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공공|******@불교의우주론@

2018. 9. 15. 14:46일반/생물·과학과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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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생애 _ 2


<37>공공(空空)

- 물리학의 ‘진공’개념 공의 의미 못미쳐 -
- 집착 해왔던 모든 존재 놓아야 지혜 완성 -

반야공 사상의 핵심은 법계가 연기(緣起)이므로 무자성(無自性)이고 무자성이므로 공(空)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감각으로 경험하는 모든 것이 오직 연기이고 무자성하며 우리의 몸과 마음을 구성하는 모든 것도 또한 이와 마찬가지이다. 즉 오온(五蘊)이 모두 공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연기에 의하여 잠시 생겨난 것일 뿐이며 그에 따라 그것에 명칭이 일시적으로 부여된 것 뿐이다.

이러한 반야공의 이치가 체득되면 반야 바라밀을 행한다든가 행하지 않는다든가 하는 터럭만큼의 생각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하여 대품반야 봉발품(奉鉢品)에서는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는 보살을 보지 않고 보살이란 명칭을 보지 않으며 반야바라밀다를 보지 않는다. 또한 내가 반야 바라밀다를 행하고 있다고도 보지 않으며 행하지 않고 있다고도 보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며 금강경에서는 “응당히 법에도 집착하지 말고 또한 법아닌 것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 이유에 대해 봉발품에서는 “보살이란 것도 보살이란 명칭도 그 본성은 공이며, 공 가운데에는 색도 없고 수상행식도 없으며 또한 색을 여의고 공이 없으며 수상행식을 여의고 공이 없기 때문이다. 색은 바로 공이며 공은 바로 색이며, 수상행식이 공이며 공이 수상행식이다. 왜냐하면 명칭만으로 보리라고 하며 명칭만으로 보살이라고 하며 명칭만으로 공이라고 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공에 대한 논의는 대품반야경에 나오는 십팔공(十八空)에서 모든 존재나 생존체가 무자성이라는 법공(法空)이나 중생공(衆生空)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겠다. 18공의 하나 하나를 소개하는 것은 이 글에서 별의미가 없겠지만 그 중에서 특히 공공(空空)이나 필경공(畢竟空)은 주목할 만 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진공묘유나 색즉시공을 논의하면서 색의 성품이 공하다고 하였다. 상대론적 양자역학에 기초한 현대물리학의 진공 개념이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자가 그로부터 생성될 수 있는 가능태라고 하였었다. 그런데 이 말에만 집착을 하게되면 우리가 눈 앞에 보는 존재 즉 색이 공에서 연유한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공이라는 것이 마치 실체가 있는 것처럼 오해하게 된다. 불교에서의 공 의 의미는 일체 대립의 완전한 부정이므로 공이라는 것도 그 실체가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하면 공에 대해서도 색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집착 하여서는 안된다. 이 공까지도 공한 것이라고 부정하는 것이 공공이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공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필경공에 이르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물리학에서 말하는 진공이란 불교에서의 공의 의미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공에서는 우리가 여지껏 절대적인 것처럼 여기고 집착해왔던 제존재를 놓아버려야 만 하였는데, 공공에 와서는 그 공이라는 것마저 놓아야 한다. 천길 낭떠러지에서 의지하고 있던 색이라는 한가닥의 밧줄을 놓아버리고 다시 공이라는 밧줄까지 놓 으라고 가르친다.

이와 연관하여 바라밀다라는 말의 의미를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바 라밀다의 원어는 paramita이다. 이를 흔히 피안에 도달했다는 의미로 도피안(到彼岸)이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이를 차안과 피안을 대비시키면서, 생사 경계의 차안 에서 열반의 피안에 이르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 의미는 반감되고 만다. 여기서 피안은 이 언덕과 저 언덕으로 구분되는 피안이 아니라, 모든 대립의 구도와 집착 을 벗어난 완성의 피안을 의미한다. 따라서 가령 반야바라밀다라고 한다면 “완전 한 지혜” 혹은 “완성된 지혜”를 의미한다고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이는 곧 집 착에서 벗어남으로서만 얻어지는 자유이며 일체에 대한 긍정으로 연결되는 지혜이 다. 공의 자유, 공의 긍정, 공의 실천의 의미가 완전하여질 때 비로소 완성된 지혜 곧 반야바라밀다와 상응(相應)한다고 하겠다.

불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은 완전한 자유인이 되라는 것이다. 일체에 대해 막힘 이 없으려면 언제나 깨어있어야만 한다. 모든 예속과 부자유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라고 성자는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모차르트의 運柩



시/이정님


그 화려하던 무대들은 다 어디에

그 환호하던 군중들은 다 어디에

그 아름답던 여인들은 다 어디에


해도 달도 별도 없이

가족도 친구도 아내도 없이

고작 개 한 마리 운구 뒤를 따른다


어떻게 살아야 세상을 잘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죽어야 세상을 잘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손가락 움직일 힘 없어 천장 보며

눈으로 그리던 악보는

미완성인 체

짧은 생 별이 되어 별을 떠났구나


누구나 세월의 끝은 모르고 산다고 하기에

누구나 세상을 다 살고 나서야 안다고 하기에

몇백 년이 지나서야

그가 빚어 두고 떠난 뭉클한 감동을 알겠구나


그래서 사람들은 모르는 채 살아 가고

그래서 사람들은 모르는 채 죽어 가고

그래서 사람들은 모르는 채 사랑 하고

모르는 채 그렇게 그렇게 사는가 보다.



신의 은총과 질투를 한몸에 받은.. 모차르트의 삶을 연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