "자네가 다시 활을 쏘는 것은 예가 아니지,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내 차례일세."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두 말할 필요없이 상대의 활을 맞고 죽은 것입니다. 농민이 전쟁에 참가하는 것은 전국시대부터입니다. 맹자가 예가 무너졌다고 한탄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너도 나도 전쟁에 참가하여 예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크샤트리아 출신입니다. 크샤트리아는 근본적으로 전문 무사집단입니다. 부처님을 단순히 왕족이니 또는 왕자라고 생각하는데, 이렇게만 보면 불교에 대해 잘못 이해하게 됩니다. 불교를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부처님은 단순히 왕족 출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무사 신분의 부처님이 왜 칼을 내려 놓았는가를 보야야 합니다.
내 얘기가 어떤 사람에게는 불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내 상식에 반하고, 내가 존경하고 있는 분을 불인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특별히 내가 거론하고 비판하는 그분들과 원수진 일이 있어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는 점을 밝혀 두기 위함입니다. 오늘 강연의 주제가 부처님의 권화입니다. 권화權化 혹은 권능權能 은 요새는 잘 쓰지 않지만, 원래 불교에서 쓰던 전문 용어입니다. 좋은 것은 잊어버리고, 안 좋은 것만 가져다 쓰는게 요새 현실입니다.
부처님 시대에 부처님을 엄청나게 싫어하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부처님만 보면, 호랑말코니 시기꾼이니 비난을 쏟아냅니다. 이 세상에서 100% 존경 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100% 비난받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것은 어느 누구에게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비난받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도리어 이상한 것입니다. 내가 비난받는다는 것은 그만치 내가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돌아가, 그 할머니는 부처님 얘기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입니다. 좋아서가 아니라 싫어서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는 시장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도 싫어하는 부처님을 시장 입구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얼른 오른 쪽 옆길로 돌아 갑니다. 그런데 어찌되었는지 그 곳에서도 붓다가 걸어 나옵니다. 그래서 다시 왼쪽 골목으로 돌아가니 역시 그 곳에서도 붓다가 나옵니다. 할머니는 오늘 재수 옴붙었다 싶어 되돌아서 집에 돌아가려는데, 그 곳에서도 붓다가 나타납니다. 놀라서 주변을 돌아보니 온 사방에 붓다가 가득합니다. 그래서 하늘을 쳐다보니 그 곳에도 붓다가 있습니다. 땅을 내려다보아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붓다를 보지 않으려 순바닥으로 눈을 가립니다. 그런데 손가락 사이사이로 붓다가 나타납니다. 눈을 감으니 심지어 눈꺼플 안에도 붓다가 보입니다. <메트릭스>라는 영화를 보면 이런 비슷한 장면이 나옵니다. 검은 옷를 입고 안경 쓴 사람들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죠. 그래서 할머니는 결국 눈물을 터트리고 맙니다. 이런 걸 권화 또는 권현權顯이라고 합니다. 지난 강론에서 아난존자의 기도를 듣고 마탕카녀 집에서 지붕을 뚫고 아난 존자를 사원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도 권화 또는 권능의 예입니다.
오늘 할머니 얘기는 할머니가 부처님을 싫어했는데 심지어 만나고 싶어하지조차 않았는데, 부처님이 권화를 보였다는 것입니다. 할머니가 얼마나 울었을까? 우리가 경전을 읽으면서 그저 내용만을 보아서는 안됩니다. 경전을 읽으면서 사색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명상입니다. 부처님의 얘기나 말씀을 읽으면서 그것을 사색하는 것이 진정한 명상입니다. 할머니는 부처님의 권화를 보고 눈물을 흘립니다. 그 눈물을 기뻐서 흘린 눈물입니다. 할머니는 진정으로 부처님의 권화의 은혜를 입은거죠. 그런데 우리는 정작 부처님의 권화의 의미를 읽지 못해요. 우리는 그저 열심히 기도하는데... 이상하지 않나요? 할머니는 부처님을 싫어하는데 권화를 보고, 권능의 은혜를 입었죠. 할머니가 부처님의 권화의 은혜를 입고, 우리가 입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오염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으로부터? 우리가 붓다를 인간 붓다, 마음이 부처, 불상이 붓다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즉 이런 잘못된 견해에 오염되어 부처님의 참 모습을 못보는 것입니다. 인간 붓다, 마음이 부처, 불상이 부처라는 이 세 가지 잘못된 견해를 씻어야 부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붓다라고 하면, 다르마로서의 붓다, 진리로서의 붓다를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 붓다가 아닙니다. 부처님도 이 부분을 강조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이 보리수좌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근본적인 것을 잘못 이해해 왔습니다. 근본적인 것을 잘못 이해하니 나머지 역시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즉 붓다에 대해 잘못 이해하게 됩니다. 마치 첫 단추를 잘못 끼워 나머지 단추 끼우는 것이 어긋나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이 보리수좌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얘기에 대해 잘못된 이해가 있습니다. 정말 보리수좌에서 깨달음을 얻었을까요? 그렇다면 그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그렇게 되면 근본적으로 하나의 의문이 남습니다. '깨달아야 할 진리가 따로 존재하는가?'입니다.
부처님이 출가하게 된 동기는 두카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크샤트리아로 전사계급인 부처님의 출가 이유가 두카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인도의 가장 강력한 신 인드라는 전사戰士의 신입니다. 즉 인드라는 크샤트리아의 신이라는 얘깁니다. 원래 기독교신인 야훼도 고대에서는 전신戰神입니다. 그래서 야훼가 죽이고 살육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려지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출가가 두카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두카를 중국에서 괴로움이라는 고苦로 번역했습니다. 이런 번역에 대해 잘못된 번역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좋은 번역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두카의 원래 의미는 불만족스럽고, 뒤틀려 있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의 출가는 바로 이걸 제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흔히 고의 예로 일컫는 노병사老病死는 부처님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인도나 고대 그리스 등에서도 이것에 대해 말합니다. 인도, 페르시아, 고대 그리스인들은 같은 집단의 분파입니다. 러시아 코카서스 지방에서 어떤 이유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리스, 인도, 이란 등지의 세 갈래로 갈라져 나오게 됩니다.
부처님의 핵심은 두카를 제거하고, 평화로움을 얻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처님이 출가한 이유입니다. 크샤트리아 전사계급인 부처님이 칼을 내랴 놓은 이유가 그것입니다. 부처님이 보는 세상은 그렇습니다. 그 당시 인도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합니다. 강력한 국가들이 정복전쟁을 펼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마가다, 코쌀라 제국이 등장하죠. 쌍가란 원래 이런 정치체제를 뜻하는 말이죠. 쌍가가 지금은 교단을 의미하는 용어이지만, 사실 쌍가가 그 당시 어떻게 운영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습니다. 그 당시의 국가체제는 쌍가 또는 가나였습니다. 마가다제국이 코쌀라를 장복하고 밧찌연합국을 격파합니다. 원래 불교는 마가다제국에서 출발했지만, 마가다 제국은 불교를 부정합니다.
부처님은 크샤트리아 출신입니다. 크샤트리아는 전문적으로 전쟁을 전담하는 계급입니다. 아마 부처님도 그런 신분이므로 열심히 체력단련을 했겠죠. 이런 내용은 경전에도 나옵니다. 그가 그런 훈련을 받은 것이 왕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크샤트리아여서 입니다. 크샤트리아는 전투에 임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무예를 닦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어느 날 그걸 놓고 갑자기 출가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보리수좌에서 깨달음을 얻죠. 여기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다르마를 확인했다는 것입니다.
다르마는 무엇 하나로 정의하기 어렵습니다. 여러 의미가 있습니다. 우주의 근본질서, 천체의 운행질서, 만유 존재의 질서가 다 다르마입니다. 보리수좌에서 깨달음을 얻은 후,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르마를 확인한 후, 처음으로 5비구를 만나죠. 그 때 붓다는 나의 이름(고타마 싯타르타)을 부르지 말라고 하죠. 그리고 당신을 '붓다'라고 합니다. 바카리 비구에게 '썩은 몸을 보아 예배해 무엇하겠는냐? 진리로서의 붓다를 보라'는 것도 그것입니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다르마, 즉 진리를 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진리입니다. 즉 다르마(진리)로서의 붓다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을 보라고 얘기합니다. 부처님은 다르마를 보라고 하는데 말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보라는 것은 다르마를 보기 위한 단계로서의 마음을 보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보라는 것이 궁극의 단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 마음을 보라고 하니 그 궁극인 다르마를 못보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명망있는 스님이 있습니다. 그 분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그분을 존경하는 분들께 혼날까봐 말입니다. 그 스님이 어느 날 법문을 하는데... 사실 이 법문이라는 용어도 맘에 안 듭니다. 법문은 붓다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 외는 부처님의 법문을 해석하고 전하는 강론입니다. 내가 지금하고 있는 이 강론 역시, 부처님 얘기를 내 관점에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법문을 한다면 그는 교주입니다. 교주가 아니면 법문을 할 수 없습니다.
그 분이 육조혜능 스님의 말씀을 인용하며, "선한 마음을 일으켜서도 안되고, 악한 마음을 일으켜서도 안된다. 이것이 선이다"고 얘기합니다. 육조혜능은 오조홍인의 문하로 역시 오조의 문하인 신수대사 게송을 주고 받았지만, 훨씬 탁월한 견식을 나타냈다고 하지만, 신수와 혜능은 만난 적이 없어, 후대에 지어낸 허구적인 얘기입니다. 혜능이 홍인에게 갔을 때 이미 신수는 없었습니다. 오조법연에서 육조 혜능으로 법이 전한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혜능이 오조 홍인스님과 하직하고 황매산을 떠난지 며칠이 지나도 홍인스님께서 전혀 당에 오르시지 않자 대중이 물었다. “어디 편치 않은 곳이 있으십니까.?” "아니다 의법이 이미 남쪽으로 갔을 뿐이다"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이었다. 대중들은 모여서 일시에 공사를 부치고 그 무지몽매한 방아지기 혜능이란 놈을 잡아 없애도록 공론 하였다. 이렇게 공사가 끝나자 사방으로 사람을 풀어 찾아 쫓는데 다들 도중에 포기하나 한 사람은 끝내 포기없이 혜능을 쫓았다. 혜능이 남쪽 대우령에 이르렀을 때 선사품장군을 지낸 바 있는 진혜명이란 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너 이놈 조행자 거기 있거라. 도망치면 살지 못하리라.” 이 소리를 들은 혜능은 얼른 그 옷과 바루를 바위 위에 올려 놓고,“이것은 믿음의 표시인데 누가 힘으로 감히 이것을 다투겠는가?” 하고 숲에 숨었다. 그때 혜명이 이르러 의발을 보고 너털 웃음 웃으면서, “목적이 바로 이것에 있으니 사람을 해친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하니 혜명이 엎드려 말한다. “행자여, 나오소서, 나는 법을 위하여 온 것이요 의발을 탐내어 온 것이 아닙니다.” 그 때 혜능이 나와, "불사선(不思善), 불사악(不思惡)하라. 바로 이러할 때 어떤 것이 명상좌의 본래 면목인고?" 다그쳐 물었다. 이에 혜명이 깨닫고 “제가 그동안 황매에 있었으나 실로 제 본래 면목을 알지 못하였더니 이제 가르침을 받잡고 마치 물을 마셔보고 차고 더운 것을 스스로 아는 것 같습니다. 이제 행자께서 저의 스승이 되어 주십시오.” 하였다. 이에 대사는 묵묵히 허락하고 “네가 만약 그러하다면 나를 도와 황매의 문인을 잘 지키어 나아가라.” 하시고 길을 떠났다. 이후 676년 광동성으로 돌아간 혜능은 열반경의 대가인 종법사로 부터 구족계를 받고 37년간 널리 가르침을 펼쳤다.]
다시 돌아와 그 스님은 '불사선(不思善), 불사악(不思惡)'에 대해 ,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알도 생각하지 마라'는 해석을 덧붙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선한 마음을 일으켜서도 안되고, 악한 마음을 일으켜서도 안됩니다. 이것이 선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위배됩니다. 부처님 얘기는 꾸살라(kusala: 선)를 끊임없이 일으키라는 것입니다. 꾸살라의 반대말은 아꾸살라(akusala)입니다. 선의 반대말은 악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꾸살라는 악이 아니라 불선不善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또한 아꾸살라를 일으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善이라고 번역되는 꾸살라, 꾸살라를 일으키는 것, 그것이 수행입니다. 꾸살라를 일으켜야만 다르마를 볼 수 있습니다. 꾸살라는 청정한 마음(淸淨心)입니다.
할머니 얘기를 하다가 웬 봉창 두드리는 얘기인가 할 것입니다. 할머니는 부처님을 싫어했는데 어떻게 부처님의 권화, 권능을 입었는가? 그 할머니의 마음이 청정했기 때문입니다. 그 얘기는 차리리 부처님을 미워하고 싫어한다고 할지라도 부처님의 권화를 입지만, 잘못된 견해를 가지면 영원히 구제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말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두카, 즉 뒤틀려 있는 것을 제거하려 하였습니다. 두카는 실이 얽혀서 풀어낼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꾸살라, 아꾸살라 얘기를 합니다. 불교에서는 선악의 이분법적 대립구조를 말하지 않습니다. 불교에서는 악의 개념이 없습니다. 왜냐구요? 악은 돌이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저식으로 말하면 루비콘강을 건넌 것이 악입니다. 그래서 꾸살라는 선이며, 그 반대말 아꾸살라는 (악이 아니라) 선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선하지 않은 것은 회심하면 선한 것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善과 불선不善입니다. 누구에게도 선한 면도 있지만, 불선한 면 역시 있습니다.
인간세계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만은 안 변합니다. 같은 류는 끌어당기고, 다른 류는 밀어내는 것입니다. 유식한 말, 사자성어로 유유상종이 그것입니다. 왜 그 할머니가 부처님을 싫어하고 미워했을까요? 유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건 변하는 게 아닙니다. 이명박 정부가 며칠 전 몇 분에게 감투를 주었습니다. 언론을 보니 그걸 비난하는 분도 있던데, 비난할 일이 아닙니다. 같은 유가 당기는 건 당연한 것입니다. 그걸 부정하려면 정치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같은 유를 당기고, 다른 유를 밀어내는 것은 어느 시대고 안 변합니다.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것은 선과 불선의 개념에 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은 선한 면과 불선한 면이 있는 것입니다. 야누스라는 표현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끊임없이 선을 일으키라는 것입니다. 선한 마음이 커지면, 불선한 마음이 줄어듭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선과 불선을 가릴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국 선종의 치명적 약점은 선과 불선에 대한 기준이 없다는 것입니다. 선한 마음을 일으켜서도 안되고, 악한 마음을 일으켜서도 안된다고 말합니다. 도대체 마음을 어디에 두라는 말입니까? 어느 가수의 노래 가사처럼 '내마음 갈 곳을 몰라'입니까. 이것은 그저 말일 뿐, 실제적인 것에서은 이러할 수 없습니다. 공자님도 단어가 현실을 규정한다고 했습니다. 저번 강론에서 '함이 없이 한다'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런 이치입니다. 함이없이 한다는 것은 무위無爲를 말하는 것인데, 무위는 '어떠한 움직임도 없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 움직임이 없는데, 움직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존재할 수 없는데 존재하는 것, 그것이 신이라고 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을 증명하는데 이걸 써먹었죠. 미안한 얘기지만, 그 명제는 실제 증명해낼 수 없을 뿐입니다. 존재할 수 없다 또는 존재한다는 것은 실재할 수 없습니다. 두카(뒤틀려 있다는 것)는 바로 이것입니다. 선과 불선은 엄연히 실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과 불선은 불에 우유를 넣듯 증명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진리(다르마)를 보는 자가 나를 본다고 말했습니다. 그 얘기는 인간 붓다를 보지 말라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붓다를 보지 말라라는 것입니다. 불상으로붓다를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리를 보려면 꾸살라, 즉 선한 마음을 일으켜야 합니다. 할머니는 마음이 청정심입니다. 청정하다는 것은 오염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즉 붓다에 대해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부처라면 마음이 언제나 기쁨이나 평화로 넘쳐나야 하지 않을까요? 마음을 절대화시키니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분법적으로 생각합니다. 마음과 몸, 정신과 물질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마음과 몸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과 몸은 따로 존재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부처님이 아나타(무아)를 얘기한다고, 마음을 절대화합니다. 그러니 이런 얘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차라리 모르면 배우면 돼! 차리리 모르면 알면 돼! 그러나 잘못 배운 것은 고치기 어렵습니다.
나는 전에도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불편한 진실'이라고 말입니다. 진실은 불편합니다. 몰랐으면 편한데, 알고 나면 불편한게 진실입니다. 우리에겐 이런 것이 너무 많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 또는 내가 좋아하는 분의 말에 반反하면 어떻습니까? 뭐 어때? 기분 나쁘지! 속으론 그래 너 많이 알아 행복하겠다라고 할지도 모르죠.
박정희 대통령이 전북도청에 업무보고를 받고난 후 물었습니다. 여기에 유명한 음식이 무엇이냐고? 그랬더니 콩나물국밥이 짱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럼 먹지! 각하께서 문무백관을 대동하고 콩나물 국밥집을 갔죠. 그의 장점은 겉치레를 잘 안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잠바를 걸치고 가는데, 누가 토끼처럼 간을 빼 놓지 않은 다음에야 양복을 입고 따라 나서겠습니까? 더 추리한 복장을 하고 나섰겠죠. 그런데 이 콩나물국밥집 주인 할머니가 입이 거칠기로 유명했답니다. 그래서 할머니는 각하를 보자마자 대뜸 하는 말 "어쨔? 이 자식은 박정희 닮았네" 그에 대한 박정희 대답" 아니오, 박정희가 나를 닮았겠죠?" 적어도 일국의 대통령이 될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합니다. 시장에 가서 연출로 떡뽁이 먹지 말고. 이 때 할머니가 쐐기 멘트를 날립니다. " 야 이 자식아! 박정희 반만 닮아라!" 그 랬더니 박정희가 너무 기뻐 그 이후로는 전주만 가면 그 집을 들렀다는 얘깁니다. 박정희를 진정으로 알아준 것은 그 할머니라는 것입니다.
진실은 굉장히 불편합니다. 몰랐을 땐 행복한데, 알고 나면 불행하죠. 그것이 두카입니다. 두카는 뒤틀려 있기 때문입니다.꾸살라와 아꾸살라가 있습니다. 우리에겐 꾸살라의 마음도 있지만 아꾸살라의 마음도 있습니다. 내 친구가 내가 좋아하는 처녀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그 처녀 앞에서 바나나껍질을 밟고 쓰러졌다면 이때 기분이 어떨까요? 어매 고마운 것! 겉으로는 다치지 않았는지 손을 잡아줄지 몰라도 속으로는 그런 마음일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는 이런 마음이 "마 나 빼고는 없겠죠?"
청정심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내 마음 속의 꾸살라를 끊임없이 일으키는 것입니다. 내 마음 속에 꾸살라를 끊임없이 일으키면, 아꾸살라가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기쁨 두배 축협'은 좋은 광고입니다. 불선한 마음은 선한 마음을 키우면 없어집니다. 미워하는 마음은 사랑하는 마음을 키우면 없어집니다. 미워하는 마음이 있다가도 상대방이 헌신적인 사랑을 보여주면, 미워한 마음을 보일 필요 있을까요?
인간이고 동물이고 같습니다. 전국시대 외양은 '군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고, 여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한다'고 했습니다. 군자에게 자기를 알아준다는 것은 남자간의 사랑입니다. 내가 좋아하면, 심지어 고양이나 개조차도 나를 좋아하고 반겨줍니다. 식물도 자기를 좋아하고 닦아주고 하는 사람에게는 반응을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움츠린다고 하지 않습니까? 내가 쳐죽일 죄를 졌더라도, 그걸 뉘우치고 사랑하게 되면 달라집니다. 할머니가 부처님을 싫어하고 미워했지만, 권화와 권능의 은혜를 입으신 것과 같죠. 다르마로서의 붓다를 얘기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교환의 원리가 작동합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입니다. 함무라비 법전의 이 말은 인간사회를 말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눈에는 시여입니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한 것도 시여입니다. 그것이 권화이자 권능입니다. 차라리 뒤틀려 있는 것 보다는 모르는게 낫습니다. 그것보다는 없는 게 낫습니다. 없으면 없는대로 삽니다. 이빨이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 얘기가 있잖습니까? 충치 먹은 이빨을 달고 사느니 차라리 없는게 낫습니다. 우리가 꾸살라를 일으켜야 다르마를 봅니다. 그래야먄 진정한 붓다를 봅니다.
우리가 착각을 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부처님이 다리를 꼬고 앉았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깨달음은 기본적인 사고의 틀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고행을 관두면서 "지난 날 잠부나무 아래에서 더 행복하지 않았던가?"라고 말합니다. 잠부나무는 돌복숭아 나무입니다. 어린시절 유모와 함께 축제를 보라갔는데, 붓다는 따라가지 않고 농부들이 밭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밭을 갈면서 땅속의 벌레가 드러나자 새가 그걸 잡아먹는 걸 보고 마음 아파합니다. 장자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오죠. 까치를 쏘려고 화살을 겨누고 보니, 그 까치는 버마잽이를 겨냥하고 있죠. 그런데 그 바마잽이는 벌레를 잡아먹으려 겨냥하고 있습니다. 까치는 자기가 누구에겐가 표적이 되는 것도 모르고 먹이사냥에만 열중하고 있습니다. 장자는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어느 놈이 자기를 잡으려 화살을 당기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화살을 내팽개치고 돌아갔다는 얘깁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그걸 보고 부처님이 자애심을 일으키고, 잠부나무 아래서 살아 있는 모든 생명에게 자애심을 보입니다. 이것이 자애명상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고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차라리 모르는 것만 못합니다. 할머니가 부처님의 권화와 권능의 은혜를 입은 것은 순수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강론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권화權化(원어 avatāra ) :불교 및 인도 사상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신(神)이나 부처가 인간세상에 어떤 권세의 상징으로 나타나는 것을 가리키는 말. 부처가 중생을 구하기 위하여 임시로 인간이 되어 나타나는 일
보유: 바빠서 못 올렸던 지난 해 9월 첫주 일요법회 강론을 올립니다. 되는 일은 걱정말고, 안되는 일도 걱정 않는 한 해가 되길 기도합니다.
은희 골든 32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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