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바팔리의 공양|…… 혜천스님설교

2018. 9. 2. 13:3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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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바팔리의 공양

혜천스님 설교 불기2555년 1월 23일


 

 

어느 날, 붓다가 베살리에 들린다고 하자 암바팔리가 오백명의 미인을 대동하고 영접하러 나섰다. 여기서 오백명은 상징적인 숫자이기는 하지만, 어떻든 그렇게 많은 수의 미녀들이 붓다를 찾아 온다고 하자 붓다는 다음과 같이 단속했다. "비구들아, 머리를 숙이고 그녀들을 보지마라, 마음을 단속하고 경계를 게을리 마라"  이윽고, 암바팔리와 오백명의 미녀가 도착하여 붓다에게 다음날 점심 공양에 모실 뜻을 전했다. 이에 붓다는 흔쾌히 수락한다. 이들 일행이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 베살리의 지도자들이 방문했다. 그들도 내일 비구와 오셔서 공양받기를 간청한다. 그러나 붓다는 이미 암바팔리와 약속을 했으니 곤란하다고 하였다. 그러자 베살리 지도자들은 암바팔리를 찾아가, "많은 재물을 줄터이니 우리에게 양보하라"고 제의하지만, 암바팔리는 한마디로 거절해 버린다. 그러자 지도자들은 격분하여 즉각 시장을 철시하고, 성문까지 폐쇄하는 조치를 내린다.

 

어느 시대나 권력은 무섭다. 순응하는 사람에게는 관대하지만, 그들의 명에 거역하면 무서워 짐. 이것이 인간의 본성임. 돈, 명예, 권력, 사랑... 이것을 물성이라고 하는데, 암바팔리는 이 모든 것을 거절해 버린 것이다. 그런데 왜 붓다는 비구에게 그들, 암바팔리와 오백미녀를 보지 못하게 했을까. 암바팔리는 경국지색이었다고 한다.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에 인근에서 쟁투가 벌어졌다. 그래서 더 이상의 쟁투를 막기 위하여 국가정책으로 기녀가 되었다. 암바팔리로 인해 빚어진 젊은이들의 분쟁을 해소하는 것이 문제였는데 그들이 모두 권문세가의 자녀들이었으니 간단치 않았을 것이므로 지금 보아서는 어처구니 없는 얘기지만, 혼자 차지하지 않고 여럿이 공유하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다. 우리도 불과 얼마전까지 박통시절 등, 귀한 국빈이 오면 이런 대접이 있었다고 하지 않는가.

 

국가 지도자들의 분노는 그녀가 기녀였기에 더 하였을 것. 막 도착한 붓다와 그 일행을 일개 기녀가 대접하는 것은 국격에 해가 된다고 생각 하였음. 그렇지만, 정작 국격을 떨어뜨리는 부류는 그들이었죠. 도둑 집안의 가훈이 정직과 성실이듯이..., 이렇게 국가 지도자들이 나서는 것은 그럴만한 배경이 있었음. 베살리는 바찌공화국의 수도였는데, 어느 해 가뭄과 흉년, 전염벙이 들어 국가 전체가 괴멸직전에 처하였다. 이를 붓다가 멸망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함. 사람이 죽어도 그 시신을 파묻지 못할 정도였는데, 지금도 우리는 구제역으로 260만마리의 소돼지를 살처분하였는데, 2600년전이었으니 오죽했으랴. 면역 수의사로 유명한 우희종 박사는 이번 구제역 처리를 두고 조류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전염되 듯  인수(人獸)공통 전염병을 불러올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음. 어쨌든 이 대명천지에도 구제역을 막을 방법은 없어 보임. 그러니 2600년 전에는 어찌 막았을 것인가. 힌두신 등 종교지도자들에게 도움을 청해봤지만 효과가 없었음. 그 때는 장로들이 공통으로 통치하고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마가다국의 붓다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함. 이에 붓다는 아난존자에게 발우와 축복경을 주며 먼저 가게 하였음. 아난은 먼저 바찌공화국에 도착하여 발우에 물을 담아 뿌리면서 축복경을 읊기 시작하였음. 이윽고 붓다가 공화국의 경계에 들어서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였고, 한참을 내리던 비가 멈추자 병자들이 회복됨. 국가 재난 사태가 회복된 것임.

 

이런 붓다를 일개 기녀(창녀)에 불과한 암바팔리가 대접한다고 했으니 지도자들이 용납하지 못한 것도 이해가 됨, 그래서 시장철폐와 성문폐쇄라는 엄청난 조치를 내렸는데, 암바팔리는 이에 굴하지 않고 땔감에 없어 이불에 기름칠을 하여 땔감으로 쓰면서도 물러서지 않았음. 그렇다면 왜 붓다는 암바팔리의 공양을 받았을까. 붓다는 출가 전에 인도 카시산 비단을 입었음. 지금도 비단으로 유명한 곳인데 이것으로 옷을 해 입으면 하늘하늘 하여 젖꼭지가 다 보일정도임. 지금으로 보자면 삼청각이나 대원각에서 초청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여기는 연예인들보다 더 이쁜 여자들이 많았다. 어쨌든 그 초청에 응한 것은 '진심'때문이었다. 암바팔리는 나중에 살해당해 죽었는데 아마 붓다를 배반했던 데바다따를 추종하던 세력의 소행으로 추측하고 있음. 암바팔리는 많은 대중들앞에서 데바다따의 잘못을 추궁하고 망신을 주었음. 그래서 그의 추종자에게 살해당한 것인데 왜 붓다가 암바팔리의 공양을 받는가 하는 문제는 여기에 있음. '차라리 암바팔리가 될지언정 데바다따가 되지 말라'는것임. 데바다따는 붓다의 제자 중 누가 봐도 출중할 정도로 가장 뛰어났고 성실하였음. 데바다따는 아난다의 친형으로 붓다의 사촌 동생이었음. 다른 설에는 붓다의 두번째 처였던 야소다라의 후예란 말도 있음. 어쨌든 붓다는 그런 그를 질책하였음.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보다 중요함. 진심이 그것임. 암바팔리는 기녀였지만, 그녀에게는 진심이 있었음. 우리는 꿈이 있어 마음을 꾸밈. 참인것 처럼 보이려고 애씀. 붓가가 데바다따를 꾸짖은 이유도 바로 이 진심의 문제였음.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명예를 바라는 데바다따의 마음을 암바팔리가 간파하였던 것임. 우리는 항상 세상을 살면서 본 마음을 감추고 끊임없이 꾸미는 것을 배움. 이런 겉보기에 근사한 데바다따의 모습을 보고 마가다국의 아세사왕 등 사람들이 동요하였지만, 끝내 데바다따는 지옥의 불구덩이로 떨어짐. 잠시 속일수는 있어도 영원히 속일수는 없었던 것임. 끝내 아세사 왕도 데바다따와 결별하게 됨.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진심임. 행복도 진심에서 시작되는 것임. 그런데 우리는 진심을 두려워 함. 우리는 무언가를 감추고 살아왔음. 기본적으로 물성을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임. 언제가 장기려, 법정, 김수환 세명을 주제로 바보 시리즈로 만든 책을 보았음. 위 세분은 바보가 아님. 누릴수 있으나 누리지 않은 분들임. 명동성당은 로마 바티칸 대사가 상주하는 바티칸 땅임. 그래서 공권력이 허락없이는 들어갈 수 없었음. 이들은 가지려고 했으면 가질 수 있었음. 사막민족에게는 무엇보다 물이 중요하지만, 캄보디아의 호수족에게 물은 아무것도 아님. 우리가 그분들, 장기려, 법정, 김수환을 존경하는 것과 현실은 다름. 인간의 근본적 문제는 사는 것임. 붓다도 인간의 가장 큰 고통으로 굶주림을 들었음. 사는 문제를 빼놓고 다른 문제는 없음. 살기위해 공부하고, 친구를 사귀고, 사랑하고, 결혼하고, 출산을 하는 것임. 다 살기 위한 것들임. 인생이 뭐 이렇게, 이 정도로 무미 건조한가? 하지만 그래도 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마음의 안식이 없음.

내 아이가 아파 우는데 돈이 없어 병원을 못간다면 마음이 무어고, 종교가 무엇인가. 사랑도 내가 마음이 편해야 가능함.

 

예전에 어떤 할머니가 내게 와서 말씀을 하시는데 나는 그를 스승으로 삼았음. 그녀는 유복하게 살다가 IMF를 맞아 빚보증을 잘못 선 아들 덕분에 살던 집은 물론 시골의 전답을 모두 팔아야 했음. 무능한 남편과는 못 살겠다며 며느리도 떠나고 지하셋방에서 살게 되었다고 함. 그러다 죽으려고 강에 두번이나 빠졌는데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함. 손자들이 눈에 밟혀서, 본인 몸도 좋지않음에도 손자들을 키워야 했으므로 죽지도 못했는데, 지금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강으로 가는 것 뿐이라고 말씀하시는 그 할머니에게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할 지 고민스러웠습니다. 무슨 말로 위로와 희망을 주겠는가. 그래서 "할머니, 기도하세요, 3년 안에 아드님이 일어나게 되니 기도하십시오.." 그러자 그 할머니 얼굴에 화색이 돌았습니다. 그 할머니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이었음. 믿음의 행복이 아니었음.

 

모든 일의 출발점은 진심임. 가식이 아님, 바보예찬도 하지만 가식은 세상 사람을 속이는 것, 우리는 진심을 왜곡함. 물성없는 행복은 없음. 이것을 욕망이라고 하면 안됨. 욕망은 진실과 등지는 것임. 내 가족을 위해, 내 명예, 사랑, 돈을 위해 노력하는 것, 이것을 어찌 욕망이라 할 것인가. 붓다는 수입을 3등분하라 하였음. 1등분은 저축하고, 1등분은 생활비로 쓰고, 나머지 1등분은 이웃과 나눠쓰라고 하였음. 이것은 다른말로 현재와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것임. 붓다의 현재는 곧 미래임. 과연 우리는 얼마만큼 미래를 준비하는가. 대한민국 사회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없음. 아직도 과거에 얽매여 있음. 우리가 현재를 살게 되면 영어, 중국어를 해야 함. 물성과 욕망을 견주어볼때, 진심을 속이고, 거짓을 참이라고 하는 것임. 붓다는 암바팔리의 진심을 알기에 공양을 받음. 인간의 기본요건은 진심이고 거기에서 행복을 느끼게 됨.

 

우리가 스스로의 진심을 스스로 속임. 그래서 남에게 속임을 당하면 길이 있으나, 나에게 속임을 당하면 길이 없다고 하였음.  스스로가 무엇을 진실이라고 믿으면 길이 없게 됨. 인간은 기억의 동물임. 자기 생각이라는게 없음. 그 생각틀이 진심에서 나와야 하는데 대부분 거짓에서 나옴, 안심정려 하지 못함. 진심에서 나오면 안심정려임. 안심정려는 모든 두카로부터 벗어난 것을 뜻함. 우리가 물성도 긍정해야 벗어날 수 있음. 다른 차원에서 보자면, 암바팔리가 방문하였을때 '다 수구려'한 것은 마음을 어지럽히는 중에 아름다운 여인만큼 더 어지럽히는 것은 없다고 함. 당시 비구들은 혈기왕성한 남자임. 나무토막이 아닌 바에야 그녀들의 아름다움, 향기를 못느끼는 것은 송장밖에 없음. 그래서 붓다는 공양을 받게 다고 함. 도망가지 않는 것임. 나이많은 여인은 어머니이고, 조금많은 여인은 누님, 여동생.. 으로 치부하면 됨. 도가 높다고 안먹고 안씻을수 있는가. 사막족과 호수족의 차이와 같음.

 

자꾸 있는 현실을 마사지 하기 때문에 진심을 잃어 버림. 현실은 현실, 영화보다 현실이 무서운 이유는 영화는 아무리 무서워봐야 뒤세시간이면 끝나지만 현실은 끝이 없이 이어짐. 죽음이 있어야 비로소 끝나는 것임. 진심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마사지를 끝내자는 것임. 그렇다면 물질만 가지면 온전한 행복인가. 물성과 진심의 배합이 있어야 함. 진심은 현실을 마사지 하는 것도, 현실을 도피하는 것도 아님. 암바팔리는 국가지도자으 탄압에도 꿋꿋하게 성정을 지켰음. 우리는 진심이 약하기에 흔들림. 진심에서 출발하여 진심에 처하라. 오늘 강의주제가 '암바팔리의 공양'인데 공양은 진심을 담는 것임. 붓다와 비구는 그녀의 음식이 아닌 진심을 먹은 것임. 붓다가 열발할때 "아난다야 태어날 때 별이 떨어직, 아름다운 음악이 천상에 퍼져나도 나에 대한 참다운 공양이 아니다. 나의 깨달음을 참으로 따르고 실천할때 그것이 나에 대한 최고의 공양인 것이니 특별할 것이 있는가" 하여음. 붓다의 가르침이 특별한 것은 진(眞)임. 바우도아 다르마?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들임. '진'을 가슴속에 새기고 있는 사람들임. 붓다와 같이 행복한 사람들임. 붓다의 계승과 진이라고 하는 나가 각인된 것임.

 

 

* 역시 난삽합니다. 혜천스님의 맑은 목소리를 흐렸을까 두렵습니다만, 대충 그 부근이라 여기시고 참고 바랍니다 _()_... 

그리고, 스님께서 앞으로는 불교 수행의 본질과 관련한 내용에 비중을 두신다니깐, 선우님들의 각별한 관심 부탁드립니다.


 
이 노래 기억 나시죠?(70년대 애창곡, 78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