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좇는 자 / 대우거사

2018. 9. 25. 18:0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728x90


행복을 좇는 자 / 대우거사


먼저는 미했다가 나중에 깨닫는 게 아니다.

행복을 좇는 자는 행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
    
보통 사람들의 일상은 거의 모두가 '인과법'(因果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즉 '미래'의 보다 안정되고 보다 나은 '결과'를

위해서 '지금'에 있어서 열심히 '원인 행위'(因行)를 쌓아나가는 거죠.

이 현실 세계가 생성과 소멸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무상(無常)한 세계요,

적자생존의 냉혹한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세상이라고 보는 한,

이런 세상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가야 하는 범부의 처지에서는

이와 같은 생활양식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끊임없이 닥쳐오는 도전에서 살아남아야 할 테니 말입니다.

이와 같은 세속의 일상사를 통틀어서 '유위행'(有爲行)이라고 합니다.


범부의 안목에, 이 세상이 <지금 있는 이대로> 적멸한 열반(涅槃)이라는

사실이 어찌 납득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세존(世尊)도 대각(大覺)을 이룬 후에,

세상에 나아가서 이 '깨달음의 경지'를 과연 중생들에게 설해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두고 이렛날 이렛밤을 식음을 전폐하고 고민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길이 얼마나 험한 길인가를 새삼 절감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지금 목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믿깁니까?

아무리 믿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엄연한 '진실'이고 보면,

대장부가 어찌 '진실'을 외면하고 허망한 길을 헤매겠습니까?

그래서 지금껏 정성을 들여서 '온갖 법의 실상'(諸法實相)을 밝혀온 것이

 아니겠어요? 그 결과로 '실상'은 분명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즉 생멸도 없고, 왕래도 없다는 사실을 밝혀냈던 거구요.

그런데도 그 '무명'의 뿌리가 워낙 깊어서, 이 '작용의 주체'도 없고

'수용의 주체'도 없는, 따라서 '함이 없고'(無爲) '모습도 없는'(無相), 적멸한

실상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때문에 그 마음은 여전히

<일정한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일정한 '결과'를 낳는다>는 고전적 세계관을

고수하고 있는 거예요. 이와 같은 낡은 물질관, 세계관은

'철학'이나 '종교'에서뿐 아니라, '현대과학'에 의해서도 반증된 지가 오래인데,

그런데도 이 뿌리깊은 고정관념은 좀처럼 다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겁니다.


때때로 「나는 '유위행'을 그만둔 지 오래다. 나는 오직 '무위'(無爲)를 행할 뿐이다」

라고 하면서, 몇 마디 얻어들은 지견을 추켜들고 다니면서 대중을 현혹하는

친구들을 보는데, 이런 자들은 증세가 매우 위중한 상태입니다.

성인들의 말씀은, 다만 지금의 이 모든 '유위행'이 사실은 '짓는 자'도 '받는 자'도

없는, 마치 꿈속의 일과 같은 것이므로 헛되이 집착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뿐입니다.

만약 '유위행'과 '무위행'을 서로 상대되는 두 법으로 보아서,

'유위행'을 여의고 '무위행'을 행하는 것으로써 옳음을 삼는다면,

이것은 가장 심한 '유위의 함정'에 빠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 끊임없이 나름대로의 어떤 목적이나 목표를 추구하면서, 오로지 옆도 돌아보지

않고 살다가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게 너무나 이기적인 행위라는 걸

깨닫고는, "이제부턴 결코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하는 것으로써 이른바

'무위행'인 줄로 아는 ― 이런 외통수들을 왕왕 봅니다.

하기야 그렇게 마음을 내는 사람들도 매우 드물긴 하지요.

이렇게만 마음을 써도 유한한 범위 안에서의 공덕을 입을 수는 있어요.


그러나 성교(聖敎)의 '무위'는 결코 그런 게 아닙니다.

지금의 모든 '유위'가 그대로 '무위'인 겁니다. 즉 '유위'도 '무위'도 다 나의

'한 생각'으로 '지어낸 바'(所作)로서, 끝내 '빈 말'뿐이라는 것을 깨달아서,

이 양변을 몰록 다 여의고는, 그 여읜 자리에도 머물지 않게 되면,

그 때에야 비로소 '무위'가 뭔지 조금은 알 수 있게 되겠지요.

그건 결코 조작이나 노력에 의해서 얻어지는 경지가 아니라는 것을

거듭거듭 명심해야 합니다.

종일 세속의 '유위' 가운데 있으면서도 물드는 일이 없고, 종일토록 온갖

'유위법'을 행하면서도 끝내 <종일 '없는 법'을 굴린 것임>을 분명히 알아서,

자취가 없으면 이것이 바로 '무위'인 겁니다.

어쨌거나 이렇게 하면서, 늘 보다 나은 어떤 경지, 보다 안정되고, 보다 편안하고,

보다 즐거운 경지를 얻기 위해, 지금에 있어서 열심히 '원인행위'를 지어감으로써

훗날 이에 상응하는 '과보'(果報)가 얻어지길 기대하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누구라도 처음엔 이 힘들고 괴로운 세상살이의 중압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하는 생각으로 '신'이나 '부처'를 찾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와 같은 선택이 올바른 것이었는가의 여부를 가늠하는 척도가,

 ― 적어도 '무위'의 참뜻을 깨친 사람에게 있어선, ― 그 소망하는 바가 얼마나

이루어졌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범부나 성문(聲聞), 연각(緣覺)이나 일부 정토보살(淨土菩薩)들에게 있어선

그의 바라는 바가 얼마나 이루어졌는가? 즉 공덕(功德)이 있었는가의 여부가

수행의 성과를 가늠하는 유일한 기준이 되는 게 당연하겠지요.

그러나 '일승보살'(一乘菩薩)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미 '법의 평등'을 얻어서 일체의 법집(法執)을 여읜 그들로선 '깨끗한 것'이건

'물든 것'이건, '이로운 것'이건 '해로운 것'이건, 이 모두가 다만 '빈 말'일 뿐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깨친 터이므로, 별달리 '공덕'의 있고 없음을 가릴 만한

소재가 사라져 버린 겁니다.

모든 게 다 가지런한데, 금(金)을 가지고 다시 금을 바꾸어야 할 까닭이 없지 않겠어요?

그래서 이 '일승법'(一乘法)은 아무의 손에나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던 겁니다.

어쨌거나 이런 저런 까닭으로 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불법'(佛法)의 소중한

인연을 만났으면서도 '성교'(聖敎)의 진정한 뜻을 알지 못해서, 끝내 올바른

'깨달음의 길'에 들어설 기회를 얻지 못하고 마는 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즉 '선지식'(善知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오히려 그의 소구소망(所求所望)이 얼마나 절실하고 또 큰 것이었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보는 게 옳을 겁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일신의 자유나 행복을 얻기 위해 나름대로 큰 서원(誓願)을 세우고

노력하다가, 어느 날 문득 자신의 그와 같은 모습에 회의가 느껴지면서,

겨우 필부(匹夫)의 조그마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 허덕이는 자신의 모습이

무척 왜소해 보이고, 초라하고 구차하다는 생각이라도 들라치면,

― 바라는 바가 쉬 이루어지지 않아서 역분(逆憤)이 난 게 아닙니다. ― 이것은 영겁을

두고 잠들어 있던 그의 오성(悟性)의 하늘에 새벽이 밝아오는 징후인 겁니다.


여기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헤르만 헷세의 '행복'이라는 제목의 시 한 수를 소개하죠.


그대,
행복을 좇고 있는 동안은
그대는 아직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비록 가장 사랑하는 것이 지금 그대 것일지라도.
그대,
잃어버린 것들을 슬퍼하고
많은 목표를 추구하면서 초조해 하는 동안은
그대는 아직
참된 평화가 무엇인지 모르는 채 살아가리라.

그대,
모든 소망 버리고
어떤 목표도 욕망도 모르는 채,
행복 따위는 입에도 담지 않게 될 때,
그때, 비로소 이 세상의 모든 흐름이
그대 마음을 괴롭히지 않게 되고,
그대 영혼은 진정 평화로우리라.


누구라도 조금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곧 알 수 있는 일이지만, ― 모든 이루어진 건

곧 허물어지고 마는 게 아니겠어요? 이 세상에 영원한 게 어디 있어요?

그게 바로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말하는 까닭이기도 하구요.

그런데 그것이 진정 어김없는 진실이라면,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이 이렇게

자기의 범용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 허구한 날 쉴 새 없이 애쓰고 있는 이 모습은

과연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까요?
세속에선 세속대로, 그저 보다 안정되고 보다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 돈이니

권세니 명예니 하면서 억척같이 각축을 다투다가, 그와 같은 악다구니가 지겨워서,

 참으로 인간다운 삶의 길은 없을까 하고 찾아든 이 출세간(出世間)의

귀의처(歸依處)에서조차도 세속에서 하던 그 악다구니를 되풀이한다면,

이것은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게 아니겠어요?

― 어떻게 하면 빨리 '해탈'을 얻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빨리 영원한 '열반의 땅'을

밟을 수 있을까 하면서 허구한 날 그 몸과 마음을 달달 볶으면서, 그것으로써

수행인 줄 안다면, ― 이것은 출발부터가 잘못된 겁니다.

이런 경우를 두고 불가(佛家)에서는 「'발심'(發心)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고 꾸짖습니다.  

 

- <그곳엔 부처도 갈 수 없다>(대우거사 지음) 중에서

 
이연실&박길라 20곡