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하는 행복'|…… 혜천스님설교

2018. 9. 15. 15:2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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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하는 행복'

혜천스님 2555년 3월 13일


 

 

오늘은 먼저 이웃나라인 일본에서 벌어진 지진참사에 대한 유감을 표하면서 시작하겠습니다. 하루빨리 용기와 희망을 찾아 다시금 행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강론의 주제는 '함께하는 행복'입니다. 옛날 씽기하(?)라는 선사가 '나는 항상 부지런하고, 견실하고, 바른길을 가며 바른 생각을 한다고 한다"라고 하자 옆에 있던 처사가 "그렇다면 당신은 어찌 붓다와 함께 있지 않는가?"라고 하자 그는 "나는 한 순간도 그 분을 떠나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함께하는 존재감이 기도이고 안락이고, 존재감입니다. 행복을 함께하는 존재감을 느끼는 것이 바로 극락인 것입니다. 나는 언제는 그 분과 함께 하고 있다는 마음은 그 법을 따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붓다 역시 '내 가사자락을 잡고 있더라도 나의 가르침을 새기지 않는 것은 나와 함께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을 새기고 따르는 것에 같이 하는 존재감이 있고, 같이 하는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전을 읽고 공부를 하는 것은 오늘을 이해하기 위함입니다.

 

옛날에는 일면식도 없이 결혼을 하면서 초례청에서 처음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느 소년 신랑, 신부도 이렇게 예식을 치르고, 첫날밤을 맞게 되었습니다. 둘이 신방에 들자 분위기는 어색해지는 것을 느낀 신부가 어머니에게서 들은 대로 신랑에게 합환주를 권하고자 더듬거리며 잔을 찾아 따랐습니다. 이를 본 신랑이 '눈이 안보이느냐'하고 물었습니다. 이말을 들은 앳띤 신부는 그만 얼음땡이 되어 굳은 몸으로 눈물을 흘리고 맙니다. '죄송합니다. 서방님, 속일려고 한 것은 아니었으나 부모님의 권유도 있었고..." 그러자 꼬마 신랑은 제법 굵직한 목소리로 '내 당신을 평생 사랑할 터이니 아무 걱정 마시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몇년 지나지 않아 이 신랑은 병에 걸려 요절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자 보통은 친정으로 도망을 가게 마련인데 이 처자는 주막을 하나 차려서 몸종이 서빙을 하고 자신은 주방을 맡아 일을 하며 아들을 키우게 됩니다.  이 아들이 훗날 조선 중기의 명신 '서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녀가 앞을 못 보면서도 이렇게 용기를 내어 열정적으로 아들을 가르치고 기른 것은 바로 자신을 거두어준 신랑에 대한 '함께하는 존재감'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녀가 앞을 못 보면서 초례청에 섰을 때 실제로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예전에는 혼례가 일종의 동맹이었습니다. 혼례 동맹으로 가문의 흥망이 결정되고는 하였습니다. 실제로 안동 김씨, 덕수 이씨 등은 서로 간에 결혼을 하면서 벌열을 형성하였습니다. 그래서 조선조에 양반들은 정실 부인외에 사랑하는 이를 첩으로 두는 것이 용인되었던 것입니다. 결혼은 일종의 거래였기 때문에 내치지 못하고 그냥 살았던 것입니다. 어쨌든 서성 같은 명신도 바로 이 어머니의 열정과 교감이 있었기에 그 후손들이 잘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얘기들은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 그것은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한 그루 나무로는 숲을 이루지 못합니다. 숲에는 온갖 것들이 다 존재 합니다. 곧게 뻗은 목재에서부터 잡목, 등거지 등등 여러종류의 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냅니다. 어느 숲에 몇백년은 된듯한 나무가 보기 좋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목수가 '거 참 좋은 나무이기는 한데, 쓸모가 없구나'하자 그 나무는 '그래서 지금까지 내가 살아남게 되었다 '라고 했습니다. 좋은 나무는 순전히 인간의 입장입니다. 나무에게는 오히려 위험할 뿐입니다. 아무리 한 그루 나무가 아름다워도 숲의 아름다움을 능가하지는 못하는 법입니다.

 

포유류 동물은 본인이 원치 않더라도 때가 되면 어머니 뱃속에서 분리 되어 배출되게 마련입니다. 안전하고 쾌적한 어머니 뱃속에 있다가 홀로 존재하게 되면 굉장히 위험하고 어려운 것입니다. 제가 한때 허리가 아파서 고생을 했는데 혼자 체득한 것이 잘때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의 자세를 취하면 하중을 받지 않아 잠을 잘 이루게 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자세가 심리적 안정을 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머니 배속에 잉태되는 것은 엄마의 모체와 함께 하는 것임니다. 이렇게 되면 정서적 교감, 즉 공감을 나누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가 덜 행복한 것에서 더 행복한 것으로 가는 데 중요한 것은 함께 하는 존재감입니다. 함께 하고 있는 존재를 느끼게 되면 몸과 마음을 공유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스님들이 흔히 하는 말중에 '자업자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스스로 짓고 스스로 받는다는 것이지요. 일종의 예정설로 수동적 입장에 처하게 하는 말입니다만 스스로의 삶은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능동적인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으 삶을 자기가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붓다는 여기에 열반의 길이 있고 가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열반에 이르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열반은 더 할 수 없는 행복, 더 없는 행복한 상태를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전이라고 할 때, '경'은 붓다의 말씀이고, '전'은 붓다의 말씀을 해석한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경전이라는 것은 붓다의 말씀을 우리가 호흡하고 있는 이 시대의 언어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 운명이 미리 정해져 있다면 얼마나 편안한 삶이겠습니까. 마치 강물위를 흘러가는 나뭇잎 배와 같을 것입니다. 돛대도 없고, 삿대도 없는 나뭇잎 배는 아무런 개입이 없습니다. 작위적인게 없는 것입니다. 자연스러움, 그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돛을 걸고 노를 걸치면 상황이 달라지게 됩니다. 그냥 흘러가다 빠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태평양까지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백만송이 장미를 예로 들어도 만약에 무엇이 정해져 있다면, 백만송이 장미를 들고 그녀를 향해 달려갈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녀를 향한 열정으로 자기의 노력을 기울이는 따뜻한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서성의 아버지가 신부를 두고 갔다면 어땠을까요.

 

전설의 고향을 보면 첫날밤을 맞은 신랑이 소변이 마려워 문 밖을 나서는데, 누가 옷깃을 잡아 당기자 이 신랑은 신부가 붙잡는다 생각하여 음탕한 여자라 하여 그 길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후에 이 신랑이 공부를 하고 과거에 급제하게 되어 서울에 벼슬을 살고 있었는데, 고향에서 일이 여러가지로 잘 되지않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사또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이 선비는 예전의 일을 까맣게 잊고 마을을 살피러 다니다가 그 옛날 자신이 신방을 차렸던 집을 가게 됩니다. 문도 비스듬히 열려 있는데, 글쎄 하얗게 된 백골이 족두리를 쓴채로 앉아 있더라 이겁니다. 그래서 놀라서 살펴보니 문 짜투리에 자신의 옷감이 찢어져 있던 것입니다. 그제야 사태를 알게 된 선비는 자책을 하며 제사를 지내 주었습니다. 이렇게 함께 하는 존재감이 중요합니다. 행복은 바로 이 함께하는 느낌 같은 것입니다.

 

미얀마에는 쉐다곤 대탑이라는 큰 불탑이 있습니다. 붓다의 머리칼 세올이 들어있다는 미얀마 최고의 보물입니다. 한창 열강들이 식민지를 세울때, 영국이 미얀마를 침공했다가 패퇴하였습니다. 영국군은 패인을 분석하였습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 쉐다곤 대탑을 먼저 접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영국군은 왕궁 대신에 쉐다곤 대탑을 점령하자, 이 탑을 훼손할까 걱정한 미얀마는 항복을 하고 접수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탑을 보는 가치가 입장에 따라 서로 다르지만, 미얀마인들에게 이 탑은 어떤 사물이상인 존재감을 주었던 것입니다. 중생이 없는 부처님은 존재감이 없을 것입니다. 내가 그녀와 함께하는 존재감, 그녀는 나와 함께하는 존재감...., 이것이 서로에계 따뜻한 마음을 나누게 합니다. 

 

오늘 주제인 '함께하는 행복'은 함께 하는 존재감의 인식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없으면 행복지수도 떨어지게 됩니다. 히말라야 오지에 사는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제일 높은 것으로 나옵니다. 이것은 함께 하는 존재감을 서로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함께하는 행복감이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러한 행복지수보다 자기 재산을 지키기위한 담을 높이 쌓고 있습니다. 자업자득, 모든 것은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모쪼록 서로에 대해 함께하는 존재감이 충만해 지시길 빌어 봅니다. 그래서 함께하는 행복이 가득한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혜천스님 - 초기불교전공 흥천사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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